2021-06-05

요리할 돈이 없어서 배달음식을 먹는 사람들

상파울루, 브라질. 2011년 2월 뉴스. 피자 배달점이 늘어나고 있다. 왜일까? 

도시 빈민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데, 그들에게 부엌이 없기 때문.

 '가난한 사람이 핸드폰은 있다고? 그런데 가스비를 낼 돈이 없다고?' 같은 소리들. 얼마나 근시안적인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시각인가. '요리를 할 돈이 없어서 배달음식을 먹는다' 같은 '비논리적' 현상이야말로 현실에 더 가깝다.

Food is also one of the few pleasures available to the poorest. In the favelas (slums) of São Paulo, the largest city in South America, takeaway pizza parlours are proliferating because many families, who often do not have proper kitchens, now order a pizza at home to celebrate special occasions.
"The 9 billion-people question", The Economist, Feb 24th 2011, Special Report.

2021-05-29

[아무튼, 주말] 韓美 정상회담을 中에 보고하라? 그들을 '사대주의자'라 부른다

 

[아무튼, 주말] 韓美 정상회담을 中에 보고하라? 그들을 '사대주의자'라 부른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입력 2021. 05. 29. 03:01

기사 도구 모음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남한산성'으로 본
한·미·중 국제정치학
일러스트=안병현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향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발이 묶여 남한산성에서 농성하게 되었다. 갇힌 조선은 성 안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항복하여 백성의 피해를 줄이고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자는 주화파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농성하고 역전의 기회를 노려야 한다는 주전파가 대립한 것이다.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은 그 광경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주화파의 대표인 최명길(이병헌 분)은 말한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하니 자존심을 버리고 고개를 숙이자는 입장이다. 반면 김상헌(김윤석 분)은 임금이 오랑캐에게 굽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신은 차라리 가벼운 죽음으로 죽음보다 더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막강한 적의 군대가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일전을 벌이면 이길 수 있다’는 말은 그저 허황될 뿐. 게다가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알고 있다. 병자호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명나라는 내부의 갈등과 반란을 다스리지 못해 무너졌다. 천하의 패권은 청나라로 넘어갔다. 그 격동기에 조선은 새로운 흐름에 올라타는 대신 기존의 낡은 세계관 속에 스스로를 묶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일방적으로 주전파를 비난하는 작품이 아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각자의 논리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미덕을 보여준다. 당시는 국운이 쇠했을지언정 아직 명나라가 중원을 지배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조선왕조는 명나라 황제를 정점으로 피라미드처럼 내려오는 유교적 위계질서를 통치 근거로 삼았다. 갑자기 사대의 대상을 바꾸는 것은 스스로의 집권 정당성을 부정하는 행위일 수 있다. 그런 맥락을 놓고 보자면 김상헌의 주전론에는 나름의 이념적 근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국제정치학 용어를 빌려 설명하자면, 최명길은 현실주의를 대변하고 있던 반면, 김상헌은 자유주의를 표방한 셈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된 학문 분야로 정착한 국제정치학은 크게 세 가지의 학문적 패러다임으로 작동한다. 국가와 국제 관계를 힘(power)으로 바라보고 설명하는 현실주의(realism). 국가 간의 공동 이익 창출과 상호 협력에 주목하며, 특히 ‘제도’를 통해 상호 견제가 가능하다고 보는 자유주의(liberalism). 국제 관계뿐 아니라 각국의 내부 동역학까지 고려하며 다양한 맥락을 따지는 구성주의(constructivism)가 그것이다. 여기서는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에 집중해보도록 하자.

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는 케네스 월츠, 존 미어샤이머 등이 있다. 이들의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전제 몇 개를 공유한다. 국가는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언제 침략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늘 안고 있다. 국제 관계를 설명하는 유일한 요소는 결국 힘이다. 국제사회에 정의(正義)란 없다. 억울하고 분해도 약자는 강자의 뜻을 따라야 한다. 병자호란의 위기 속에서 최명길이 택한 입장이기도 하다.

반면 조셉 나이, 로버트 코헤인 등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자들은 생각이 다르다. 물론 국제 관계는 힘으로 작동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국가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할 수 있다. 문화와 가치를 공유한다면 그러한 협력은 더욱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국가 간 합의를 통해 제도를 구축하여 장기적인 공존 공영을 꾀하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다. 명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일종의 국제기구로 바라본다면 이는 김상헌을 비롯한 주전파의 세계관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셈이다. 유교의 종주국인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를 향해서는 사대를 할 수 없다는 입장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명·청 교체기에 오늘날을 곧장 대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미국은 마치 명나라처럼 저물어가는 제국이며, 중국은 청나라처럼 떠오르고 있으니, 처신 똑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2020년 총수출액 중 중국에 대한 수출 비율은 25.8%로 1위를 차지했다. 중국에서 무역 보복을 할 수 있으니 중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보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 21세기 주화론자들의 주장이다.

이는 현실과 거리가 있다. 우리가 중국에 수출하는 물량의 절반 이상은 소재·부품이다. 특히 반도체의 비율이 높다. 중국에서는 한국이 싫어도 수입할 수밖에 없는 필수 요소인 것이다. 상대가 무역 보복을 할까 두려워 할 말을 못 한다는 변명도 옹색하기 짝이 없다. 중국에 대한 수출 비율이 32%에 달할 정도지만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쿼드에 가입한 호주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이다. 한미 동맹을 공고하게 다져나가는 것은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은 정치, 경제, 문화 면에서 핵심적인 가치를 공유한다. 동북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시장경제, 대중문화를 모두 갖춘 나라는 일본을 제외하면 한국뿐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국전쟁 참전 용사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그 노병의 삶이 조용히 웅변하는 진실을 보라. 미국은 강자고 한국은 약자다. 하지만 한미 관계는 오직 힘의 논리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돕기 위해 피 흘리고 싸운 혈맹이다. 현실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의 우방이 누구인지는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들이 정치권에는 더러 있는 듯하다.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이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린 내용만 봐도 그렇다. “문 대통령 귀국 길에 주요 수행원 중 한 사람은 중국에 들러 회담과 관련해서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네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이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뱉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우리가 중국의 속국인가?

현실의 힘에 굴복할 것인가, 기존의 신념에 충실할 것인가. <남한산성>이 던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그때와 같지 않다. 현실주의적으로 힘을 추종하건, 자유주의적으로 가치와 제도에 신뢰를 보내건, 우리가 갈 길은 정해져 있다. 그 사실을 끝내 부정하고자 하는 자들을 흔히 사대주의자라 부른다.

2021-05-27

유발 하라리의 ⟪대담한 작전⟫

리디셀렉트에 있길래 심심풀이 삼아서 읽어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TTS 기능을 이용해 '들었다'고 해야 옳겠지만, 아무튼.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시피 <대담한 작전>은 유발 하라리의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세계 속에 우뚝 솟은 신흥 선진국 K-나라, 그곳이 바로 이곳이지만, 아직도 지성계는 글로벌 트렌드를 못 따라가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 떴다 하면 유치원때 쓴 그림일기까지 출판하고 있다.

라고 욕하기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대담한 작전>을 보면 유발 하라리가 왜 오늘날의 '유발 하라리'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글을 잘 쓴다. 하나마나한 소리 같지만 그게 아니다. 스토리텔링 능력을 가지고 있다. 탁월하다. 대중에게 팔릴 책을 쓰는 저술가로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

둘째, '근대 이후'의 세계를 상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진작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 내용은 좀 더 자세히 설명할 가치가 있다.

<대담한 작전>은 서양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특수작전들을 다룬다. 흔히 특수작전이라고 하면 근대국가, 즉 정규군/상비군 체제가 갖추어진 이후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는 그런 고정관념에 반기를 든다.

소수의 인력으로 전략적 요충지 혹은 인물을 점령, 파괴, 납치, 살해하는 것을 특수작전이라 말한다면, 오히려 근대(와 총력전의 등장) 이전이야말로 특수작전의 전성기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기사도 문학과 전설들은 대부분 특수작전의 일종으로 해석 가능하다.

이와 같은 관점은 두 가지의 장점을 낳는다. 첫째, 앞서 말했듯 근대 이후의 세계를 절대적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은 역사 서술을 가능케 한다. 둘째,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기사들의 모험담이라는 재미있는 영역에 대한 독점적 해설권을 자신이 가져가게 된다.

학자로서, 또한 저술가로서, 대단히 유리한 포지션을 단번에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큰 영역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논문을 쓰기 시작할 때 얼마나 짜릿할까? 이런 학생을 학자로서 길러내는 교수는 또 얼마나 뿌듯할까?

'근대 이후 세계에 대한 상대적 이해'. 이것이 오늘의 키워드다. 유발 하라리의 이후 성공작인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유발 하라리를 오늘날의 스타로 만든 원동력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서구 문명, 근대 문명을 상대화함으로써, 서양인들에게는 자기 각성의 계기를, 동양인들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 아자아자'의 기쁨을 안겨줌으로써, 글로벌 스타 지식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대담한 작전>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할 게 없다. 나는 서양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 원래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하라리가 뭘 제대로 설명하는 건지, 자기 취지에 맞게 부풀려 왜곡하는 건지, 판단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일단 재미있게 쭉 읽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대중교양서로서는 차고 넘치는 일이다.

유발 하라리라던가, 토마 피케티라던가, 몇몇 스타 지식인들이 있다. 그런 사람이 등장하면 한국의 출판계는 그들의 저작을 우르르 번역해서 내놓는다. 물론 그런 모습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고상하게만 살았던가? 경박한 상업주의에 입각해 여러 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출판계가 아직은 살아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한국 출판계가 떳다방처럼 책을 찍어낸다면, 진정한 독자가 해야 할 일은 개탄하기보다는 '똘똘한 한 권'을 찾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지성계'란 그런 노력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테니 말이다.

2021-05-25

문재인의 '우리 여기자' 발언, 무엇이 문제인가?

이 핀트를 못 잡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니, 제대로 뭐가 문제인지 짚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맥락을 떠올려보자. 바이든에게 한 기자가 질문을 했다. 그런데 그 기자의 성별이 여성이었다. 통상적인 질문을 했고, 통상적인 답변이 나왔다. 통상적인 기자회견의 모습이었다.

문재인은 그 직후에 '우리도 여기자 없어요?'라고 했다. 

그 순간, 처음 질문한 미국 기자는 여성차별을 당한 것이다. '성별이 여성인 기자'에서, 특별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한 '여기자'로 취급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여성들에게 우대 정책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백악관의 컨퍼런스 룸은 이미 그런 맥락이 다 지나간 곳이다.

이걸 페미니즘의 용어로 말해보자면 이렇다. 문재인은 그 기자회견장에서 '가부장적 페미니즘'을 구현한 것이다. 여성이 기자도 못 되고, 기자가 되더라도 질문 한 마디 자기 입으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기자'에게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세상에서나 어울리는 짓을 미국 백악관에서 했다는 말이다.

한국의 언론계가 그 정도 수준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미국의 언론계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가부장적 여성 보호 배려의 페미니즘 단계를 넘어섰다고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 백악관의 내부 업무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문재인의 '여기자 질문해보셈' 발언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다. 백악관의 수준을 순식간에 문재인의 청와대와 같은 것으로 끌어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바이든이 '여기자에게 무조건 첫 질문을 줘야지, 그게 페미니즘이지'라고 생각해서 질문 기회를 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이든은 그런 걸 자기 입으로 떠벌이지 않는다. 그 정도 '위선'은 지키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다.

'우리도 여기자 한 명 질문해보세요'라니. 이런 식이면 질문 기회를 받은 기자는 '내가 실력과 무관하게 여자라서 '배려'받았나?' 싶어질 것이다. 그건 상대방에 대한 큰 실례다. 상대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여자'로 취급할 때나 가능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더 나쁜 건 문재인의 그런 발언을 두둔한 권인숙이다. 그런 가부장적 페미니즘 행태가 "작지만 소중한 발언"이라고? 제정신인가?

나는 권인숙이 한국 민주주의와 여성운동의 발전에 기여한 바를 부정하지 않는다. 세상에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앞으로는 큰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젊은 안티페미들이 득세를 하면서 반여성주의 진영은 세대교체를 하는 모양새다. 여성주의 진영 또한 세대교체가 절실하다.

2021-05-09

왕중왕, king of kings, 諸王の王

C. S. 루이스의 책에서 봤던가? 기억으로 하는 이야기다. 틀릴 수도 있고, 틀렸다는 걸 지적받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아무튼.

고대 히브리어에는 최상급을 한 단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야훼는 자신을 '왕들의 왕들의 왕'이라고 칭했다. 가장 높은 왕이라는 뜻이었다.

그 아들인 예수 역시 평범한 왕보다 더 높은 왕인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다. 예수는 자신이 '가장 높은 왕'이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왕중왕'이라는 표현을 써야 했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그리스어 화자들에게 '왕들의 왕들의 왕' 같은 표현은 생경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어 화자였던 신약성서의 기록자들은 그 표현을 직역했다. 자기 언어의 표현을 쓰지 않고, 어색하게 보이는 그 '왕들의 왕'이라는 말을 그대로 옮겼다.

라틴어를 지나 유럽 각국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시대에 도달했다. 직역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영어는 최상급 표현이 있는 언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정역의 번역자들은 그 표현을 있는 그대로 옮겨서, 'king of kings'라는 어구를 만들어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루이스가 저 말을 한 이유는 따로 있다. 성경의 언어가 번역하기 좋다는 것이다. 도치 병치 등이 주로 사용되어 있다. 특정 언어의 음성과 운율에 좌우되지 않는다.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루이스는 그렇게 보았다.

그래서 루이스는 '왕중왕'도 참 좋다고 했다(고 기억한다). 실로 간단한 언어적 장치를 통해 이전에 없던 심상을 전달하지 않았느냐고. 그 어구를 직역함으로써 영어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언어가 풍성해지지 않았느냐고.

한국어 성경은 어떨까. '왕들의 왕'이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는 '왕중왕'이다.

과연 '왕중왕'이라는 표현에 한국어 성경 번역자들은 어떻게 도달했을까? 중국어로 성경을 옮긴 예수회 신부들이 먼저 만들었을까? 일본어 번역의 영향인가? 기독교의 전파와 도래에서는 한반도가 일본 열도보다 더 빠르지 않았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나는 대답할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검색을 해보니 '諸王の王'이라는, 한국어와는 사뭇 다른 표현이 나온다는 것 정도를 확인할 수 있을 뿐.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직역'은 나쁘고 '의역'은 좋다느니, 반대로 '딱딱한 번역투'에서 벗어나 '생생한 우리 입말'을 되찾자느니, 그런 추상적인 논의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식의 강퍅한 담론이, 특히 민족주의적 정념과 뒤엉키기 시작하면, 안그래도 얕은 우리말의 물줄기는 더욱 쉽게 말라 비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예수를 '왕들의 왕'이 아닌 '왕중왕'으로 번역한 덕분에, 우리는 '프로권투 헤비급 왕중왕전'도 볼 수 있었다. 인터넷 어딘가에서는 몸 좋은 남자 배우를 보고 즐기는 여성들이 '역시 맨 중의 맨은 휴 잭맨' 같은 농담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의 국적을 논하며 무언가를 솎아내자는 이야기나 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