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워즈'의 안티히어로
다스 베이더가 남긴 교훈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제다이의 희망이었다. 예언에 따르면 ‘포스의 균형을 가져올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출중한 재능을 뽐냈다. 라이트세이버(광선검)를 이용한 싸움, 우주선 조종 등 못 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소년은 공화정을 파괴하고 제다이 기사단마저 쑥대밭으로 만든 후 은하 제국 황제의 오른팔이 되고 만다. 다스 베이더가 된 것이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조지 루커스가 만든 오리지널 3부작의 프리퀄이라 할 수 있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1, 2, 3> 그중에서도 2편인 <클론의 역습>을 살펴보자. 젊고 자신만만한 아나킨은 현 체제에 불만이 많다. 제다이 육성 과정은 길고 지루하다. 은하 공화국의 정치는 각자 다른 이해관계와 의견에 가로막혀 지지부진하다. 아나킨의 연인이 된 파드메 의원은 말한다. “매번 동의가 이루어지진 않아.” 아나킨은 답한다. “그럼 동의하게 만들어야죠. 누군가 현명한 사람이.” 파드메는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한다. “그건 독재처럼 들리는데?” 그러나 아나킨은 진지하다. “결과만 좋다면 상관없죠.” 그 모습을 본 파드메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진다.
이 대화는 마치 4컷 만화처럼 ‘밈’으로 편집되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독자들도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무언가 말할 때 헤어밴드를 두른 단발머리 여자가 정색하는 표정을 짓는 바로 그 ‘짤방’ 말이다. 뜨거운 심장을 지닌 젊은이가 결국 악당 다스 베이더가 되고 만다는 점을 놓고 보면 퍽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 철학의 핵심 개념인 변증법, 그중에서도 ‘안티테제’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변증법(dialectics)은 고대 그리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진리 탐구 방식 중 하나다. 서로 대립하는 두 주장을 놓고 맞붙여서 제3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 역시 일종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은 그 개념을 이어받아 자신의 핵심 원리로 삼았다.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지문에 등장한 변증법은, 이렇듯 정반합(正反合) 원리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고 예측하고자 했던 헤겔의 철학적 기획이다.
<스타워즈>로 돌아와 보자. 은하공화국은 1000년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제다이 기사단은 개인적 삶과 감정 등을 모두 포기하고 공화국을 지킨다. 이렇듯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헤겔은 ‘테제’(Thesis)라 불렀다. 한자로 표기하면 정(正)이다. 아나킨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다이 기사는 공화국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자신의 힘을 쓸 수 있어야 하고, 답답한 정치는 효율적인 중앙집권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점을 ‘테제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안티테제’(Antithesis), 반(反)이라 할 수 있다.
아나킨은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경험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공화정의 무능함, 제다이의 허례허식과 엄격한 규칙만으로는 소중한 이를 지킬 수 없다고 절감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영웅(Hero)인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정체성을 버리고 악당(Anti-Hero)인 다스 베이더로 거듭났다. 공화정의 안티테제인 은하제국, 제다이 기사단의 안티테제인 시스,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이고 막강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안티테제는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진테제’(Synthesis), 합(合)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단계다. 빼놓거나 생략하면 변증법적 운동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악당이 없으면 주인공의 모험이 빛나지 않듯, 안티테제가 없으면 테제는 진테제로 나아갈 수 없다. ‘포스의 균형을 가져올 인물’이라는 아나킨에 대한 예언은 그런 의미에서 정확한 것이었다. 기존 체제에 대한 안티테제인 다스 베이더가 출현했기 때문에 은하계의 역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로 돌아와 보자.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에 들어갔고 현재 50대가 되어 있는 586 세대.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전두환 정권의 본고사 폐지, 학력고사 실시 등의 여파로 이전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쉽게 대학에 들어갔다. 과외 금지는 오히려 불법 과외로 짭짤한 용돈 벌이를 할 기회였다.
캠퍼스에 모인 그들은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할지 ‘미래’를 고민하지 않았다. 김일성을 항일 투사로 과대 포장한 몇몇 조악한 서적을 읽고 ‘과거’에만 탐닉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시절,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티테제인 북한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키워나갔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후 권력 공백을 노리고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국적인 시민 저항에 직면하자 광주를 특정하여 군사력을 동원해 잔인하게 진압했다. 그런 모습을 본 당시 대학생들은 대한민국과 한미 동맹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현 체제를 부정하고 반대할 수 있다면 뭐든지 좋다고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마치 공화국과 제다이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안티히어로가 되어버리고 만 다스 베이더처럼 흑화(黑化)한 것이다.
그러나 안티테제는 어디까지나 안티테제일 뿐이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역사의 조연이지만, 안티테제 그 자체가 다음 세상에 속할 수는 없다. 테제와 안티테제, 과거에 속하는 둘이 서로 모순을 폭로해가며 싸우다 보면, 새로운 세대와 사상이 출현하여 진테제를 이루어내는 것이 변증법이다.
586이라는 안티테제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의의가 없지 않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의 형식을 갖추는 데 그들이 기여한 바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티테제는 테제와 서로 모순을 드러내며 대립하다가 진테제에 자리를 내주는, 정반합 운동의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세상을 뜬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처럼, 그 안티테제인 586 세대 역시,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때 아닐까.
다스 베이더는 어둠의 끝에서 선한 마음을 되찾는다. 아들인 루크를 지켜내고, 황제를 스스로 처리한 후, 존엄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안티히어로의 슬프고 아름다운 결말이다. 대한민국의 안티테제 세대, 586의 변증법적 퇴장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