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도구 모음
● 케이팝 시대, 어딘가 석연치 않은
● “한국의 문화가 세계를 석권”한다?
● ‘소프트 파워’ 개념 거꾸로 이해한 文
● 强國 조건 다룬 냉철하고 살벌한 이론
● 자유세계 속한 개방적 민주국가에 근간
● 北 향한 비합리적 짝사랑의 소품 취급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필자는 1983년에 태어나 40년이 조금 안 되게 살았다. 그간의 경험에 비춰보면, 한국과 한국 문화가 이 정도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던 일은 없었다. 1980년대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미술가 백남준, 작곡가 윤이상, 영화감독 임권택 등 몇몇 특출난 이가 해외 무대에서 활약하거나 주목받는 일은 있었다. 하지만 특정 장르를 넘어 한국 문화가 전반적으로 관심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으쓱거리며 인용할 내용 아닌데…
문 대통령에 따르면 "한국의 문화가 세계를 석권"하고 있다.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이 지난 10월 미국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개최한 '한국의 소프트 파워'에 대한 컨퍼런스다. 문 대통령은 "‘소프트 파워' 개념의 창시자인 세계적 석학 '조지프 나이'는, 한국이 유례없는 경제적 성공과 활기찬 민주주의가 결합하여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한 소프트 파워를 보여주고 있다고 극찬했습니다"라고 썼다.
과연 그럴까? 조지프 나이의 발언에 그러한 대목이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달랐다. 컨퍼런스 내용은 문 대통령이 BTS 대신 으쓱거리며 인용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나이의 '소프트 파워'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엉뚱한 방식으로 나이의 발언을 인용하고 있는데, BTS를 여러 행사에 동원해온 문 대통령의 행보를 놓고 볼 때 그 우려는 더욱 커진다.
나이는 미국을 대표하는 국제정치학의 거장이다. '교과서적 거장' 중 한 사람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소프트 파워 이론 때문만이 아니다. 국제정치학의 세 흐름인 현실주의, 자유주의, 구성주의 중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이론가로 우뚝 서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실주의는 국제 사회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이해한다. 반면 자유주의는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국제연합이나 국제법 등 우리가 긍정적으로 여기는 제도나 가치관이 미치는 영향에 방점을 찍는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 사회의 본질은 살벌한 약육강식 전쟁터지만, 과거와 달리 지금은 설령 전쟁을 하더라도 제네바 협약 등을 준수하며 포로를 학살하는 등의 만행은 자제한다. 이는 자유주의가 발현된 사례로 들 수 있다.
살벌한 이론으로 케이팝에 박수 치다?
갑자기 국제정치학 개론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가 있다. 나이의 소프트 파워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의 연구 분야는 국제정치학이고, 국제정치학은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결국 날것의 폭력과 전쟁을 다루는 학문이다. 국가 간의 힘, '파워' 싸움이 본격적으로 전쟁이 되기 직전까지를 다루는 학문이 바로 국제정치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소리다. 국제정치학은 곧 '국가의 파워'에 대한 학문이다.소프트 파워에 대한 오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 개념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점은 물론 '하드'와 구분 짓게 해주는 '소프트'다. 하지만 애초에 논의 자체가 '파워'의 영역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소프트 파워는 케이팝과 한류 드라마에 박수를 쳐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이 아니다. 어떤 나라가 어떤 조건 하에서 어떻게 강국이 되는지, 다른 나라를 압도하는 파워를 가지고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냉철하고도 살벌한 이론이다. 나이의 책 '소프트 파워'(홍수원 옮김, 세종연구원 刊)를 펼쳐보자.
"파워는 날씨와 같다. 모두가 날씨(파워)에 의존하고 또 화제로 삼고 있지만 정작 그 실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치 '파워'에 대한 고민 없이 '소프트'에만 열광하고 있는 문 대통령의 인식을 꼬집기라도 하는 듯한 첫 문장이다. 나이에 다르면 파워는 크게 두 가지 면을 지닌다. 첫째,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능력. 둘째,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쳐 어떤 일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능력.
국제정치학은 곧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학문이므로, 파워의 첫 번째 면만큼이나 두 번째 면도 중요하게 다뤄야 마땅하다. 나이를 국제정치학 거장으로 만든
통찰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다른 국가가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할 때, 그 방법은 전쟁이나 침략, 혹은 무력을 통한 억압만이 아닐
것이다. 다음을 보라.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즉 위협으로 타인을 강제할 수도 있고 보상으로 유인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이들을 꾀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들도 바라게끔 만들 수도 있다."
결국 나이의 소프트 파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이도 원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한 이론이다. 적어놓고 보면 이 당연한 소리가 국제정치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줬다는 사실이 외려 놀랍게 느껴질 정도다. 소프트 파워의 성격과 특징에 대한 나이의 설명을 읽어보자.
마치 꼬리가 개를 흔든다고 보는 식
"이처럼 명백한 위협이나 거래행위 없이도 자국의 목표를 받아들이고 따르게끔 타국을 설득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표현할 수 있어도 눈에 보이지는 않는 매력에 따라 타국의 행위가 결정된다면 그것은 곧 소프트 파워가 제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소프트 파워는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무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색다른 통용수단을 활용한다. 즉 공동의 가치와 정당성, 그리고 그런 가치의 실현에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소프트 파워는 어떤 나라의 문화 상품이 다른 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잘 팔리는 차원의 문화 마케팅이나 세일즈 용어가 전혀 아니다. 서로 다른 나라가 같은 목적을 추구하고 협력하며 때로는 공통의 적과 맞서기도 하는 그런 국제관계의 동역학을 일컫는 개념이다.
문 대통령이 나이의 소프트 파워 개념을 완전히 거꾸로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래서다. 물론 나이가 "한국이 유례없는 경제적 성공과 활기찬 민주주의가 결합하여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한 소프트 파워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11월 23일 올린 페이스북 게시물처럼 "한국의 문화가 세계를 석권하고, 그것이 국격과 외교에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꼬리가 개를 흔든다고 보는 식의 본말전도다. 소프트 파워는 몇몇 음악가나 영상물에서 시작해 국가 단위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파워가 소프트한 '방식'으로 구사되는 상황과 방법을 설명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소프트 파워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앞서 나이가 말했던 '공동의 가치', '정당성', '가치 실현에 대한 책임감' 등을 떠올려 보자. 나이는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나라들이 같은 이념과 지향을 지니고 협력해 상호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고 보는 자유주의 이론가다. 소프트 파워는 문화, 특히 대중문화의 많은 부분을 당연히 포함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국가정체성과 이념적 지향, 자유시장주의, 법치주의에 대한 존중까지 포괄하는 아주 넓은 차원에서 작동하는 개념이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소프트 파워는 우리가 자유세계에 속한 개방적인 민주국가라는 것에서 나온다. 우리는 북한과 달리 공개적이고 투명하며 여당과 야당의 경쟁을 보장하는 선거 제도를 통해 정치권력을 형성한다. 국민 스스로 노력해 재산을 형성하고, 이중 일부를 상식적이고 합리적 수준에서 책정된 세금으로 납부한다. 물론 나머지는 온전히 자기 몫이다. 사유재산권을 존중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제도와 문화가 한국 소프트 파워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공동의 가치' 찾아볼 수 없는 외교 제스쳐
2021년 12월 현재, 미국은 베이징올림픽을 외교적으로 보이콧하고 있다. 선수 참가는 막지 않되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인사는 방문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 뒤를 따라 프랑스를 비롯한 EU(유럽연합) 회원국 역시 외교적 보이콧을 결정했거나 검토하고 있다.이는 단지 미국과 중국의 외교적 힘 싸움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사안이다. 이전부터 중국 인권 문제는 지속적으로 지적돼 왔다. 그러던 중 공산당 고위직과 관련된 추문을 밝혔다는 이유로 테니스 스타 펑솨이 선수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따르며 국민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국가라면 선수 참여를 막지는 않더라도 대통령이나 총리 등 고위직이 방문해 베이징올림픽을 축하하는 일은 꺼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요지부동이다. 종전선언의 주체 중 하나인 미국은 베이징올림픽을 보이콧하고 있는데, 그 베이징올림픽을 무대 삼아 종전선언을 해야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소프트 파워" 운운한다. 너무도 황당한 소리다. 문재인 정권의 대북정책은 동맹국 미국 및 국제 사회와 공유하고 있는 '공동의 가치'를 업신여기며, '정당성'을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글로벌 스탠다드 '가치 실현에 대한 책임감'을 무시하는 듯한 외교적 제스처로 점철돼 있을 뿐이지 않은가.
문재인 정권의 대북정책은 소프트 파워를 키우기는커녕 더 깎아먹고 있다. 한국의 소프트 파워를 전에 없이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문화생산자들, 특히 BTS의 성공 신화를 돕지는 못할망정 가장 나쁜 방식으로 착취하고 있다. BTS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북한을 향한 비합리적 짝사랑의 소품으로 이용하는 문재인 정권의 행태는 우스꽝스러울뿐 아니라 우려스럽다. 문 대통령이 탁현민의 연출에 따라 BTS를 앞세워 자국민을 굶겨 죽이고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최악의 독재자와 폭압 정권을 옹호하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퇴임을 석 달 앞둔 상태다. 문 대통령은 한국의 소프트 파워를 더 이상 낭비하지 말기 바란다.
#BTS #AMA #소프트파워 #조지프나이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