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21

"그 공고한 체제에 대한 도발"?

"루저"(김규항, 한겨레)의 한 구절.

‘180센치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말은 그 공고한 체제에 대한 도발이었다. 그 여대생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 내용이 바람직하든 않든, 매우 중요한 사회적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같은 이야기도 미국의 마돈나가 하면 사회적 도발이 되고 한국의 여대생이 하면 골빈 소리가 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 여대생의 사회적 도발은 그뿐이 아니다. 그 여대생은 오늘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생생히 알게 해주었다.


대단히 교묘하게 여성주의를 엿먹이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여성주의가 '개념 없는' 소리를 '사회적 도발'인 것처럼 찍찍 해대는 짓거리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의문스럽다. 마돈나는 여성이 성적 주체로 우뚝 서는 것을 퍼포먼스로 즐겨 보여줬을 뿐이다. 언제 마돈나가 전 남편 숀 펜의 키가 작다고 루저라고 한 적 있었나? 마돈나가 여성에 대해 말할 때에는, 자신이 여성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인터넷의 확대 재생산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발언'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와 의도를 충실히 반영한 '발언'이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마돈나의 '발언'에는 '서명'이 존재한다. 반면 '루저녀'라고 불리며 마녀사냥을 당한 홍익대 학생은 그 발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들었다.

말하자면 그 학생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몇 가지의 그릇된 통념을 되는대로 주워섬겼다가 된서리를 맞았을 뿐이다. 김규항은 두 가지를 혼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성주의를 '개념 없는 소리'와 등치시킨다. '그 계급주의', 참으로 한심하고 짜증스럽다. 결국 자신에게 불편한 무언가에 여성주의의 딱지를 붙이는 식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는 오직 자신과 같은 남성들, 혹은 자신의 여성성을 드러내지 않는 이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계급'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런 식이라면 '씨발 나라고 정주영처럼 계집질 못할 게 뭐야, 부자들은 다 뒤져야 돼'라고 궁시렁거리는 시정잡배의 르상티망과 계급운동에 헌신하는 활동가의 사회적 재분배에 대한 지성적 요청을 구분할 수도 없다. 그런데 어쩌면 김규항은 시정잡배의 날강도와 같은 사유재산 부정 발언 또한 현재의 "공고한 체제에 대한 도발"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 '불온'한 B급 좌파의 속내를 누가 알겠나.

이 칼럼은 참으로 독특한 텍스트이다. 남자들이 발끈하게 된 상황을 그럭저럭 적절하게 묘사하다가, 그 남성들을 발끈하게 만든 발언을 여성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치환하고, 갑자기 이명박을 까는 너희들이 과연 뭐가 다르냐는 식으로 말을 돌리더니, 결국 고래가 그랬어 정기구독을 하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마무리를 짓는다. 모든 주제를 건드리는 것 같지만 그 무엇에 대해서도 진실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너무 인상적인 나머지 이 촌평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도 않는다.

2009-11-20

오바마·이명박 공동기자회견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미디어스] 한미 FTA, 자동차 재협상보다 '전략적 중요성'


State of Denial. 워싱턴 포스트의 전설적 기자 밥 우드워드가 쓴, 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의 백악관 비사를 담은 책의 이름이다.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세 권의 시리즈 중 마지막에 속하는 이 책은, 백악관 내의 의사소통이 부재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내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누군가 참여정부의 한미 FTA 추진에 대해 책을 쓴다면 역시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State of Denial. 어떤 면에서는 부시 정부보다 못하다. 노무현 정권은 대체 왜 한미 FTA를 추진해야 하는지,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내놓지 못한 채 순식간에 협상단을 파견했다. 부시 정부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단 군대를 보내고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시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후세인을 처형하면서 어쨌건 ‘승리’를 거둔 반면, 한국이 이루어낸 협상 성과는 초라하기만 하다.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개시할 당시 미국에는 당연히 전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지만, 노무현의 한미 FTA는 요란한 국정 홍보 광고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분위기 속에서 추진되었다.

11월 19일 일본 찍고 중국 갔다가 가는 길에 잠깐 들른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정부 당시 추진된 한미 FTA가 진정 ‘State of Denial’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 협상을 통해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 정부가 내놓은 답변이 너무도 궁색하자, 사람들은 당연히 ‘경제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인해 추진되는 FTA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청와대와 정부는 펄쩍 뛰면서 그 혐의를 부인했다. 2006년 8월 8일 경향신문은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 의원들 중 일부를 청와대에서 만나 “북한 문제로 한미관계에 틈이 많이 벌어졌는데 이걸 메우려면 결국 경제 분야 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State of Denial.

이른바 ‘조중동’으로 통칭되는 기존 언론들은 한미 FTA와 한미동맹 사이에 거래 관계가 성립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지속적으로 사설이나 칼럼 등에서 협상의 타결을 촉구해왔다. 조중동에서 하는 말이 저런 식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지난 정부는 한미 FTA의 이유가 전적으로 경제적이라고, 철저히 탈정치적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그리고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한국에 왔고, 이명박 대통령과 공동 기자 회견을 가졌으며, 이 기자 회견에서는 다행히도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같은 희극적인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이런 언급이 들어있다는 데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공동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일부다.

“FTA가 가지는 경제적 •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FTA 진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And we recognize that there is not only an economic, but a strategic interest in expanding our ties with South Korea.)”


한미 FTA의 추진 배경에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솔직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영어 구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은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경제적 이익 뿐 아니라 전략적 이익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는 것이 미국을 대표하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말이다. 노무현 정부의 ‘공식 입장’및 그 지지자들의 염원과 달리, 이미 한미 FTA가 가지는 전략적 의미가 ‘확인’된 바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 수 있다.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다. 저 드넓은 미국 시장을 향해 나아가자던 한미FTA, 대체 왜 하는지에 대해 국민들을 설득시키지도 못한 채 협상 내용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그 한미FTA는, 경제 협상이기 이전에 전략적 동맹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참여정부는 그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고 싶어했지만, 인기에 연연하며 정치하지 않는 현 정부는 가릴 게 없다. 노무현은 이명박을 낳았고, 이명박은 노무현을 잡아먹고 있다.

필자는 한미동맹을 ‘무조건 타파해야 할 악’으로 보지 않는다. 잠재적 핵개발국이며 언제 붕괴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실패국가인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은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되지는 않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정부와 현 정부의 한미 FTA추진은 근본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한미동맹을 위해 FTA를 추진하는 것은 경제 논리와 안보 논리를 뒤섞는 것으로, 양자 모두의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을 정부가 직접 통제할 수는 없다. ‘공물’로 바쳐진 FTA가 미국 경제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FTA를 맺은 나라라고 해서 군사적 동맹을 반드시 강화해야 할 어떤 필연적 당위가 도출되지도 않는다. 진정 그런 이유로 FTA를 채결한다면 미국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협상을 해줘야만 한다. 지난 정부는 이런 발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비판받아 마땅하거니와, 그 사실을 국민들에게 계속 숨긴 채 사실에 대한 부인과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도 용서받기 어렵다. 이 협상의 근원적 동기를 ‘뽀록’내주었다는 것은 잘한 일이라면 잘한 일이겠지만, 이미 2000명 이상의 파병을 결정하여 추진하고 있으면서 자동차 협상까지 다시 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흘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 또한 같은 수준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한미동맹은 한미동맹이고 FTA는 FTA이다. 양자를 분리해서 다룰 때 모든 면에서 열세인 대한민국은 그나마 명분과 실리를 조금이나마 챙길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게 된다. 기왕 FTA가 재논의된다면 대한민국에 불리하게 채결되어 있는 온갖 독소조항들에 대해서도 다시 협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 논리’로만 보자면 그렇겠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정부 시절부터 이미 이 FTA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자동차 재협상이 있느냐 마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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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미디어스에 올라온 제 칼럼입니다. 아무도 이 지점을 문제삼지 않는 것 같아 짜증이 나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무리 입으로는 부인해도, 국정의 많은 부분을 결국 조중동이 주장하는 바로 그 프레임에 따라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지금 국민참여당은 '친노 이익은 얻고 싶지만 노무현 정부의 과오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다'는 식이고, 민주당은 재보선 세 석 얻고 좋다고 정신 놓고 있는 판입니다. 민주노동당은 북한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안 하려고 들지, 진보신당은 NL이 싫다고 대북정책을 아예 포기해버렸지. 어휴... 한숨만 나오는군요. 이러니까 한나라당이 헤게모니를 좌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한미FTA, 자동차 재협상 보다 '전략적 중요성'

State of Denial. 워싱턴 포스트의 전설적 기자 밥 우드워드가 쓴, 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의 백악관 비사를 담은 책의 이름이다.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세 권의 시리즈 중 마지막에 속하는 이 책은, 백악관 내의 의사소통이 부재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내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누군가 참여정부의 한미 FTA 추진에 대해 책을 쓴다면 역시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State of Denial. 어떤 면에서는 부시 정부보다 못하다. 노무현 정권은 대체 왜 한미 FTA를 추진해야 하는지,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내놓지 못한 채 순식간에 협상단을 파견했다. 부시 정부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단 군대를 보내고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시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후세인을 처형하면서 어쨌건 ‘승리’를 거둔 반면, 한국이 이루어낸 협상 성과는 초라하기만 하다.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개시할 당시 미국에는 당연히 전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지만, 노무현의 한미 FTA는 요란한 국정 홍보 광고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분위기 속에서 추진되었다.

11월 19일 일본 찍고 중국 갔다가 가는 길에 잠깐 들른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정부 당시 추진된 한미 FTA가 진정 ‘State of Denial’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 협상을 통해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 정부가 내놓은 답변이 너무도 궁색하자, 사람들은 당연히 ‘경제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인해 추진되는 FTA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청와대와 정부는 펄쩍 뛰면서 그 혐의를 부인했다. 2006년 8월 8일 경향신문은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 의원들 중 일부를 청와대에서 만나 “북한 문제로 한미관계에 틈이 많이 벌어졌는데 이걸 메우려면 결국 경제 분야 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State of Denial.

   
  ▲ ⓒ청와대  
 

이른바 ‘조중동’으로 통칭되는 기존 언론들은 한미 FTA와 한미동맹 사이에 거래 관계가 성립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지속적으로 사설이나 칼럼 등에서 협상의 타결을 촉구해왔다. 조중동에서 하는 말이 저런 식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지난 정부는 한미 FTA의 이유가 전적으로 경제적이라고, 철저히 탈정치적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그리고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한국에 왔고, 이명박 대통령과 공동 기자 회견을 가졌으며, 이 기자 회견에서는 다행히도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같은 희극적인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이런 언급이 들어있다는 데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공동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일부다.

“FTA가 가지는 경제적 •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FTA 진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And we recognize that there is not only an economic, but a strategic interest in expanding our ties with South Korea.)”

한미 FTA의 추진 배경에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솔직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영어 구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은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경제적 이익 뿐 아니라 전략적 이익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는 것이 미국을 대표하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말이다. 노무현 정부의 ‘공식 입장’및 그 지지자들의 염원과 달리, 이미 한미 FTA가 가지는 전략적 의미가 ‘확인’된 바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 수 있다.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다. 저 드넓은 미국 시장을 향해 나아가자던 한미FTA, 대체 왜 하는지에 대해 국민들을 설득시키지도 못한 채 협상 내용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그 한미FTA는, 경제 협상이기 이전에 전략적 동맹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참여정부는 그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고 싶어했지만, 인기에 연연하며 정치하지 않는 현 정부는 가릴 게 없다. 노무현은 이명박을 낳았고, 이명박은 노무현을 잡아먹고 있다.

필자는 한미동맹을 ‘무조건 타파해야 할 악’으로 보지 않는다. 잠재적 핵개발국이며 언제 붕괴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실패국가인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은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되지는 않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정부와 현 정부의 한미 FTA추진은 근본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한미동맹을 위해 FTA를 추진하는 것은 경제 논리와 안보 논리를 뒤섞는 것으로, 양자 모두의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을 정부가 직접 통제할 수는 없다. ‘공물’로 바쳐진 FTA가 미국 경제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FTA를 맺은 나라라고 해서 군사적 동맹을 반드시 강화해야 할 어떤 필연적 당위가 도출되지도 않는다. 진정 그런 이유로 FTA를 채결한다면 미국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협상을 해줘야만 한다. 지난 정부는 이런 발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비판받아 마땅하거니와, 그 사실을 국민들에게 계속 숨긴 채 사실에 대한 부인과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도 용서받기 어렵다. 이 협상의 근원적 동기를 ‘뽀록’내주었다는 것은 잘한 일이라면 잘한 일이겠지만, 이미 2000명 이상의 파병을 결정하여 추진하고 있으면서 자동차 협상까지 다시 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흘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 또한 같은 수준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한미동맹은 한미동맹이고 FTA는 FTA이다. 양자를 분리해서 다룰 때 모든 면에서 열세인 대한민국은 그나마 명분과 실리를 조금이나마 챙길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게 된다. 기왕 FTA가 재논의된다면 대한민국에 불리하게 채결되어 있는 온갖 독소조항들에 대해서도 다시 협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 논리’로만 보자면 그렇겠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정부 시절부터 이미 이 FTA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자동차 재협상이 있느냐 마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2009-11-16

당신들이 가라, 세종시로

[경향신문] 당신들이 가라, 세종시로


세종시 문제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13일, 정부는 세종시의 성격을 ‘행정도시’에서 ‘기업도시’로 전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세종’이라는 이름을 붙인 도시에 행정기관이 들어서지 않는 것부터가 난센스라는 것은 아예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 또 하나의 기업도시를 짓는 것은 극단적으로 반 환경적인 선택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다른 모든 경제적 이유를 접어두더라도 행정도시는 건설돼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수도를 옮겨야만 한다. 그래야만 서울이라는 리바이어던의 스프롤(sprawl) 현상에 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과 수도권은 현재 암세포처럼 커져가고 있다. 이름을 다 기억하기조차 힘들 만큼 수많은 베드타운이 서울 인근에 건설됐고, 그도 모자란다는 듯 정부는 수도권 그린벨트를 해제해 추가적으로 주택을 건설하겠다고 나섰다. 이처럼 대도시가 무한히 확장해나가는 현상을 ‘스프롤’이라고 하며, 이것은 인간이 환경에 끼칠 수 있는 해악 중 가장 심각한 것에 속한다.

서울 주변 신도시에 살면서 하루에 한 시간 반씩 자동차를 몰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원의 비효율적 사용은 증가하고 지구는 병들어간다. 출퇴근 시간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나 강남 일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통 지체를 감수해야 한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서 있는 수많은 자동차들이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며 화석 연료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과 주변 도시를 잇는 거대한 도로는 이미 그 자체로 해당 지역에 사는 생물들에게 재앙이나 다를 바 없다. 대체로 동물들은 널찍한 영역을 갖게 마련이며, 십중팔구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그 영역을 가로지르게 된다. 야생동물을 치어 죽인 운전자들은 대체 왜 동물이 차도 위에서 얼쩡거리느냐고 분통을 터뜨리지만, 사람이 길을 놓기 전부터 동물들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동물이 자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는다. 생태계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서울 주변의 신도시들은 자동차를 이용해야만 생활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널찍한 도로가 닦여 있고, 넉넉한 주차장이 딸린 아파트가 건설된다. 주거공간과 상업공간이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애초에 도시 자체가 보행자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간단한 먹을거리라도 구입하기 위해서는 자동차를 끌고 마트에 가야만 한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스프롤 현상이 단독주택들로 구성된 주택지역의 무분별한 확장과 관련되어 있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난립하는 신도시가 스프롤 현상의 주범인 것이다.

게다가 기업도시라니. 이미 2005년부터 지역마다 기업도시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제대로 완공돼 자립한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에서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 때문이다. 조선 왕조 500년, 일제 강점 36년을 거쳐 해방 후 지금까지 600년간 우리는 단 한 번도 중앙집권 체제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자원이 600년간 ‘관습헌법적으로’ 수도였던 서울로만 집중되어 왔다. 한국에서 기업을 한다는 것은 최대한 ‘중앙’과 밀착해 정부 주도의 온갖 사업을 낙찰받아 수익을 챙기는 것을 뜻한다. 제 아무리 ‘기업도시’를 개발한다 한들 기업들이 자진해서 그곳으로 가야 할 ‘경제적’ 이유가 전무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아예 수도를 옮겨야 한다. 헌법 개정을 통해 수도를 변경하고, 입법부와 행정부 및 사법부 전부가 서울에서 떠나는 ‘사건’이 벌어져야 이 오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뿐 아니라 환경을 위해서도 그러한 변화가 절실하다. 서울 주변의 난개발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실패한 기업도시는 결국 골프장 부지로 재활용되며 인근의 환경 부담을 가중시킨다. 정부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 한 기업들은 절대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국토의 균형발전과 정경유착 해소 및 한반도 생태의 미래를 위해 진심으로 권한다. 당신들이 가라, 세종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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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지지난주 월요일자에 칼럼이 올라왔어야 하는데, 부득이한 지면 사정으로 두 번 연기되었습니다. 다시 쓰고 또 다시 써서 만든 글인데 썩 만족스럽지는 않군요. 저는 영화 친구의 대사를 인용해서 '니가 가라, 세종시'라고 했는데 여론독자부는 그것을 '당신들이 가라, 세종시로'로 고쳤습니다. 그런데 전문을 다시 읽어보니 경향의 판단이 옳은 것 같군요. 그 외에는 제가 쓴 내용 그대로입니다.

스프롤 현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행정수도 이전이 이루어져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수도 변경이 있어야 한다는 제 주장은, 당연히 그로 인해 한국이 1극 중심 체제의 국가가 아니게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부분에 대해 어떤 실증적인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조사하지는 못했으므로, 다른 자료를 접하신 분이 계시다면 정보를 공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9-11-11

평가당하는 자의 괴로움

내 경험에 따르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마음속으로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자신의 외모가 평균선에서 머물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로 '여자들의 90퍼센트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하지만, 남자들의 90퍼센트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잘생겼다고 생각한다'고 하는데, 이 농담은 절반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양심적으로 말하건대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나도 'luser'다).

'거울을 바라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함의하고 있다. 우선 평가의 대상과 주체가 모두 자기 자신이며, 스스로의 외모를 평가할만한 '객관적 지표'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나는 나보다 키가 더 크거나 작을 수 없다. 나는 나보다 눈이 더 크거나 작을 수 없고, 코가 더 높거나 낮을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은 자신이 잘생겼거나, 적어도 평균은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여자들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외모를 비관한다.

남자들이 이런 식의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잘생겼다'라는 말이 본질적으로 애매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여성들의 미를 논하기 위한 '객관적'인 기준은 이미 차고 넘친다. CD 한 장으로 다 가려지는 조그만 얼굴, 34-24-34, 패션 모델들은 그런 외적 기준을 몸으로 보여주는 이들이기에 선망의 대상이 된다. 마치 소나 돼지의 고기 부위를 평가하듯 여성의 신체의 일부만을 떼어내어 '꿀벅지'라고 부른다.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타인의 평가의 대상으로 살아가도록 강제당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자가 '예쁘다'는 말을 이제 우리는 얼굴이 작다느니, 가슴이 크다느니, 콧날이 오똑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개별화·파편화하여 어떤 수직선 위에 올려놓고 언술한다. 대체 얼굴이 작은 것과 미적으로 아름다운 것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단 말인가? 가슴이 큰 여자는 무조건 미인인가? 하나씩 떼어서 물어본다면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얼굴이 조막만하다, 열라 예쁘다' 같은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남자들의 외모가 전혀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자들이 처한 상황과는 분명히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사회에 넘쳐나는 외모에 대한 객관적, 수치적 평가 기준을 여자들은 이미 내면화하고 있고, 그래서 거울 앞에 서면 주눅이 든다. 괜히 다이어트에 목숨 걸고 500그램 줄어들었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남자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정밀한 기준이 개발되지 않았다. 남자들끼리 서로 호빗이니 오크니 찧고 까불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아까 꿀벅지가 언급되었으니 그걸 예로 들어보자. 많은 남자들은 '너희들은 초콜릿 복근 어쩌고 하더니'라고 난리를 쳤는데, 애초에 여성의 외모에 대한 평가의 언어와 남성의 외모에 대한 평가의 언어는 사용되는 방식이 다르다. 여자들은 꿀벅지라는 단어를 들으면 남들이 나를 핥는 듯이 쳐다볼까봐 신경이 쓰이고, 동시에 예쁘지 않은 내 다리가 너무 싫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반면 남자들은 초콜릿 복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헬스 두 달 해서 배에 王자 새긴 다음 해변에서 여자 존나 꼬시는 상상을 하다가, 귀찮아서 운동 안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웹서핑이나 하면 그만이다. 아니라고 하지 말자. 남자들이 자신의 외모에 대해 느끼는 최악의 자괴감이라는 것을 여자들은 일상 속에서 늘 느끼며 살고 있다는 말이다.

남자들은 자신의 외모가 평가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모른다. 어차피 외모는 주관적인 거고, 취향은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며, 이 드넓은 지구 어딘가에는 나를 나 자신으로 사랑해줄 천사같은 소녀가 한 명쯤은 있을 거라능... 이라는 판타지를 심어주는 문화 컨텐츠 또한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남들이 내게 못생겼다고 해도, 어차피 지들도 장동건처럼 안 생긴 주제에 그런 소리 한다고 비웃으면 그만이다.

'얼굴 큰 남자는 루저'라고 말했더라면 이렇게 파장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필이면 180이라는 똑 떨어지는 숫자가 나와버렸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숫자가 180인데, 이건 뭐 거울을 아무리 쳐다보면서 화이팅을 외쳐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보다 키가 크면 대체로 나보다 싸움도 잘 할 것 같고, 여러 모로 꿀리는 기분이 든다.

모든 남자의 키는 180보다 크거나 작다. 그 기준은 다른 기준과 달리 그 어떤 심미적인 판단을 통한 유도리 있는 해석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건 마치 모든 남자가 10억 이상의 자산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 않은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평가를 당하면 구석에 몰리는 기분이 들고, 두 배 세 배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오공감에는 자기 어머니가 방송을 보다가 울었다는 실화인지 소설인지가 올라와 있는데, 그것은 설령 픽션이라고 해도 진실이다. 키가 작다는 것은 돈이 없다는 것 만큼이나 '숫자'로 표현되는 진실이다. 그 앞에서 남자들의 열등감은 비로소 진정으로 드러난다.

평가를 당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혹한 평가를 여자들은 언제나 당하면서 살고 있다. 인간의 외모를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눈이 크다는 둥 가슴이 작다는 둥 양화(量化)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처럼 받아들여지는 한국사회에서, 드디어 그 칼날이 남자들에게 직설적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평가의 희생양이 된 것처럼 오버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글을 끝내면 '그래서 지금 막나가자는 거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겠다. 정 그렇게 폭력적인 평가가 싫다면, '나에 대한 폭력적인 평가'에만 반대하지 말고, 애초에 인간의 외모를 사물처럼 만들어서 함부로 논하는 이 한국 사회의 더러운 화법에 대해서까지 문제의식을 느껴보라는 말이다. 꿀벅지가 어쩌고 슴가 사이즈가 저쩌고 얼굴 존나 큰 돼쌍년이 이러쿵 저러쿵 떠들던 자들이 난리를 치면 정말 'luser'밖에 더 되나. 당신에게 들이대진 그 잣대가 가혹하다고 느낀다면, 애초에 인간을 그렇게 평가하는 방식 자체를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