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씨뉴스의 기사로 뜬 "소녀시대 성희롱 논란 작가, 과거 만화까지 논란"을 보자. 이 만화에서 윤서인은 '다니엘'이라는 단어가 과거에는 '다니엘의 집' 등에 모여 있는 장애인들을 지칭하는 뜻으로 많이 쓰였는데, 지금은 다니엘 헤니의 등장으로 인해 미남을 더 빨리 연상시킨다는 내용을 뻔뻔스럽게 그려놓고 있다. 캡처된 리플을 보면 그는 항의하는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다니엘 학교는 정신지체장애인을 위한 시설이었지요.
당연히 정신지체아 이미지를 그려놓은거구요.
정신지체아는 입가에 침흘리게 그려야지 눈부라리고 똑똑하게 그릴순 없죠.
장애는 장애일뿐 그게 비웃을일이라고도 나쁜거라고도 한적없습니다.
스스로 편견에 가두지 마세요. 누구나 오늘부터라도 장애인이 될수있습니다.
장애인은 어디서 장애라는 단어만 보여도 발끈발끈해야하나요?
왜 입가에 침흘리는 다니엘 이미지를 보면 기분이 나빠져야 하는지???
윤서인의 다른 불쾌한 만화들이 가지는 사고 방식이 다 이런 식이다. '그거 사실이잖아, 나는 그냥 만화로 그렸을 뿐이야'라는 편리한 변명을 하는 것이다. 이다해가 성형 많이 했으니까 "여러분 이거 다 성형인 거 아시죠?"라고 썼을 뿐인데 리플에서 남들이 난리를 치니까 대사를 바꾸는 거고, 한국 제품들이 일본거 베낀 거 많으니까 그렇다고 말했을 뿐인데 괜히 열등감에 쩔어있는 한국인들이 지들도 어차피 일본거 좋아하는 주제에 지랄을 하는 거다. 윤서인의 세계관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며 불쾌감을 느낄까? 윤서인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어떤 가치에 기반한 행동 체계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서인은 약자들에게 언제나 '솔직'하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장애인은 장애인이고 침흘리니까 침흘리는 모습을 그대로 그린다. 와, 솔직하다. 하지만 이런 솔직함이 과연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윤서인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디씨뉴스의 아래 달린 리플들 중에도 그런 생각에 동의하는 이들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도덕 체계는 우리에게 사회적, 육체적, 정신적 약자들을 향해 '솔직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에게 더 관심을 갖고 친절하게 대하며 부족한 지점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불운한 요소로 인해, 혹은 타고난 성향으로 인해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강자들이 지니고 있는 편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 탄압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시점이 오면 약자, 혹은 소수자들에 대한 관용적인 시선 자체가 주는 부담감이 문제시될 수 있고, 그래서 그냥 완전히 평등하게 대우해달라는 목소리가 드높아지기도 한다. 동성애자나 성적 소수자들이 사회적 입지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는 특수한 지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이전에 적극적이고 치열한 '보호'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장애인의 경우도 그렇다. '장애우'라는 단어가 오버스럽다고, 남사스럽다고 불평들이 많지만 그런 억지스러운 노력이 있기 전에는 장애인들이 장애인이라고 불리지도 못했다. 그냥 '병신들'이었을 뿐이다.
윤서인과 같은 저런 식의 '솔직함'은, 세상이 반 발자국 나아졌다는 것을 빌미삼아 자신들의 원초적인 폭력성을 '솔직'하게 드러내버린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반동적이고 부도덕하다. 소녀시대에 대한 만화의 내용도 결국 그것 아닌가. 솔직하게 드러나버린 아저씨의 성욕. 아, 나도 소녀시대와 떡치고 싶구나. 그는 왜 자신의 솔직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를 까는 사람들의 대부분도 자신들이 왜 화를 내고 왜 까는지 모르는 것 같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약자에 대한 솔직함은 강자에 대한 비굴함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윤서인의 경우에는 본인이 강자에게 비굴하다 못해 강자에게 비굴하게 굴었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치닫고("내가 일제시대에 살았더라면 친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본인 또한 자신이 생각하는 강자들의 무리에 끼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으며("일본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 '짱'에게 노골적인 찬사를 바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삼성 최고에요"). 인간의 본래적인 도덕심은 이런 식의 비굴함을 보며 분노하고 짜증을 내게 되어 있다.
문제는 이런 식의 행태, 약자에게 솔직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이런 모습이 과연 윤서인만의 것이냐 하는 것이다. 굳이 이 떡밥을 물어버린 이유는 디씨뉴스에 달려있는 리플들을 보고 우려의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니까 장애인이라고 하는게 왜 안 되냐고? 그런 식의 솔직함이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른가? 그런 식이라면 피부가 검은 사람들을 지칭해서, '검다'의 어근인 '검-'과 귀엽고 작은 누군가를 뜻할때 쓰는 어미인 '-둥이'를 합쳐서 '검둥이'라고 부르면 안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로니 콜먼에게 가서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툭 터놓고 전달할 용의가 있는 사람, 손 한 번 들어보자.
도덕은 위선이 아니다. 하지만 일체의 위선을 파괴하고 나면 도덕이 갈 곳이 없다. 우리는 약자에게 겸허하고 강자에게 솔직해야 한다. 그게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솔직함'이라는 칼날이 오직 만만한 자들만을 향하고, '겸허함'이라는 미덕이 오직 자기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만을 향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시대인 것 같다. 윤서인을 비판할 때 스스로의 모습도 좀 돌아보자는 말이다. 나의 솔직함은 과연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덧) 갑자기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The Importance of Be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