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30

우영우: '지켜주고 싶은 여자'라는 로맨스 세팅

1화만 봐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왜 흥행하는지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상당히 공들여서 잘 쓴 법정씬. '천재 변호사'가 진실을 밝히고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는, 잘 쓰면 당연히 재미가 보장된다.

본격적인 논의의 가치가 있는 건 우영우 캐릭터. 사람들이 '자폐'라는 키워드에 꽂혀서 놓치고 있지만, 이 캐릭터는 우리에게 전혀 낯선 인물 유형이 아니다. 오히려 5천만 국민에게 친숙한 '아는 맛'이다.

우영우는 기존 로맨스, 특히 2000년대 이전 순정만화에서 흔히 쓰던 여자주인공 캐릭터의 변주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고 도움을 받아야 해서 보고 있자니 딱하고 귀엽기도 한, 순수한 사랑스러운 그러면서도 특별한 게 있는 여자주인공'인 것이다.

(이런 성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귀엽다'인 것 같지만, 이게 통상적인 '귀여움'과 100% 겹치는 건 아니다. 저런 순정만화 캐릭터 세팅과 21세기 대중문화 속 귀여움에 대한 논의는 어려운 주제니까 나중에 언젠가...)

여기서 잠깐. 순정만화라는 단어만 들으면 조건반사적으로 비하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퍽 많은 터라 이런 이야기를 하기 조심스럽다. 나는 그런 뉘앙스의 리플은 적당히 지우거나 감추거나 할 생각이다. 이용에 참고하시길.

아무튼, 우영우 캐릭터란 그런 캐릭터다. 특별한 소녀. 하지만, 혹은 그래서, 지켜주어야만 하는 소녀. 순정만화 독자들에게 이러한 인물 유형은 전혀 낯설지 않다.

이은혜 작 <점프트리 A+>의 혜진이는 마음이 너무 여리다. 그래서 해야 할 말 제대로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린다. "혜진이는 수도꼭지야..." 그러면 멋진 오빠들이 간지나게 춤추며 팝송을 흥얼거리며 나타나서 도와줌.

'지켜주어야 하는 여주'가 꼭 나약한 여자일 필요도 없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나는 장미로 태어난 장미칼, 아니 오스칼은, 군인 체질이지만 시대적 한계로 남장을 하고 군인으로 일한다. 그런 비밀 때문에 뭔가 제약이 생긴다. 소꿉친구 앙드레는 공식적으로는 오스칼의 부하지만, 앙드레에게 오스칼은 '지켜줘야 하는 여자'가 된다.

꼭 '순정만화'만 이런 기법을 쓰는 건 아니다. 여자 캐릭터를 낯선 환경에 던져넣기만 해도 '지켜줘야 하는 여자'를 만들 수 있다. 로맨스의 고전 중의 고전인 <귀여운 여인>부터가 그렇다.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은 거리의 여자다. 에드워드 루이스(리처드 기어)하고 어찌어찌 엮여서 고급 호텔에 묵는다. 비싼 옷가게에 옷을 사러 간다. 하지만 옷가게 점원들이 무시한다. 그 사실을 듣고 에드워드는 격분하여 카드 들고 가게로 처들어가서 '여기 있는 거 다 내놔' 시전.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준다.

이 여자가 딱하다, 짠하다, 마음에 걸린다. 도와주고 싶다. 남자들이 쉽게 엮이는 감정의 고리다. 사실 여자들도 불쌍한 남자에게 쉽게 끌리곤 한다.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가 목발을 짚고 다니며 여자들의 동정심을 사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해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로맨스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문제다. 그런데 남녀(일단 이성애 로맨스만 이야기하자)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건 눈만 마주쳐도 가능한 일이다. 재미있는 서사가 나오려면 뭔가 장애물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장애, disable이 아니라 obstacle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그 obstacle을 여자주인공의 캐릭터에 얹어보자. 앞서 말한 순정만화의, 혹은 로맨스의 여주 생성 공식이 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여자가 어떤 장애에 부딪혀 넘지 못할 때, 그걸 딱하고 짠하게 여겨 뭔가 손을 내밀고픈 남자의 마음. 그렇게 로맨스를 만드는 게 2000년도 이전에는 특히 흔했다는 것이다.

우영우의 장애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런 면에서 당연하다. 혹은 장애의 재현이라는 윤리적 문제에 민감한 이들이 반발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우영우>는 disable을 로맨스의 obstacle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세팅이 아니다. 여성을 취약한 존재로 만들어서 로맨스 서사의 동력으로 삼는 창작 기법 자체가 20세기의 유물이다. 요즘은 여주들에게 노골적으로 obstacle을 부여하는 고전적 로맨스 세팅을 잘 안 한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물며 그 obstacle의 자리에 disable을 갖다 놓는다? 이건 상당한 모험이다.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로 플러스를 뽑아보겠다는 플랜. 다행히도 <우영우>는 배우 박은빈이 연기하고 있고, 그는 사실상 원맨쇼 차력쇼 수준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우영우>의 세팅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다. 다만 그 맥락이 뭔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약간 부연설명을 해보고 있을 뿐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이 작품의 주인공을 박은빈이 해서 천만다행이다. 조금이라도 연기력이 부족하거나 시청자들의 무조건적 호감을 끌어내지 못하는, 밉상 털이 한오라기라도 박힌 배우가 맡았다면, 엄청난 논란 끝에 순항하지 못했을지 모를 일이다. 

2022-07-28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탱크와 전투기를 수출했다는 소식 때문에 오늘 인터넷은 '폴란드의 날' 비슷한 분위기가 되어 있다.

이럴 때 나는, 마치 외국인에게 '두유노 코리아? 손흥민 몰라요?' 이러는 진상 국뽕 한국인처럼, '폴란드'라는 단어의 자동 연관 검색어를 떠올린다.

쉼보르스카는 평화주의자, 세계주의자,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그는 전차와 전투기를 사고 파는 거대한 돈과 폭력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극도로 문학적인 아무말이며, 반박시 일단 내 말이 맞는데, 솔직히 누군가 뭘 반박할 거리가 있지도 않다. 아무말이니까.

이런 시가 있으니 한 편 읽어주시면 좋겠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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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창가와 문 앞에
우산과 여행 가방, 장갑, 외투가 수두룩.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아니, 도대체 이게 다 뭐죠?"

이것은 옷핀, 저것은 머리빗,
종이로 만든 장미와 노끈, 주머니칼이 여기저기.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뭐, 아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열쇠여, 어디에 숨어 있건 간에
때맞춰 모습을 나타내주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녹이 슬었네. 이것 좀 봐, 녹이 슬었어."

증명서와 허가증, 설문지와 자격증이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태양이 저물고 있네."

시계여, 강물에서 얼른 헤엄쳐 나오렴.
너를 손목에 차도 괜찮겠지?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넌 그저 시간을 가리키는 척 하고 있을 뿐이잖아."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에 이제 어린애는 없단다."

자, 열려진 창문으로 어서 날아가렴,
저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바야흐로 내가 와락 울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2022-05-29

프리랜서: 사교성, 실력, 마감


새 책이 나왔습니다. 제목은 <프리랜서: 사교성, 실력, 마감>입니다. 

이 책의 맥락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워크룸 실용 총서'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워크룸 실용 총서'란 마치 실용서인 것처럼 보이는, 하지만 실용서가 아닌, 그래도 어쩌면 실용적인 쓸모가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담는 총서 시리즈입니다. 

가령 CIA의 사보타주 매뉴얼을 담은 <생활 공작>,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군인들에게 배포된 육박전 매뉴얼인 <실전 격투>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용서였지만 실용서가 아니고, 실용서라고 보기 어렵지만 실용서(였)죠. 

<프리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로 10년차도 더 된 프리랜서인 제가, 프리랜서로서의 삶의 태도와 방식, 여러 팁을 전합니다. 실용서입니다. 하지만 잘 읽어보면 가령 <미라클 모닝>이라던가, 뭐 그런 식의 실용서와는 거리가 멉니다. 

가격은 고작 9천원. 전체 분량 182매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실용서가 아닌 정도를 떠나, 책의 만듬새만 놓고 보면 시집 같기도 하군요. 편하신대로, 좋을대로, 그렇게 읽으면 좋을 책이죠.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2-05-22

'나는 그저 장인일 뿐'이라고 말하는 예술가

오늘(5월 22일 일요일) 막을 내린 권진규 100주년전.

일단 대단히 훌륭한 전시였고, 여러가지 할 이야기가 많은데, 그 중 하나.

사람이 하는 말을 믿어줘야 하지만, 누군가 어떤 말을 굳이 반복해서 한다면 그 말과 반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

권진규의 경우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장인일 뿐'이라고 젊은 시절 일본 가서 조각 배우고 왔을 때부터 그랬다고 전시 초반에 써 있는데, 실제로 걸어온 행보는 그와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 그리고 나무로 만든 불상 모두 그렇다.

그의 예수상은 개인적으로 만든 작품이 아니다. 멀쩡히 교회에서 돈 받고 의뢰 받아서 만든 것이다. 클라이언트가 따로 있는 작품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권진규는 그 예수의 머리의 후광을 굳이, 굳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만들었다.

수레바퀴란 종교에서 어떤 상징인가? 불교의 상징이다. 불교의 法이요, 윤회의 輪이다. 예수 머리의 halo를 수레바퀴 모양으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도에게 일종의 신성모독인 것이다.

이런 유형의 작업이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건 아니다. 가령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정도까지 전국의 여러 성당들은 앞다투어 '상투 틀고 있는 예수'라던가, '색동저고리 입은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같은 성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Roman Catholic'과도 미묘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 천주교의 맥락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천주교에서 그런 유형의 성상을 주문 제작할 때에도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따라야 함은 당연하다.

권진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남의 돈을 받아서 작업을 할 때도 아주 대놓고 자신의 의지,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곤조를 밀어붙였다.


나무로 만든 불상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커미션 받은 작품이 아니지만, 종교의 내적 논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작가주의적 의지가 강하게 개입해 있다. 미륵의 관을 썼지만 옷깃과 수인, 결가부좌는 부처의 그것이다. 종교의 문법을 알면서 무시하는 것이다.

권진규의 예술가적 목표가 뭔지, 얼마나 잘 추구하였는지, 뭐 그런 것에 대해 내가 함부로 말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제목에 써두었던 것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그저 기술자/장인/등등일 뿐'이라고 말하는 예술가야말로 예술가적 자의식이 가득한 사람들이다. 진정 간도 쓸개도 빼놓고 시키는대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저런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훌륭한 전시에 쓸데없는 말을 한 마디 덧붙여 보았다.

2022-05-15

19세기 힌두교 르네상스, 바가바드기타, 계급과 차별과 의무

이 고전이 지니는 힘과 영향력은 간디뿐 아니라 틸라크 (B.G. Tilak), 오로빈도(Aurobindo), 비노바 바베(Vinoba Bhave), 라다크리슈난(S. Radhakrisnhan) 등 수많은 현대 인도 사상가와 정치 지도자에게도 마찬가지로 강하게 미쳤다. 사실 『바가바드기타』가 힌두교를 대표하다시피 하는 대중적 경전이 된 것은 19세기의 이른바 힌두 르네상스(Hindu Renaissance)에 힘입은 바가 크다. 영국의 오랜 식민 통치는 인도 지식인들에게 정치적 저항과 독립 의식을 고취했을 뿐 아니라 종교적·문화적 각성도 가져왔다. 특히 영국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진 기독교와의 접촉은 인도 지식인들의 힌두교 이해와 개혁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힌두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선교사들의 공격적 선교에 대해 방어적 자세를 취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서구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서 비판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따라서 기독교와 서구 문명을 무조건 동일시하던 견해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인 힌두교 사상의 강점을 새롭게 의식하게 되었다. 힌두교를 비판과 개혁의 대상으로만 보던 부정적 시각을 버리고 그들은 오히려 서구 세계를 향해 힌두교 철학과 종교 사상이 지닌 장점과 매력을 적극적으로 천명하고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에 누구보다도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유명한 비베카난다(Vivekananda, 1863-1902)였으며, 그의 사상 역시 『바가바드기타』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단적으로 말해서, 현대 힌두교를 만든 것은 바로 『바가바드기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393쪽, 해설]

- 길희성 역주, 『범한대역 바가바드기타』(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10)

가장 평이 좋은 길희성 역주 바가바드기타를 읽고, 부산대학교 박효엽 교수가 (당시는 교수가 아니었지만) 쓴 『불온한 신화 읽기』를 읽으니, 현대 힌두교가 지니는 여러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힌두교는 본래부터 다신교에 어떤 종파가 지배하고 있지도 못했다. 일종의 토착 민간 신앙 차원에서 발전이 멈춰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인도의 식민 지배를 겪으며 19세기에 '재발명'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약성경마냥 바가바드기타의 지위가 급상승하였고, 크리슈나는 '크라이스트'의 지위에 올랐다.

문제는 카스트 제도. 그 전까지도 인도를 관습적으로 묶어놓던 카스트 제도는 바가바드기타 역시 열렬하게 옹호하고 있었다. 그러니 신약성경과 달리 바가바드기타는 '보편 해방의 경전'이 되지 못했다(그렇게 해석하고자 하는 힌두교 신학자 혹은 신도들도 상당히 많은 듯하지만). 결국 카스트 제도는 인도가 '현대화' 되는 과정에서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확고한 종교적, 이론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는 소리.

박효엽의 <불온한 신화 읽기>는 특히 이 지점을 충분한 분량을 동원하여 잘 언급하고 있다(제3장 "『기타』가 폭력을 옹호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바가바드기타』는 인간의 보편적 인식과 윤리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무사 계급'의 특수한 의무를 앞세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 경우 힌두 신화 체계에 강하게 의존하지 않는 한 다수에게 설득력을 지니는 도덕 철학 체계를 이루기가 어렵다.

한국은 '의무'라는 개념이 아예 실종된 사회다. 특히 군복무와 관련된 논의를 보고 있노라면, '국방의 의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한다).

그러나 『바가바드기타』와 같이 의무 개념을 해석하며, 특수 의무를 보편 의무보다 절대적으로 앞세우면, 그런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끔찍한 차별과 배제의 구렁텅이가 되고 만다. 『바가바드기타』를 비롯한 인도 철학을 애호하는 서구의 리버럴 엘리트, 서구 리버럴 엘리트를 흉내내는 한국의 식자층들은, 은연중 자신을 브라만 계급에 대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