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16

매개념 문제

인터뷰를 마치며 박 교수는 걱정스런 얼굴로 “제 얘기가 그렇게 근본주의로 들리나요?”라고 물었습니다. (1) 진보신당 사람들은 늘 올바른 이야기를 하지만, 가끔은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2)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당인데도 제가 선뜻 표를 주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저의 그런 우려에 박 교수는 “지식인의 삶의 유일한 기준은 죽음에 임박해 자기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30년대 말의 조선 지식인들을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뜨끔했습니다. 근본주의적이든 아니든, 사회주의 국가에서 소수자로 태어나 평생 약자에 대한 따뜻한 감수성과 냉철한 이성을 벼려온 박노자의 존재는 ‘지엔피 인종주의’에 빠져 외국인과 소수자 차별이 일상화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그의 아들 율희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더 오랜 시간 우리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 인터뷰였습니다.

집안일 많이 하며 죄악을 씻고 있어요”(한겨레, 2012년 9월 15일)
김두식이 박노자를 만나 인터뷰를 한 후, 마지막 정리 발언으로 한 말. 여기서 ①과 ②의 논리적 관계를 추적해보자.

(1)은 일종의 대전제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진보신당 사람들이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로 보인다고 김두식은 말하고 있지만, 어차피 본인의 주관적 판단을 정정할만한 다른 내용을 제시하지 않으므로, (적어도 화자에게는) 진보신당의 지식인들이란 까대기에만 능숙한 청맹과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2)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당이지만, 진보신당에 선뜻 표를 주지 못한다.

이 사이에 빠진 소전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금새 알 수 있다. ‘나는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에게는 표를 주지 않는다’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 임의로 (1.5)라고 번호를 부여해보자. 그렇다면 이 삼단논법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띄게 된다.
(1) 진보신당 사람들은 늘 올바른 이야기를 하지만, 가끔은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1.5) 저는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의 집단에는 표를 주지 않습니다.

(2)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당인데도 제가 선뜻 표를 주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즉, 그래서 저는 진보신당에 표를 주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매개념’, 즉 대전제와 소전제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이 바로 그것인데, 그것이 결론에서는 “좋아하는 사람들”로 슬쩍 바뀌어있다. 하지만 이 삼단논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매개념이 같은 것이어야 한다.

즉 김두식에게는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이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서 같은 차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색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물론 ‘애정어린 비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지만, 굳이 분석해 보았다.

김두식은 현실과 담 쌓은 지식인들을 좋아하지만 그들에게 투표하지는 않는다는, 즉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표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에서 오늘의 보람을 찾도록 하자.

2012-09-04

고종석의 안철수와 최장집 생각

[고종석 칼럼] 안철수 생각, 한겨레, 2012년 9월 2일.

[최장집칼럼]책임정치를 위하여, 경향신문, 2012년 8월 27일.

누군가 늘 하던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현상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양자 모두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더욱 그렇다.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한 문필가가, 현재 가장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정치학자의 주장을 오해하는 모습을 보며, 괜히 한 마디 덧붙인다.

“안철수 생각”이라는 제목 하의 고종석 칼럼에서 주목해 읽어볼만한 지점은 다음과 같다.
대의제 정당정치를 중시하는 정치학자들도 안철수를 꺼린다. 이 정치학자 집단을 대표한다 할 최장집은 지난주 ‘책임정치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칼럼에서 “필자는 대선 후보 가운데 정당을 바로 세우는 것을 통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의제 정당정치에 대한 그의 오랜 신념을 생각하면 조금도 놀랍지 않은 발언이다. 그런데 최장집의 지지 조건을 가장 잘 충족시킬 수 있는 후보는 박근혜일 수밖에 없다. (강조는 인용자)
나는 고종석이 저러한 단언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대단히 궁금하다. 최장집의 칼럼을 검토해보자.

최장집은 한국의 대통령제가 ‘책임정치’를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은 정당이 아니라 캠프의 힘으로 대통령이 되고, 임기 말년 지지율이 떨어지면 자신의 정당과 거리를 둔다.
임기 전반에 대통령은 “집권당 없는 대통령”이고자 여러 형태로 당의 영향력을 제어했다. 그러나 임기 후반에 이르러 그의 권력이 현저하게 약화될 때의 당정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 당이 오히려 멀어지고자 한다. 대통령은 대선에 가까워오면서 오히려 당에 부담이 되고, 이제 당이 나서서 “대통령 없는 집권당”이 되기를 원하게 된다. 이러한 청와대-집권당 관계는 대통령을 유능하고 좋게 만드는 데 있어서나, 정당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나 실패하게 된 원천임이 분명하다.
그 결과 ‘이명박 심판론’을 들고 총선에 나선 야권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갈아치우고 ‘나도 이명박을 심판하겠다’고 나선 박근혜와 대립각을 세우기가 매우 곤란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대선 국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이명박의 실정을 비판하기 위해 같은 당(이지만 다른 계파)인 박근혜를 찍겠다고 나서면, 사실상 유의미한 정치적 선택은 불가피하다.

즉, 최장집의 이 칼럼은 ‘나는 박근혜를 찍겠다’는 내용으로 이해되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고종석은 그렇게 읽고 있다. 왜일까? 잘 모르겠다. 최장집 칼럼은 전체적으로 현재 ‘캠프’ 중심으로 돌아가는 대선 국면이 국민들의 정치적 선택권을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현상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쪽은 같은 당의 대통령을 심판하겠다는 대선후보인 박근혜 아닌가.

고종석은 “대선 후보 가운데 정당을 바로세우는 것을 통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는 최장집의 말에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박근혜가 ‘책임정치’를 구현하려면, 이명박 정부 심판론에 편승하지 않고, 그 공과 과를 모두 이어받겠다는 태도를 내밀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어쩌면 아버지의 독재를 사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현재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종석이 안철수를 ‘지지’ 혹은 ‘응원’하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다. 그는 박근혜와 안철수가 낳을 수 있는 1mm의 차이를 위해,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 의사를 밝히지 않는 정치학자의 원론적인 주장마저도 히스테리컬하게 ‘그것은 박근혜 지지가 아니냐’라고 묻는다. 대체 어쩌다가 한국의 정치 토론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심히 안타깝고 씁쓸하다.

2012-08-26

안철수의 국민연금 생각

꼭 아파트를 새로 지으려고만 하지 말고 민간의 다세대주택을 사들여서 공공임대주택으로 전환하는 정책 같은 것을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많은 재원을 갖고 있는데 국민의 소중한 자산을 가지고 미래가 불안정한 오피스빌딩을 매입하기보다 국가보증하에서 안정적이고 공공성이 높은 공공임대주택 건설에 투자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 안철수, 제정임 엮음, 『안철수의 생각』(서울: 김영사, 2012), 106쪽. 강조는 인용자.

2012-07-18

2010.10.10 - 2012.07.18

2012년 7월 19일부로 저는 다시 민간인 신분이 되었습니다. 몇몇 분들의 기대 섞인 우려, 혹은 우려 섞인 기대와 달리, 단 하루의 추가 복무 없이 병장 만기 꽉 채우고 나왔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간략하게 몇 가지 항목만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군 복무 형태는 카투사, 근무지는 미 2사단 1여단 모 대대 모 중대, 병과는 통신병입니다. 몸 쓰는 일과 머리 쓰는 일을 골고루 다 하며 후회 없는 군생활을 하다가 나왔습니다.


2. IOTV 입고 뛰어다니고 통신망 설치하는 것 외에 다음과 같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2-1. 『마이크로스타일』 번역 및 출간.

2-2. 《프레시안북스》에 서평 기고.

2-3. DOMINO 동인 활동.


3. 이 블로그는 2011년 8월 17일 비공개로 전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날 제가 2사단 지역대에 소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군인의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위반했다며 '이우람'이라는 분이 국방부에 민원을 넣었습니다.

보 시면 아시다시피 저 글은 '정치의 이론적 해석'에 대한 글이지 '정치적 지지나 비난'을 담고 있지 않으므로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만, 최장집이나 손학규 같은 실존 인물이 거론되고 있으며, 어쨌건 민원이 들어왔으니 뭔가 조치가 취해지기는 해야 한다는 이유로 블로그 폐쇄를 지시받고 그 당일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4. 물론 군대는 군대니까 모든 게 다 쉽거나 재미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나이가 많은 채 군대를 간 덕에 논산훈련소와 KTA(KATUSA Training Academy)는 쉽게 넘겼지만, 자대에 가보니 얘기가 좀 달랐습니다.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한 불굴의 이성이 본인의 처지마저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개인적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당시 썼지만 공개하지 않은 다음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겠습니다.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2011년 1월 16일)


5. 하지만 그것도 이른바 '짬'을 좀 먹으니, 대략 일병 꺾이고 난 다음부터는 별 문제 없이 잘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01학번인데, 저보다 많게는 열 살 정도 어린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이른바 '이중의 시차'를 느꼈다고 해야 할까요. 어느 시점부터는 선임이건 후임이건 다 제 밑으로 동생들이 되고 말았지만, 저는 워낙 스스로에게 엄격한 탓에 특정 시점을 넘기까지는 함부로 말을 놓고 하대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군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6. 본연의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보면, '논객질'이라는 특정한 활동의 범주가 있습니다. 다들 군대 오면 비로소 '대중'의 존재를 느끼고 논객질의 한계를 고민한다던데, 저는 카투사라 그런지 학력은 높지만 지성은 미숙한 다수의 고학력자들이 새로운 차원의 '계몽'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지금 당장 뭘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아무튼 돌아왔습니다. 고전 명작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며 이 기쁨을 만끽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2012-02-11

이정렬 판사가 서기호 판사의 재임용에 대해 재판한다면

서기호 판사의 재임용 탈락에 대한 논의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사람은 진중권이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관련된 뉴스의 링크를 제공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나는 그의 전체적인 취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불만이 없다.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은 ‘가카’라는 외재적 거악이 아니라, 공적 기관이나 사기업 혹은 기타 생활세계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는 자기 구속과 억압이다. 다른 수많은 사례들에서처럼, 여기서도 ‘작은 두목’들이 휘두르는 조직 내의 정치가 문제인 것이다.

이옥형 서울지법 판사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은 바로 그 지점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길게 인용해보자.
이제 판사들은 법원장으로부터 근무평정을 좋게 받지 못하면 판사직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냉엄한 현실을 목격하였다. 꼭 사건처리와 일치하지도 않는다. 사건처리를 못하면 그것을 이유로, 사건처리를 잘해도 조직적응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간관계가 원만해도 판결에 나타난 국가관이 이상하여 균형감이 없다는 이유로, 무슨 이유로든지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로 좋지 않은 평정을 받을 수 있다.
서기호 판사의 글(링크)
이 항변의 내용은, 공교롭거나 공교롭지 않게도, 최근 큰 논란을 불러온 ‘석궁 테러’의 가해자인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그것과도 같다. 그 사건의 대략적인 맥락을 상기해보자.

세계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기재하는 실력자이지만, 입시 문제의 출제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재직중인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교수, 평소 다른 교수 및 재단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고 학생들에게도 막말을 했다는 그런 교수가,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당시 서울고등법원에 재직중이던 이정렬 판사는 본인이 주심을 맡은 이 사건에서 성균관대학교는 김명호 교수를 복직시킬 필요가 없다는 원심을 확정지었다.

이 판결의 결과에 불만을 품은 김명호 교수가 해당 재판의 재판장인 박홍우 부장판사의 집에 석궁을 들고 찾아갔고, 그는 이후 살인미수로 수사받고 상해죄로 기소되어 징역 4년형을 살고 현재 석방된 상태다. 이미 나는 그 형사사건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부러진 화살, 뭉툭한 이성). 이번에는 지난 글에서 다루지 않았던 민사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이정렬 판사는 ‘김 교수가 판결문을 읽어보았더라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그 판결문은, 이정렬 판사의 자부심 넘치는 발언처럼,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다. 학생들에게 욕을 얼마나 했느냐, 욕 먹은 학생들은 다들 앙심을 품어서 그런 것이냐, 따위의 자질구레한 ‘진실게임’은 다 접어두고 판결문의 기본적인 논리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구 교육법(김명호 교수가 재임용 심사를 받을 당시의 법률)에 따르면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具有)하게 하여 민주국가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념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2. 같은 법에 따르면, 대학은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의 심오한 이론과 그 광범하고 정치한 응용방법을 교수연구하며 지도적 인격을 도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3. 그러므로 성균관대학교가 교수의 임용과 관련하여 연구 실적과는 무관한 요소들, 가령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평가의 항목으로 삼는 것은 정당하다.

4. 그런데 김명호 교수는 바로 그 항목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고, 대학측이 제출한 자료를 통해 보건대 그 평가는 정당하다(또한 김명호 교수는 바로 그 부분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고 있지 않다).

5. 따라서 성균관대학교의 재임용 불가 처분은 정당하다.

이와 같이, 이정렬 판사는 철저하게 해당 사건과 관계되는 법률을 찾아내고, 그에 기반한 판결을 내린다. 그를 ‘우리편’으로 만들어준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과 ‘꼴통’으로 만들어준 억대 내기 골프 무죄 판결 모두를 관통하는 원칙이 바로 그것이다. 기존 판례나 ‘국민감정’보다 현행법으로부터 도출되는 법도그마틱을 우위에 두는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는 것이 그를 ‘튀는 판사’로 언론에 오르내리게 만든 원동력인 것이다(물론 ‘가카새끼 짬뽕’으로 인한 유명세는 별개로 쳐야 한다).

물론 그 원칙은 정당한, 혹은 우리 모두가 정당하다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판사가 법도그마틱이 아닌 다른 요소를 통해 판결을 내린다면 국민들은 안정적인 법 작용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법적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정렬 판사의 그 판결문을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해당 사건과 관련된 법을 통해 판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수의 임용에 교육자로서의 자질 같은 주관적 평가를 개입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항변은 판사가 아니라 입법부를 향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같은 논리가 서기호 판사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한 단계씩 그 논리를 따져보도록 하자.

1. 헌법 제101조 3항에 따라 법관의 자격은 법률로 정한다. 헌법 102조 3항에는 대법원과 각급법원의 조직은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 위 헌법 조항들은 법원조직법으로 구체화되고 있는데, 법관의 근무성적의 평가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44조의2 (근무성적의 평정) ①대법원장은 판사 및 예비판사에 대한 근무성적을 평정하여 그 결과를 인사관리에 반영시킬 수 있다. ②제1항의 동무성적평정에 관한 사항은 대법원규칙으로 정한다.

3. 그런데 대법원규칙(2012년 1월 1일 개정)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제6조(임용기준)

판사임용대상자에 대해서는 법률지식 및 법적 사고 능력, 공정성, 청렴성, 전문성, 의사소통능력, 품성, 적성, 공익성 등을 참작하여 법관 수급 사정에 따라 임용 여부를 결정한다.

4. 대법원규칙은 “법적 사고 능력”뿐 아니라 “공정성”과 “품성”을 임용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객관적인 지표로 측정될 수 없는 요소가 평가의 소재로 사용되는 것은 정당하다.

5. 그러므로 서기호 판사는 법원의 재임용 거부에 대해 항변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앞서 우리는 조직과 기관마다 속속들이 박혀있는 작은 두목들의 비위를 맞춰야만 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동일한 논리를 지니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단순히 분위기나 문화나 ‘빌어먹을 꼰대 새끼들’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엄격하게, 혹은 이정렬 판사의 방식대로 따져보면, 바른 말 하는 당신보다는 당신에게 ‘젊은 친구가 세상을 모르네’라고 말하는 ‘꼰대’가 법정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게 법에 써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이 개인에게 ‘인격’을 요구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 인격을 판단하는 주체는 적어도 당신보다는 더 힘이 있는 누군가일 것이다.

나에게는 김명호 교수의 재임용 탈락이 서기호 판사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국가의 법이 개인에게 특정한 ‘인격’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쟁점이라면, 두 사건은 상호 교환 가능하다.

허재현 한겨레 기자를 비난하기 위해, 김명호 교수를 ‘완전히 4차원’으로 몰아붙여간 진중권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몇몇 언론은 진중권이 김명호 교수를 닦달한 그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논조로 서기호 판사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려 든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잘릴 만하니까 잘렸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서 판사는 심사 하루 전인 6일 자신의 근무 평정을 판사 내부 통신망에 스스로 공개했”는데, “그는 초반 7년 동안 ‘상·중·하’에서 ‘하’를 5회, ‘중’을 2회 받 았고 ‘상’은 한번도 받지 못했”고, “이후 A~E 까지 5단계로 평가한 3년간은 C를 2회, B 를 1회 받았”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그 평가의 내용이 반드시 법관으로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한 내용이 아닐 수도 있고, 대법원규칙에 의해 규정된 바에 따른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김명호 교수의 사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송 따위로 인해 그 ‘인격적’, ‘품성적’ 내용이 공개되었느냐 그렇지 않으냐 뿐이다.

‘김명호는 4차원이지만 서기호는 천사표’라는 식의 저질스러운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분들을 위해 조선일보는 세심하게 팩트를 던진다. “그는 또 변호사가 재판부에 낸 준비서면을 그대로 오려 붙여 ‘72자(字) 짜리’ 무성의한 판결문을 썼다가 변협의 공개 항의를 받는 등 물의를 빚은 적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중권은 ‘요새는 판사도 Ctrl-c Ctrl-v 하느냐’는 식의 조롱 대신, 근무 평점이 중간인 사람이 어떻게 뒤에서 2등이 되는지 ‘논리적’으로 궁금하다며 너스레를 떨 뿐이다(이미 조선일보는 ‘그 둘 빼고 중하위권은 다 알아서 나갔다’고 설명하고 있다).

내가 계속 진중권을 걸고 넘어지는 이유는 논의의 이성적 수위를 공고하게 높이기 위해서이다. 누군가가 어떠한 인격과 품성과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고 법에 써놓고 강제하는 것이 가능한 나라, 100개의 조직마다 100명의 원님이 호령할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하는 나라에서, 바로 그 메커니즘에 의해 짓밟힌 누군가를 향해 ‘알고 보면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정말 실망했다. 이성과 상식을 부르짖지만 그 방법론은 과연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요컨대 지금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열정으로부터 그것의 토대가 되는 문화적 맥락을 분리하고, 그 문화적 기제의 바탕에 깔린 제도적 장치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깝깝한 이유는 늙었는데 죽지도 않는 노인부대가 정신줄 놓고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나 찍고 자빠져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 속의 인간을 분리하고, 사건 자체의 문화적 측면과 법적 측면을 별개의 것으로 고찰하는 사고의 구조가 확립되고 보편화되지 않는 한 현재의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연이어 불거진 두 개의 사건을 바라보는 한 총명한 논객의 발화를 검토해보고 있노라면, 밤은 깊고 갈 길은 멀 뿐이다.

진중권은 ‘김명호 민사사건 담당, 일명 튀는 판사로 유명한 이정렬 판사네요’라며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김명호 교수에 대한 판결이 옳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트위터에 흘린 바 있다. 바로 그 이정렬 판사와 같은 방식으로 서기호 판사의 경우를 바라보면, 그러나, 그 결론에 동의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면 뭘 어쩌자는 말인가?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현재 상황이 그 자체로 문제적이라는 위기 의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닳고 닳은 인용구로 긴 글을 끝내야겠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