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10

[북리뷰] 우리에게도 와 있는 그들, 난민

내 이름은 욤비
욤비 토나, 박진숙, 이후, 1만6500원.


욤비 토나. 1967년 콩고에서 태어나 현재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는 난민이다. 그의 안타까운 사연은 여러 차례 방송으로 소개되었고, 이 책 <내 이름은 욤비> 역시 널리 알려지고 읽힌 편에 속한다. 콩고에서 작은 부족의 왕손으로 태어난 저자는 제2차 콩고 내전과 관련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고, 2002년에 망명 신청서를 제출한 후 최종적으로는 법무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거쳐 2008년부터 난민 자격을 인정받은 상태다.

책에 따르면 "2012년 5월 말 기준으로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은 294명,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4515명"(333쪽)이다. 난민 인정률은 13퍼센트 가량으로, 전 세계 평균 난민 인정률이 약 30퍼센트인 것과 비교해볼 때 대단히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욤비 토나는 그 13퍼센트의 확률을 이겨내고, 약간 높이는 데 기여한,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러두기에 따르면 "이 책은 욤비 토나가 구술한 내용을 박진숙이 기록한 것이다." 책의 내용은 욤비 토나의 궤적을 순서대로 추적하고 있다. 그가 13세에 처음 기숙학교로 떠나던 순간부터, 어떻게 본인이 지망하지 않았던 경제학과에 진학하여 비밀정보국 요원이 되었는지, 왜 중국을 통해 한국에 도착한 난민이 되어야 했는지에 대해 충실한 설명을 제공한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부연 설명이 추가되어 있는데, 그 각각은 욤비 토나라는 한 사람의 삶으로부터 난민 문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준다. 가령 욤비 토나의 어린 시절이 담긴 1장의 끝에는 콩고민주공화국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 따라붙고, 그가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에 발을 내딛는 2장이 마무리되면서 32년간 장기집권한 독재자 모부투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식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주변 맥락을 파악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짜여진 책이다.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에 동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난민도 사람이며, 대한민국의 수많은 난민들은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어 살았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에서 정치적 난민으로 살았던 홍세화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우리가 욤비 토나에게 일말의 동정심과 인류애적 연대감을 가지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난민협약에서 정의하는 바,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의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이거나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위험 때문에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 또는 받을 것을 희망하지 않는 자로서 국적국 바깥에 있는 자"들을, 우리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한 가지 더 깊게 생각해볼만한 문제를 안겨준다. 욤비 토나의 자녀들은 대한민국에서 성장했고, 박지성을 '우리나라 축구선수'로 생각하며 유관순을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로 인지할만큼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있다. 콩고로 돌아가 콩고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어하는 저자와 달리, 자녀들은 하루가 다르게 콩고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상태다.

인류애적 당위와 공공선 차원에서 벗어나, 지금 토나 집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난민 1세대와 2세대의 문화적 갈등을 사회적으로 확장해보면, <내 이름은 욤비>가 놓치거나 간과하는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오직 아버지의 눈으로 한국 문화에 동화되어가는 자녀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뿐, 아들과 딸의 시각에서 망명자의 자녀로 살아가는 경험을 논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세대간의 갈등이야말로 이민 문제의 핵심임에도 말이다.

난민에 대한 논의를 동정심 너머로 끌어올리기 위해, 우리의 고민은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되어준다.


2015.09.22ㅣ주간경향 1144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9-06

[별별시선] '반미'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각주구검(刻舟求劒)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배를 타고 가다 물에 칼을 빠뜨린 사람이, 그 자리를 표시한답시고 뱃전에 칼집을 낸 데서 유래한 말이다. 배가 움직이는데 배에 표시를 해둔다 한들 물에 빠뜨린 칼을 찾을 수 있을 턱이 없다.

2015년 대한민국 진보 진영의 오늘을 묘사하면서 이 고사성어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무 잘 맞아떨어지기에 어쩔 수가 없다. 한국의 진보, 좀 더 넓게 잡아 범야권은, NL과 PD를 막론하고 넓은 의미에서 ‘반미주의’라는 큰 배에 탑승해 있다. 그들이 눈과 귀를 막고 상황을 업데이트하고 있지 않은 사이, 반미주의와 더불어 한국의 진보는 끝없이 표류하는 중이다.

굉장한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터넷과 TV를 통해 주요 외신을 검토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지난 3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는 상원의원 34명을 확보했다. 의회에서 절차를 밟아 지난 7월14일 최종 타결된 이란 핵 협상을 엎어버리려던 공화당의 의도는 실현 불가능하게 됐다.

미국의 중동정책이 큰 반환점을 돌고 있는 것이다. 단단하게 굳은 혈암(shale)에 갇힌 석유를 ‘프래킹’으로 뽑아낼 수 있게 되면서 미국은 1970년대 오일쇼크 이래 40년 만에 원유를 수출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 말은 세계 최대의 원유 수출국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밖에 중동 산유국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략적 가치가 급락한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칼럼이 지난 2일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유명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우리의 이슬람 극단주의자 절친,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수많은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이 이슬람국가 혹은 다양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에 참여하거나 기부를 해왔음에도 미국은 그 사실을 올바로 지적해오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석유에 중독돼 있었고 중독자들은 마약판매상에게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미주의자들이 미국을 비난하던 바로 그 논리다. 미국은 중동에서 나오는 석유 때문에, 인권과 평화를 위해 개입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순에 눈을 감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 중독을 끊을 수 있다. 미국에서 석유가 펑펑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제 미국이 중동에 개입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 많은 전쟁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 정치적 안정은 군사적 기반 없이 성립하기 어렵다. 결국 서구의, 특히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석유 중독에서 갓 벗어난 미국이 왜 중동의 문제에 끼어들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의 개입을, 마치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여겨왔다. 중동뿐 아니라 한반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주한미군이 발생시키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섬세한 맥락을 고려해 정책을 제시하고 레토릭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한미군 철수하라’고 외치면 주한미군과 한국 정부가 해답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상은 아직은 끝나지 않았지만, 저물어 가고 있다. 지난 3월 반미주의자 김기종은 한·미연합군사훈련인 키 리졸브를 반대한다며 마크 리퍼트 주한 미대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지금 공화당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대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는 주한미군 철수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를 진지한 후보로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그만큼 미국 국민들이 ‘세계의 경찰’ 노릇에 염증을 내고 있다는 방증인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미국도 바뀌고 있다. 그런데 진보진영의 반미주의만큼은 변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80년대에 하던 방식대로 미국에 손가락질을 하지만 이미 미국은 거기에 없다. 낡은 반미주의로는 오늘날의 세계가 설명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스스로 변해야 할 때다.


입력 : 2015.09.06 20:52:10 수정 : 2015.09.06 20:56:0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9062052105

2015-08-27

[북리뷰] 함성이 포성으로 바뀔 때

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먼, 평민사, 2만9천원.


긴 평화의 시기가 이어졌다. 물론 유럽 내에 국한된 평화였기는 하지만, 식민지의 고통에 힘입어 유럽은 1870년 보불전쟁 이후 50여년간의 '벨 에포크'를 맞이했다. "1914년 당시 변두리에서 벌어졌던 발칸전쟁을 제외하면 유럽대륙에서는 한 세대 이상 전쟁이 없었"(492쪽)다. 그런데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유럽에는 호전적 분위기가 넘실거렸다.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오늘날보다 훨씬 짧았음을 상기해보자. 1914년쯤 되면 보불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거의 다 죽었거나, 전쟁 당시 어린이였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자고 일어나면 정말이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물건, 가령 자동차라던가 비행기라던가 전화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유럽인들의 가슴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무엇이든' 속에는, 당연하게도 전쟁이 포함되어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촉발 원인은 이른바 '사라예보의 총성'이지만, 그 암살 사건은 쌓여있는 화약에 불꽃을 튀겼을 뿐이다. 프랑스는 1870년 발발했던 보불전쟁에서의 패배를 잊지 않고 있었다. 반면 "1870년부터 독일인들은 군대와 전쟁만이 독일의 위대함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원천이라는 사상에 세뇌되어 있었다."(79쪽) 유럽 각국은 평화와 안정을 위해 거미줄처럼 동맹을 맺었지만, 오히려 그 수많은 동맹 관계 때문에 전쟁은 점점 커져만 갔고, 사라예보의 총성은 유럽 뿐 아니라 세계사를 뒤흔든 '8월의 포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역사 저술가 바바라 터크먼은 1962년 <8>을 출간했다. 그는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얽매이지 않은 시각으로 역사적 사건들을 되짚고, 그 속의 등장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글쓰기를 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작가였지만 <8>은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그의 애독자 중에는 존 F. 케네디가 포함되어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영국의 맥밀란 수상에게 이 책을 증정하면서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1914년 8월과 같은 함정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6쪽)

그는 역사의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본인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탁월한 저자였다. 1차 세계대전 전체를 조망하는 대신, 개전 이후 30일까지의 상황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독일군은 이미 세상을 떠난 슐리펜 장군이 세워놓은 작전 계획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굳이 벨기에를 침공한 후 프랑스로 향했다. 프랑스의 자신감의 충만했지만 전쟁 대비는 형편없었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지만, 마른 전투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게 저지당하고, 1차 세계대전은 길고 지루한 참호전으로 고착되고 만다. "교전국들은 처음 30일 동안 전세를 결정짓는데 실패한 전투로부터 만들어진 덫, 그때도 또 그 이후로도 출구가 없는 그러한 덫에 걸려들었던 것이다."(680쪽)

전쟁 이후 세계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되던 사회주의자들의 형제애 그리고 재정, 상업, 그 이외의 다른 경제적인 요인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과 같은 전쟁 억지력은 막상 때가 되자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국가주의가 난폭한 돌풍처럼 일어나면서 그것들을 모두 날려버렸다."(491쪽) 막상 한 번 시작되자 전쟁은 뜻대로 쉽게 풀리지도 않았고, 마음대로 끝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 땅에서 울려퍼졌던 '8월의 포성'은 멈췄다. 그러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함성은 쉽게 잦아들고 있지 않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아직 <8>으로부터, 우리 스스로의 역사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2015.09.08ㅣ주간경향 1142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8-14

[북리뷰] 그들의 눈으로 침략을 되짚어본다

그들이 본 임진왜란
김시덕, 학고재, 1만5천원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대형 빌딩을 뒤덮은 거대한 태극기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그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는 나라다. 그리고 일본에 의한 한반도 침략의 근원적 경험은 결국 임진왜란으로 수렴한다.

임진왜란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좌우하는 가장 근본적인 서사 중 하나다. 춘원 이광수의 <이순신전>은 우리가 아는 '그 임진왜란' 이야기의 원형과도 같다. 최종 결정권자인 왕은 무능하고 의심만 많으며 자기 살 궁리나 한다. 역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신하들은 당파싸움에 정신이 팔려 일본이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예상하면서도 대비를 게을리했다. 그 와중에 고군분투하는 단 한 사람의 장군, 이순신은, 끝까지 이용당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내몰린다.

이러한 임진왜란 서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도 조선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임진년에 왜가 쳐들어와 난리가 났다는 그 명칭에서 이미 시각의 폭이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왜란'이었던 그 사건은, 일본인들의 눈으로 볼 때, 전국시대의 막바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의 몰락을 불러온 거대한 패착이었다. 명나라는 만력제가 조선에서의 전쟁에 뛰어드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조선과 명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만주에서는 누르하치 세력이 힘을 얻고 결국 청나라를 일으킨다. 임진왜란은 국제전이었고, 동아시아의 역사의 큰 결절점이었던 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교수인 김시덕은 <그들이 본 임진왜란>에서,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그 임진왜란'을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다. 본디 고문서학자인 그가 택한 방법은 일본에서 출간된 대중적 출판물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가 열리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했고, 수많은 대중 출판물이 범람하였는데, 그 중 임진왜란은 인기 있는 이야기거리였기 때문이다.

출판문화가 꽃을 피운 에도 시대에는 출판물이 당대인의 세계관·역사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에도 시대 일본인들의 정신에 자리한 임진왜란관 및 한국·중국관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고문서가 아니라 이들 대중적 문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에도 시대의 베스트셀러 출판물을 주목해 임진왜란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43쪽)

<그들이 본 임진왜란>은 단지 에도 시대 베스트셀러들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소개할 뿐 아니라, 임진왜란의 발발 및 전반적인 진행 과정을, 역시 외부인의 눈으로 조망하는 책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에도 시대의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의 관점이 어떤 경로로 형성되었는지, 명백한 문헌적 증거를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징비록>의 일본판인 <조선징비록>이 출간되면서 '그들이 본 임진왜란'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등의 자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자. 중요한 건, 그 무엇보다 먼저, 임진왜란이 '우리들만의 역사'가 아님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 전쟁을 겪었고 곱씹었다. 그것은 물론 침략자로서의 시각이긴 하지만, 침략자였던 그들이 임진왜란을 이해했던 방식을 조선인들은 훗날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현대 한국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임진왜란은 '해양 세력'인 일본이 '대륙 세력'인 중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그 첫 단계로 조선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을 그저 '무능한 왕 - 분열된 조정 - 고독한 장군'의 삼각 구도를 통해서만 이해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우리의 역사적 관점을 한 단계 업데이트해보자.


2015.08.25ㅣ주간경향 1140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8-12

'딱 중학생 수준에 맞춰서'라는 표현에 대하여

내가 저널리즘의 세계에 들어와 내딛은 첫걸음은 주간지 기자가 된 것이었다. 그때 선배기자로부터 엄하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문장의 구석구석까지, 과연 중졸짜리도 알 수 있을까 자문하면서 알기 쉬운 문장을 쓰라'는 것이었다. 같은 얘기를 지금의 신입기자들에게 했다면 오해를 초래할 것이다. 당시와 지금은 학력구성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 시점(1964년)에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해 취직한 사람만을 생각해도 중졸자가 틀림없이 30퍼센트 정도는 있었다. 이미 성인이 되어 사회인이 되어 있는 사람들 전체의 학력을 생각해보면 당시는 중졸자가 다수파였던 것이다. 지금은 고졸자가, 곧 대졸자가 사회의 다수파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평균적 고졸자가 가진 지식을 공유지식이라 전제하고 글을 쓰려 해도, 과학이나 기술이 관련되는 문제라면 어느 시대의 고졸자를 전제로 해야 하는지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다.(202쪽, 강조는 인용자)

다치바나 다카시, 박성관 옮김, 『지식의 단련법』(서울: 청어람미디어, 2009)

한국에서도, 특히 방송계에서 많이 쓰는 표현이다. '딱 중학생 수준에 맞춰서 컨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많은 업계에서 사용되는 은어, 작업 관행, 표준 등이 일본에서 왔음을 전제로 해보면, '중학생에게 눈높이를 맞춰라'라는 표현 역시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그 경우 현재 한국의 대중매체 종사자들이 아무 비판적 고찰 없이 저 표현을 되뇌이며 '중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글을 쓰고 방송을 만드는 것은, 대중의 지적 수준을 오히려 끌어내리는 역할을 한다는 비판이 가능해진다. 과거의 중학생 수준이라면, 지금은 대학교 신입생 정도에 비교할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대학 신입생 교양 교재로 쓸 수 있을만한 무언가를 만들라'고 해야 올바르지 않을까. 그렇게 눈높이를 설정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물론 시청률이나 구독률 등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