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3

[북리뷰]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남성 지배
피에르 부르디외, 동문선, 1만원.

1958년부터 1960년까지 피에르 부르디외는 알제리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그의 전공은 사회학이었지만, 알제리대학교에서는 알제리의 카빌 지역 내 전통 사회에 대한 민속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강의했던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한 책이 바로 <남성 지배>라고 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남성 지배'라는 현상에 대해 민속학적으로, 혹은 인류학적으로 탐구한 것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남성 지배',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와 지배를 당연시하는 그 현상은 이른바 "공론(公論)의 모순"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잘못된 일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그로 인한 억압이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남성 지배 속에서, 그리고 그것이 강요되고 강요받는 방법 속에서 그러한 모순된 순종의 예를 줄곧 보아 왔다."(7쪽)

우리는 이 책의 논의 대상인 알제리의 카빌 지방, 그곳에 살던 베르베르족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남성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강요하고 또 받아들이기 위해 동원했던 논리는,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카빌 사회에서처럼 성의 질서와 성의 차별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고 우주를 주관하는 대립의 총체 속에 잠겨 있는 세계에서, 속성들과 성행위들은 인류학적이고 우주론적인 결정들로 짓눌려 있다."(16쪽) 길고 현학적인 문장을 쉽게 옮겨보자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과 같은 비유로 꽉 차 있다는 뜻이다.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이의 대립에 따른 사물들과 행위들(성적이건 아니건간에)의 분리는 고립된 상태에서는 자의적이지만 높고 낮음, 위와 아래, 앞과 뒤, 오른편과 왼편, 곧음과 구부러짐(그리고 삐뚤어짐), 건조함과 축축함, 단단함과 물렁거림, 간간한 것과 무미건조함, 밝음과 어둠, 바깥(공적인 것)과 안(사적인 것) 등의 동질적 대립 체계 안에 끼워넣어짐으로써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필요성을 부여받는데, 그 중 몇몇 대립은 위와 아래, 올라감과 내려옴, 밖과 안, 나감과 들어옴이라는 신체의 움직임에 상응한다.(17쪽)

남자는 바깥이고 높음이며 밝음, 즉 양(陽)이다. 반대로 여자는 안쪽이며 낮음이고 어두움, 즉 음(陰)이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 남자는 명예로운 일, 여자는 그 남자를 수발하는 일. 이렇듯, 자연계의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그것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별에 대입함으로써 인간 사회에서의 남성 지배, 혹은 여성 착취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세상 어디에나 존재해왔던 것이다.

이 작지만 단단한 책에서 부르디외는 그러한 통찰 하에 남성 지배의 '인류학적' 특성을 조목조목 고찰한다. 전통사회의 문화와 철학 속에 베어들어 있는 온갖 이분법적 사고를 검토한 후, 그는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남성 지배의 변화 혹은 유지 과정을 대가의 솜씨로 개괄한다. 그 결과 도달하는 중간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보듯 남성성은 두드러지게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다른 남성들 앞에서, 다른 남성들을 위해서, 여성성에 대항하여 여성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구축된 개념이다."(78쪽)

이것은 결코 개별 문화권만의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인류 사회가 공유하고 있다. 남성 지배와 여성 억압은 그만큼 보편적인 전근대적 사고 체계에 기반한 현상이었던 셈이다. 1950년대의 젊은 부르디외와 마찬가지로, 2016년의 우리는, 그것의 극복을 사회적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16.09.13ㅣ주간경향 1193호

2016-08-30

[북리뷰] 미러링과 표현의 자유

진실유포죄
박경신, 다산초당, 1만5천원


오래 전에 구입해 책장에 꽂아만 두고 있었던 이 책을 꺼내든 것은 한 칼럼 때문이었다. <경향신문> 8월 2일자에 실린 "넥슨 여성운동 탄압사태, 눈치들 보지 마라"를 통해, <진실유포죄>의 저자 박경신은 메갈리아를 둘러싸고 벌어지던 논의의 방향을 바꿨던 것이다. 영어의 표현을 빌자면 "Game changer"였던 셈이다. 그 칼럼을 읽고, 내가 놓쳤던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이 책을 펼쳤다.

메갈리아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대체로 비슷하다. 일베가 여성혐오를 즐기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대신, 메갈리아 역시 일베를 '미러링'하는 과정에서 '남성혐오'를 조장하고 퍼뜨린다는 식으로 항변한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일베를 배척하듯 메갈리아 역시 배척해야 하며, 메갈리아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혐오 그 자체는 인간의 감정 중 일부일 뿐이다. 게다가 원론적으로 따져보자면 혐오를 드러낼 자유 역시 자유이기는 하다. 그 중에서도 굉장히 소중하고 민주주의의 유지를 위해 각별히 보호되어야 할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 따라서 논점은 언제 어떻게 '혐오 표현'을 통제해야 하느냐로 넘어간다. 그 질문에 대해 박경신은 이미 넥슨 여성운동 탄압사태 이전에 답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모욕적 표현들이 혐오죄에 해당할 것인가? 결국 그 기준은 "혐오표현이 혐오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 대한 물리적인 폭력과 실체적인 차별로 이어질 위험이 얼마나 명백하고 임박한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76쪽)

법학의 용어를 빌자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발생시킬 위험이 "명백하고 현존"해야 한다. 혐오 그 자체는 그저 감정일 뿐이다. 사회적 약자를 향하는 혐오가 폭력과 차별로 이어진다. 여성혐오로 인한 범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넘쳐나지만, '남혐범죄'는 실체가 없다. 우리 사회의 공권력이 통제해야 할 대상은 전자이지 후자가 아닌 것이다.

비록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나는 법학과를 졸업한 사람이다. 이와 같은 논리 전개가 전혀 낯설지 않다. 그러나 독자들은 법원의 판결에 분노할지언정 그 판결의 논리에 대해 따지는 글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분명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법치국가인데,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법치주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필자는 매우 드물다. 박경신의 <진실유포죄>는 바로 그 어두운 영역에서 빛나는 결과물이다.

이 책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그가 신문에 기고한 칼럼, 블로그에 쓴 게시물, 이후의 사태 진행에 대해 덧붙인 뒷이야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실유포죄>는 그러므로, 이명박 정권 시기와 고스란히 포개지는 책이다. 민주정권 10년을 거친 후 권력을 되찾은 보수는 법치주의를 내걸고 '검치주의'(檢治主義)의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한 무기는 바로 명예훼손과 모욕죄 등. 심지어 아직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따라서 거짓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사안에 대해서도, 검찰은 허위사실공표죄를 휘두르며 반대자들의 입을 다물게 한다. <진실유포죄>는 그 시기를 겪어낸 한 법학자의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개별적인 글 꼭지의 출처는 표시되어 있지만 정작 글이 다루는 판결의 사건번호가 빠져 있다. 적극적으로 이 책을 찾아볼 정도의 열의를 지닌 독자의 지적 수준을 과소평가한 것은 아닐까. 권력이 법을 무기삼아 휘두르는 '검치주의' 시대다. 우리는 더 공부해야 한다. <진실유포죄>는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2016.08.30ㅣ주간경향 1191호

2016-08-28

[별별시선] '몰카'의 윤리학

국가대표 수영 선수들이 여자 탈의실에 카메라를 설치해 알몸을 찍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대한민국은 큰 충격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남성 위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피해자인 여자 국가대표 수영 선수들이 누구일지 추측을 하며 시시덕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훨씬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대한민국은 '몰카'의 왕국이다.

이토록 '몰카 범죄'가 만연한 것은 기술적 이유 때문인가? 다시 말해, 스마트폰과 초소형 녹화 장비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진 탓에 벌어지고 있는 불가피한 현상인가? 자동차가 보급되면 교통사고가 늘어나듯,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CCTV부터 뿔테 안경까지 온갖 일상적 사물로 위장한 카메라를 구입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몰카'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가?

인터넷이라는 것이 이 땅에 도입된 후, 동의 없이 촬영하거나 유포한 성관계 영상은 언제나 어딘가의 하드디스크 속에 존재해왔다. 모 연예인의 성관계 장면이 담긴 'O양 비디오'부터, 중학생으로 추정되는 청소년들의 성행위가 찍힌 '빨간 마후라' 등, 한국의 네티즌남(男)들은 '몰카' 혹은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즐겨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적잖은 남자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을 것이다. 나와 내 친구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 카메라와 인터넷이 잘못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주요 국가들 가운데 스마트폰에 부착된 카메라로 촬영할 때 소리가 나도록 규제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뿐이다. 하지만 공공장소, 특히 대중교통에서 '몰카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나라 역시 한국과 일본이다. 이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특히 남자들의 문제다. '몰카를 찍는 것은 굉장히 비겁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그걸 본다면 그 죄에 동참하는 것과 같다'는 도덕적 기준이 작동하지 않는 일종의 아노미 현상인 것이다.

그 남자들은 타인의 알몸, 성기, 항문, 성행위 장면, 심지어 배설 장면 등을 몰래 찍고 돌려보면서도 자신의 존엄성이 깎여나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남의 치부를 훔쳐봄으로써 상대방을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쾌감을 느낀다. 성적 쾌감 이전에 모욕하는 쾌감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몰카 범죄'의 본질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몰카'를 문제로 인식하는지부터가 의심스럽다는 데 있다. 가령 <내부자들>은 결국 '몰카로 정의구현'하는 영화인데, 재개봉한 감독판을 포함할 때 대략 천만 명 가량의 관객이 그 작품을 보았지만, 문제의식은 커녕 대다수가 후련함과 통쾌함을 느꼈다고 한다. 최근 <뉴스타파>는 이건희 삼성그룹 명예회장의 성매매 현장이 담긴 '몰카'를 입수하여 공개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기업이 회삿돈을 '오너'의 성매매 비용으로 썼다면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몰카' 공개가 과연 독립언론의 품격에 어울리는 일인지, 그 영상을 편집해서 공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지, 그런 도덕적 차원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성판매자가 아니라 성구매자를 처벌해야 성매매의 해악을 근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강경한 수요억제론자다. 이건희도 예외일 수 없다. 그를 옹호하기 위해 이 칼럼을 쓰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 중 하나인 그가 피해자가 되었는데도 '몰카'에 대해 이토록 무덤덤하다는 사실이 소름끼칠 뿐이다. 이건희가 당해도 다들 시시덕거릴 뿐이라면, 그 많은 '몰카'와 '리벤지 포르노'의 피해자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단 말인가.

'몰카'는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잠재적 가해자인 남성들의 인간적 품위와 존엄의 문제이기도 하다. 엄정한 수사와 처벌이 요구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도덕적 기준이 삐뚤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적 당위를 추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몰카'에는 우리 사회의 곯아버린 내면이 찍혀 있는 것이다.


입력 : 2016.08.28 20:44:02 수정 : 2016.08.28 20:46:4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282044025&code=990100&s_code=ao122#csidxd58f4c73f0252b28b24c52e475ae150

구글 크롬에서 뉴욕타임즈 더블클릭, 텍스트 선택 안 되는 문제

사용중인 하드웨어가 터치스크린으로 인식될 경우, 파이어폭스와 달리 크롬은 뉴욕타임즈의 텍스트를 모바일용으로 인식하여 뿌리는 오류를 보여준다. 해결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주소창에 chrome://flags 입력 후 엔터.
  2. Enable Touch Events를 끈다.


말하자면 파이어폭스의 about:config 수정과 비슷한 것일텐데, 오늘 처음 알았음. 한편 이 버그는 꽤 유명한 것인데 왜 구글이나 NYT에서 수정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2를 시행하면 다른 웹사이트를 이용할 때에도 터치스크린을 쓸 수 없는 불편이 생기므로, 구글이나 NYT에서 버그를 잡는 편이 옳다.

2016-08-25

여성주의를 '가르쳐 달라'는 남자들

'가르쳐 달라는 남자들'이 보이던 태도는 기존의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버리고 여성 활동가들에게 발언권을 넘겨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여성 활동가들에게 넘어온 것은 발언의 권리가 아니라 발언의 의무였다. 이런 구도에서 끊임없이 "어떻게 해야 돼?"라고 묻는 것은 남성 활동가들의 정치적 수동성과 무지를 변명해주는 편리한 알리바이가 되었고, "20여 년 동안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으로 사회화되어 온 무지한 남성"에게 여성주의적 정답을 제시해야 하는 무거운 부담은 여성 활동가들이 져야 했다. '가르치려 들지 않는' 겸허함을 칭찬하고, '배우려고 질문하는 자세를' 기특해 하고, 노력을 가상히 여기고, 실수를 용서해 주고, 계속 여성주의에 관심을 갖도록 보살피는 것은 이 구도 속에 있던 여성 활동가들에게 부과된 새로운 버전의 노동이었다.

그러나 사실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과 '가르쳐 달라는 남자들'은 동일한 성별 구도의 양면이다.[각주] 이 '오빠'들은 둘 다, 여성주의를 통해 자기를 성찰하고 조직과 이념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여성 활동가가 여성 문제를 '담당'하고 '전문가'가 돼 '해결사' 구실을 해주기를 요구했다. 여성주의를 '인정'한다고 하면서 "구색 맞추기"로 동원하고, 끊임없이 여성주의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면서 정답을 요구하는 남성의 행태는 여성 활동가들을 소진시키고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각주] 질문하는 권력과 대답해야 하는 고통은 다양한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수없이 실천되는 권력관계의 한 양상이다. 내가 만난 여성 활동가들 중 특히 남성 중심적 조직 안에서 별다른 여성 연대나 지지 집단 없이 활동한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로 "찍히"거나 "커밍아웃"을 한 뒤 끝없는 질문에 끝없이 대답해야만 했던 고통을 토로했다. 여고은은 주변의 "맑스주의자들이 한 달에 한 번은 시비를 걸어" 왔다고 말하면서, "자기 생각은 절대 얘기 안 하"면서 "당신은 페미니즘 진영의 대표로서 대답을 해야 된다"고 말하는 맑스주의자들의 태도를 고발하기도 했다. 타자에게 끊임없이 대답을 요구하고, '내가 물으니 너는 당연히 설명해줘야 한다'는 식의 태도는 많은 여성 활동가들의 공분을 샀다.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서울: 이매진, 2008), 233쪽. 강조는 인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