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8

오드리 탕: 공무원의 역할

우선 공무원이 책임져야 할 것은 세 가지이다. 첫번째는 확실성이다. 상수도와 인터넷이 끊김없이 제공되도록 하는 것도 확실성이다. 두번째는 정의와 균등함이다. 모두는 균등한 기회를 가져야 하며 사회정의가 유지되도록 노력해야한다. 세번째는 민주주의 의지에 대한 반영이다.

공무원의 역할은 민주주의 의지의 변화에 따라 함께 바뀔 것이다. 10년 뒤에는 사람들이 누군가가 대신 해주길 바라는 대신 직접적으로 민주주의적인 행동을 할 것이며 더이상 디지털 장관 같은 역할이 필요없게 될 수도 있다.

또한 머신러닝과 자동화 등이 공무원들이 하는 업무 중 ‘확실성’과 관련된 업무들을 대체할 것이다. 따라서 10년 후 공무원의 역할은 공공의 가치를 찾아 사회정의가 유지되도록 하는데 집중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지위가 다르더라도 공유할 수 있는 공공의 가치를 구성원들이 찾아내고 관련 규범을 만드는 데는 인간의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역할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강현숙, 오주영, "[인터뷰] 대만 디지털 장관 오드리 탕 (3)", 2020년 4월 10일.

‘디지털 시대와 공무원의 역할’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지금까지 읽어온 수많은 텍스트 가운데, 가장 탁월한 축에 속한다. 공무원이란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하며 왜 해야 하는가? 기술 발전에 따라 그 일은 어떻게 달라질 것이며 어떤 식으로 존속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을 품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

2020-04-16

아직 개표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2004년 총선, 노회찬이 소수점 차이로 김종필을 꺾고 국회에 입성했던 그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 나는 민주노동당이 급성장하여, 마치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리버럴 파티를 압도하고 보수당과 양당 구도를 이루는 미래를 꿈꿨다.

어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당시 내가 아무리 원숙했다한들, 정의당이 된 민주노동당이 NL 주사파 주류가 떼어준다고 꼬여낸 비례 의석 몇 개에 눈이 팔려, 원칙이고 뭐고 다 갖다바치며 공수처같은 악법에 동의할줄은 몰랐을 것이다.

개표 결과가 최종적으로 어찌되건, 이미 내 피는 식었다. 내가 현실 정치에서 희망을 보던 나날은 여기서 마무리되는 듯하다.

2020-04-13

중국 자본주의와 코로나 19

2003년 사스도 그렇고 이번 바이러스 대란은 중국이 무책임한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개혁개방을 시작할 당시 이미 경제적 기반이 있는 부농들이 일반적인 농업을 선점하자 빈농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그 대책으로, 중국 공산당 정부는 아무 생각 없이, 현존하는 모든 동식물을 천연자원으로 간주하여 채집 수렵 매매를 원천적으로 허가합니다.

그래서 특히 내륙의 밀림과 맞닿은 우한시 등이 야생동물 밀렵(도 아니죠 사실) 거래의 천국이 되었고 야생동물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온 겁니다.

이건 제 뇌피셜이 아니라, 중국계 미국인 학자를 인터뷰한 미국 언론 Vox의 보도 내용입니다.

"How wildlife trade is linked to coronavirus", Vox, 2020년 3월 6일.

중국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처럼, 야생동물 밀렵을 금지하고 매매를 엄금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10여년 단위로 새 바이러스가 퍼지는 일은 없었겠지요. 공산주의를 빙자한 극단적 자본주의의 인류적 민폐라고 봅니다.

좋은 시장경제, 바람직한 시장경제라면 시장에서 매매해도 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후자는 엄격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자칭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는 양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자본주의도 아니고 그냥 돈이면 다 되는 아수라장인 셈.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 이런 위험을 안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쥐만 잘 잡으면 된다며 아무거나 영리활동의 대상으로 만들어주니, 온갖 야생동물을 잡아서 비위생적으로 유통하는 시장이 생겨버린 겁니다.

저는 이번 판데믹의 전개를 보며 '인간의 탐욕'과 '자연의 회복 능력'의 대립 구도를 상정하는 논의가 매우 불편합니다. 백신이 개발되지 않는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이건 2년 후면 인류 전체 인구의 60%가 감염되면서 끝납니다. 스페인 독감이 그렇게 끝났습니다. 이 경우도, 최악이라 해도, 그렇게 끝납니다.

인간은 여전히 자연을 지배할 것이고, 인류는 화석 연료를 활활 태울 것이며,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의 작동 원리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일부 한국인들은 '바이러스 앞에 죽어나가는 선진국 시민들'을 보면서 뒤틀린 만족감을 느끼는 듯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요?

정리해보겠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자연의 복수가 아닙니다. 통제되지 않은 중국식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비극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더 잘 제어되는 시장질서와 경제 윤리, 그리고 원시림과 야생동물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 하는 '서구적 자연 관리' 개념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2020-04-12

21대 총선 과정에서 확인된 몇 가지

  • ‘소수 정당을 우대하는 제도’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제도를 어떻게 만들어도 결국 정치 지형은 정치인과 유권자가 만든다.
  • 우리가 잊고 있던, 단순다수대표제에 기반을 둔 소선거구제의 장점.
    1. 선거에 참여하는 모든 유권자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2. 선거에 참여하는 모든 후보자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3. 유권자에게 ‘저 인간 떨어뜨리기’의 권리가 주어진다. 반면, 비례대표제의 경우, 유권자는 무슨 수를 써도 타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를 떨어뜨릴 수 없다.
  • 애초에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을 촉진하는 제도’가 왜 필요한지부터 물어봐야 할 시점이다. 그것이 왜 당위적 선으로 여겨지는가? 어차피 국회에 보내놓으면 거대 여당/야당 따까리 짓이나 하는데?
  • 소선거구제이며 비례대표 따위 없는 영국의 정치.
    • 한국보다 훨씬 역동적이다.
    • UKIP이나 스코틀랜드 국민당 같은 소수 정당이 출현하여, 대중을 설득하고, 민심을 움직여, 소선거구제를 뚫고 의석을 얻어낸다.
    • 그 역동적 과정 속에서 영국은 새로운 정치적 의제와 대립 구도를 얻었다(그 의제가 좋은 의제라는 뜻은 결코 아님).
  • 반면 한국은, 제도만 신나게 뜯어고쳤지, 5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대립 구도 속에서, 현재의 국면에 걸맞는 정치적 의제를 내놓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
  • 왜 한국의 정치인들은 ‘정치’를 하지 않는가? 왜 ‘제도’ 탓이나 하는가?
  • 이것은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생각하기로.

2020-04-06

2000년대 초, 인터넷과 페미니즘에 대한 단상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이유는 촬영자와 모델의 갑을 관계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전문가이든 아마추어 동호회원이든 ‘촬영을 거부한 모델’이라는 소문이 나면 사진 업계에 발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 관계를 악용해 모델을 성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비공개 촬영회가 2000년대 초반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게 곽씨의 증언이다.

허정헌, ‘모델이 신었던 스타킹 나눠 드려요’ 도 넘은 촬영회, 한국일보, 2018년 5월 21일. http://m.hankookilbo.com/News/Read/201805211066365076

2000년대 초반. 디씨 부흥기. 월드컵 하고 세상 다 ‘우리 거’라고 믿던 때. 페미니즘이 여성만이 아닌 ‘모두’의 것이던 시절.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부장관을 ‘흑미추녀’ 같은 식으로 조롱하는 영상을 만들고 유포해도 ‘진보적’으로 괜찮다고 여겨지던 시절. 여자니까 박근혜를 지지할 수도 있다던 최보은을 김규항이 두들겨 패놓은 탓에, ‘젖녀오크’ 같은 언어 성폭력에 감히 반발하지 못하던 시절. 다함께 여혐하던 시절.

발기탱천한 진보남들의 부랄발광에 여성들이 장단맞춰주고 남성적 언어의 외피를 둘러쓰고 같이 놀았던, 혹은 그러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 그게 존나 쿨한 줄 알았던 시절. ‘우리’가 이 시점에 ‘힘을 몰아주지’ 않으면 수꼴들이 부활한다는 협박이 날아오던, 그런 시절에 만들어진 여혐 템플릿들.

우파 남자들은 국가의 개입이 싫지만 남자의 성욕은 본능이라서, 좌파 남자들은 시장주의가 싫지만 가난한 여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라면서, 성매매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고 ‘이대 부르주아 꼴페미’를 욕하던 시절. 성매매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라고 ‘좌파 남자’들이 진보 사이트에서 히죽대던 시절.

* 일러두기: 표현이 다소 거칠지만 기록 및 공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예전에 썼던 트윗 타래를 블로그에 적어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