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소칼이 《지적 사기》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에 대해서도 적잖이 공감한다. 은유는 어디까지나 은유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논리를 따라가면서 전개되어야 한다. 또한 은유는 기본적으로 잘 아는 것을 통해 잘 모르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모르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더 모르는 대상을 끌어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소칼이 제기한 일부 경향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인문학이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는 아이추판다님의 발상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저의"라는 글에서 아이추판다님은 문제 의식을 혼동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이었다. 아마 그는 노예 소유주였을 것이다.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알렉산드로스는 재위 기간을 모두 전쟁과 정복으로 보냈다. 카이사르는 당대의 문장가요 교양인이었으나 갈리아에 대해서는 침략자였고 로마 공화정에 대해서는 독재자였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들 중 일부는 이단심문관이었으며 또한 마녀재판관이었다. 옥스포드와 캠브리지는 식민 통치를 위해 고전을 가르쳤다. 프랑스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하이데거는 나치였다.
이런데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을 보면 저의가 의심스러워진다.
"저의", Null Model, 2008년 11월 4일
'인신공격의 오류'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아이추판다님이 인문학의 역할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몇몇 '스승'들의 인격을 본받기 위해 하는 학문이 아니다. 개별적인 인문학 분야에는 나름의 연구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대한 연구와 연구자에 대한 인격적 판단은 별개로 취급되어야 한다. 특히 여기서 아이추판다님은 철학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나 또한 그 차원에서 대답해보겠다.
내가 겪어본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철학을 '잘 사는 법'에 대한 연구로만 간주하는 경향이 크다. 즉, 철학자라면 삶의 모든 분야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의 철학은 잘못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짧은 생각이다.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관통하는 주제를 세 가지의 질문으로 요약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 질문을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특히 근대 이후의 철학은 인간의 지식이 어떻게 성립하는지, 그리고 그 지식에 대한 확실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를 꾸준히 질문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코기토 명제도, 그 방법으로 발견된 '확실히 존재하는 나'로부터 세계에 대한 지식을 구성해 나가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 모든 지적 탐구의 역사는 '잘 사는 법'과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가령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사실로부터, 그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프랑스 철학자들을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것은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고, 그 중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문제의식. 철학적 텍스트에서 그동안 덜 중요하다고 여겨진 부분을 잡아내어 자신의 논지를 구성하는 해석 기법. 독일어와 그리스어의 어원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구성하는 방법론. 이것들은 하이데거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와는 무관하게, 철학의 역사에서 이루어낸 큰 성취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하이데거의 철학 그 자체로부터 나치즘과의 관련성을 캐내려는 시도가 꾸준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 자체가 철학적 논쟁인 것이지, "프랑스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하이데거는 나치였다. 이런데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을 보면 저의가 의심스러워진다."라고 제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20세기 중반부터 인간에 대한 자연 파괴를 통탄하고, 그것을 철학적으로 승화시켜낸 사람이라는 점을 지적해둔다.)
그렇다면 과연 인문학, 범위를 좁혀 철학이 '현대의 문제'에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을까? 나는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 "저의"에 다음과 같은 리플을 달았다.
'좋은 나라'란 무엇인가요? 이명박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와 아이추판다님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가 다를 것 같은데요. 이런 간단한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문학의 고전에서 다루어진 논제들을 다시 훑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창조과학같은 사이비 과학이 미국에서 판치는 이유는, 과학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부 복음주의 기독교단의 '열심'을 제어할만한 인문학적 소양이 그 사회에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창세기의 창조 설화가 '우화'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아우구스티누스 시대부터 상식이 되어있습니다만, 그게 진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면 '현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문학의 유물'로 취급되느냐는 다른 문제죠.
한국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노빠'들이 '상식'을 운운하며 날뛰지만, 대체 그 상식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다운 대답을 듣기란 어렵습니다. 물론 그에 대해서도 노예 소유주와 영국 부르주아들, 그 외 비도덕적인 사람들이 실컷 논의해놓은 바가 있는데, 그 모든 과거의 유산을 도외시하고 현재만을 사는 사람들은 설득되지 않는 무식한 자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지에 근거하여 사고하고 판단한다. 미국에서 판을 치고 있는 창조과학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지구가 7일만에 뚝딱 만들어지지 않은 것임을, 또한 생명체가 진화해왔음을 증명하는 '과학적 증거'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창조를 과학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이들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게 과연 '과학'의 부족 때문일까?
하지만 나의 문제제기를 아이추판다님은 영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인문학적 제어론"이라는 새 포스트를 올려, "이와 같이 인문학이 무엇을 제어해야 한다 또는 제어할 수 있다는 관점을 '인문학적 제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제어대상으로 손꼽히는 것이 아마 과학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밑에 ....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신 분이 잘 지적해 주셨다시피, 나는 인문학이 과학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없다. 나는 이미 칸트가 1700년대에 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칸트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대상, 가령 신, 자유 등과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우리의 이성이 범주를 적용하려 드는 것에서 오류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신은 자비로운가?', '인간은 기계론적으로 결정된 존재인가, 아니면 자유를 가진 존재인가?' 등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질문의 대상은 경험 가능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계속 이런 질문을 한다. 요컨대 사람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들을 그저 헛소리로 취급할 수만은 없다. '신은 자비로운가?'라는 질문에 대해 누군가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면, '신은 자비롭지 않다'는 상념에 사로잡혀 자신이 생각하는 그 신보다 더 잔인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등장하게 된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 또한 마찬가지다. 리처드 도킨스가 되도 않는 무신론을 주장하기 전에, 이미 칸트가 대답했다. 창조자로서의 신이 존재한다는 관념은 우리가 세계를 일관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경험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기술이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논할 수는 없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것은, 곧 과학적 지식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말과도 같다. 《프롤레고메나》에서 칸트는 '안전한 길에 접어든 학문'의 대표로 수학과 자연과학을 꼽는다. 수학은 경험적 대상을 갖지 않는 순수한 사유의 산물이기 때문에 형이상학과 같은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반면 자연과학은 경험적 대상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에 학문으로서 안전한 길에 접어들었다. '안전한 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방법론 자체에 대해 회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 또한 칸트의 자연과학에 대한 생각에 동의한다. 철학이 해야 할 일은 과학을 '제어'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지식이고 무엇이 지식이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함으로써, 사이비 지식과 사이비 과학이 사람들에게 어설픈 회의주의를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 중 하나이다. 이것은 나만 동의하는 발상이 아니다. 최근 과학철학에서 등장한 논의들은 말 그대로 '최근'의 것일 뿐 그것이 철학이나 인문학 전체를 대변하고 있지는 않다.
과학이 무색무취하지 않다는 비판, 과학은 중립적이지 않고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있다는 비판을 하는 인문학자들에 대해 나는 그러므로 따로 변호의 말을 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의 발상이야말로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일은 어디까지나 철학 혹은 인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프랑스 철학은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아야만 하므로 백인들의 전유물이다'와 같은 허술한 논변을 내세우는 과학도의 역할이 아니다.
"인문학적 제어론"이라는 포스트를 통해 아이추판다님은, 프랑스 철학의 '스타일'에 정치적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어의 섬세한 뉘앙스를 통해 전개되는 논의는 그만큼 프랑스어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을 소외시키고, 그 결과 "철학판이야말로 "서구-백인-남성-중산층"의 전유물로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 결론에는 귀를 기울일만한 지점이 있다. 철학은 대부분의 학문과 마찬가지로 "서구-백인-남성-중산층"의 전유물이다. 하지만 그것과 프랑스 철학의 수사학적 성향을 논하는 것은 별개다.
아이추판다님이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철학 텍스트는 충분히 번역 가능하고, 또 외국어를 통해서도 교육하거나 토론할 수 있다. 물론 특정 언어의 특성에 기대어 창조된 개념의 경우 전달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하이데거의 Dasein은 독일어의 Da와 Sein을 합성한 것으로, 독일어를 모른다면 즉각적으로 그 뜻을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단어를 한국어의 맥락에서 '현존재'라고 번역하고, '현존재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이다'라고 서술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서양 철학을 하는 것, 혹은 서유럽이나 미국에서 발간되는 주요 철학 저널에 자신의 논문을 등재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것은, 철학이 문화적 맥락 속에서 논의되는 학문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황인종이고 저들은 백인종이고 그래서가 아니다. 가령 분석철학의 경우 김재권 교수가, 정치철학의 경우 승계호 교수가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한국계 미국 철학자'이지 '한국 철학자'는 아닐 것이다. 아이추판다님이 논적으로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생각과는 달리, 과학은 상당히 문화 중립적이고 철학은 그렇지 않다. 중국인이 한국 사학계의 논문집에 자기 논문을 올리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우리가 프랑스 철학계의 일원이 되기 어려운 것을, 지나치게 해석하면 곤란할 듯 싶다.
하지만 아이추판다님은 자신이 아는 극히 몇 가지의 사례만을 놓고, 인문학에 대한 포괄적인 비하를 서슴치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문학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는 도리어 반지성주의의 토대가 될 뿐이며, 과학을 우롱하는 비과학적인 목소리에 대한 사회의 면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만을 낳는다. 한참 전에 언급한 창조과학의 사례로 돌아가보자.
창조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흔히 쓰는 논법은 이런 것이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을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100% 부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과학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100% 부정할 수야 없다. 하지만 수많은 증거들이...'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면 창조과학자는 '거봐라, 아무리 현대과학이 발전해도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라고 논리적 비약을 할 것인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선량한 과학자는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를 뜨거나 화를 내게 된다. 혹은 리처드 도킨스처럼 책을 쓰거나.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종류의 지적 회의주의에 대한 반박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의 몫이었고, 나는 그 사례를 칸트를 통해 제시한 바 있다. 오히려 그동안 진행되어온 철학적 논의에 무지한 상태로, 다만 잠시 기승을 부리고 있을 뿐인 주장들에 반박하기 시작하면, 담론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자신이 뭘 반박하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화부터 내다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줄창 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적 제어론"의 리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고래를 관찰하는 것과 별로 상관없어도 그의 정치철학하고는 심각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요?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한 폴리스가 아니었다면 과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설마 알렉산더 대왕이 아테네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를 교육한 것은 마케도니아가 제국으로 본격적인 발을 내딛기 전의 일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을 쓴 것은 그가 알렉산더의 교육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와 뤼케이온을 설립한 뒤 한참 후의 일이며,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에 입각한 도시국가를 논하고 있을 뿐 알렉산더가 만드는 제국의 논리를 찬양하고 있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알렉산더의 제국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에 본질적 연관이 있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입증할 수 있다면 그는 인문학계의 스타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추판다님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비판하다가 못된 것만 배웠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일단 써놓은 후 질문으로 바꿔서 그 입증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고 있다.
기초적인 오류는 계속 발견된다.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한 폴리스'였던' 것은 맞는데, 플라톤이 살던 시대는 이미 아테네가 한물 간 다음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로 넘어가면 거의 망해가고 있었다.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태어나, 페리클레스의 후계자 알키비아데스의 죽음을 목격했고,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권을 빼앗기고 위축되는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국가》에서 수호자 계급을 칭송하는 것은 스파르타에 대한 동경심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데에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한다. 물론 아테네 사람이니까 다른 도시국가에서 온 유학생을 가르치고, 시라쿠사로 망명해서 자신의 이상국가를 건설해보고자 시도했을 수 있었겠지만, 그게 플라톤 철학의 본질적 내용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가. 아이추판다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파피루스가 중세에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과정에 대해 뭔가 더 알고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대체 이런 의미 없는 소리를 뭐하러 하는 걸까?
홍준기를 포함한 일부 인문학자들이 과학적 지식에 무지하고, 과학에 대해 불필요한 '견제론' 따위를 들먹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는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적 상식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있는대로 다 드러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서평에서 테리 이글턴은, '영국의 새들'이라는 책 한 권 달랑 읽고 조류학에 대해 떠드는 녀석을 보는 기분이라고 실소를 터뜨렸다. 내 소감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과학을 '까고' 있지 않다. 다만 과학을 수호하기 위해, 얼척없이 철학을 '까는' 방향을 택한 이를 책망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식으로 과학과 철학을 대립하는 것으로 놓는 것은, 결국 반지성주의와 지적 회의주의의 득세만을 더욱 가속화시킬 뿐이다. 아이추판다님이 좀 더 신중하게, 과학도로서 인문학에 대한 비판을 수행해주었으면 한다.
덕분에 좋은 구경했네요. 그런데 저분이 올린 글은 참으로 어이가 없네요. 코끼리 다리 만진 개미가 엉뚱한 소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줄줄이 달린 댓글 읽으면서는 별 소용없는 지적 놀음이라고 밖에 뭐하나 실재적인 연관없이.. 저러고 놀면 머리만 아플거인데.. 허긴 지적 허영이겠지요. 지긋지긋한 허영..
답글삭제지도교수님이 학부생들에게 플라톤의 사상에 대해 토론할때 그가 반민주주의자라고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수준의 토론만은 제발 하지 말라고 당부했었는데 왠지 그때 교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저 분의 주장대로라면 만년에 '바이블 코드' 의 해석에 매달린 뉴턴의 역학은 세계의 법칙을 전혀 드러내 줄 수 없게 되는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겠죠.
답글삭제익명/ 지적 허영 그 자체는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잘 아는 것에 대해,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블로깅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읽고 뭔가 배우게 되니까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도 있는 거고요. 문제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논의에 무리하게 끼어들었다는 거죠. 저는 아이추판다님이 과학도의 입장에서 정신분석과 심리학을 구분하는 글을 재미있게 읽어왔던 사람으로서, 지금의 문제 제기를 대단히 아쉽게 생각합니다.
답글삭제익명/ 플라톤이 살았던 당시의 '민주주의'와 지금의 민주주의가 같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실제 토론을 해보면 그렇게 되지가 않죠. 뉴턴은 말년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서 연금술을 연구한, 최후의 연금술사같은 인물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근거로 그의 지적 결과물을 논하는 것은 더더욱 피장파장이 되어버리죠.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의 생산물은 자연과학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강변하실 가능성이 높은데, 물론 정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는 게 제 논지입니다.
ㅎㅎ 덕분에 또 좋은 거 하나 배워서 갑니다. ^^
답글삭제주인장님의 다른 논지(아이추판다님의 인문학에 대한 무지)에는 동의하지만, 테리 이글턴의 만들어진 신 서평에 대한 소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답글삭제인간은 시간과 정력의 한계 상 비판 대상에 대해 모든 것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점성술에 대해 비판하기 위해 점성술에 대해 이제껏 나온 모든 책을 독파하거나 점성술학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할만큼 공부를 많이 할 것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는 점성술의 핵심 요지, 즉 인과관계에 대한 진술, 예측에 대한 진술을 정확하게 일별한 뒤에, 그것이 이미 확고히 입증된 천문학적 사실과 어긋나며 또한 예측은 이중맹검법을 통해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점성술가는 과학자에 대해서 '좆도 모르는 놈이'라며 실소를 터뜨릴 수 없습니다.
즉, 비판에 있어 중요한 것은 '비판 타겟팅의 정확성', 그리고 '비판의 방법론'인 것이지, 비판 대상에 대해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임금님이 걸치고 있는 옷의 옷감, 생산지, 장인기술, 패션과 그 유래에 대한 수많은 문헌을 읽어야 한다는 결론이 될테니까 말입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의 타겟팅은 분명합니다. "초자연적인 인격적 존재가 있어 우리의 삶을 감시하고 과학법칙을 때때로 어기며 기적을 행한다" 라는 진술의 건전성을 '과학적 방법론'에 비추어 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킨스는 논리적으로 건전한 논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도킨스는 파인만과 달리 철학의 기능에 대해 무지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또한 미리 앞서 단언하지도 않습니다.
주인장님 말고도 저는, '종교 내부에서 가해지는 종교 비판'이나 굴드식의 NOMA 가 더 우월한 비판이라고 보는 견해를 지닌 여러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Straigtforward 한 targeting 과 비판을 일부러 회피하는 것이 왜 더 우월한 비판적 자세인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혹시 제가 놓치고 있는 지점도 있을 수 있겠지요. '임금님의 옷감에 대해서 좆도 모르면서'와 같은 이유를 제외한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1) targeting 이 부정확하다. (예를 들어 실제로 기독교, 이슬람교, 유태교의 신은 인격적이지 않거나, 동정녀나 죽은 자의 부활은 그 종교의 내용에 들어가지 않으며, 현대에서는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거나 사후의 삶은 없는데도 도킨스가 있는 것처럼 잘못 진술했다)
2) target이 된 대상을 논박하는 방법의 유효성을 오염시키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통계적 오류, 논리적 오류, 이미 오류로 판명 난 메타 학문에 기대기 등등)
위 두가지에 주로 관련된 것이었으면 합니다.
과학의 경계를 철학이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제어론'입니다. 칸트는 "프롤레고메나"에서 심리학은 과학이 될 수 없다고 '논증'합니다.
답글삭제그러나 어떤 것이 과학인지 아닌지는 과학자들의 집단적 의사결정에 달린 것인지 철학자들이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닙니다.
MIT는 심리학과를 사회과학대학에서 자연과학대학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MIT 교수들이 칸트보다 과학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랬을까요?
과학의 경계를 결정한 권한을 칸트에게 부여한다면 라캉에게 주지 못할 이유가 없고 홍준기라고 요구하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노정태님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라캉이나 홍준기도 철학의 일부고 그런 이상 원칙적으로 이들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erte/ 제 글에서 뭔가를 배우셨다니, 흡족하군요.
답글삭제익명/ 이글턴이 주장하는 바 또한, 도킨스가 비판하는 대상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가령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도킨스가 '과학적 검증이 불가능하다'라고 할 때, 그것은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마나한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세계 안에도 세계 밖에도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 '초월적'이라는 게 대체 뭐냐는 질문에 제가 답을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기독교의 2000년 역사에서 도킨스같은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고, 현재의 신학은 그런 이들에 대한 답변을 통해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니 '임금님의 옷'을 다 알아야만 그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비판할 수 있다는 비유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은 인격적이지 않다는 말에도, 그 '인격적'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과 같은 인격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라면, 동의할 수 있죠. 그건 당연한 겁니다. 신학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검토해보지 않은 사람만이, 벼락을 던지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털보 할아버지를 '신'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도킨스의 비판은 주로 이런 통속적인 신관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또 '통속적인 신'에 대해 비판할 요량이었거든, 그에 대해 저널리스트적인 집착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야 했을 겁니다. 그런 비판은 기독교 교단 중 일부의 무지와 일탈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죠. 하지만 현재까지 성립하고 있는 신에 대한 이성적 인식, 즉 신학에 대한 비판으로 성립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리플에서 도킨스에 대한 이글턴의 논박을 지지한다면, 그 이유는 방문자께서 1)이라고 지칭하신 바로 그게 될 겁니다.
덕분에 이글턴의 서평도 다시 한 번 훑어볼 수 있었군요.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아이추판다/ 과학의 경계를 철학이 '결정'하는 게 아니죠. 18세기 사람 칸트가 보기에는 그랬다는 겁니다. 지금은 또 지금 나름대로 판단 기준이 있을텐데, 그건 제가 현대 과학철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18세기나 21세기나, 과학자들은 경험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과학'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지 않나요? 칸트가 말한 건 그런 건데요. 심리학에 대한 평가절하는 역사적 차원에서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오직 경험 가능한 대상에 대해서만 성립하는 지적 활동이라는 인식 자체는 지금도 옳습니다. 그러니 어떤 분과 학문이 과학인지 아닌지는 과학자들의 집단적 의사결정에 의해 판가름되지만, 그 판가름하는 과정의 전제에는 이미 칸트가 파악해낸 구도가 깔려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겠죠.
개별적인 분과 학문이 과학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은 철학의 임무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판단이 이성적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은 철학의 임무가 맞습니다. 그리고 과학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의 부분집합일 뿐 두 가지가 서로 등가적인 것은 아니죠. 그런데 저는 정신분석의 논리가 이성적일 수는 있어도 과학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라캉주의에 대한 아이추판다님의 (심리학도로서의) 비판에 동의한 거고요. 하지만 인문학과 그 일부인 철학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저는 철학이 개별적인 분과 과학의 범주를 결정하거나 그것이 '엄밀한 과학'인지 아니면 '아직 덜 성숙한 과학'인지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아이추판다님이 최근에 제기한 문제와도 부합하지 않죠. 지금 아이추판다님은 너무 많은 질문을 한꺼번에 던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추판다/ 철학이라는 분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과학의 경계를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며, 현실적으로 그러한 제어는 성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자 집단 내부의 '의사결정'이라는 것도 결국 '과학' 그 자체가 아닌 메타학문적 논의에 기반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은 보다 적절한 과학철학적 논의일 수 밖에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답글삭제노정태/
1) 도킨스가 지적한 것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신학자들의 정의가 비판을 피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을 뿐, 철학적으로 건전한 언어의 사용이나 분류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이 이 세계 내부에 인간의 감각이나 탐구로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술을 살펴봅시다. 그러나 적어도 '신'은 인간의 감각이나 탐구로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기적'을 행하였고,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기적이라는 신의 운동은 '세계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은 검증의 대상이 됩니다.
2) 도킨스가 천착하고 있는 부분은 보통 과학의 방법론인 '반증가능성'에 의해서는 배척할 수 없는 진술인 '보이지 않고 파악할 수 없는 00가 있다'라는 진술 역시 과학적 지식과 유의미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개연성'을 따지는 합리적 방법론에 의해서 진술의 참 거짓 여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와 태양 사이를 돌고 있는 조그만 찻잔이라든지, 안드로메다 성운에 사는 스파게티 괴물이라든지, 번개를 내리는 제우스라든지, 유니콘, 산타클로스, 요정 등등은 모두 나름의 '신학적 변명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인류역사가 다하는 날 까지 사람들이 유니콘의 존재는 개연성이 없으며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그것을 믿지 않는 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다며 '수도 없이 문제제기를 해도', '하나마나한 소리'로 만들어버릴 수 있겠지요. 예를 들면 요정은 그 정의 자체로 '이 세계 내부에도 외부에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다'라는 어떤 definition 상의 진술을 통해서 말입니다.
신앙 내부에서는 신앙을 정당화하는 정합적인 진술의 순환적 고리들이 많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을 도킨스가 아예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킨스는 복음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영국 성공회 주교와 같은 지성적인 기독교인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을 것이고 그와 유사한 진술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술들이 아무리 정합적이라하더라도 '합리적'인 방법론이 제기하는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는 듯이 보입니다. 다음 진술 중 어느 것이 참이라고 봅니까?
A. '신앙은 비신앙에 비추어 더욱 합리적인 선택이다'
B. 'K(기독교)라는 신앙은 L(사이언톨로지, 몰몬교)라는 신앙에 비추어 더욱 합리적인 선택이다'
C. 'K, L, M 등 신앙 자체의 보유는 비신앙에 비추어는 더욱 합리적인 선택이다'
D. 'K라는 신에 대한 신앙은 유니콘에 대한 믿음보다 더 합리적인 선택이다.
E. 신앙과 비신앙은 합리성의 차원에서 검증할 수 없는 것이며, 신앙 내부에 정합적인 순환 논리가 구비가 되어 있다면 사이언톨로지, 기독교, 몰몬교, 옴진리교 등등을 믿든지 말든지 무차별하다.
저는 도킨스가 적어도 E는 적절한 대답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고 봅니다.
저 또한 신앙이 비합리적인 사고 체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명제 A, 즉 신앙이 비신앙에 비해 더욱 합리적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지요. 우리가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지적 탐구를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본다면 제 입장에 동의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이글턴이 정통신학의 논리 하에서 도킨스를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된 일이고요. 지금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군요. 감사합니다.
답글삭제노정태/ 주인장님이 바쁘셔서 의견 교환을 여기서 마칠 수 밖에 없다니 안타깝습니다. 저는 감각과 무관한 학문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윤리학, 과학철학, 논리학, 수학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건전한 논리와 언어사용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답글삭제그러나 (1) 기적과 기도에 대한 응답, 육체에 깃든 영혼을 이야기하는 신앙이 감각과 무관하다는 점은 진지하게 논증된 바 없습니다.
(2) 이성적인 탐구에 의해 살펴본 결과, 신앙이 비신앙에 비해 더욱 합리적이라는 결론도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인정한다고 쳐도 A신앙이 B신앙에 비해 더욱 합리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이나 바알 신이나, 알라보다는 야훼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산타클로스에 대한 비신앙은 산타클로스에 대한 신앙보다 비합리적인 것일까요. 저는 이 점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는 '정통신학' 문헌을 알지 못합니다.
이를 테면 "기독교의 신> 알라> 바알> 산타클로스> 비신앙" 정도일텐데, 이 부등호에 대한 증명이 아쉽습니다.
저는 맥그라스의 도킨스의 망상 등을 비롯한 도킨스 비판자들의 논리를 읽어보았으나 모두 정의상의 의미조작, 순환논리, 적반하장식 논리 오류만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주인장님은 대단히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이지만 '신앙'과 관련된 논리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는 그 합리성이 중지되는 많은 분들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주인장님은 제가 알고 있는 지성적인 사람이면서도 제가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마음이 상하지 않으면서도 의견교환을 하면서 혹시 제가 놓치고 있는 논리를 들을 수 있을까 했으나 바쁘시다니 저도 주인장님의 시간을 뺐지 않겠습니다.
시간이 나더라도 제가 방문자께서 제기하신 질문에 대해 만족할만한 답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 또한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 다른 분께 설명을 해드릴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기독교의 신> 알라> 바알> 산타클로스> 비신앙" 정도일텐데, 이 부등호에 대한 증명이 아쉽"다는 질문에 대해, 저는 직관적으로 현대의 신학에서 저 부등호를 받아들일 턱이 없다고 짐작하지만, 그에 대해 적절한 근거를 찾아드릴 수는 없으니 대답을 드릴 수가 없는 거지요. 하지만 신앙이 비신앙보다 합리적이라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제가 더 공부를 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리플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삭제안녕하세요 노정태 님.
답글삭제다른 게 아니라, 나중에 기회가 되면 연결 포스트랑 덧글들까지 찬찬히 읽어보려고 제 블로그에 이 포스트 주소를 링크시켜놨었습니다. 이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잡담을 덧붙여서 써놨구요. ;; 저는 그게 트랙백처럼 원문에 걸리는 건지 몰랐거든요. 유입경로에 노정태님 블로그가 떠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
아무래도 노정태 님이나 노정태 님의 블로그를 찾으시는 분들이나 또 저를 위해서도 링크를 지우는 게 나을 듯 해서 글을 남깁니다. ^_^;;
링크주소를 담은 포스트는 따로 비공개로 저장했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이 포스트에 걸린 링크를 지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쁘실텐데 괜한 일로 신경쓰게 해드린 것 같아 죄송하네요. 그럼. (__)
원하지 않는 유입자가 생기면 놀라는 게 당연하죠. 부탁하신대로 처리해 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지나가다가.. 책한권 추천드려요.
답글삭제ZEN AND THE ART OF MOTOCYCLE MAINTENANCE. 이 포스트에 주제를 평생 연구한 정말 탁월한 책입니다.
아마존에서 검색해보니 일종의 철학 개론 대중서인 것 같더군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여가 삼아 읽어볼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선을 찾는 늑대"라는 이름으로 번역본이 나와 있네요. 지나가다 괜히 참견^^;;
답글삭제고려원에서 나왔군요. 당연히 절판일테고 구하기도 쉽지 않겠죠. 아무튼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답글삭제과학과 철학은 예전의 저의 유치한 생각으로는 반대될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아니네요
답글삭제그 둘은 엄청난 상호관계에 있다는 것이 인상을 주었습니다.과학을 저도 좋아하는데요,철학은 보지도 않는것이 후회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