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4-08

고전 문학의 현재성

한 문학 작품이 가리키고 있는 바가 인간의 보편적인 무언가에 맞닿아있으며, 그리하여 그 주제 의식이 현재성을 갖는다는 것과, 그냥 그 작품 자체가 보편적이며 따라서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자는 옳지만 후자는 타당하지 않다. 우리가 흔히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작가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환경을 철저하게 관찰하고 연구하여 품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작품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것은 그 당시의 모습을, 어떤 방향에서 어떻게를 불문하고, 파악하기 위한 훌륭한 참고 문헌이 된다.

가령 오만과 편견을 살펴보자. 거기서 사용되는 영어의 용법은 현재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civil, manner, agreeable 따위 단어의 용례는 진정 너무 달라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후 맥락을 꼼꼼히 되짚어보는 일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 경우, 제인 오스틴이 꿰뚫어본 인간의 본질이라던가, 그가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는 여성들의 심리 변화 등이 보편적이며 따라서 현재성을 지닌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지만, '오만과 편견'이라는 작품 자체가 현대 영어로 작성되고 있는 소설들과 완전히 동등한 입장에서 읽혀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까지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타당성 없는 말이 된다. 아무리 지금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던 독자들과 동등한 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그 시대를 정확하게 포착하기 위해 노력한 작가의 노고를 폄하하는 것일 수도 있다. 불멸의 걸작들이 대부분 그렇다. 훌륭한 작품이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남지만, 똑같은 이유에서 그것은 철저히 그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고전을 직접 읽는다는 것은 많은 한국어 화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피곤한 일이다. 원서를 직접 접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대개 그 언어로부터 현대 한국어로 옮겨진 형태로 문학의 고전들을 접하게 되는데, 그렇기에 고전이 갖는 자기 시대에 대한 천착을 체감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어 화자가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는다고 해보자. 제아무리 언어 감각이 탁월하고 꾸준히 독서를 해 온 사람이라고 해도, 그 작품이 쓰여지던 당시의 생생한 언어의 맥락에 빠져들어 그 맛을 음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주제를 완벽하게 관통하며 그 과정에서 무지막지한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 하나가 이후의 모든 창작을 가로막는다면, 한국의 역사소설은 임꺽정 이후 아예 맥이 끊겨야 정상일 터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고전을 직접 읽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 있는데 내가 뭐하러 인간의 영적 타락과 고뇌에 대한 작품을 써?'라던가, '밀고 당기는 연애물을 대체 왜 쓰는지 모르겠네, 그냥 제인 오스틴을 읽으면 되는 거 아냐?'라는 식의 발상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완벽하게 같은 주제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거의 비슷한 인물 구도를 깔아놓고, 심지어는 몇몇 문장을 고스란히 베껴쓴다 해도 문학 작품은, 그것이 탁월하게 작성된 것인 한 언제나 서로 다르다. 또한 작가들은 창작 과정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언어의 풍경을 정제된 형태로 기록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고전 문학에 대한 존중을 넘어, 그 위상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창작자나 자신의 노력을 폄하하고 의지를 깎아내리는 것은, 도덕적으로 그다지 올바르지 않으며 지적으로도 탁월하다고 볼 수 없는 견해이다. 진정 위대한 작가들은 그런 '슬픔의 해석학'에 빠져들지 않고, 그냥 자기 언어로 글을 썼다. 고전은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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