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4-14

인용: 테리 이글턴

동정이 홉스, 흄, 루소의 경우에서처럼 자아의 상상적 영역에 머물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덜 개인적이고 더 익명적인 '비인간'(non-human)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포'는 바로 이 '비인간'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자아의 폐쇄회로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혹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폐쇄적 관계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타자를 그(녀)가 흉물스럽다는 바로 그 이유로 동정할 수 있어야 하고, 눈먼 오이디푸스나 미친 리어를 바로 그 정나미 떨어지는 비인간적 모습 그대로 동정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단히 '비인간적인' 동정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유태-기독교 전통은 이 비인간적인 동정을 사랑의 율법이라 부른다. 구약 성서를 의식(儀式)을 고집하는 것으로 보고 신약성서를 사랑과 내면성의 힘으로 구약성서의 율법지상주의를 물리친 것으로 보는 것은, 세련된 형태의 기독교적 반유태주의다. 사실은 구약 성서의 유태인들도 사랑의 율법을 지지한다. 예수는 독실한 유태인으로서 자신이 사랑의 율법을 깨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천하기 위해서 왔다고 선언한다. 예수는 의무 대신 감정을 주장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런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히지는 않았다.

미성숙한 아이들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 바울은 이런 이유에서 법을 대부분 아이들과 관련된 문제로 보았다. 따라서 윤리가 인간을 꾸짖고 칭찬하는 권위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인간은 아이들은 고사하고 개보다도 그리 많이 발전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대로 우리는 율법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래야 그 치명적인 법의 무게에 눌려 '죽게 되어' 결국 그 법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예술의 규칙처럼 법은 우리가 그것 없이도 자발적으로 덕을 실천하는 습관을 가질 정도가 될 때 완성된다. 역시 예술의 규칙과 마찬가지로 법은 우리가 언제 법을 버릴 것인지를 알려 준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에게 사전이 필요 없듯이, 우리가 일단 덕을 지닌 존재로 성장하면 율법 책을 줄곧 펴 놓지 않아도 된다. 신약은 또한 우리에게 구원이 예배가 아니라 윤리(굶는 자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병자나 죄수를 방문하는 따위)와 관련된 문제라는 인식을 주는데, 이에 따라 의식(儀式)의 중요성은 줄어든다. 그러나 법의 논리적 완성은 죽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을 죽여 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 어떻게 법의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하라고 명령할 수 있을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이 농담을 재미있어 해!"라거나 "4초 안에 질투심을 느껴!"라는 말처럼 터무니없이 않은가? 낭만주의자들이 오해했듯이 동정이 주로 감정의 문제라면 확실히 그럴 것이다. 일부 윤리학자는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라 본다. 상상력이라는 모방 능력에 의해서만 타인의 느낌을 알 수 있고, 그래서 그들을 자신처럼 대접할 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겠지만 여기서 윤리학과 미학의 경계는 흐려지고 양자는 서로 만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아보았듯이 동정은 감정이입의 문제가 아니다. 동정이 감정이입이라면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상상계의 옹호자들은 실재계의 투사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누구도 내 애완동물의 배를 갈라 죽인 자에게 내가 따뜻한 감정을 품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그를 정당하고 인간적으로, 즉 그가 애완동물에 했던 식과는 다르게 대할 것을 기대할 뿐이다. 그런데 누구라도 내 애완동물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은 무의식적 욕망처럼 대상의 신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의미에서 법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사랑은 포스트모던식으로 서로의 문화적 종족적 특수성을 존중하며 민감하게 조율하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문화 따위는 무관하게 나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정은 무정할 정도로 비인격적이다. 동정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은 개인을 존중하지 않으며 가족도 존중하지 않는다. 사랑에는 사랑스러운 것이 전혀 없다. 신약 성서는 기독교 보수주의자들과 급진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그처럼 숭배하는 가족과 성(性)에 대해 별로 말을 하지 않는다. 딱히 해야 한다면 신약은 분명 가족에 대해 적대적인 말을 할 것이다. 신약은 우리가 가장 가깝고 가장 아끼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사랑하거나 동정하라고 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건 가족 간의 사랑은 가족 바깥에서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의무일 뿐이다. 데이비드 흄은 우리의 애정은 자연스러워야 하지만 그렇다 해서 제 자식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물론 모든 이에게 자연스런 애정을 갖게 되면 자식 사랑에 도움이 되겠지만, 자식 사랑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엔드게임]]에서 햄이 자기를 왜 낳았냐고 힐난하듯 묻자, 내그가 너같은 애가 나올 줄은 몰랐다고 대답하듯이 말이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므로 전형적인 사랑은 친구가 아니라 이방인이나 적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가 타인을 상처투성이의 역겨운 모습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그를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적으로 만나는 셈이다. 어쨌거나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것은 섹스나 초콜릿을 즐길 줄 안다고 자격증을 받는 것과 같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또 하나의 나를 사랑하라는 의미라면, 그것은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쉬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이처럼 상상계적인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이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음식물로 자기 배를 채우거나, 자신을 스스로 높게 평가하거나, 심할 정도로 이기적이 되는 것에 비하면, 자신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게 그가 자신을 대접하듯 나를 대접하겠다고 말한다면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블래즈 파스칼에 의하면 인간은 (타인에 대한--역자) 강한 욕망을 지니고 있으므로 자신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속에 있으되 우리 자신은 아닌 누군가를 사랑"(Blaise Pascal, Pensees (London, 1995), p.194.)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것을 실재계라 부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든 도덕적 지저분함 속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타인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의 상상적 복제품으로서가 아니라 타인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계가 아니라 실재계 속의 그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속에 있는 "비인간"--우리 자신의 핵심에도 존재하는--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쉽기는커녕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감당해야 하지만 우리 능력으로는 버거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타인을 실제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그 모든 실존적 추악함과 함께 받아들이는 이와 같은 냉담함(impersonality)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이 보다 해로운 의미에서 추상적이 되는 것--즉 특정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서 전혀 무관한 난잡한 개방성이 되는 것--을 막아 준다. 당신은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비참한 내가 아니라,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끔찍한 나를 사랑해야 한다. 게다가 이렇게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고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듯, 무조건성은 또한 비상호성을 의미한다. 계명은 "사랑하라, 그러면 그 보답으로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거나 "당신에게 지겨울 정도로 비굴하게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라!"가 아니라, 그저 "사랑하라!"이다. 사랑은 이처럼 인간 상호간의 결과를 계산하기를 단연코 거부하고, 상징계의 통제된 균형인 수입과 지출의 자연스러운 질서를 폭력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에서도 비인간적이다.

사랑이 법이라면 사적 감정과 공적 의무의 구별은 무의미해진다. 그리하여 사랑은 사적 영역에서 정치적 영역으로 진입한다. 부르조아 사회에서 이들 영역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은밀하게 관련된다. 감정은 사적이고 자의적인 반면, 공적 의무는 돌에 새겨진 듯 엄격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감정도 체스 게임처럼 이성적일 수 있고, 공적 의무도 머리 스타일처럼 자의적일 수 있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별이 이처럼 와해된다면 거기서 몇 가지 중요한 윤리적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데, 그중 일부는 사회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 예컨대 관대함이 공적 의무가 된다. 즉 나는 당연히 내 요구에 대하여 사람들이 단순히 의무적으로 표명하는 관심 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에게는 자비를 요구할 권리,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이제 비상호성은 일상의 문제가 된다.

사랑이 법이라는 주장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리,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하리"라는 W. H.오든의 다소 과장된 시구--그는 나중에 이를 부정했다--는 어쨌든 우리가 협동하지 않는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정치적 진실을 포착한 것이다. 철학자들은 사실에서 가치로 나아갈 수 있는지 곤혹스러워 하지만, 아마도 바로이것이 그런 이행이 가능하다는 예상치 못한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처한 물리적 상황은 우리가 서로를 소중하게 여길 때만 지속가능할 것이다(나는 이것이 이른바 자연주의적 오류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해결책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처한 물질적 상황이 이대로 지속되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보게 해 주는 무엇인가가 그 상황 속에 존재함을 보여야만 할 것이다-각주). 그와 같은 가치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런 사실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발전하기 위해 애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이제는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도 애정이 필요할 지경이 되었다.

305 페이지. [[우리 시대의 비극론]], 경성대학교 출판부, 이현석 옮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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