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03

르네상스맨이 되지 말자

다양한 분야에 대해 식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지니는 '르네상스맨'이라는 단어는, 그리하여 결국 생활에 여유가 있고 자신의 지위를 위협받지 않을만한 교수들이 이 분야 저 분야에 잡다한 도서를 내면서 스스로에게 붙이는 훈장처럼 변해버리고 말았다. 가령 알라딘에서 저자 이름을 클릭하면 총 60권의 다종다양한 도서가 뜨는 영남대 법학과의 박홍규 교수는 자신을 '르네상스맨'이라 칭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유명한 라드부르흐주의자인 서울대 법학과의 최종고 교수는 법상징학 등에 관한 연구를 하고, 《괴테와 다산, 통하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유독 법대 교수들만이 지적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외에도 많은 저자들이 다양한 방면으로 외도를 하며 르네상스적인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다.

'르네상스맨'들의 열의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수만권의 책이 쏟아지고 있는 현실이고, 특히 한국은 OECD 국가 중 출판물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인 만큼, 한국어로 직접 글을 쓰는 필자의 수는 늘어날수록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네상스맨'이라는 단어가 유한계급의 지적유희를 치장하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은 옳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를 특징짓는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떠올리는 지금의 문화 풍토를 나는 지적하고 싶다. 자신을 '르네상스맨'이라 칭하는 그 이면에는 바로 그렇게, 다재다능한 천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진정한 가치는, 그동안 묻혀있었던 그리스 철학의 원전을 직접 탐색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 전까지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서도 아랍어 중역본을 보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이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비잔틴 제국이 간직하고 있던 그리스어 원전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는 근대 철학이 고대 철학을 극복하는데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도 본질적인 바탕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근대의 예비 단계이자, 동시에 인류 문명 사상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시대가 되게끔 한 원동력은 바로 그러한 원전을 향한 탐구에 있었다. 물론,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천재가 되고 싶은 기분에 취해있는 저자들을 굳이 뭐라고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나는 그들의 욕망이 한국 지성계의 어떤 경향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동시에 그들의 그러한 다방면적인 저술 행위가, '너 전공이 뭐야?'라는 질문으로 대변될 수 있는 한국 학계의 '박사학위주의'를 깨뜨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문제삼을만 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르네상스맨들이 결국 부유한 가문에 고용되어 있는 기능인일 뿐이었듯이, 현대 한국의 '르네상스맨'들은 학계의 관성을 타파하기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선에서 그냥 이런 저런 책들을 내고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댓글 4개:

  1. 최종고 교수, 저작은 많은데 읽어보면 그냥 요약 정리 수준의 책들이 대부분이더군요. 그렇고 저런 책 잔뜩 출간하기보단, 라드부르흐 전작 번역에라도 나서보는 게 낫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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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라드부르흐 전작 번역은 그야말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니까요. '르네상스맨'이 되겠다는 생각은 딜레당티즘에 가까운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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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설마 그런 저작들이 "한국지성계의 경향성"을 드러낼려구요?

    아마 이어령교수가 한국의 르네상스맨 원조라 생각되네요.. 요즘엔 우석훈박사가 경제학을 중심으로 시도할만한 그릇이라 보여지고..

    진정한 지성과 석학들이라면 학문을 넘나드는 시도들이 되어야겠죠. 하이퍼텍스트시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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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제 설명이 다소 거칠긴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이야기할 수 있겠죠.

    저는 이어령 교수의 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석훈 박사는 시대가 원하고 있는 글을 써내고 있기에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고요.

    학문을 넘나드는 시도를 너무 손쉽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경제학 원론 한 번 읽고 '수요와 공급만으로는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소리치는 수준의 경계 넘기가 너무도 만연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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