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위는 지금이 물러나야 할 때'라는 식의 주장이 적지 않고, 특히 '촛불시위는 노동조합의 하투와 연대해야 하고, 촛불은 내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2071님의 블로그에서 그런 주장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건 '연대'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촛불을 내리고 집에 들어가 앉아있는 시민들이 대체 무슨 수로 노동조합과 '연대'한단 말인지? 방구석에 앉아 마음으로 연대하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다운 방법이 없다. 상식적으로 볼 때 그런 행동은 그냥 이것 저것 다 포기하고 집에 가서 씻고 자는 거지, '연대'가 아니다.
내가 뭔가 놓친 게 있나 싶어서 "夏鬪後援論 使用說明書(하투후원론 사용설명서)"를 다시 한 번 읽어봤는데, '촛불을 내리고 하투와 연대'라는 주장만 있을 뿐 대체 그 연대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특히 왜 연대를 하는데 꼭 촛불을 내려야만 하는지에 대한 논증은 딱히 찾아볼 수 없다. 최장집 학파가 주장하는 바대로, 나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한국의 정당정치가 마비되어 있고 그로 인해 시민들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이 사실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촛불을 내리고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 표현은 전부 묻혀버린다. 나는 저 글을 쓰신 분이 대체 '연대'라는 단어의 구체적인 내용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 그게 너무 궁금하다.
노동조합의 전면적인 파업과 그로 인한 실질적인 압박 없이는 촛불집회의 성공 가능성을 내다볼 수 없다는 말을 나는 이 시위가 굵어지던 시점부터 꾸준히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의 실천을 위해서라도 시민들은 계속 촛불시위에 나와야 한다는 말도 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자면, 노동조합에서 만든 유인물 등을 시청 광장에서 한 뭉테기씩 가져와 다른 시민들에게 뿌리는 활동을 제안한 바 있고, 나 자신이 직접 그렇게 해왔다. 헌데 이 모든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단 광장에 시민들이 꾸준히 나와줘야 한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고스피어처럼 인식론적 필터링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에서는 앞서 말한 방법론이 전혀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의 등장을 놓고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탈정치'를 개탄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불만이 없잖아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좀 더 긴 설명이 필요하므로 오늘 밤에 하지는 않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지금 이 판이 깨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질긴 놈이 이긴다'라는 말을 나는 본디 매우 싫어하고, 그것은 그것이 신부님들의 입에서 나왔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6월 30일부터 7월 5일까지 촛불시위의 제1의 목표는 그 자체의 생존이지, '탈정치에 함몰된 대중들을 그 늪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적어도 지금 당장은) 달성 가능한 목표가 결코 아니다.
《아나바시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크세노폰의 선거 홍보용 기행문, 전쟁 참전 기록문, 아무튼 그런 건데, 거기서 그와 그리스 군대는 페르시아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그러면 우리는 너희들을 친구로 대하리라"고 주장한다. 그리스인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무기를 버리지 않겠다. 만약 우리가 너희들의 친구가 된다면, 무기를 내려놓았을 때보다 무기를 들고 있을 때 더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너희들이 우리와 친구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손에 무기가 들려있지 않을 때 우리는 너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크세노폰에 따르면, 크세노폰의 간지나는 지휘 하에) 최소한의 피해만을 입으며 무사히 탈출하여 바닷가에 도착한다. 2071님의 블로그에서 본 "솔직히 촛불시위는 승산이 없다"라는 글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대답을 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촛불이 무기라면, 한 줌의 도덕적 우월함이 무기라면, 무사히 탈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것을 절대 내려놓을 수 없다. 전경들이 왁 하고 닥쳐오는 순간에, 피해를 최소화하며 탈출하기 위해서는 절대 뒤로 황급히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사람들이 더 현명해졌으면 좋겠다. 그게 너무 과도한 기대라면, 최소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면서 말했으면 좋겠다. 지금 촛불을 내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종교단체가 '지도부' 역할을 하는 것이 눈에 거슬리다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 그건 최대한 '탈정치적'이고자 노력했던 대책회의가 풍비박산나면서 빚어지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대책회의의 확성차가 살아있던 당시에는 모든 시민들이 다 '나는 지도부가 없는 게 좋아'라고 했다고 생각하나? 눈에 불을 켜고 대책회의와 싸우고 스스로 길을 뚫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그건 대책회의 차량에 시비를 걸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웅성웅성 달려와서 '그래도 지휘부가 있어야 하지 않냐'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은(대책회의에서 일부러 심어놓은 듯한 사람들을 제외해도 그렇다), 정말이지 겪어본 사람이나 아는 거란 말이다.
촛불을 내리면 시민들은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제발 이걸 좀 인정하고 나서 다음의 대책을 생각하건 말건 하자. 무기를 내려놓으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노예가 되는 것 뿐이다. 정당정치가 마비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정당정치가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촛불을 내리는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노동조합과의 연대를 위해 노동조합과의 연대에서 가장 유용할 수 있는 무기를 내려놓는다는게 앞뒤가 맞는 소리이긴 한가? 나는 그런 의견에 반대한다. 크세노폰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한두달안에 끝장을 내지않으면..(어떤의미로든) 국민에게 승리란 없을것이고.
답글삭제그동안 고통받고 희생하시고 구속당하신분들을 그저 범법자를 만들어 버리는 꼴이 되버리겠죠.
지금 촛불을 내리자는 이야기가 있다면 노정태님 말씀데로 그냥 노예로 살자라고 외치는것이 불과하다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면 죽는다 라는 심경으로 싸워야 한다는것을 간과하고 너무 점잖빼면서 이야기하는것을 보면..아무것도 하지말고 그냥 노예로 살아라..라는 절망이적인 조언밖에 남지안는군요.
지금 촛불을 끄라는 말을 들으면, 한참 밥물이 끓고 있고, 아직 죽도 밥도 안된 상태에서 갑자기 뚜껑 열자고 하는 것 같아서 씁쓸합니다. 지금 광장의 그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끄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는 게 정부나 보수단체들의 열망인데, 그것을 촛불을 위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쉽기도 하구요. 잘 읽었습니다.
답글삭제(2071님의 글을 정독해봐야겠지만)
답글삭제노동자와의 연대를 촛불시민들 스스로 어떤 식으로 해석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백인백색?
당장 하투니 뭐니 해서 구호부터 달라질테고 그러면 촛불시민 중에는 이전의 이명박 아웃, 재협상 실시..등의 구호에서는 느끼지 못 했던 계급차에 대한 인식을 할테고..
그러다보면 내가 촛불을 왜 드나에 대한 성찰이 이뤄지겠죠.
결국 광장의 사람들이 좀 더 생각하기 시작하면 불리해지는 건 노동자들일 뿐이란 생각입니다. (광장에 계속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볼 때 도시 중산층정도의 계층도 상당수란 소리거든요)
차라리 현재 2달여간의 촛불은 경고였음을 알리고 자연스러운 퇴각을 한 후에, 언제든지 우리는 나갈 수 있음을 강력하게 표시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죠.
이랜드 아줌마들이 끌려나갈때도 꿈쩍 하지 않았던 분들이, 실제로 본인들이 전경들의 위협을 목도하고 격하게 흥분하는 건 '촛불이 투쟁'이라든지 하는 의미와는 괘를 달리한다고 봐야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노무현정부 시절의 대통령의 권위약화(인터넷에서의 노무현탓)가 이명박정부로 오면서 실제적으로 공간에서 작동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정도 만만하니까 청와대로 진격하자는 말도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2071님의 의견도 이런 선상에서 해석하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노정태님과 2071님의 차이라면 촛불시민들이 무슨 생각으로 왜 나왔냐..혹은 광장에 수일을 나오면서 어떤 생각을 했겠느냐 등의 문제에서 다른 해석을 하시는 듯.
이번 촛불은 친노동자 계층이 벌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에 본인들을 희생할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차라리 이 촛불시민들과 노동자들이 자연스러운 바톤터치를 하면서 가시적인 연대라도 보여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익명/ 삼성에 노동조합이 생기는 수준의 강력한 경제, 사회적 변화가 발생하거나, 혹은 현재 대한민국의 행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적 변화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않는 한, 이번 시위를 통해 무언가 성과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그러니 가능한 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야 할텐데, '이쯤 됐으니 촛불을 내리자'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많아지는 것이 참 우려스럽습니다.
답글삭제Surplus Text/ '촛불을 끄고 토론을 하자'는 말도 말이 안 되죠. 촛불을 켜고 광장에 모였기 때문에 이만큼이나마 토론이 되고 있는 것이니까요. 자신들이 촛불을 '위한다'고 말하는 대신, 직접 광장에 서서 사람들의 분위기를 몸으로 느끼며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감사합니다.
tdkim/ 촛불시위가 한창 커져있던 때에는 노동자들이 촛불시위대의 속에 들어와서 '이명박 아웃'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반대로, 촛불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노동조합과 함께 노동조합의 구호를 외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죠. 제가 바라는 것은, 꾸준히 촛불들이 광장을 지켜줌으로써 노동조합의 파업이 '정치성'을 잃지 않도록, 또한 폭력적인 진압에 덜 직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tdkim님은 현재 상황 파악을 어떻게 하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현재 2달여간의 촛불은 경고였음을 알리고 자연스러운 퇴각"을 하면, 이후에 또 광장에 사람들이 이만큼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저는 이 촛불의 성격이 친노동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말의 논점은 그게 아닙니다. 한번 해산해버리면 다음 기회를 위한 동력을 비축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그나마도 각자 생활이 바쁘고 삶이 고단해서 쉽지 않을 겁니다. 중산층은 중산층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목소리를 드높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연스러운 바톤터치"는 애초에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