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25
[별별시선]네 최고 존엄에 침을 뱉으마
지난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발언이다. 테러에는 반대하지만 신앙심 역시 존중받아야 하므로, 표현의 자유가 한발 물러서야 한다는 뜻이다.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이후 우리는 이와 같은 의견을 숱하게 접할 수 있었다.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 그들이 테러범이 되도록 만든 구조적 문제가 있다.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 타인의 종교를 모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 악의 씨앗을 뿌린 서구 제국주의가 더 나쁘다 등등….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으로 시작하는 이러한 주장들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표현의 자유가 갖는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 첫 번째이다. 이것을 ‘가치 상대론’이라고 하자.
표현의 자유를 누리면서 타인이 소중히 하는 무언가를 침해할 경우, 물론 그래도 테러는 나쁘지만, 이른바 ‘원인 제공자’ 역시 비난을 피할 수 없다는 입장이 두 번째일 것이다. 이것을 ‘도발론’이라고 불러보자.
대부분의 경우 첫 번째와 두 번째 근거는 함께 작동한다. 앞서 인용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부터가 그렇다. 나의 것이건 타인의 것이건 신앙심은 표현의 자유만큼이나 소중하므로, 그것을 함부로 모욕하는 것은 ‘주먹질’을 불러오는 도발 행위가 된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발생 직후 주요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이 내놓은 성명도 이와 대동소이했다.
이슬람교는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결코 성전으로 부르지 않으며 용납하지 않지만, 종교와 신앙에 대한 도발은 나쁜 행동이라는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결국은 ‘도발론’으로 향하는 셈이 된다.
종교 지도자가 아닌 사람들이 내놓은 발언들도 같은 틀에서 분석이 가능하다. 신앙심 대신 종교의 자유 혹은 서구 사회의 소수자로서 탄압받지 않을 자유가 ‘가치 상대론’의 저울 위에 올라 표현의 자유와 비교 대상이 된다.
‘도발론’의 경우도 그렇다.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부터 시작해, 값싼 이주노동자를 얻기 위해 문화적 차이가 큰 무슬림들에게 취업 비자를 쉽사리 내주었던 서유럽 국가들의 역사,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극우적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극우 정당이 모두 ‘원인 제공자’로 간주되었다.
물론 표현의 자유도, 여타 기본권과 마찬가지로, 경우에 따라서 제한될 수 있다. 충돌이 발생했을 때 사실관계를 충분히 따져보지 않고 일방의 책임으로만 몰아붙이는 것 역시 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두고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라든가, ‘종교적 심성을 도발하지 말라’ 같은 말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광경을 보면, 섬뜩하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명백히 퇴행하고 있다는 징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내 어머니를 욕하면 주먹질을 각오하라”고 농담처럼 말할 수 있었지만, 불과 500여년 전의 프랑스인들은 바로 그런 이유를 들먹이며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벌였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역시 마찬가지다. 테러범들은 명백히 그들이 믿는 신과 그 신의 말씀을 가져다준 예언자의 이름을 외치며 범행을 저질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에게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는 한국의 ‘샤를리 에브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학살 앞에서 애써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장막 너머의 신성한 권력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이만큼의 시민적 권리를 발견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수많은 선각자들이 많은 것을 바쳐오지 않았던가.
‘신성불가침의 최고 존엄’과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인류 진보의 역사는 종교와 신앙과 권위를 조롱하는 자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히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온 역사다. 그 희생과 헌신을 배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도 샤를리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1252105075&code=990100&s_code=ao122
2015-01-20
[북리뷰]대중문화 ‘돌아온 과거’ 열풍
사이먼 레이놀즈 지음·최성민 옮김·작업실유령·1만8000원
복고가 대세다. 영화 <국제시장>이 새해 첫 1000만 관객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 모습을 마뜩찮게 여기는 젊은이들조차 MBC의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90년대 가요 특집, 이른바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를 보며 어깨춤을 추고 추억에 젖는다.
과거의 전성시대다.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특히 그렇다. 런던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대중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널즈는 그러한 오늘날을 “바야흐로 팝이 레트로에 환장하고 기념행사에 열광하는 시대”(11쪽)라고 말한다. “2000년대는 맹렬한 재활용 시대이기도 했다. 흘러간 장르는 재탕 또는 재해석됐고, 빈티지 음원은 재처리되거나 재조합됐다. 젊은 밴드의 팽팽한 피부와 상기된 볼 뒤에는 그윽하게 늙은 아이디어의 회색 살이 있었다.”(12쪽)
이 책 <레트로 마니아>는 바로 그런 시대의 대중음악을 포괄적으로 조망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수많은 고유명사들이 문자 그대로 비처럼 쏟아지는데, 나처럼 서구 대중음악에 그다지 밝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익숙하지만 많은 경우 낯선 이름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레트로 마니아>를 읽는 일을 주저할 필요는 없다. 저자 스스로도 직감하고 있다시피 ‘레트로 열풍’은 대중음악에만 국한되는 일도 아니며, 동시에 영미권에만 해당되는 사항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 길게 인용해보자.
“몇 년 전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의 아파트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길거리 풍경이 내가 태어난 1963년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물론 자동차 디자인은 조금 달라졌지만, 우리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아니라 연소기관으로 달리는 지상 운송수단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믿음직스러운 주차요금 계량기에서부터 튼튼한 청색 우체통과 상징적인 노랑 택시에 이르기까지, 21세기 맨해튼은 우울하리만치 비미래적이었다.”(349쪽)
20세기의 후반, 인류는 달 탐사를 넘어 미지의 우주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러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듯, 대중문화 역시 각자의 분야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미래’를 개척하고 있었다. 저자는 20세기의 팝 음악이 “전자 장치를 통해 소리 공간을 탐구”(376쪽)했으며, 그것은 저 먼 우주를 향해 나아가던 모험정신과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 누구도 가까운 미래에 인류가 화성 너머로 나아갈 것을 꿈꾸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대중문화 역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동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트로 문화도 결국은 기울어 무너지는 서구의 또 다른 얼굴일 테다.”(376쪽)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90년대의 ‘신세대’들은 당시의 ‘구세대’들을 위한 영화인 <국제시장>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추억을 곱씹는 문화상품 앞에서 여지없이 향수에 젖어든다. 현재 한국 정치는 1930년대에 태어난 노인들이 쥐락펴락하고 있고, 그에 맞서는 것은 이제 은퇴 연령을 향해 달려가는 1960년대생들이다. ‘미래’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청춘’들은 이전처럼 기성세대와 대립하기는커녕, 당장 오늘 내일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미래’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돌아온 과거’들이 꽉 채우는 것은 비단 대중문화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국면 속에서 어떻게 ‘현재’를 지켜내고, 최소한의 활기를 잃지 않으며, ‘미래’를 창출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노정태 ‘논객 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1121517511&code=116
2015-01-12
부모님의 ‘개고생’ 두고 왜들 이래
- 노정태│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1.12 14:14
"<국제시장>을 보면 아예 대놓고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라는 식이거든요. 정말 토가 나온다는 거예요. 정신 승리하는 사회라는 게.”
방송인 허지웅의 말이다. 이것을 TV조선에서 ‘국제시장은 토 나오는 영화’로 축약해 소개한 후 <국제시장>의 정치적 색깔에 대한 논란이 확산됐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던 중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을 두고 박근혜 대통령이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이 영화의 정치색에 대한 논쟁은 점점 첨예해지고 있는 듯하다. 1월6일 윤제균 감독은 JTBC 뉴스룸과 인터뷰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 장면에 대해 “시대 상황과 맞물려서 두 사람의 갈등이 너무 무겁지 않게 또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이 그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서 좀 편안한 마음으로 생각을 했었다”며 “그 장면이 애국심을 강조하는 장면이라고 해도 저는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적극적으로 논란을 피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국제시장>에는 ‘정치’ 이야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까지 이어지는 주요 줄거리 속에서 대통령의 얼굴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정전협정을 발표하는 이승만의 목소리만이 흐릿하게 등장할 뿐이다.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주요 사건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줄거리의 출발점이 되는 한국전쟁 역시 ‘흥남 철수’라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 압축된다.
영화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보자. 덕수(황정민 역)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라타던 중 등에 업고 있던 동생 막순이를 잃어버린다. ‘아버지’는 “이제부터 네가 가장 노릇을 해야 한다”며 동생과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는 말을 남겨놓고는 그 동생을 찾기 위해 배에서 내려간다.
덕수 본인의 꿈은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선장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생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남동생이 서울대에 합격하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독 파견 광부가 되고 그곳에서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난다. 가게 인수할 돈을 만들기 위해 월남전의 한복판에 파월 기술자가 되어 뛰어든다.
덕수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데는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흥남 철수 과정에서 잃어버린 동생, 그 동생을 찾기 위해 자신의 탈출을 포기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그의 인생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1000만 관객 영화’인 봉준호 감독의 <괴물> 역시, 한강에서 불쑥 튀어나온 괴물에게 잡혀간, 가족을 찾기 위한 사투임을 떠올려보자.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것, 혹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지켜내는 것은, 아주 강력한 서사적 도구다.
‘가족’이라는 모티브만을 놓고 보자면 <국제시장>은 <괴물>과 같은 얼개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괴물>은 개봉 당시 ‘반미 영화’라는 논란에 휩싸인 반면, <국제시장>은 정치적 복고를 부추긴다는 비난을 듣고 있다. 왜일까. ‘가족의 상실’이라는 거대한 원동력을 제공한 원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괴물>에서 ‘괴물’을 탄생시킨 원인은 미군의 무단 화학폐기물 방류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국제시장>에서 가족들이 생이별을 하게 된 원인은 누가 제공했는가.
영화 속에서 막순이를 덕수로부터 떼어놓는 것은 ‘누군가의 손’이다. 누구의 손인지도 모르고, 왜 하필 막순이를 잡아당겼는지도 모른다. 덕수는 ‘내가 막순이를 잃어버렸다’고 자책할 뿐, ‘누군가 막순이를 끌어당겼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국제시장>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단이 놓여 있다. 이 영화는 ‘부모 세대의 개고생’을 다루고 있지만, 정작 그 ‘개고생’을 유발시킨 원인이 무엇인지 탐구하지 않는다. 막순이는 ‘어쩌다가’ 헤어졌고, 서독의 석탄 광산은 ‘어쩌다가’ 폭발했고, 베트콩 역시 전쟁 중 ‘어쩌다가’ 주인공의 다리에 총을 쐈을 뿐이다. 주인공이 고생은 하지만 악역 비슷한 역할은 모두 ‘타자’에 의해 수행된다. 광산에 동료를 구하러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외국인, 선량한 베트남 사람들을 학살하는 베트콩 등.
<국제시장>이 표상하는 ‘부모님의 개고생’에는 ‘가해자’가 없다. 진보 진영에서는 그 자리에 ‘박정희’가, ‘자본’이, 혹은 ‘병영국가 대한민국’이 들어가지 않은 것에 불만을 표시하는 듯하다. 그 비판은 타당하다. 특히 약자에게 폭력적이었던 대한민국 현대사에 면죄부를 부여한 셈이기 때문이다.
‘부모님 개고생’시킨 가해자가 없다
하지만 ‘가해자’의 자리를 공백으로 만들어버린 탓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이 영화를 전유하는 시각 역시 가능해진다. 2007년 한국까르푸-이랜드홈에버 파업을 모티브로 삼은 웹툰 <송곳>의 베스트 댓글 중 하나다.
“(중략) 우리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고 서로 연대하고 부당함에 하나씩 맞서 꾸준히 싸웁시다. 돈의 논리가 강해져가는 이 현실에서 해답은 우리 사람들끼리 힘을 합치는 것뿐입니다. 내게 주어진 부당한 처우부터 고쳐나가고, 주변의 억울한 일들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와 우리 다음 세대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지겠죠?ㅎㅎ 영화 <국제시장>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처럼, 우리 젊은 세대도 훗날 지금의 노력을 더 나은 세상에서 추억하기 위해 열심히 삽시당….”
젊은 세대가 ‘개고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중장년층을 떠올린다면, “토가 나온다”는 허지웅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구세대와 맞서려면 결국 청년도 ‘승리하는 정신’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어떤 청년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국제시장>을 보고 와서 ‘힐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시장>에 대한 비난에 힘을 보태기보다는, 청년들을 위한 새로운 작품이 나오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2015-01-06
[북리뷰]우리는 인권을 왜 지켜야 하는가
조효제 지음·한울아카데미·1만8500원
인권 변호사 출신 박원순 시장이 이럴 줄은 몰랐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지난 12월 3일에 벌어진 일이다. 서울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위원들이 6개월에 걸쳐 토론하여 만들어낸 서울시민인권헌장 초안 중 다섯 개 조항에 대해 표결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동성애자들의 인권 보호에 반대하기 위해 작정하고 있었던 10여명의 시민위원들이 원만한 합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60대 17. 단순히 계산해봐도 찬성이 반대의 세 배가 넘는다. 하지만 서울시는 시민위원회가 의결한 인권헌장을 선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모든 시민위원들이 ‘합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시민위원회는 서울시의 돌변한 입장에 당혹감을 표했고, 논란이 커지자 박원순은 엉뚱하게도 한국기독교총연합을 방문해 “나는 서울시장으로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상식 이하의 발언을 했다.
동성애는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성적 정체성 중 하나다. 지지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박 시장이 인권헌장에 대해 ‘만장일치’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인권 선언도 만장일치로 이루어진 적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외당하는 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면서, 필연적으로 더 가진 자들의 몫을 빼앗아오기 때문이다.
인권 연구자 조효제 교수의 역작 <인권을 찾아서>를 펼쳐 보자.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토대로, ‘인권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왜 지켜야 하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조심스레 제시하는 책이다.
세계인권선언은 1948년 제3차 유엔 총회에서 선포되었다. 저자는 그것을 “세계인의 이상주의적 열망에다 종전 직후부터 냉전 개시 직전까지 잠시 열렸던 정치적 기회의 창이 합쳐져 1948년에 채택된 역사적 합의”(20쪽)로 본다. 하지만 이 지당한 원칙들의 선언조차 ‘만장일치’는 아니었다. 당시 유엔에 속해 있던 58개국 가운데 48개국이 찬성하고 8개국은 기권하였으며 두 나라는 회의장에도 오지 않았다. 소련권의 소련, 벨라루스, 체코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유고슬라비아는 세계인권선언이 ‘자유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불만을 표했다. 나머지 두 나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사우디아라비아다. 남아공은 공공연히 인종차별정책을 펴던 나라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인권선언이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너무도 ‘서구적’이라며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이 두 나라의 기권표는 오늘날 역사적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인간을 인간 취급하지 않겠다는 공공연한 선언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벌어진 일도 결국 그런 것이다. 한때의 인권 변호사 박원순은 서울시민인권헌장에 만장일치를 요구함으로써, 너무도 많은 것을 내팽개쳤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서울시장의 ‘역주행’을 시민들이 수수방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성애자들 및 그들과 연대한 단체들로 이루어진 ‘무지개 행동’이 서울시청 로비를 점거했고, 시민위원회는 12월 10일 인권의 날을 맞이하여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선포했다. 같은 날, 박원순 시장도 무지개 행동과의 면담을 통해 사과의 뜻을 밝혔다. 인권은 보편적이지만 합의의 대상은 아니라는 당연한 진리를 우리는 이렇게 다시 배운다. 세계인권선언, 그 정신으로 돌아가자.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2161049341&code=116
[북리뷰]‘밖에서’ 본 헌재의 탄생과 구성
이범준 지음·궁리·2만원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를 8대 1이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인용하는 헌법재판소를 보며, 나는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결정문을 낭독하기 전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사무사 무불경”(思無邪 毋不敬)을 운운할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학부 시절 법학과를 졸업했고, 비록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배운 가락이 있다고 생각해왔던 나는, 내가 헌법재판소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했다. 책이 몇 권 나와 있었는데 일단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를 골랐다. 이범준은 저널리스트답게 헌법재판소의 탄생, 구성, 정치권과의 관계 등을 ‘밖에서부터’ 고찰했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의 결과 헌법재판소가 탄생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는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구성되었고, 대법원에서는 제2차 사법파동이 발생했다. 헌법재판소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이 같은 해 9월 1일이라는 것은 그러므로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헌법재판소는 그 시작부터 ‘정치적’이었다. 책을 인용해보자. “다양성과 정치성이 1기 재판소의 특징이다. 국회의원을 비롯해 정치에 관여한 3명(이성렬·변정수·한병채), 검사 출신 1명(김양균), 교수 출신 1명(이시윤)이다. 나머지도 모두 변호사를 거쳤다. 판사로만 있다 재판관이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러한 다양성은 2기부터 주춤한다. 그리고 3기와 4기에서는 정통법관들이 헌재를 장악한다.”(18쪽)
1기 구성원 중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은 변정수와 이시윤이다. 이시윤은 형사소송법의 1인자로, “한정합헌, 한정위헌, 위헌불선언 등 다양한 결정양식을 도입”(29쪽)했다. 반면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출신 변정수는 현실권력은 기본권을 침해하려는 강한 경향을 가진 만큼 그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헌법재판이라는 태도를 보인다.”(29쪽) 재판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고, 그들과 인터뷰를 진행하여,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지게 된 배경과 경과 등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성실히 추적한다.
헌법재판소는 역설적이게도 ‘정치색’을 띠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경향을 보여주는 듯하다. 1990년 7월 14일, 당시 여당이었던 민자당이 날치기로 통과시킨 법안에 대해 야당 의원 72명이 심판 청구를 했지만, 헌재는 심리와 선고를 차일피일 미루었고 사건은 흐지부지되었다. 헌법재판소가 2기를 맞이한 1995년 2월 23일이 되어서야 1990년의 국회 날치기 사건에 대해 전원일치로 각하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러자,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민자당 후신인 신한국당은 1996년 12월 26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안 등 11개 법안을 또다시 변칙처리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다시 2기 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이 청구된다.”(136쪽)
헌법은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높은 법이다. 그 헌법에 기반하여 기타 모든 법률 및 법률로 인한 행정행위까지 심판할 수 있는 헌법재판소는 우리의 법 체계 속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기관 중 하나다. 그러나 헌재는 지금까지의 전적을 놓고 볼 때, 법관의 양심과 법의 논리에 따라 기꺼이 정치 권력에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그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노정태 ‘논객 시대’ 저자 / 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2291645051&code=116
2015-01-01
독서 목록(2014)
독서 목록(2014)
- 20140103 - 박해천, ○○○ 기획, 구동희 외, 『DT3: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서울: 작업실유령, 2013)
- 20140120 - 월간 수퍼레시피, 『진짜 기본 요리책』(서울: 레시피팩토리, 2013)
- 20140121 - 이승옥, 김은산, 『애완의 시대』(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3)
- 20140121 -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경기도 고양: 개마고원, 2013)
- 20140122 - 남화숙,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서울: 후마니타스, 2013)
- 20140124 - 맷 킨트, 소민영 옮김, 『거인의 역사』(서울: 세미콜론, 2013)
- 20140203 - 앨버트 O. 허시먼, 이근영 옮김,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0)
- 20140208 - 후안 모레노, 미르코 탈리에르초 사진, 정혜경 옮김,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서울: 반비, 2013)
- 20140212 - 한홍구, 『유신』(서울: 한겨레출판, 2014)
- 20140212 - 문영심,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서울: 시사IN북, 2013)
- 20140213 - 로버트 달, 김순영 옮김,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서울: 후마니타스, 2010)
- 20140215 - 요차이 벤클러, 이현주 옮김, 『펭귄과 리바이어던』(서울: 반비, 2013)
- 20140224 - 프란츠 카프카, 배수아 옮김, 『꿈 - 제안들1』(서울: 워크룸, 2014)
- 20140226 - 루카 파치올리, 존 B. 가이스빅 영역, 이원로 옮김, 『1494 베니스 회계』(서울: 다산북스, 2011)
- 20140227 - 헬무트 콜, 김주일 옮김,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서울: 해냄,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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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6 - 프레드 로델, 이승훈 옮김,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서울: 후마니타스, 2014)
- 20140306 - 톰 빙험, 김기창 옮김, 『법의 지배』(서울: 이음, 2013)
- 20140311 - 뉴레프트리뷰, 프랜시스 멀헌 엮음, 유강은 옮김, 『좌파로 살다』(서울: 사계절, 2014)
- 20140313 - 테드 창, 김상훈 옮김,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서울: 북스피어, 2008)
- 20140320 - Z. 브레진스키, 김명섭 옮김, 『거대한 체스판』(서울: 삼인, 2000)
- 20140326 - 로널드 드워킨, 김성훈 옮김, 『신이 사라진 세상』(서울: 블루엘리펀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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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3 - 미야지마 히로시, 노영구 옮김,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서울: 너머북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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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10 - 글렌 그린월드, 박수민, 박산호 옮김, 김승주 감수, 『더이상 숨을 곳이 없다』(경기도 파주: 모던타임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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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2 - 프랭크 맥클러스키, 이종철 옮김, 『소방관이 된 철학교수』(서울: 북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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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06 - 김시덕, 『그들이 본 임진왜란』(서울: 학고재, 2012)
- 20140813 - 호르스트 푸어만, 차용구 옮김, 『교황의 역사: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서울: 길, 2013)
- 20140813 - 플로리안 일리스, 한경희 옮김, 『1913년 세기의 여름』(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3)
- 20140814 - 함인선, 『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서울: 마티, 2014)
- 20140821 - 스탠리 밀그램, 정태연 옮김, 『권위에 대한 복종』(서울: 에코리브르, 2009)
- 20140828 -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경기도 파주: 창비, 2009)
- 20140904 - 강준만, 『싸가지 없는 진보』(서울: 인물과사상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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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6 - 강준만, 『담배의 사회문화사』(서울: 인물과사상사, 2011)
- 20140925 - 토마 피케티, 장경덕 외 옮김, 『21세기 자본』(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4)
- 20140927 - 데이비드 맥컬레이, 김영선 옮김, 『이슬람 사원』(경기도 파주: 한길사, 2005)
- 20140929 - 야스다 고이치, 김현욱 옮김, 『거리로 나온 넷우익』(서울: 후마니타스, 2013)
- 20141001 - 데이비드 맥컬레이, 김서정 옮김, 『암탉은 왜 길을 건넜을까?』(서울: 문학과지성사, 2011)
- 20141001 - 데이비드 맥컬레이, 김서정 옮김, 『안젤로』(인천: 북뱅크, 2009)
- 20141005 - 드이 이뇨, 김주경 옮김, 『홍콩: 중국과의 해후』(서울: 시공사, 1998)
- 20141006 - 대니얼 디포, 윤혜준 옮김, 『로빈슨 크루소』(서울: 을유문화사, 2008)
- 20141013 - 오노레 드 발자크, 이동렬 옮김, 『고리오 영감』(서울: 을유문화사, 2010)
- 20141015 -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알라스테어 스미스, 이미숙 옮김, 『독재자의 핸드북』(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2)
- 20141017 - Daniel Yergin, The Quest: Energy, Security, and the Remaking of the Modern World(New York: Penguin Books, 2012), Audible audiobook.
- 20141019 - 알렉산더 스틸웰, 오태경 옮김, 『생존 지침서: SAS와 특수부대 교본으로 배우는 위기탈출 토털 패키지』(경기도 파주: 푸른숲, 2013)
- 20141029 - 스티븐 존슨, 김명남 옮김, 『바이러스 도시』(서울: 김영사, 2008)
- 20141101 - Babara Goldsmiths, Obsessive Genius: The Inner World of Marie Curie(New York: W. W. Norton, 2005), Audible audiobook.
- 20141104 - 프레드 피어스, 김혜원 옮김, 『데드라인에 선 기후: 과학자들은 왜 기후변화의 티핑 포인트를 두려워하는가』(서울: 에코리브르, 2009)
- 20141111 - 새뮤얼 헌팅턴, 이희재 옮김, 『문명의 충돌』(서울: 김영사, 1997)
- 20141112 - 김찬호, 유주환 작곡, 『모멸감: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서울: 문학과지성사, 2014)
- 20141114 - 레베카 스클루트, 김정한 김정부 옮김,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2)
- 20141119 - 웬디 웰치, 허형은 옮김,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서울: 책세상, 2013)
- 20141130 - Walter Isaacson, Steve Jobs: Exclusive Biography (New York: Simon & Schuster, 2011), Audible audiobook.
- 20141208 - Ha-Joon Chang, 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 (New York: Bloomsbery, 2011), Audible audiobook.
- 20141210 - 조효제, 『인권을 찾아서』(경기도 파주: 한울, 2011)
- 20141218 - 앨리 러셀 혹실드, 이가람 옮김, 『감정노동: 노동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상품으로 만드는가』(서울: 이매진, 2009)
- 20141224 - 이범준,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서울: 궁리, 2009)
- 20141225 - 찰스 디킨스, 이은정 옮김, 『크리스마스 캐럴』(서울: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8)
- 20141227 - Malcolm Gladwell, David and Goliath (New York: Little, Brown and Company, 2013), Audible audiobook.
- 20141230 - 플라톤, 박종현 역주, 『국가·政體』(서울: 서광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