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10년 10월 18일 〈프레시안북스〉에 실린 "'죽은 철학자의 사회'…'희망의 인문학'은 없다!"의 원고입니다. 편집부에서 수정, 교열을 한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앞서 제시된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원고들을 읽어나가던 중, 9년 전에 쓴 글이지만, 아직도 유효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하여 블로그에 올리고 공유합니다.
1.
자신이 대단한 아이디어 뱅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한 선출직 공무원이 있다. 그는 선출직 공직에 당선된 직후부터 본인의 '끼'를 마음껏 발산해왔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날이 갈수록 쌀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고, 그래서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당선자의 생각을 묻자 그는 대번 대답했다. "쌀로 국수를 만들어서 먹으면 되지!"
이 선출직 공무원이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이라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일 것이다. 쌀 생산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말하는 자리에서, 현실적으로 통용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 이익이 농민들에게 직접적으로 갈 것이라고 보장할 수도 없는 '아이디어'만을 내놓는 그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혀를 찼다. 2008년 초, 이 대통령이 아직 당선자 신분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같은 논리 구조가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를 둘러싼 담론에서도 사실상 동일하게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쌀 농사가 힘들면 쌀국수를 먹으면 되지, 라는 말처럼, 인문학이 위기라면 '희망의 인문학'을 하면 되지, 라는 대답이 돌아오고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 논리 구조는 대동소이하다. 구조적 변화에서 비롯한 위기 앞에서 '시장성'의 재고를 강조하는 것 말이다.
말하자면 '인문학의 위기'라는 현상 그 자체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대응 담론들의 모습이 더욱 문제적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그 위기에 대한 이 반응만큼은 분명히 한국적이며, 그 자체가 사실상 더 큰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야기를 좀 더 풀어놓기 위해서는 『희망의 인문학』을 펼쳐들 필요가 있다.
2.
왜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하게 사는가? 이 해결되지 않는 질문 앞에서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인 얼 쇼리스는 한 가지 답을 제시한다. "현대 사회의 빈곤은 물질적 결핍과 숱한 도덕적 좌절이 겹쳐져서 만들어진 복합성 그 자체"라고 정의내린 후, 그는 "전적으로 소득에만 기초한 빈곤선은 중산층의 삶을 발견한 사람들로부터 빈민을 가려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55쪽)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참석한 향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리스토데모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던 아폴로도로스가 길 위에서 만난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액자 형식의 작품인 『향연』에서, 정작 작품의 주제를 전달하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여사제 디오티마였듯이, 얼 쇼리스 역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어떤 여성의 입을 통해 전달한다. 그는 비니스 워커라는 여성 제소자의 발언에서 힌트를 얻어,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그 핵심적인 부분을 펼쳐보자.
비니스는 대화의 주제가 실제로 자녀 문제로 넘어갈 수 있도록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빠르지만 리듬감 없는 어투로 입을 얼였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moral life of downtown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중략)… "그렇게만 하면, 그 애들은 더는 가난하지 않게 된다니까요!" …(중략)… "길거리에 방치된 그 애들에게 도덕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168쪽)
일반적으로 볼 때, 가난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은 노동이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 노동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혹은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투쟁하는 것.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적·도덕적 고양. 클레멘트 역시 그와 같은 긍정적 효과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볼 때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무력(force)'에 의해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일을 하면 일을 할수록 가난해지고 무기력해진다. "빈곤의 포위망 안에서 하는 노동은 무질서하기 짝이 없"으며, "그런 식의 노동은 또 다른 무력을 낳게 되고, 포위망 안의 혼돈은 점점 더 심해져 가"(117쪽)는 것이다.
따라서 가난에 대한 해법은 노동 혹은 노동운동을 통한 단결이 아니다. 중산층과 같은 정서적·도덕적(moral) 힘을 기름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부유하고 자유로운 개인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러한 결론을 정당화한다. "내가 만났던 빈곤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모두 무력의 포위망에 대해 일종의 창조적 대항, 적극적 대응을 했으며, 이것은 계급투쟁이라는 개념보다는 운명에 대항하는 자유의 성장과 더 많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161쪽, 강조는 인용자. 이 지점에서 얼 쇼리스가 드러내는 반 노동적인 서술에 대하여 논의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겠으나 이 지면에서는 일단 논점에 집중하도록 한다.)
이와 같은 사상적 기반 하에서 출발한 클레멘트 코스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졸업 뒤 6개월이 지났을 때 정규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거나, 전일제 일자리를 얻지 못했거나, 혹은 두 가지 다 해당하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는데, 그는 "뉴욕 라디오 방송국에 비정기적으로 원고를 쓰면서 바드대학에 다시 한 번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269쪽)었다. 말하자면 클레멘트 코스를 이수한 모든 사람들은 정규 대학에 진학하거나 정규직이 되었다. 예외는 단 한 명 뿐인데, 그나마도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발적 실업'에 속한다.
빈민들이 개인적으로 삶의 원동력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적어도 이 책 『희망의 인문학』에 등장하는 사례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고 모범적이다. 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일군의 사회운동가 및 학자들이 한국에서도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어 운영중이다. 성프란시스 대학 인문학 과정 글쓰기 교수인 최준영에 따르면,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인 성프란시스 대학의 1기와 2기 졸업생 20여명 중 대부분은 노숙생활을 청산했으며 "앞으로 최소한 자기 자신만큼은 책임지는 삶을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참고링크: http://www.ggcf.or.kr/books/iframewebzineview.asp?ino=2076 )고 한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자립은 한낱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다. 얼 쇼리스의 책으로 돌아가보자. 그는 "빈민들이 합법적 권력의 범주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러고 나서 게임의 잔혹성과 맞선다면, 그들은 기존에 확립된 사회 질서에 진정한 위협이 될 것"(428쪽)이라고 확신한다. 자존감을 회복한 빈민들이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위험'한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얼 쇼리스가 주창하는 '희망의 인문학'은 '인문학의 위기'에 맞서 현재진행중이다.
3.
얼 쇼리스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교편을 잡고 있던 시절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철학자로서, 주로 고대 그리스 고전을 해석하여 자신의 논거로 삼았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은 모두 그리스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스승이 한 그대로 고전을 읽고 번역하는 것을 자신들의 주된 과업으로 삼았다. 그 제자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앨런 블룸(Allen Bloom)이며 그와 얼 쇼리스는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 줄여서 '스트라우시안'(Straussian)들은 몇 가지 사상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앞서 말했듯 그리스 고전에 대해 대단히 큰 경외심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플라톤을 열심히 읽는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레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비의적(秘儀的)인 방식으로 엘리트주의적인 정치사상을 감춰두었기 때문이다. 타인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한들, 실질적으로 국가를 지배해야 한다는 내용이 플라톤의 텍스트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플라톤을 그렇게 해석하였고 그의 제자들은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얼 쇼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스트라우시안들이 가지고 있는 인문학, 혹은 철학에 대한 입장에 부정적이지만, 그것은 완전히 비교가 불가능한 위치에 서기 때문에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어떤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스트라우시안이나 얼 쇼리스나 모두 고대 그리스를 이상적인 삶이 구현될 수 있었던 공간으로 간주한다. 그 속에서 살았던 한 사람, 즉 소크라테스를 어떤 전인(全人)적 삶의 원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후대에 기록으로 남긴 플라톤에 대한 입장 정도일 것이다. 스트라우시안들이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비의적으로 숨겨진 엘리트주의를 찾아내려 할 때, 얼 쇼리스는 '순수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찾아내고 엘리트주의자였던 플라톤의 흔적은 애써 무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호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의미에서의) 플라톤주의자인 앨런 블룸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말했다. "우리는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할 겁니다. 『변명Apology』, 『크리톤Crito』의 일부분, 『파이돈』에서 몇 쪽, 아마 이런 식으로 시작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학생들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을 것입니다."(234쪽) 전통적으로 '에우티프톤', '변명', '크리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한묶음으로 취급되어왔다. 동시에 플라톤을 읽을 때에도, 초기작(에우티프톤)부터 중후기의 걸작(파이돈)까지 고루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플라톤의 텍스트가 널리 읽히기 시작한 이래 위 네 대화편을 한꺼번에 읽는 일은 언제나 장려되어온 철학적 학습법인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왜 '몇 쪽, 일부분'만 읽고 넘어가야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얼 쇼리스는, "우리는 플라톤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행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발췌해서 읽겠다는 목적이 너무도 잘 드러나고 있다. 플라톤에서 시작한다면서 이렇게 플라톤을 안 읽기도 쉽지가 않다. 보다 못한 디오티마, 아니 비니스가 한 마디 첨언한다. ""뭔가 빠뜨린 게 있는데요." …(중략)… "'동굴의 비유'요. 그걸 빼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철학을 가르치려고 하죠? 동굴이 바로 빈민지역이고, 빛이 교육인 거죠. 가난한 사람들은 분명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에요."(234-235쪽)
쇼리스가 플라톤의 핵심 저작인 『국가』,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부분 중 하나인 '동굴의 비유'를 빼놓았던 동기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과 중기 대화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는 전적으로 플라톤의 작품일 뿐 소크라테스의 실제 행적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니스가 올바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상대가 가난한 사람들이건 아이비리그의 귀공자들이건) 플라톤 철학을 가르치면서 동굴의 비유를 생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얼 쇼리스가 플라톤, 혹은 플라톤을 비의적으로 해석하고 숭배하는 앨런 블룸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희망의 인문학』중 12장 '급진적 인문학'은 통째로 앨런 블룸의 인문학에 대한 입장을 비판하는데 할애되어 있다. 인간이 공적인 삶, 정치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인문학이 갖는 역할을 서술하고, 그것을 부정한 앨런 블룸을 비판하는 것이다. 플라톤을 읽으면서도 플라톤의 생각이 아닌 오직 소크라테스의 행적만을 추적하려 하는 쇼리스의 행동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블룸은 플라톤의 『국가』를 교육에 관한 위대한 저작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플라톤의 사상 가운데 반 민주주의 부분만을 편식했고, 그것에 기초해서 사회와 대학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었다"(187쪽)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비판은 앨런 블룸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 중 하나로 특별히 언급할 것이 없다. 하지만 "소피스트가 시에 관한 토론이 인간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했지만 근본주의자 블룸은 그 말을 들으려 조차 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이상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해 버렸기 때문"(189쪽)이라고 고발할 때, 그는 뭔가 잘못 짚고 있다. 그가 비판하는 앨런 블룸이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을 쓴 그 앨런 블룸이 맞다면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은 처음부터 시와 정치의 관계를 고찰하는 챕터로 시작한다. 플라톤의 시인추방령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단지 일종의 엄숙주의로만 받아들일 때, 우리는 플라톤이 고대의 서사시 전통과 벌였던 진지한 지적 투쟁은 모두 망각한 채 그저 '착한 소크라테스와 그것을 왜곡한 플라톤'이라는, 19세기에 이미 충분히 논박된 도식적인 철학 이해에 발목을 잡혀버린다.
책 자체의 내용과 크게 상관 없어 보이는 이런 서술을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얼 쇼리스의 활동, 그의 헌신, 그가 철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뜨거운 애정과는 무관하게, 상아탑에 안주하는 철학과 세속에서 활동하는 철학을 구분하고 후자의 가치를 전자에 비해 높은 것으로 평가하는 것 역시, 특정한 맥락 속에서 도출된 '하나의 입장'이라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얼 쇼리스의 활동에 대한 존경과는 별개로, 우리는 '인문학'적으로 그의 입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 고전에 대한 편향된 강조, 그 속에서 도드라지는 플라톤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 칸트와 소크라테스를 비교하며 "두 철학자 모두 진리와 도덕, 아름다움의 문제에 관심을 뒀지만, 칸트는 세상과 떨어져서 살 수 있었고, 소크라테스는 누구보다 세속적인, 즉 '세상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29쪽)다고 내리는 평가 등은 결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니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을 자신의 논적으로 삼고 있으며 스트라우스에게 배운 그리스 철학의 맥락을 채 지워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얼 쇼리스의 인문학에 대한 입장이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광야의 지식인이고 칸트는 상아탑의 노예라는 발상, 그것 역시 하나의 '입장'일 뿐이다.
4.
이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누군가의 내면적 주체성을 북돋워줌으로써 그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다면, 왜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그 누구보다 인문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자살하고 있을까?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왜 '희망의 인문학'이 승리하고 있는 가운데, 인문학자들은 절망하고 좌절하여 목숨을 끊고 병에 걸리고 눈물을 삼켜야 하는가?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클레멘트 코스를 수강하는 그 누구보다도 인문학에 푹 빠져 산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건 미국에서건 마찬가지이다. 매우 기초적인 삼단논법에 따라 생각해보자. 대전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힘'을 가진다. 소전제: 인문학자는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결론: 인문학자는 '힘'을 갖는 사람이다.
물론 우리의 현실은 이와 정 반대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솟아오르는 동안, 정작 인문학의 근간이 되는 연구를 수행하는 소장학자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문자 그대로 말라죽어가고 있다.
7월 4일 세상을 뜬, 대표적인 하이데거 전문가 신상희 연구교수의 사례를 살펴보자. 그는 하이데거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번역해온 사람으로, 후기 하이데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숲길』을 포함해 다수의 작품들을 우리 말로 옮겼다. 하지만 대학들은 인문학 교수의 정원을 줄여나가기만 할 뿐이었고, 그는 늘 교수 임용에서 고배를 마셨다. 오랜 절망 끝에 헤매던 그는 50세의 이른 나이에 심장발작으로 숨을 거둔다. 교수신문에 따르면 고 신상희 교수의 "아내는 남편의 깊은 사색 저편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가 오랫동안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잠시 접어두고, 대신 이 한 사람의 인문학자의 죽음에 대해 살펴보자. 대학들이 인문학과의 정원을 줄이거나 폐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인문학 연구자들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인문학 교수들의 철밥통이 깨지는 것'이라며 비아냥거린다. 지금까지 인문학자들이 세상과 소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영향력을 잃었고, 그 결과 인문학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식의 해석 혹은 훈수도 빠지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을 그와 같이 파악한다면, 클레멘트 코스와 같은 대중적인 인문학 강연의 수를 대폭 늘림으로써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사실이 그러할까?
앞서 살펴보았듯이 클레멘트 코스에서 전제하고 있는 '인문학'은 결코 인문학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줄 수 있도록, 그와 같은 목적으로 편집된 인문학이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인문학적 관점이겠지만 그것이 전체 인문학을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희망의 인문학'을 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져갈 때, 고 신상희 교수와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민주주의적 가치를 위해 인문학을 교육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깔려있을 때, 과연 나치에 협력한 혐의를 안고 있는 하이데거만을 연구해온 사람과 그의 작업들은 어떻게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얼 쇼리스의 입장과 같은 '하나의 인문학'이 지배하는 세상은, 인문학이 통째로 사라진 세상만큼이나 끔찍할 수 있다.
애초에 '인문학의 위기'라는 논의의 프레임 자체가 잘못되었다. 인문학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기초학문의 연구가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당장 돈이 되는 학문, 돈이 되는 학과로만 정부 및 대학들의 지원이 쏠린다. 해당 분야 내에서 충분히 인정받는 연구 실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더라도, 해외의 연구지에 등재되지 않으면 성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식의 협박이 횡횡한다.
이것은 인문학의 위기지만 인문학'만'의 위기는 아니다. 기초학문 전체의 위기를 놓고 연대의 범위를 넓혀나갈 때 비로소, 한국 사회 내에서 대학이 갖는 위상과 그 대학 속에서 학문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고찰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우선 '인문학의 위기'라는 단어가 너무도 '핫'하게 떠올라버렸다. 그리고는 그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어떤 하나의 인문학적 해석 및 방법론이 마치 모든 문제의 해법인 것처럼 논의되고 주창되고 도덕적 우월성을 지니는 명제처럼 유통되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이여, 고매한 상아탑에서 벗어나 대중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라!' 얼마나 쉽게 대중들의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구인가. 그리하여 인문학의 위기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대중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 연구실에서 파고들어야만 하는 철학을 연구하는 인문학자들은 쓸쓸히 잊혀지고 생계를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5.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책 자체가 지니는 가치는 쉽사리 폄하될 수 없는 것이다. 학문과 세상이 맺어야 할 올바른 관계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고, 그것을 실천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책갈피마다 끼워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린 '인문학의 위기'는 훨씬 더 크고 본질적인 사태이며, 『희망의 인문학』은 그 문제 중 일부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전체에 대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문제는 오직 이 책만을 혹은 이 책에 대한 소개만을 읽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내뱉는 목소리가 인문학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 『희망의 인문학』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촉발된 국내의 담론들은 한층 더 문제적이다. 고매한 상아탑의 학자들이 대중들과 지식을 나누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중, 그 연구자들이 적절한 수준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식 나눔', '배움의 공유' 같은 그럴싸한 단어들이 횡횡하는 가운데, 오랜 세월과 노력을 들여 얻은 지식을 무료로 배포하라는 목소리만 높을 뿐이다.
얼 쇼리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희망의 인문학』을 읽고 감동받았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인문학자들에게 무턱대고 지적 자원봉사를 요구할 때,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얼 쇼리스는 못을 박는다. "…(중략)… 자원봉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름지기 대학 수준의 강의는 자원봉사자가 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코스 교수들은 일류 대학의 조교수들이 받는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23쪽)
인문학 하는 너희들이 지금까지는 너희들끼리만 통하는 소리 하고 시시덕거렸으니 좀 굶어도 싸다, 굶기 싫으면 '소통'해라, 이런 식의 폭력적인 요구가 적어도 『희망의 인문학』에는 담겨있지 않다. 국내에서 시행되는 '좋은 활동'들 중 상당수가 참여자들의 인내와 고통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다른 인문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도 '상아탑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만큼의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얼 쇼리스는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국내에서 통용되는 '희망의 인문학'에 대한 논의에 이와 같은 현실적 고려가 담겨있긴 한가?
필자는 한 선출직 공무원이 쌀농사에 대해 내놓은 '아이디어'를 비판하면서 이 서평을 시작했다. 쌀이 잘 안 팔리면 쌀로 국수를 만들면 되지. 이 발상은 현실성이 없다. 쌀로 국수를 먹은 사람이 또 밥을 먹는 게 아니니까, 전체적으로 쌀 소비량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쌀국수를 만드는 쌀과 우리가 밥을 해먹는 쌀은 종(種)이 다르다.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설익은 담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생을 바쳐 어떤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너 고매한 상아탑에서 머물지 말고 '희망의 인문학' 해봐 라고 말하는 것은 농민들에게 벼 뽑고 안남미 심으라고 하는 말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제에 대한 해법이 아니며, 오히려 문제를 가중시킬 뿐이다.
『희망의 인문학』은 인문학에 대한 국내의 담론에서 한 이정표가 되는 책이다. 이 책의 성공과 그 파장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현상은 매우 다양하고 중층적이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하는 것 자체는 대단히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미약한 빛이 비춰지고 오직 그것만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해법처럼 이해될 때, 누군가는 굶고 절망하고 죽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윤리가 아닌가? 죽음을 기억하는 것, 잊지 않고 거짓 해법에 열광하지 않는 것. 인문학이란 본질적으로 기억하고 되새기는 학문이니까. 다양한 논의와 해법이 오가는 가운데 진정한 '희망의 인문학'이 도래할 날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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