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31

<반일 종족주의>, 이영훈 외, 2019.

<반일 종족주의>는 실증주의적인 책이 아니다. 이영훈 교수, 혹은 그와 뜻을 함께하여 <반일 종족주의>라는 단행본 및 그 단행본의 토대가 된 연속강연에 참여한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 책은 대단히 이념적이다.

여기서 나는 '이념적'을 '나쁘다'의 동의어로, '실증적'을 '좋다'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반일 종족주의>가 이념적인 책이라는 내 주장은, 말 그대로 이 책이 사실관계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이념적 차원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이영훈 본인 스스로가 경제적 사료를 통해 한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인물이다. 책에 참여한 다른 학자들 역시 각자의 분야에서 쟁쟁한 입지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런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반일 민족주의>는 오직 사실만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둘러싼 온갖 '거짓말'과 싸우는 책일 뿐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일 종족주의>는 그렇게 단순한 책이 아니다. 이 책에 참여한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대표 저자인 이영훈은 조선왕조의 몰락부터 대한민국의 건국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모종의 거대 서사를 기획하고 있다. '반일 종족주의'는 그 거대 서사 속에서 가장 강력하고 음험한 적을 지칭하기 위해 그가 공들여 만들어낸 개념이다.

이영훈의 이러한 기획이 드러나는 것은 1부를 지나 2부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20장에 이르러서이다. 그곳에서 그는 서구의 민족주의가 근대국가의 형성에 기여한 바를 되짚으며, 따라서 서구의 민족주의는 한국의 민족주의와 달리 개인주의의 자양분일 수 있다는 논변을 편다.

이영훈의 구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지속'과 '심성'을 경유하여, 한반도 거주민은 단 한 번도 철저히 뿌리뽑히지 않은 '장기지속의 심성'인 샤머니즘에 사로잡혀 있다는 아주 강한 주장을 펼친다.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개심은 그러한 샤머니즘의 원인이며 동시에 그 샤머니즘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민족주의의 저변에는 장기지속의 심성으로서 샤머니즘이 흐르고 있습니다. 문명 이전의, 야만의 상단上段에 놓인 종족 또는 부족의 종교로서 샤머니즘입니다. 그것이 문명시대 이후에도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성립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 특질을 강하게 띱니다. 한국의 민족은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와 거리가 멉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 신학이 만들어 낸 전체주의 권위이자 폭력입니다. 종족주의 세계는 외부에 비해 폐쇄적이며 이웃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이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일 종족주의입니다.[251쪽]

물론 이정도의 주장을 우리는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건 좌우를 넘어서는 문제다. 우파 버전이 '반일 종족주의'라면, 좌파 버전은 '한국은 아직 탈근대를 거론할 수 있을만큼 근대화하지 못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 주장은 사실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다만 이영훈이 그 '반일 종족주의'의 사례로 위안부와 징용 문제를 구체적으로 짚고 넘어갔기에 논란이 커졌을 따름이다.

그러나 친숙한 주장을 편다 해서 친숙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정치적 성향이 어찌됐건, '한반도의 전근대성'에 대해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인상비평을 내놓은 후 그냥 까먹어버린다. 반면 이영훈은 나름의 (실증적?) 근거와 (페르낭 브로델이라는 빅 네임을 경유한) 이론적 틀을 제시하고 있다.

이영훈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러한 논의 전개를 좀 더 진지하게 상대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한 사실의 조합이 아니라, 그 사실을 모으고 하나의 서사로 만들어내는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 특히 2010년대 말부터 2020년대 지금까지의 정치적 과정의 전개에 있어서 일본을 적개시하는 민족주의가 정부에 의해 증폭되는 과정은 크게 우려스럽다. 이영훈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 중 국군위안부는 완전히 잊혀지고 오직 일본군 위안부만 거론되는 상황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데, 이와 같은 지적은 비 NL 계열의 여성운동가들도 자주 해왔던 것으로서 유의미하다. 즉, 구체적인 사실관계만 놓고 볼 때 <반일 종족주의>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차원에서 나름 유의미한 점이 없지 않다.

문제는 <반일 종족주의>가 다소, 혹은 상당히, 정직하지 못한 책이라는 데 있다. 이영훈은 자신이 오직 사료에 입각해 사료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특정한, 그리고 저자가 좀 뚝딱 만들어낸 듯한 인상을 주는 역사철학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철학은 일종의 뒤틀린 자학사관이며, 전도된 탈식민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영훈은 한국에 근대성을 이식한 일본의 영향, 미국의 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예견하고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며 독립국가를 만들어내신 이승만 대통령의 찬란한 능력을 예찬하고자, 그 반대편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 한반도 거주민들의 토속성을 물신화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물신화인가? 왜냐하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어느 상황을 보더라도, 모든 인간 사회는 이영훈이 지적하는 정도의 야만성, 원시성, 주술성, 토속성을 두루 가지고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서는 배울만큼 배운 고학력 리버럴들이 자식들에게 백신 접종을 하지 않겠다며 시위를 하고, 스위스에서는 모스크를 폐쇄하는 '민주적 주민투표'를 거행한다. 우리가 잘 모르면서 모범국가의 사례로 꼽는 북유럽 국가들 또한 그 내막을 보면 비슷하다.

모든 국가는 각자 물려받은 '장기지속의 심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오늘날처럼 SNS를 통해 포퓰리스트들이 활개치는 시절이 오면 그것은 다양한 외양을 띠고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것을 활용하고자 하는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더욱 심각한 모습을 종종 드러내는 듯 보인다.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영훈은 그러한 '장기지속의 심성'을, 마치 환빠들이 단군의 후예를 몰아낸 중국 한족 묘사하듯 바라본다. 이는 그다지 학문적으로 엄밀성을 갖추지 못한 역사철학으로 수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 진정으로 토론해야 할 여지는 바로 그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영훈과 그의 동료들이 지적하는 내용 중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전반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역사관, 특히 이승만이 저지른 공과 중 과오를 굳이 덮어놓거나 축소하려 하는 경향 등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이영훈이 말하는 '반일 종족주의' 내지는 '장기지속의 심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올바르면서도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다.

2020-01-25

빌 게이츠 vs. 트럼프 (그리고 문재인)

"정치가 끼어들 될 수 있다는 건 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우리 정부일 거라고는 결코 생각해본 적이 없었죠."
"We always knew there would be politics involved. We never thought it would be out government."

망치를 잡은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빌 게이츠는 순순히 인정한다. 자신의 망치는 기술이며, 세상 모든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려 한다고.

하지만 천하의 빌 게이츠도 정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세상을 구하는 가장 중요한 승부처인 기후변화와의 싸움 앞에서. <인사이드 빌 게이츠> 를 3부까지 다 본 후의 소감이다.

3부는 빌 게이츠가 만든 원자력 벤처 기업 테라파워의 홍보 영상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 그럴만도 하다. 사람들이 워낙 싫어하고, 두려워하면서, 정작 알고자 노력하지도 않는 분야가 바로 원자력이기 때문이다.

테라파워에서 설계한 진행파 원자로는 지금까지 '핵폐기물'로 취급하던 사용후핵연료를 연료로 삼는다. 미 정부가 보관중인 '핵폐기물'을 연료로 쓸 수 있고, 지금껏 저장된 '핵폐기물'을 통해 미국 전체가 125년간 사용할 에너지 전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막대한 가능성 앞에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에너지와 환경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만큼 굉장한 일이다.

물론 본인이 개발한 아이템을 세일즈하는 사람의 말이긴 하다. 그러나 1) 인류 전체가 쓰고 남을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2) 이산화탄소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고 3) 사고가 발생한다 한들 원자로가 자체냉각되는 원자력 발전소가 개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빌 게이츠는 온갖 천재들을 끌어모았다. 그 중에는 <모더니스트 퀴진> 시리즈로도 유명한 네이선 미어볼트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누군지 궁금하다면 직접 검색을 해보시라. 아무튼 빌 게이츠와 테라파워의 입장은 확고하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이성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원자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와 테라파워는 온갖 재능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진행파 원자로의 개념 설계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완료했다. 2015년 시진핑을 만나 중국에 대량 보급하는 계약을 체결했지만, 2016년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2017년 문재인이 당선되면서 원전 생산의 생태계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중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다른 모든 발전소와 마찬가지로 인프라 건설 사업이다. 여기서 사업성이 맞으려면 생산과 소비에서 규모의 경제를 갖추어야 한다. 빌 게이츠가 생산과 소비를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중국을 찾아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반면 한국은, 중국처럼 막대한 양의 원자력 발전소를 소비해줄 수는 없지만, 지어낼 수 있는 능력은 있다. 테라파워에서 개발한 기술을 얼마나 공유하고 이전할지가 관건이긴 하겠으나, 적어도 현재 표준 기술이라 할 수 있는 경수로의 건설, 유지, 관리 등에 있어서 한국은 독보적인 나라다.

그러나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다. '원자력 마피아'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노정태부터 그레타 툰베리까지 모든 인류가 오래도록 안정적인 기후 속에서 풍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짓밟고 있는 것이다. 선량하고 정의로운 가치를 표방하며 당선된 문재인과, 노동계급의 불만을 들먹였지만 결국 미국 사회의 이주민 혐오를 무기삼아 당선된 트럼프는, 그 점에서 큰 교집합을 그린다.

지난번에 <인사이드 빌 게이츠> 1부를 보고 내놓았던 감상과 이 대목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 많은 문제들은 기술로 해결 가능하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사람이 해결해야 한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정치로 수렴한다. 따라서, 천하의 빌 게이츠도, 정치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인류 전체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의 탈원전은 철회되어야 한다. 순식간에 많은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집단이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인사이드 빌 게이츠>는 우리에게 모종의 자아 성찰의 기회까지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01-23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방금 보고 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단순한 레즈비언 연애물인 것처럼 시작해, 마치 유화처럼, 한 겹씩 한 겹씩 레이어를 덧입힌다. 그리하여 소박하면서 웅장하고, 섬세하면서 대범하며, 응시하지만 귀기울인다. 온갖 모순되는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꽉 차있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기생충>이 아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황금종려상을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칸느 심사위원들의 여성혐오를 은폐하기 위한 도구로 봉준호의 영화가 소비되고 말았다는 것까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블랙 코미디'를 이루는 것 같기도 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예술 형식으로서의 영화가 죽었다는 말이 헛소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가 왜 존재하는지를, 압도적이면서도 담담하게 입증한다.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말로도 벅차오르는 감동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빌 게이츠와 신뢰의 화장실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의 1화는 빌 게이츠의 어린 시절과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동시에 다룬다. 화장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부질없이 목숨을 잃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그 문제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지도층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빌 게이츠는 그 문제를 직시하고,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방식대로, 최선의 기술적 돌파구를 마련하여 해결하려 한다.

문제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가 기술, 테크놀로지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다큐멘터리 내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개발도상국의 대도시에는 대체로 하수처리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잘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런 사회기반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이 마련되지 않거나, 마련된다 해도 운영 과정에서 새어나가기 때문이다.

즉 개발도상국 화장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해당 국가의 사회적 자본이나 신뢰 따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빌 게이츠가 '선의'로, 그러한 사회적 신뢰를 요구하지 않는 혁신적인 화장실을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가령 인도에서는 고철 및 비철금속의 가격이 상승하면 갑자기 사람들이 죽기 시작한다. 살인이 늘어나서가 아니다. 맨홀 뚜껑을 뜯어서 팔아먹는 도둑들 때문이다. 가로등이 있거나 제 기능을 못하는 깜깜한 거리에서, 도둑이 뚜껑을 훔쳐간 맨홀에 사람들이 빠져서 다치고 죽는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 게이츠가 인도의 거리에 CCTV를 설치해준다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도둑들이 훔쳐가봐야 팔아먹을 수 없는 재활용 플라스틱 따위로 맨홀 뚜껑을 개발해준다면 어떨까? 도둑은 맨홀 뚜껑을 훔쳐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멀쩡히 길을 걷던 사람이 땅으로 쑥 꺼지면서 목숨을 잃는 일도 상당부분 방지할 수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저런 방식은 문제에 대한 해결로 보이지 않는다. 맨홀 뚜껑을 훔쳐갈만큼 극심한 인도의 가난, 그리고 맨홀 뚜껑을 훔쳐가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인도라는 국가의 치안 등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안 죽는다면 그것은 진보다. 하지만 사회적 신뢰의 부재로 인해 인프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생길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은 여전히 발생할 것이다.

맨홀 뚜껑 도둑 문제와 하수처리장 유지비 도둑 문제는 결국 같은 것이다. 공공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사취하는 자들을 해당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감시하고 처벌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빌 게이츠는 개발도상국에 전기가 필요 없는 화장실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나라에 이미 건설되어 있는 발전기를 돌려서 이미 있는 하수처리장을 가동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의 전반적인 사회적 공공 의식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언론에서 글을 쓰거나 썼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나는 기술결정론자요 기술만능주의자다. 나는 원자력이라는 새로운(19세기에 발견되어 20세기에 상용화된) 기술을 인류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기후변화라는 전대미문의 재앙과 맞설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하지만 그 모든 기술의 개발, 발전, 사용은 사회적 신뢰가 당연히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부럽게도 빌 게이츠는 사회적 신뢰를 중시하는 나라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돈을 벌었고, 그 미국인들의 선한 의지를 세계 만방에 과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시설이나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자본이 없어서 돌아가지 않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모든 사회는,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 말이다.

2020-01-19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

입만 열면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하던 분들 중, 지금 청와대와 여당 및 그 지지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해리스 대사 콧수염 일제 순사' 레퍼토리에 똑부러지게 반대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쪽바리'가 혐오발언인 게 분명하다면, 일본계 미국인을 상대로 '일제 순사같은 콧수염' 타령하는 것이 혐오발언이다. 이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처럼 여겨지지만, 우리의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도 하다. 어떻게 우리 한국인이 백인과 일본인 혼혈인 미국 대사를 '인종차별'할 수 있느냐는 식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지만, 침착하게 설명해보자. 어떤 발언이 혐오발언이냐 아니냐, 인종주의적 언사냐 아니냐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속한 국가의 국력 차이와는 무관하다. 그저 '당사자에게 부여된 어떤 범주를 폄하와 모욕의 근거로 삼느냐'만 따져보면 된다.

가령 우리는 드록바를 '흑형'이라 부르는 게 인종주의적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50센트라던가, 쿤타 킨테라던가, 심지어 버락 오바마를 상대하더라도 '흑형' 타령을 하면 그것은 인종주의적 발언이다. 다시 말해 흑인에 대한 '흑형' 운운은 해당 흑인의 모국과 한국의 국력 차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백인, 혹은 백인 혼혈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그 또한 억지다. 한국에서 미군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많은 혼혈인들이 당해온 모욕과 차별을 도외시하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드록바한테 '흑형' 하는 거나, 웨인 루니한테 '백돼지' 하는 거나, 둘 다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이다. 해리스 대사를 두고 '일제 순사', '조선 총독' 운운하는 게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이라는 걸 의심할 여지가 있긴 한가?

유시민이 만들어낸 '인디언 기우제식 수사'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미 대륙 원주민은 날씨와 기후의 변화를 파악하고 대응하지 못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이 사안에 대해서도 굳게 입을 다물어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차별주의에 반대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파의 이익을 안겨주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들은, 당신들은, 심지어 선량하지도 않다. 그저 차별주의자일 뿐이다.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세력에게 딱지를 붙이고 몰아세우기 위해 인권을 동원하고 있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일말의 인권에 대한 관심 없이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던 시절에는 당신들이 인권을 적에게 던지기 위한 돌맹이 취급하던 것이 유의미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아니다. 나는 당신들의 '선량함'에 반대한다.

2020-01-12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 (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제목: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2020년 1월 8일, 요헨 비트너(Jochen Bittner) 작성

독일, 함부르크 - 독일인들은 비이성적인가? 스티븐 핑커라면 그렇게 생각할 듯하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핑커는 최근 독일 시사 잡지인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인류가 경제 성장을 멈추지 않으면서 기후 변화를 멈추고 싶다면, 원자력을 덜 쓰는 게 아니라 더 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원자력을 몰아낸다는 독일의 결정은 "편집증적(paranoid)"이라고 말이다.

내 조국은 실로 독특한 실험을 감행하는 중이다. 메르켈 정부는 원자력과 석탄 발전소를 모두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독일 최후의 원자력 발전소는 2022년 말에 폐쇄될 예정이며, 최후의 석탄화력발전소는 2038년 문을 닫을 예정이다. 동시에 정부는 친환경적인 전기차 구입을 촉진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전력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난 수십년간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에너지 소비는 1990년 이후 10퍼센트 상승했다.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은 독일이 위험한 경로를 걷고 있다고 우려한다. 화석 연료와 원자력이 빠진 손실을 채워넣을 수 있을만한 신재생에너지가 적절한 시점에 마련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신재생에너지는 독일의 전력 공급 중 4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이상 확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 이유는 기술적인 것보다 정치적인 것이다.

독일의 몇몇 지방에서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가는 "풍력 농장"에 진력을 내고 있다. 새로운, 많은 경우 더 큰 풍력 발전기가 주변에 세워지는 것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해안가에서 산업 중심지를 이어줄 송전선이 새롭게 깔리게 될 지역에서도 주민들의 저항이 늘어가고 있다. 공식적인 집계에 따르면, 독일의 "에네르기벤데(Energiewende)", 혹은 에너지 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송전선의 길이만도 5954킬로미터(3700마일)에 육박한다. 2018년 말 현재 실제로 건설된 송전선은 약 150킬로미터(93마일)에 불과하다.

이 계획은 전력 부족을 야기하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을 안고 있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석탄 화력 발전소보다 빨리 폐쇄하고 있는 탓에, 독일은 화석 연료에 의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독일은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기후에 피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대는 굳건하다. 60퍼센트의 독일인들은 가능한 한 빨리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현상의 이면에 놓인 태도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편집증은 정확한 용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는 딜레마와 맞닥뜨렸을 때 얼어붙은 듯 멈춰버리는 대단히 독일적인 특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선한 일이라면 열성적으로 달려드는 독일 같은 국가에게 있어서, 원자력 발전과 기후 변화라는 두 개의 악을 놓고 선택하는 것은 거의 수행 불가능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논의의 시작을 위해 언급하자면, 원자력 발전이 궁극적으로 안전한 것은 아니며, 독일인들은 특히 그 점에 대해 늘 불편함을 느껴왔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후,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아토마우스티에그(Atomausstieg)", 즉 원자력 발전을 단번에 완전히 포기하는 결정을 내린다. 왜? 당시 메르켈 총리가 설명한 바는 이렇다. "원자력 발전의 잠재적 위험은,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위험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에만 용인될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훈련받은 물리학자인 메르켈 총리는 원자력 재앙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같이 고도로 기술이 발전한 나라에서도 그러한 재앙이 발생했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바꾸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악인 기후 변화는 어떠한가? 그 재앙은 석탄화력발전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으며 거의 확실하게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메르켈 총리는 최근에서야 "기후 변화는 우리가 몇 년 전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고 인식했다. 동시에 메르켈 총리는 독일이 파리 기후 협약에서 약속한 바를 이행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나온 희망찬 숫자를 놓고 보더라도, 2020년 말까지 탄소 배출양의 40퍼센트를 줄인다는 목표치는 달성 불가능하다. 기후 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이해가 2011년 이후 훨씬 깊어졌으니, 각 국가들은 화석 연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가 원자력을 폐기하겠노라는 생각을 바꿀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원자력으로 회귀하는 것은 녹색당의 입장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녹색당은 향후 메르켈의 기민당이 연정을 맺어야 할 상대이기도 하다. 녹색당은 1980년대 초 반핵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반핵운동은 녹색당의 DNA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이중 구속 상태에 대해 녹색당은 그럴듯한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한 듯하다. 아날레나 베르보크(Annalena Baerbock) 녹색당 공동대표는 독일 국영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독일이 석탄 발전소를 더 빨리 폐쇄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를 더 오래 유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러한 발상 자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나라의 그 누구도 우리 이웃의 정원에 원자력 폐기물을 묻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그는 대답했다.

그건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원자력 에너지가 방사성 폐기물과 기술적 사고의 위험을 사회에 전가시키면서 기업의 배를 불리고 있는 것 또한 맞다. 하지만 석탄 발전소가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는 계산 또한 참이다.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은 독일의 거의 종교적 반핵 정서가 기술 발전에 따른 논의의 여지를 전혀 남겨놓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미국, 러시아, 중국의 과학자들은 방사성 폐기물을 이용해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사용후 핵연료 보관 문제, 즉 원자력에 반대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인 그것의 해법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른바 고속증식로에도 나름의 위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재생 가능 에너지 시대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원자력은 석탄이나 가스 발전소보다는 나은 선택지가 아닐까?

일체의 원자력 발전소를 급속도로 폐쇄하면서, 독일은 [원자력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 독일은 어쩌면 인류가 본 것 중 가장 안전하고 가장 친환경적인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는 기술과의 접점을 차단해버렸다. 독일이 현존하는 원자력 발전소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화석 연료의 사용을 급격하게 줄이는 방안이 될 수 있을텐데 말이다.

원자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비이성적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기회를 그냥 흘려 보내는 것은 메르켈 시대가 낳은 최악의 실수 가운데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요헨 비트너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의 토론 지면의 공동 담당자이며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기고한다.

원문: Jochen Bittner. “Opinion | 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The New York Times, 2020년 1월 8일, sec Opinion. https://www.nytimes.com/2020/01/08/opinion/nuclear-power-germany.html.

2020-01-09

사막의 생명, 인간의 에너지

내 로망 중 하나는 사막 여행이다. 물론 생명에 위험이 없을만큼 안전한 루트와 일정이 제공될 때 일이지만, 아무튼. 나는 사막에 피어나는 온갖 식물과 동물들의 조화를 만끽해보고 싶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막도 생태계다. 사막에는 사막의 환경에 최적화된 동물과 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온대 기후에 적합한 우리 인류, 호모 사피엔스의 눈에 '가치' 있는 생물군이 매우 부족해서 그렇지, 사막의 생태계는 사막 나름의 논리와 치열함을 지니고 오늘도 작동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서부 해안가 대도시에 살면서 인근 사막에 태양광 발전기를 뒤덮어버리는 미국 리버럴들의 '환경주의'에 동의하기 힘든 이유도 그래서이다. 그들은 생태계 보호니 환경이니 잘도 떠들지만, 자기 양심을 달래기 위해 사막 생태계를 황폐화시키는 일은 서슴치 않고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말로 생태계를 보호하고자 한다면, 에너지 생산 및 소비 과정에서 최대한의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발전 양식은 모두 지양하는 것이 옳다. 대신 원전처럼 아주 좁은 면적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뽑아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래야 더 많은 땅에 더 많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발자국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자연은 되살아난다. 흔히 '죽음의 땅'이니 뭐니 하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현장 인근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발을 끊자, 멸종된 줄 알았던 야생동물까지 모두 돌아와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반면 당신들이 뒤덮어놓은 태양광 발전기는 오늘도 전자파를 내뿜고, 거대한 풍력 발전기에는 곤충과 새들이 부딪쳐 죽는다. 누가 친환경인가? 누가 생태계 파괴자인가?

참고: Pat Brennan, "Desert damage: the dark side of solar power?", PHYS.ORG, 2009년 3월 30일.
Sammy Roth, "Study: California solar farms threaten desert species", The Desert Sun, 2015년 10월 19일.

2020-01-06

필립 풀먼에게서 배우는 글쓰기 수업

작가 필립 풀먼은 새로운 3부작 <먼지의 책>(The Book of Dust) 가운데 첫 번째 편을 깜짝 발표하면서 리라 벨라쿠아(Lyra Belacqua)의 세계로 돌아왔다.

<아름다운 야수: 먼지의 책 1권>(La Belle Sauvage: The Book Of Dust Volume One)은 풀먼의 71번째 생일에 맞춰 목요일에 출간되었다. 그가 앞서 내놓은 3부작의 후속작으로는 17년만이다.

<황금나침반> 시리즈의 리라는 중요 인물 중 하나로, 이야기는 리라가 생후 6개월이던 시절부터 시작한다. 수녀들 틈에 숨어 있는 리라의 삶에 11살 소년 말콤 폴스테드가 끼어들어, 그의 카누인 아름다운 야수에 리라를 태우고 보호해주게 된다.

풀먼을 이토록 성공적인 작가로 만들어준 비결이 있다면 무엇일까? 갓 시작하는 작가들에게 그가 건낼 조언은 무엇일까?

BBC와 마주 앉아, 풀먼은 그의 행운의 펜에 대해, 그리고 전동드릴이 돌아가는 상황에서는 일할 수 있지만 왜 절대 음악은 안 되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1. 캐릭터가 스스로를 드러내게 하라.

그것은 신비로운 과정이다. 물론 나의 일부는 그들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하지만 만들어내든 것과는 다른, 발견하는 느낌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더 나은 단어를 찾아 종이 위에서 펜이 움직일 때까지 책상에 앉아 텅 빈 벽을 바라보며 기다린다.

이 과정을 신비롭게 포장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 느낌은 발명보다는 발견에 가까운 것이다.

마치 이야기가 이미 그곳에 있고, 내가 그것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그 이야기를 말하는 최선의 방식을 찾아내는 것과 같달까.

이 희한한 일에 대해 내가 모든 것을 확실히 안다고 할 수는 없고, 실은 어떤 식으로 장담을 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의혹에 빠져 있는 상태를 좋아한다.


2. 언제나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황금나침반> 시리즈를 끝내고 난 후,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황금나침반> 시리즈에서 말한 리라의 이야기는 결말로 향하고 있었고, 끝났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들이 늘 존재한다. <황금나침반> 시리즈가 끝날 때 리라는 고작 12살이었을 뿐이다. 성장하고 어른이 될 것이다.

리라에게는 많은 일이 벌어질 것이고 무언가를 해낼 것이다.

나는 그게 궁금해졌다. 말하자면 내 시각의 바깥에서, 내 눈이 닿는 구석 너머에서, 나는 내 흥미를 끄는 다른 캐릭터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점점 내 펜이 그 이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외에 퍽 많은 일들을 해오고 있었지만, 이 새로운 이야기의 설득력과 재미가 너무도 강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캐릭터들이 너무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3. 자신에 차 있지 못한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음악을 듣지는 마라.

나는 (내 글이) 좋다고 생각했던 적이 전혀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래, 이 정도면 되겠네" 정도다.

글을 쓸 때 나는 사실 의미보다는 소리를 더욱 의식한다. 어떤 단어가 문장에 들어갈지에 앞서 문장이 어떤 리듬으로 흘러갈지를 먼저 알게 되는 편이다.

이것은 내가 글을 쓰는 방식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음악이 틀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글을 쓰지 못한다.

어떤 작가들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나는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

고요한 상태는? 좋다. 전동 드릴 소리는? 괜찮다. 교통 소음? 문제 없다. 하지만 음악은 절대 불가다. 그러므로 나는 고요한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리듬을 들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4. 어조(tone)가 구조보다 더 중요하다.

글이 흘러가는 방향이라면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글이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방법은 모른다.

구조를 만들지 않는 것, 그렇다, 나는 그런 식이다. 하지만 나중에 구조가 잡힌다. 종종 구조를 어떤 근본적인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다.

구조는 피상적인 것이다. 책에서 근본적인 요소는 어조, 말하는 어조이며,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모든 문장을 바꾸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구조는 최후의 순간에 바꿀 수 있다. "중간부터 시작하겠다"라던가, 그런 비슷한 말은 가능하다. 구조는 존재하는 것이지만 뒤따라온다고 할 수 있다.


5. 가장 좋아하는 펜을 골라라.

일단, 나는 볼펜과 종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이게 작동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행운의 펜을 가지고 있다. 몽블랑 볼펜이다. 무게와 크기가 완벽하기 때문에 사용한다.

그리고 잘 작동한다. 그 볼펜으로 여러 책을 썼다. 이제는 그 볼펜 없이는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만약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일단 글을 쓴다. 그리고 한 챕터나 두 챕터를 쓸 때마다 컴퓨터로 옮긴다. 지금껏 발명된 편집 도구 중 최고의 것이기 때문이다.


6. 자신을 위해 써라.

글을 쓸 때는 자신을 만족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다른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이란 누군가에게 읽힐 때까지는 온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그 상호작용에서 독자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읽고 싶은 것을 읽어야 한다.

나는 나를 위해서 글을 쓴다. 지금껏 있어온 모든 '나 자신들'을 위해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나부터, 처음으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던 나, 50년 전에 옥스포드에 있었던 나, 학교 선생으로 일했던 나, 교실에서 이야기를 해주던 나.

이 모든 나 자신. 나는 나를 위해 글을 쓴다. 나는 넓은 독자층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다. 그 독자들 속에 어른과 아이가 모두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원문: "Philip Pullman: Rules of writing from man behind His Dark Materials", BBC, 2017년 10월 19일.

개인적으로 4번이 가장 인상적이다. 소설 뿐 아니라 기타 분야의 글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저 구절을 갈무리해두려는데, 혼자 보는 자료 모음집에 담아둘까 하다가, 전문을 번역하여 블로그에 올려둔다.

2020-01-01

작년의 영화: <우상>(2019)

<우상>은 <비밀은 없다>의 남매편(자매편x 형제편x) 같다. <우상>에서 성매매가 등장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분들은 <비밀은 없다>에서 디지털성범죄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되짚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두 작품 모두 결백하지 않은 인간들이 등장해, 최선을 다해 싸우는 이야기.

<비밀은 없다>를 좋아한 사람이 <우상>을 좋아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전자를 '이해'하면서 볼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후자도 적어도 '이해'는 하면서 볼 수 있다. 양자 모두 평균적인 한국 관객의 영상 리터러시보다 기준점이 훨씬 높기 때문에 애초에 흥행은 불가능한 작품이다.

<비밀은 없다> 이후 한국 영화가 이렇게 '영화답게' 나온 것도, 글쎄, 내 기억에는 중간에 끼워넣을만한 작품이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요 사건 설정, 인물 구도, 기타등등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비밀은 없다>를 본 사람이라면 <우상>은 보고 나서 판단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싫음 말고...

참고로 나는 문제의 '그 장면'을 보면서 문득 <말죽거리 잔혹사>를 떠올렸다. '대한민국 학교 다 좆까라 그래 씨발~' 하더니, 결국에는 강남의 입시학원 다니는 게 결론이었던 그 영화. <우상>도 '대한민국 정의 도덕 다 좆까라 그래 씨발~'을 외치는데, 이쪽은 그따위 얄팍한 자기변명이 아니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애초에 그 남자와 결혼을 한 게 잘못이었다. 왜 결혼했을까? 그 남자는 '전라도 출신 미녀'가 필요한 정치 지망생이었고, 연홍은 탑 스타가 못 될 것이 거의 확실한 가수(지망생)이다. 물론 사랑도 했겠지. 남자의 야망에 탑승해 스포트라이트도 받고 싶었고. 근본적인 실수.

<우상>의 중식도 아주 근본적인 실수를 했다. 극중에서 아예 본인의 입으로 말을 해버린 그것일 수도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어떠한 방향으로건 비극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세팅. 두 영화 모두, 두 인물의 근본적인 실수에서 출발해, 한국 사회가 없는 셈 치는 '터진 맹장'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극장에서 '터진 맹장'(참고로 이것은 영화와 완전히 무관한, 내가 방금 떠올린 은유다) 같은 걸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우상>을 안 보는 편이 나을 수 있고, 솔직히 본다 해도 뭐 이해가 될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비밀은 없다>를 따라갈 수 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봐도 좋을 것이다.

다음 영화에서 댓글을 보니까 정말 '그 장면'에 진심으로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우상>은 어쨌건 '우상 파괴'에 성공한 것이다. 흥행에는 실패했(다고 지금 말해도 큰 무리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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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5일 남겼던 기록. 내가 작년 본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우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