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8

광화문과 門化光


광화문 한자 현판이 門化光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한자가 기본적으로 세로쓰기이며, 문장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문 세로쓰기 문장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고대 중국인들이 택한 매체, 죽간 때문이다. 오른손에 붓을 쥔 사람이 왼손으로 죽간 두루마리를 풀어가며 글씨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마치 지금 우리가 종이에 글씨를 쓸 때 문장이 점점 아래쪽으로 쌓여가듯, 죽간의 문장은 (글씨 안 쓴 여백이 왼쪽 두루마리에 있으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된다.



이는 매체의 물리적 속성이 문자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언가에 관한, 책>의 저자 애머런스 보서크는 이렇듯 "형식에 의해 제시되는 이용가능성"을 행위유도성(affordance)이라 부른다.

우리가 고대 중국의 죽간 때문에 생긴 행위유도성과 그로 인한 한문 작성법을 2020년 현재까지 그대로 따르고 있을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광화문'이 아니라 '문화광'이라고 까는 건 정말이지 너무도 무식한 소리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정말이지 통탄할 일이다. 레닌이 말했다시피 무식이 혁명에 도움이 되는 일은 없다. 좀 유식하게 살자.

댓글 2개:

  1. 갖고 있는 한글 책 중 우종서 방식이 딱 하나 있군요.
    74년에 集文堂에서 번역되어 나온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일본어 책이야 거진 우종서고요.
    평소 읽는 텍스트의 7할이 우종서다보니 나름 익숙해지긴 했지만 역시 사람 눈은 가로로 달려 있다보니 좌횡서 한글을 읽는 데 비하면 애로 사항이 많습니다.

    http://egloos.zum.com/sbrobo/v/5915330
    매체의 물리적 속성이 문자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는 다르지만 흥미로운 주제라 링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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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링크 재미있네요. 안그래도 약 2-3년 전부터 구글을 비롯한 거대 인터넷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텍스트 진행 방향 선택' 옵션을 만들고 있어서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좌횡서가 아니라 우횡서로 읽고 쓰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거나, 그 시장을 노릴 필요가 있다고 느꼈거나, 뭐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그것과 악보가 같이 따라가는 상황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저는 집에 한글로 적힌 우종서 책이 단 한 권도 없습니다. 한글 역시 한자와 마찬가지로 세로쓰기를 전제로 만들어진 글자고, 세로쓰기로 잘 조판된 책들은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이제 대세가 완전히 바뀌었기에 그런 책을 만들지도 않고 읽지도 않으니까요. 일본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서 일본 서적을 읽다보면 우종서 책이 책장을 더 채워나가지 않을까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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