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4

행정수도, 한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유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 아니라 워싱턴 아니냐, 한 나라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가 수도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 하시는 분들께.

미국의 수도가 왜 워싱턴 DC인지 알고 계시는지요.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하여 13개 주가 연방을 결성할 때, 가장 힘이 셌던 두 도시가 있습니다. 뉴욕 주의 뉴욕 시, 버지니아 주의 리치몬드 시.

지금 구글 지도를 펴서 미국의 동부 지도를 보십시오. 워싱턴 DC가 어디 있습니까? 네, 그렇죠. 뉴욕과 리치몬드의 중간에 있습니다. 가장 힘이 센, 남부와 북부를 대변하는 두 도시의 중간 지점에 연방의 수도를 새로 만든 겁니다.

이건 호주의 수도가 시드니가 아닌 캔버라인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호주에서 가장 힘이 센 도시 두 곳은 어디? NSW의 시드니, 그리고 빅토리아주의 멜버른. 그럼 연방국가 호주의 수도는? 그렇죠. 시드니와 멜버른의 중간 지대에 만든 인공 도시 캔버라가 되는 겁니다.

캐나다의 수도가 오타와인 이유도 똑같습니다. 서부가 개척되기 전, 가장 센 도시 두 곳, 몬트리올과 토론토. 둘 중 어디도 자체적으로 수도가 될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기에 중간 지점인 오타와가 연방의 수도로 낙점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세종이 무난하게 행정수도로 기능하려면, 부산이 서울에 맞먹을만큼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1차 세계대전 수준의 무장을 해서 전쟁을 했을 때 호각으로 싸울 수 있을만큼) 힘이 강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중간 지점인 대전이나 그 인근에 행정수도를 건설하는 게 말이 되죠. 아니, 안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서울과 수도권을 합치면 인구의 절반이 들어가고 산업생산 역시 절반을 넘깁니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권역은 중화학공업 생산기지와 항구를 가지고 있지만 수도권과 별도로 헤게모니 싸움을 할 역량은 없는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행정수도를 세종으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요? 서울은 장기적으로 황폐화되고, 잘못 만들어진 세종시가 제2의 서울 강남 기타등등이 되어서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골때리는 수도권 과밀 현상을 겪게 될 겁니다.

한국의 식자층 여러분, 꿈을 꾸는 건 좋지만, 우리의 현실에 입각한 소리들을 좀 하고 삽시다. 한국은 앵글로색슨이 주류가 되어 만들어낸 연방국가가 전혀 아닙니다.

이 나라의 풍토에서는 '행정수도' 같은 기능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정부의 핵심 기능을 세종으로 옮긴다는 건, 그냥 서울을 다 옮긴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서울을 세종으로 옮기면, 지금 서울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몇 배 더 심각하고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재현될 겁니다.

덧) 한국의 행정수도 논란을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2020년 현재, 갑자기 프랑스가 '국토 균형 발전'을 꾀한다며 파리와 마르세유의 중간 지점인 (심지어 제3의 도시 리옹도 재껴둔 채) 군소 도시 클레르몽페랑을 수도로 삼네 마네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권력이 수도 일극에 집중된 다른 나라를 예로 들어보니 감이 확 오지 않습니까?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운운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이며, 그것을 실현하는 게 얼마나 큰 혼란과 재앙을 초래할지?

덧2) 일본은 관서의 오사카, 관동의 도쿄가 전쟁을 해서 도쿄가 이겼죠. 도쿄는 자신들의 승리를 확고히하고자 천황을 '모셔와서'(납치해와서) 도쿄에 데려다 놓고 있고요. 그래서 일본의 수도는 지금껏 도쿄인 겁니다.

아, 국토의 균형 발전, 그거 참 좋은데, 일본도 도쿄와 오사카의 중간 어디쯤에 행정수도를 만들면 좋겠네요. 일본과 경쟁하는 한국 입장에서 절호의 기회가 될텐데.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을 추격하는 경쟁국들에게 아주 큰 기회를 공짜로 헌납하고 있는 셈입니다.)

댓글 8개:

  1. 사례로 드신 대조군의 또 다른 차이는 '어떻게 전 국토의 통일 혹은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었나, 그럴 필요가 있었나'군요.

    한국 - 박터지게 싸운 끝에 고려의 후삼국 통일 9세기말
    프랑스 - 박터지게 싸운 끝에 백년전쟁 끝난 15세기말
    일본 - 박터지게 싸운 끝에 에도막부 수립 17세기초

    미국, 캐나다 - 앵글로색슨족이 인디언들 때려잡으며 세운 이주민의 나라 18세기
    호주 - 앵글로색슨 죄수들이 인디언들 때려잡으며 세운 이주민의 나라 18세기(욕 아닙니다)

    전 국토의 통일을 백성의 무수한 피로 이뤄 낸 전자의 정권들은 필연적으로 절대군주제를 택했고, 장기간의 평화 속에서 내실을 다지며 근대적인 의회에 권력을 넘길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 상황에 힘의 이원화는 당연히 혼란만 가져왔겠죠.

    반면 후자는 이주민 입장에서 당장 원주민부터 몰아내고 그 넓은 땅덩어리를 적은 수의 인구로 개발하는 게 급선무였으니 여기저기서 지주가 되고 주마다 자치권이 강해졌지요.
    전자와 같은 식으로 하기엔 인구도 부족하고 땅은 더럽게 넓고. 선거인단 제도도 그래서 생겼고요.

    저들이 좋아하는 국뽕 관점에서 이야기하자면 의외로 한국의 역사는 국토 통일이 빨랐고 중세에서 근대까지 한 나라의 역사로서의 테크트리는 유럽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래서인지 수도와 지방의 하이어라키도 철저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처럼 서남전쟁 같은 내전도 없었고요.

    여러가지 병폐는 있지만 지금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국토의 발전 형태는 거창하게 말하면 이 역시 인류 역사의 공통 분모를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셈입니다.
    어떻게든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픈 저들 자격지심은 이해하는데, 자기가 가진 게 뭔지는 제대로 알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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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가 놓친 지점을 정확히 짚어주셨습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은 애초에 우리와 비교할 상대가 아니죠. 서울, 전주, 상주, 평양, 함흥 같은 도시들은 몇천년 전부터 정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고 우리는 그 후예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통일 전쟁을 겪었고, 고려시대 이후로는 단일 국가를 형성해 살아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고요.

      저 또한 서울이 너무 강한 도시여서, 사람과 자원과 정치적 관심을 다 빨아들여서 생기는 문제의 해결 필요성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수도 이전이 아니라, 정치 권력이 개인의 미시적 일상에 너무 자주, 너무 큰 영향을 미치는 한국의 권력 구조 탓이 크죠. 그런 '정치 리스크'만 없더라도 자기 고향에서 여생을 마치고픈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야기도 나중에 해볼까 합니다. 좋은 답글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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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정치 권력이 개인의 미시적 일상에 너무 자주, 너무 큰 영향을 미치는 한국의 권력 구조"를 해소하는 데 행정수도 이전이 도움이 될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아래 댓글에서 다른 나라들도 대도시에 정치, 문화, 경제 기능이 밀집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인구밀도, 중견기업의 지역적 분포 등 더 세밀한 분석을 보면 우리나라가 다른나라에 비해 확연히 기형적이라는 것을 알수 있을 겁니다.
      특히나 현대 권력의 핵심인 미디어가 다루는 내용만 봐도 지역적 편중이 심각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차례 정부로부터 지적 받은 '여의도 면적'이라는 표현은 사라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미디어가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대상에 수도권 외의 사람은 별로 고려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으시는 분이니 자신의 지식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좋겠지만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 너무 단정적인 표현을 것은 자제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행정수도 이전은 단순히 '미국 따라하기'가 아닙니다.
      더구나 미국을 포함한 별도의 행정수도를 가진 나라들의 정치적 역사를 우리나라가 공유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게 행정수도를 하면 안될 이유가 되는 것도 아니구요.

      첫번째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나라의 정치적 권력이 개인의 미시적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 생각앤 권력이 도달해야하는 범위가 매우 좁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은 수도권 사람들만 신경쓰면 된다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 받아야할 지역적, 사상적 범위가 넓다면 정치인들은 되도록 지역적으로 협소하거나 개별적인 사안보다는 국가적, 추상적 사안들에 관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겠죠.
      반대로 지방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할겁니다. 정치가 자신들의 미시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기는 커녕 자신들의 삶 자체에 관심이 없을 거라고 말할겁니다.

      행정수도의 이전은 적어도 행정서비스 만큼은 전지역, 전국민에게 편중되지 않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공공성의 입장에서 접근 되어야 합니다. 그를 통해 국가가 발전되니, 산업이 융성하니 같은 비판은 전혀 핀트를 못잡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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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iffy_jimin/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인데, 한국의 1극 체제 문제는 행정수도의 위치를 바꾼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행정수도를 만들고 옮긴다고 정치가 사람들의 삶에 덜 간섭하는 식으로 바뀔 거라는 건, 문제에 대한 적절한 처방으로 보이지도 않고요.

      정치가 사람들의 삶에 덜 간섭하는 국가를 만들려면 정치적 이유로 수도를 옮기는 대신, 그냥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행정 등의 예측가능성을 최대한 높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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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세상을 너무 쉽게 단순화 편린화해서 보시네요. 안타깝습니다. 현재의 서울은 과연 서울 시내에 사는 980만 뿐일까요?
    행정수도, 세종시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단순하게 현재의 수도권 과밀화라는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을 분석하는 것에는 절대적으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의 전세계 어디를 가도 볼편화하기 힘든 현실을 다른 나라와 비교하는 것도 동의하기 어렵고, 단순도식화해서 쾌도난마처럼 정의내리는 것은 경솔해 보입니다.
    분단된 나라들 중에서 한 쪽은 못살고 한쪽은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으며 전세계 최고의 재래식 무장을 하고 있는데, 그 40킬로미터의 직선거리에서는 10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득시글 거리며 살고 있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이게 단순 정의와 도식화로 설명이 된다고, 설득이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안타까울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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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도권 과밀화라는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

      진짜... 뭐 쥐뿔도 모르면서 왜 이렇게 아는척을 하세요? 심지어 국토가 엄청나게 크고 세계에서 가장 다극화된 국가인 미국마저도 결국 몇몇 대도시로 경제적, 문화적, 인구적 자원이 집중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영국의 경우 다니엘 튜더가 한국어로 쓴 칼럼에서 '영국은 런던과 그 밖의 황무지'가 되었다고 했었던 것 찾아보시고요, 프랑스의 수도 집중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뭘 모른다는 사람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저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수업료를 받는 거죠. 일단 돈을 주면 본전 생각이 나서 선생 말을 듣거든요. 그런데 익명의 방문자님이 제게 돈을 주지도 않고, 또 저도 댁 같은 사람에게 돈 받고 가르칠 생각 없습니다. 본인 SNS나 블로그에서 노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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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말레이시아의 푸트라자야는 과천이랑 비슷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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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보 ㄱㅅ.

      "푸트라자야와 세종시는 ‘행정도시’라는 외형을 비롯해 여러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건 공무원들이 겪는 ‘애로사항’마저도 비슷하단 사실입니다. 서울역에서 세종시 정부청사까지 거리는 136㎞, 차로 이동할 경우 약 2시간이 걸립니다.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시내에서 푸트라자야까지 거리는 20㎞, 차로 이동하면 30~40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세종시에 비하면 푸트라자야는 수도와 ‘굉장히’ 인접해있지만 말레이시아 공무원들도 푸트라자야에서 일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30916001094&md=20130919003745_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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