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시사철] 의사·기독교… 희생양 만들기는 멈추고 코로나와 싸워라
일러스트= 안병현

늦여름 주말을 위한 납량특집 코너. 1976년 미국, 이혼을 앞둔 부부가 자동차로 대륙 횡단 중이다. 남편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에서 나와 국도로 접어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밭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10대 청소년. 차와 충돌했는데 자세히 보니 이미 목에 칼로 그어진 상처와 출혈로 죽기 직전이었다. 아내는 일단 시신을 싣고 대도시까지 가자고 하지만 남편은 사건을 신고해야 한다며 인근의 개틀린이라는 작은 도시로 향한다. 어색한 분위기에 라디오를 틀자 어떤 소년이 외치는 설교가 울려 퍼진다. "속죄! 오직 새끼 양의 피를 통해서만 우리가 용서를 받으리니!"

아내의 경고를 무시하고 개틀린 시내로 진입한 남편 버트는 섬뜩한 사실을 알게 된다. 1964년의 어느 날, 리처드 디건이라는 열여덟 살 소년이 몇몇 친구들과 함께 19세 이상의 모든 마을 사람을 다 죽였다. 인간이 너무 죄를 많이 지어서 옥수수가 죽어가고 있으므로 속죄의 제물로 인신공양을 해야 한다는 종교적 광신에 빠져든 것이다. 그는 본인도 19세가 된 날 옥수수밭에서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다. 개틀린은 옥수수밭의 아이들이 지배하는 광기의 공간이 된 것이다. 버트와 아내 비키는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공포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 '옥수수밭의 아이들'은 그의 수많은 작품 중 단연 손꼽히는 걸작이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고작 40여쪽에 지나지 않는 단편이지만 그 악몽과도 같은 여운은 실로 오래 남는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체제를 유지하는 방식을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가 낳은 인문학의 거장 르네 지라르가 드러낸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해 알아볼 때다.

사람은 모여 산다. 서로 모방한다. 그러나 인간의 군집 생활과 모방 본능이 좋은 방향으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향한 폭력 역시 상호 모방과 경쟁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상대가 복수했고, 복수할 테니까, 우리도 복수한다. 이렇듯 서로를 모방하고 있는 한 폭력의 악순환은 끊이지 않는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했던 재앙이나 재난으로 인해 공동체가 충격에 빠져 방향을 잃기도 한다. 자칫하면 서로를 탓하며 자멸하는 길에 들어설 것이다.

여기서 원시적인 해법이 등장한다. '희생양'이다. 사회에 속하지 못하는 자, 배제된 자, 약자가 주로 희생양으로 지목된다. 희생양은 발언권이 없다. 따라서 만장일치로 폭력이 결정된다. 서로를 향하던 돌과 주먹이 오직 희생양 하나로만 쏠리게 하면 '공동체'는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 지라르는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퍼져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 보편적인 폭력의 근원인 셈이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그런 사례를 떠올려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령 유대인 혐오는 나치 독일에서 정점에 이르렀지만 중세 시대부터 유럽에 만연해 있었다. 관동대지진이 벌어지자 공포와 분노에 휩싸인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며 희생양으로 삼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늘 누군가를 따돌리고, 괴롭히며,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고 뭉친다. 학교, 직장, 군대처럼 모든 곳에서 크건 작건 늘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지라르의 통찰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희생양을 만든 자들, 희생제의를 벌인 자들은, 희생양을 성스러운 존재로 떠받든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을 '폭력과 성스러움'이라 한 것은 그래서이다. 희생양에게 집단 폭력을 휘두른 자들이 도리어 그 희생양을 숭배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폭력과 광기를 직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혐오와 숭배는 하나다. 그 대상을 '우리'가 아닌 무언가로 만들어 '우리'의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숭배와 혐오가 하나라는 것, 폭력과 성스러움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최근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의사들을 대하는 현 정권과 지지층의 태도 때문이다. 의료진 '덕분에' 코로나를 극복하고 있다며 배지 나눠주고 인증샷 릴레이 챌린지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의사들을 적폐로 몰아가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라. 심지어 아직 코로나 유행이 끝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전광훈 목사가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벌인 것을 현명한 행동이라 말할 수는 없다. '턱스크'를 쓰고 구급차를 탄 모습을 보며 나도 화가 났다. 심지어 '바이러스 테러 음모론'까지 퍼뜨리고 있으니 더더욱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어리석고, 반성할 줄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비호감이라 해도 정부의 희생양 만들기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임시공휴일을 만들고 온갖 할인 쿠폰을 뿌리며 외출과 소비를 부추긴 원죄는 분명 정부에 있으며, 감염의 위험을 늘린 것은 광화문 집회나 해운대 해수욕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희생제의로 불만을 잠재우는 원시 부족국가가 되었을까.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향한 청와대와 정부의 끝없는 찬양과 칭송을 보며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래서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이나 최재형 감사원장의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다. 저들의 숭배는 공짜가 아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에 거스르는 발언이나 행동을 할 경우 순식간에 '양념'을 끼얹고 조리돌림 하겠다는 협박이 깔려 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청와대에 모여 앉은 옥수수밭의 아이들이 벌이는 끝없는 희생제의의 광기 속에 대한민국은 오늘도 곪아가고 있다. 일관성 없는 부동산 정책이 집값 폭등의 원인이건만, 이제는 청년과 평범한 주부들까지 투기꾼으로 몰아가는 추미애 법무장관의 발언을 보면, 내가 한국에 있는 건지 개틀린의 옥수수밭을 헤매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하지만 소설이 끝나도 우리의 공포 가득한 현실은 적어도 당분간은 끝나지 않을 테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

지라르의 철학에는 기독교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그는 ‘희생양’에서 우리가 예수라는 희생양을 통해 희생양 메커니즘의 폭력성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지적인 요소와 도덕적인 요소, 종교적인 요소를 결합하여, 배제하고 추방하며 얻는 가짜 평화가 아니라 포용하고 품어내는 진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녀사냥을 멈추고 과학의 힘으로 질병과 맞서야 할 때다. 합리와 이성과 믿음과 신뢰로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원문 링크: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8/202008280331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