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30

희망 ≠ 고문

문득 드는 생각. '희망고문'이라는 말, 과연 타당할까요.

희망은 고문이 아닙니다. 절망하고 있다고 해서, 혹은 희망을 버린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고통은 어떤 식으로건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차분히 응시하는 자(불교적 용어를 쓰자면 觀하는 자)는 그 고통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택할 수 있을 따름이죠.

'희망고문하지 마' 같은 식의 표현이, 제가 이제 만으로도 30대 말이지만, '우리 젊은이'들을 퍽 나약하고 비겁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한 마디 덧붙여 보게 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희망을 버리지 맙시다.

‘파친코’가 한국 드라마? 그 태연한 몰염치가 무섭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K-콘텐츠’라고 으스대는 이들에게

● ‘오징어 게임’과 명확히 다른 경우
● 다분히 ‘미국적’인 캐릭터 설정
● 넷플릭스 ‘나르코스’와의 공통점
● 이제와 자이니치를 ‘우리’라고?


드라마 ‘파친코’에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10대인 선자(김민하 분)가 자신의 엄마가 운영하는 부산 영도의 하숙집 방에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앉아 있다. [애플TV+]
‘기생충’ ‘오징어 게임’ 뒤를 이은 또 다른 K-콘텐츠, ‘파친코’. 요즘 언론을 통해 흔히 들을 수 있는 찬사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파친코’가 애플TV+의 간판 작품으로 선정·제작·유통되는 것을 ‘우리’의 문화적 승리로 봐도 될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파친코’라는 작품은 그 원작부터 드라마까지, 지금껏 ‘우리’가 갖고 있던 세계관과 다른 관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파친코’는 한국 드라마가 아니다. ‘겨울연가’로 대표되는 원조 한류 드라마와는 비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오징어 게임’과도 다른 경우다. 넓은 의미의 ‘K-컬처’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일각에서는 “애플이 일본 시장을 버리고 대신 한국을 택했다”며 마치 축구 한일전에 이겼다는 듯한 말투로 ‘파친코’를 다루는 기사를 냈다. 너무도 이상하고 우려스러운 시각이 아닐 수 없다.

‘파친코’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태어날 때 그 나라에 함께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다. ‘한국 드라마’가 아닌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껏 대한민국이 해외교포, 그 중에서도 ‘자이니치’를 다뤄온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 이야기’조차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파친코’를 좀 더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넷플릭스의 모험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 [애플TV+]
한국 드라마는 배용준, 최지우 주연의 2002년 작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큰 히트를 친 뒤부터 해외에서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류’라는 용어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역수입됐다. ‘대장금’ 같은 경우는 이란에서 국민 드라마의 반열에 올랐다.

어떤 나라의 드라마가 외국에서 큰 인기를 끄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대만 드라마 ‘판관 포청천’은 한국에서 국민 드라마의 반열에 올라 주연 배우가 광고를 찍기도 했으니 말이다. 즉 2000년대 초의 한류는 이례적이고 반가운 현상이었지만,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확률적으로 생길 수 있는 일이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맥락이 달라진 것은 미디어 환경 자체가 변화하면서부터다. 넷플릭스는 초창기에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연출하고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한 ‘하우스 오브 카드’로 흥행뿐 아니라 비평 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곤 콜롬비아의 전설적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마약 범죄 수사물 ‘나르코스’를 내놨다.

‘나르코스’에는 잠깐이나마 미국 플로리다와 뉴욕 등이 배경으로 나오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라틴아메리카, 특히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인과 그 밖의 정글을 무대로 삼는 이야기다.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보고 유입됐을 미국인 시청자에게 다소 낯설고 당혹스럽게 느껴질 가능성이 충분했다. 미국과 무관하지 않지만 결국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만드는 글로벌 프로젝트가 바로 ‘나르코스’다.

넷플릭스는 왜 그런 모험을 감행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글로벌 콘텐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2019년 현재,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3억8000만여 명으로 세계 3위다. 반면 스페인어는 4억8000만여 명의 모국어로 세계 2위다. 게다가 미국 현지에도 남부 지방과 캘리포니아 등을 중심으로 수많은 스페인어 화자가 살고 있다.

넷플릭스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야만 할 운명이었다. 이에 가장 가까운 라틴아메리카를 먼저 공략하기로 했다. 미국 회사가 콜롬비아 마약왕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그것도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해 제작하는 이례적인 현상은 그래서 벌어졌다.

부산 사투리로 번역된 미국 정서
드라마 ‘파친코’에서 노년에 이른 선자를 연기한 배우 윤여정의 극중 모습. [애플TV+]
OTT(Over The Top‧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업체들의 글로벌 콘텐츠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특정 지역에서 개발돼 그 지역 시청자를 타깃으로 한 콘텐츠가 세계적 호응을 얻기를 기대한다. 한국 시청자를 노리고 한국에서 제작한 작품이지만 세계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며 일종의 문화 현상으로 솟아오른 ‘오징어 게임’이 대표적이다. 그 전에 넷플릭스에서 흥행한 ‘종이의 집’은 스페인 드라마인데, 그 또한 비슷한 경우다.

반면 앞서 언급한 ‘나르코스’나 ‘파친코’처럼 OTT 본사에서 만든 글로벌 콘텐츠도 존재한다. 이는 ‘내수용’으로 만든 작품이 해외에서 인기를 끄는 현상과는 다른 경우다.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하며, 해당 지역의 풍토 및 현지인의 정서를 십분 반영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는 ‘미국 드라마’다.

우리는 ‘나르코스’를 콜롬비아 드라마라고 하지 않는다. 콜롬비아 마약왕이 주인공이고 콜롬비아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미국인 수사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캐릭터가 스페인어로 대화하지만, ‘나르코스’는 어디까지나 넷플릭스에서 만든 미국 드라마다.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파친코’ 또한 미국 드라마다. ‘파친코’는 애플TV+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일곱 살에 부모와 함께 이민을 간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미국 작가들이 각본을 쓰고, 한국계 미국인 두 사람이 연출한, 엄연한 미국 드라마다. 주요 등장인물의 성격과 내적·외적 갈등, 사건이 전개되는 방식, 작품이 준수하는 윤리적 기준 등 모든 면에서 미국 영화·드라마 업계의 표준적 작법과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파친코’의 주인공 선자(김민하 분)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큰 외동딸이다. 어려서부터 똑 부러지는 성격에 셈이 밝다. 아버지는 딸을 잘 교육시키고 주체적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애쓴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다분히 ‘미국적’이다. 1900년대 초의 조선인 아버지가 딸을 그렇게 키운다? 현실에서 그런 사례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인 시청자들에게 선자의 캐릭터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같은 인물을 직접 연상시킬 수밖에 없다.

선자의 첫사랑이자 첫 아이의 아버지인 고한수(이민호 분)는 어떨까. 일본 야쿠자의 중간 보스 정도 되는 위치를 차지한 조선인이다. 조선인을 경멸하지만 동시에 조선인을 보호한다. 이재에 밝은 현실주의자지만 가슴 속에 뜨거운 한줄기 순정이 있다. 역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빗대어 보자면, 20세기 초 동아시아에 출현한 레트 버틀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한수가 선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온 세상을 다 주겠다고 하지만 선자는 거절한다. 거절의 이유를 나중에 털어놓는 선자의 말. ‘나 자신을 반으로 갈라놓고 살 수는 없데이.’ 부산 사투리로 번역된 대사지만 여기 담긴 정서는 한국보다는 미국 드라마의 그것이다. ‘스스로에게 충실할 것’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말 것’ 같은, 실로 미국인다운 건전한 태도가 담겼다.

K-콘텐츠’라고 으스댈 일 아니다
‘파친코’는 미국 시청자에게 퍽 친숙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 설정과 구도 위에 이야기와 주제가 전개된다. 실제로 ‘파친코’의 작가와 제작진은 시즌 1을 만들 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되는 ‘대부 2’의 이야기 구조를 적극 참고했다고 한다. ‘대부 2’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이야기지만 의문의 여지없는 미국 영화다. 마찬가지로 ‘파친코’는 조선에서 건너가 오사카에 뿌리를 내린 재일교포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미국 드라마다.

‘파친코’를 여타 다른 한국산 콘텐츠와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파친코’는 역사의 격변 속에 태어난 디아스포라, 자이니치(재일 조선인)를 다룬 대하물이다. 6화에서 수십 년 만에 고향 부산에 찾아온 선자는 한국의 공무원에게 스스로를 ‘특별영주권자’라고 한다. 해방이 오기 전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한국인도 북한인도 일본인도 아닌 ‘조선 국적’을 유지하며 살아간 자이니치의 현실을 반영한 설정이다.

우리, 즉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들은 재일교포, ‘자이니치’를 ‘우리’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엄연한 사실이다. ‘파친코’와 마찬가지로 오사카의 자이니치를 다룬 영화 ‘피와 뼈’는 국내 관객들에게 싸늘하게 무시당했다. 그런데 그 자이니치의 이야기를 미국 OTT 업체가 큰 예산을 동원해 드라마로 만들자, 이제 와서 ‘우리 이야기’라고 거들먹거리는 것은 염치없는 일 아닐까.

이는 마치 주한미군의 자녀인 혼혈인들이 한국에 있을 때는 ‘튀기’라고 조롱하다가, 하인즈 워드가 NFL 스타가 되자 ‘우리의 핏줄’로 인정하며 호들갑스럽게 환영하던 모습마저 연상시킨다. 한국과 일본의 점이지대에서 힘겹게 살아간 재일교포의 이야기, 그 귀중하면서도 쓰라린 역사적 경험에 대해 모른 척으로 일관하더니, 재미교포의 소설을 미국 기업이 드라마로 만든 걸 보면서 ‘K-콘텐츠’ 운운한다.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의 보수 정치는 재일교포 단체들을 ‘간첩의 온상’ 쯤으로 취급하며 정치적 필요에 따라 착취했다. 한국의 진보 정치는 자이니치를 감성과 선동의 도구로 활용하며 보수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소설 ‘파친코’의 그 유명한 첫 문장,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는 말을, 마치 일본에 대한 규탄으로 받아들이며 ‘국뽕’의 소재로 삼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자이니치들에게 한국과 한국인은 일본만큼이나 그들을 ‘망쳐놓은’ 역사의 일부다. 우리는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며 건설적 방향으로 손을 내밀어야지, ‘그래, 이것이 우리 민족의 힘이며 K-콘텐츠’라고 으스댈 일이 아니다.

‘우리’가 얽매어 있는 동안 자이니치는…
한반도의 역사는 한반도 내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 조선의 왕가가 국권을 일본에 넘긴 후 벌어진 역사적 질곡 속에서, 한반도 거주민은 들어가고 나가고 섞이며 살아왔다. 단일민족의 허구, 일본을 향한 끝없는 피해자 의식, 스스로의 야만성을 드러내기 위한 알리바이로 동원되는 근현대 역사관에 ‘우리’가 얽매어 있는 동안, 애플이라는 다국적 기업은 자이니치들의 험난한 삶 속에서 매력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디아스포라의 스토리텔링을 발굴했다. 이런 상황 에서 무슨 ‘K-콘텐츠’를 운운한단 말인가.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 또한 그 ‘역사’의 일부다. 그런 자기객관화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파친코’ 같은 작품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민족주의적 세계관과 원한 감정으로만 얼룩진 역사의식을 넘어, 세계에 통할 수 있는 보편적 감성과 스토리텔링을 고민할 때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합법의 탈 쓰고 국가를 파괴하는 사람들… 대한민국에 ‘헌법수호자’는 없다


[아무튼, 주말-노정태의 시사哲]
넷플릭스 드라마 ‘지정생존자’
‘검수완박’과 졸렬한 정치인들

도시환경공학을 전공한 교수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은 정치인이 될 생각이 없었다. 그가 기획한 공영주택 사업을 대통령이 마음에 들어 해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이 되었지만 정치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 매년 초 치러지는 ‘연두교서’ 발표를 앞두고 ‘지정생존자’로 선정되어 워싱턴 DC의 안전가옥에 틀어박혀 있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 내각 구성원, 상하원 의원, 대법원 판사들까지 모두 모여 있는 미 연방의사당을 커크먼은 TV로 지켜보고 있다.

연두교서 발표는 그런 자리다. 미국을 이끄는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그런데 만약 그곳에서 큰 사고나 테러가 발생한다면 어떨까? 나라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은 지정생존자 제도를 운영 중이다. 커크먼처럼 내각의 누군가는 일부러 연두교서 발표에 참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생존자’가 되도록 ‘지정’하여, 국회가 폭파되고 대통령이 죽고 내각이 허물어지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다.

일러스트=유현호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연두교서 발표 중계방송이 끊긴다. 창문을 열어 밖을 보자 일명 ‘캐피탈 힐’에서 폭발과 함께 불꽃이 솟구친다. 미 연방의사당은 문자 그대로 무너졌다. 그 속에 있던 이들 중 생존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청바지에 후드티 차림으로 맥주를 마시던 톰 커크먼은 그 모습 그대로 성경에 손을 얹고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게 되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헌법을 지켜야 하는 자, ‘헌법의 수호자’가 된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정생존자>의 설정은 퍽 과격하다. 아무리 현실에 존재하는 제도라고 해도 그렇지, 입법·사법·행정 3부를 모두 폭탄으로 날려버린 후 시작하는 이야기니 말이다. 하지만 픽션은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법. 어떤 나라가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지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존속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그랬다. 1920년대 내내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1929년부터 시작된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도탄에 빠졌다. 이원집정부제를 택하고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정치적 구심점 없이 오작동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헌법의 가치를 누가,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1931년, 두 사람의 헌법학자가 지면을 통해 논쟁을 벌였다. 카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현 체제를 공격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비상사태의 권력을 일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선을 통해 꾸려진 연방의회와 총리는 독일 국민 전체의 선택을 받지 않고 간접적으로 뽑힌 이들이므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논리였다.

반면 또 다른 헌법학자 한스 켈젠은 현 체제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켈젠이 볼 때 슈미트의 주장은 옳지 않았다. 헌법 수호는 대통령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입법·사법·행정부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때 헌법을 지키고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원론적 입장이었다. 특히 켈젠은 헌법재판소에 주목했다. 입법부는 행정부를 견제하는 기구다. 반면 국회가 ‘입법 폭주’를 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도입한 헌법재판소가 그 공백까지 채워넣을 수 있다고 켈젠은 주장했다.

이 충돌은 ‘헌법의 수호자 논쟁’이라 불린다. 헌법과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카를 슈미트가 볼 때 헌법이란 국가 공동체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 중 하나일 뿐이었다. 형식적인 법 논리나 기존의 제도 같은 것은 그저 자의적인 규칙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흔히 ‘결단주의’라 불린다. 반면 한스 켈젠은 ‘법실증주의’를 택했다. 법은 법의 영역 바깥에서, 정치나 기타 요소에 의해 형성되지만, 법학은 법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훗날 카를 슈미트는 나치에 협력하면서 ‘히틀러의 법학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덕분에 결단주의 대 법실증주의의 대립은 전체주의 대 민주주의의 대립으로 간주되기 일쑤다. 그러나 이 논쟁을 그런 식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다음과 같은 수많은 철학적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주권은 어떻게 형성되고 또 행사되어야 하는가? 국회, 법원, 심지어 대통령 같은 헌법 기관이 합법성의 탈을 쓰고 국가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들을 막아설 힘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자.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는 채 보름도 남지 않았다. 이 와중에 더불어민주당은 ‘검수완박’을 밀어붙이고 있다. 한스 켈젠의 법실증주의적 관점을 따르자면 제도권 내에서 해결할 일이다. 국회 내에서 정치 세력 간 견제가 이루어질 것이고, 명백한 위헌 요소로 가득한 법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헌법의 수호자’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언론인 출신으로 법 전문가조차 아닌 박병석 국회의장이 중재안을 제시하자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단 하루 만에 그것을 덥석 받아들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송 인터뷰에서 검수완박에 대해 사실상 지지의 뜻을 밝혔다.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릴 것이라 기대할 근거도 희박하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담은 현행 형사소송법 역시 마찬가지로 졸속 처리되었는데, 헌재는 이미 그 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으니 말이다.

국회와 헌재를 벗어나더라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윤석열 현 대통령 당선인은 ‘검수완박은 부패완판’이라며 검찰총장직을 내던지고 대권 경쟁에 뛰어들었던 사람이다. 국민들은 그런 그에게 0.74%p의 아슬아슬한 차이로 승리를 안겨주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헌법의 수호자’로서 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수완박 타협, 아니 야합 국면에서 윤석열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는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지정생존자>는 정치에 대한 미국인들의 분노가 응축된 작품이다. 국회의사당에 정치인들을 몰아넣고 폭파해버리고 싶다는 답답함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검수완박 야합을 보는 우리 국민들의 심정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분노가 픽션보다 무서운 현실을 불러오기 전에 국회가, 헌재가, 대통령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절망감을 더 이상 방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22-04-29

자기 투사: 미국은 러시아가 제대로 군사 개혁을 했다고 전제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현재까지 드러낸 온갖 난맥상의 원인이야 분명. 부패했고, 사기가 낮고, 실전 경험도 부족하고 등등.

그런데 미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대가 이지경일 줄은 몰랐음. 왜 러시아의 군사적 역량을 실제보다 높게 보고 있었을까?

러시아는 2008년 조지아(aka 그루지아) 침공 당시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꼴을 못 보여줌. 군사적 치욕을 경험. 그 후로 국방 예산도 엄청 늘림.

미국은 그걸 이렇게 해석했음. 러시아 군대가 진짜 강해졌겠다.

그런 판단의 기저에는 '사람은 남을 평가하면서 결국 스스로를 바라본다'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했음.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굴욕을 맛본 후 철저한 분석과 개혁을 단행. 그래서 1차 걸프전에서는 한 해중 가장 짧은 2월 한 달이 다 지나기도 전에 나라 하나를 쓰러뜨리는 괴력을 과시.

미국은, 자기들이 그러니까, 러시아도 제대로 군사 개혁을 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는 소리. 물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음. 

웃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교훈'이 있음. 

문재인 정권이 5년 내내 했던 반일 선동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 그들이 일본을 상대로 했던 손가락질, 결국 문재인과 민주당의 멘탈리티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던 것임. 

같은 비판을 스스로에게도 해볼 수 있어야 성숙한 어른이겠지요. 길지만 재미있는 기사입니다. 

"This belief was based on the assumption that Russia had undertaken the same sort of root-and-branch military reform that America underwent in the 18-year period between its defeat in Vietnam and its victory in the first Gulf war. In 2008 a war with Georgia, a country of fewer than 4m people, though successful in the end, had exposed the Russian army’s shortcomings. Russia fielded obsolete equipment, struggled to find Georgian artillery and botched its command and control. At one stage, Russia’s general staff allegedly could not reach the defence minister for ten hours. “It is impossible to not notice a certain gap between theory and practice,” acknowledged Russia’s army chief at the time. To close that gap, the armed forces were slashed in size and spruced up."

https://www.economist.com/briefing/how-deep-does-the-rot-in-the-russian-army-go/21808989

2022-04-23

尹 정호영 옹호는 정치인 아닌 ‘검사’ 발언

[노정태의 뷰파인더] 도덕과 관습 우롱한 어떤 ‘합법’

● 퍽 놀랍고 충격적인 尹의 말
● ‘불법 아니니 괜찮다’고만 하면…
● 민주당發 가짜 법치주의의 결과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최근 제기된 자녀 관련 의혹 등을 설명하기 위해 4월 17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대강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부정의 팩트가 확실히 있어야 하지 않나.”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의 자녀 의대 편입학 논란과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내놓은 말이다. 위법한 행위를 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어떤 ‘팩트’가 있어야 당선인이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윤석열 본인이 마이크를 잡고 한 말이 아니라 배현진 대통령 당선인 대변인을 통해 전달된 이야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퍽 놀랍고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잠시 기억을 되돌려 조국 사태를 떠올려 보자. 조국 당시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된 후 본격적으로 제기된 여러 의혹에 대해 함구하거나 사실이 아니라는 식으로 일축해왔다. 여론 악화의 결정타가 된 것은 2019년 9월, 자청해서 열었던 기자간담회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딸의 논문과 의학전문대학원 편입 등에 관한 의혹을 두고 이렇게 못 박았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불공정 의혹 제기, 너무나도 당연하다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4월 21일 서울 국회 법사위원장실 앞에서 검수완박 입법을 위한 안건조정위원회 구성과 관련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안건조정위 무력화를 위해 민형배 의원이 탈당하는 ‘꼼수’를 썼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박 위원장은 “국회법에 따라 안건조정위원을 지정하겠다”고 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의 ‘부정의 팩트’ 발언을 보며 충격에 빠진 사람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그 이유 역시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아직 새 정부가 출범하지도 않았는데 조국 사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정권교체를 통한 한국 사회의 정상화를 꿈꾸었던 이들이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일단 몇 가지 분명히 해둘 일이 있다. 적어도 4월 현재 조국 사태와 정호영 논란의 내용이 완전히 등치되는 것은 아니다. 조국과 그 딸인 조민 씨의 경우처럼 명백히 위조된 서류가 확인된 것도 아니고, 일각에서는 정호영의 자녀가 논문에 참여해 이름을 올린 것에 그 나름의 합리적 근거가 있다는 항변도 있다. ‘부정의 팩트’가 100% 확실히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이 사안을 두고 제기되는 우려가 과도하다고 할 수도 없다. 의대 편입은 ‘차라리 수능을 다시 봐서 의대에 가는 게 더 쉽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려운 과정이다. 그런데 정호영의 두 자녀는 동시에 아버지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스펙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아버지가 재직하는 의대에 편입했다. 불공정 의혹이 벌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윤석열이 이 사안을 '정치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느냐다. ‘부정의 팩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불법이 아니면 합법이고, 합법이면 문제가 없다는 식인데, 이것은 ‘법 기술자’의 말일 뿐이다. 법은 대체 무엇인가. 불법이 아니면 합법이고, 그러니 모든 일이 허용되는가.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불법이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말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근대 법치국가의 원리를 잘 반영한 표현이다. 법과 도덕을 분리하는 것, 동시에 법의 규제 영역을 최소한으로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다.

가령 노골적 성적 묘사가 담긴 창작물, 즉 성인물과 법의 관계를 떠올려 보자. 성인물을 만들거나 즐기는 이들은 성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는 성인들을 법이 막을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성인물에 대한 규제를 찬성하는 이들은 그런 성인물이 미성년자들의 건전한 성 관념을 해칠 수 있을 뿐더러, 성인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 심지어 미성년자들이 유입돼 성적 착취를 당할 가능성을 고려할 때 적절한 규제 및 법적 감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양쪽 모두에 일리가 있다. 법이 도덕의 모든 영역을 관할하려 해서는 안 되지만, ‘최소한의 도덕’으로서 작동해야 한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심지어는 전 국민에게 도덕적 지탄을 받고 있는 사안이나 행위가 반드시 법에 의해 규제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법학자 엘리네크(Georg Jelinek)의 명언처럼,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강제력이 개입되는 법적 절차는, 도덕적 당위를 따질 수 있는 영역 중에서도 최소한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옳다.

형사소송법 전공 교수 조국의 태도
이 원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당연한’ 것이 아니다. 가령 여성들이 입는 짧은 치마, 미니스커트를 생각해 보자. ‘미니스커트 단속’이라는 말을 들으면 한국인들은 흔히 박정희 정권 시절에나 있던 일이고 ‘서구 선진국’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1968년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생한 ‘68혁명’ 이전에는, 서구에서도 경찰이 여성들의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을 나무라고 단속하는 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도덕이 법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옥죄는 것은 20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소리다.
이런 맥락을 놓고 볼 때, ‘불법이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질문은 사회의 근본 질서를 파괴하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법’과 ‘도덕’의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 법을 통해 도덕을 강요하는 근본주의적, 전체주의적 질서에 저항한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진보는 그렇게 이뤄져 왔다. 법과 도덕의 구분을 최대한 명료하게 하고,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영역에 법이 개입하지 않는 쪽으로 움직여왔다.

도덕의 영역, 가치관의 영역, 취향의 영역에 불과한 것을 법으로 옥죄지 말라. 이는 특히 진보적 성향을 지니는 법조인 사이에서 두루 통용되는 법철학적 시각이다. 심지어 누군가 법을 어겼다 해도 그럴만한 이유, 참작할 만한 사유, 혹은 그 위법 행위를 한 사람이 위법 행위를 하게끔 한 사회 구조 등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참여연대의 초기 멤버 중 하나인 형사소송법을 전공한 교수 조국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며, ‘불법이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태도를 취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불법이 아니니 괜찮다’는 태도를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민간 영역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직종이 아니라, 사회의 기준과 가치관을 제시하고 구현하는 공직자들이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역시,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불법이 아니니 괜찮다’는 태도로 일관해 법에 걸리지 않는 한 무슨 짓이건 하고 있다면, 높은 확률로 그 사람은 우리 사회가 통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도덕의 영역을 건드리거나, 넘어서거나,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합법과 불법, 도덕과 비도덕의 경계를 오가는 행위가 사회 전체에 만연하다보면, 법의 존재 근거 자체가 흔들린다. 왜냐하면 법은 도덕의 기반 위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둘러싼 정치적 지형이 모두 그렇다. 일단 21대 국회의 출발부터가 문제적이었다. 선거법은 선거라는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법이다. 참여자 모두가 합의하고 동의하지 않는 한 함부로 바꿀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20대 국회의 막바지, 바로 그 기본적 상식 혹은 정치적 도덕이 망가졌다. 더불어민주당은 선거법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상식 바깥의 수를 뒀다. 비례 의석을 노리는 정의당과 바른미래당은 민주당이 흔드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당시 제1야당이던 자유한국당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선거법 개정이 이뤄지고 말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국회에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제1야당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위원장 자리를 넘겨주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법사위는 모든 법안의 자구를 검토하고 수정 보완할 수 있는, 국회의 ‘입법권’ 중 가장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소위원회다. 그 법사위원장을 야당에서 가져가면 여당의 입법 폭주를 막을 수 있다. 국회법에 명문으로 규정돼 있지는 않으나, 21대 국회 이전까지는 모든 정치 세력이 동의해온 일종의 ‘관습법’이다.

21대 국회의 민주당은 그 또한 파괴했다. 자유한국당이 ‘모든 상임위원장 거부’라는 초강수를 두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법’ 바깥에 있는 ‘도덕’과 ‘관습’을 무시한 결과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신들이 만든 법을 야당이 꼼꼼히 읽고 평가하고 되돌려 보내지 못하게 하겠다는 오기를 부린 끝에 내놓은 법 중 대표적인 게 ‘임대차3법’(계약갱신청구권, 전월세상한제, 전월세신고제)이다.

우리는 그 덕분에 이전까지 겪어본 적 없는 엄청난 부동산 가격 상승과 그로 인한 계층 분리를 경험하고 있다. ‘불법은 아니지 않느냐’, ‘법사위원장을 야당 주라고 국회법에 쓰였느냐’며 도덕을 무시한 가짜 법치주의 탓에, 집 없는 국민은 순식간에 ‘벼락거지’가 돼버렸다.

민주당의 도덕 무시를 통한 법치 질서 파괴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법사위에 속한 무소속 양향자 의원이 검수완박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자 민형배 의원이 민주당 탈당을 선언한 것이다. 이를 두고는 민 의원이 양 의원을 대신해 법사위 안건조정위에 비교섭단체 의원으로 합류할 것이라는 해석이 곧장 나왔다. 국회법상 안건조정위는 여당 의원 3명, 야당 의원 3명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즉 여당을 ‘꼼수 탈당’해 야당 몫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의미다.

국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성향의 무소속 의원을 법사위에 배치해 야당 몫의 투표를 빼앗아오는 것 자체가 법과 제도를 무시하는 행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더 심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상식과 도덕을 우롱하면서 만들어진 법을 대체 그 어떤 국민이 존중할 수 있단 말인가.

오만한 사고방식을 심판받다
‘불법이 아니면 합법이고 정당하다’는 태도는 ‘법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기에, 사회 전체의 인식과 도덕을 파괴하는 식의 입법은 수월하게 이뤄지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만들어진다 한들 긍정적 효과를 낳기 어렵다. 법을 법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법 그 자체가 아니라 법을 감싸고 있는 도덕이다. 국회법은 국회의 관습과 도덕이 없다면 법으로서 유명무실해진다. 다른 모든 법도 마찬가지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법을 법으로 온전히 작동하게 해주는 도덕과 관습까지 존중하며, 문제가 있다면 공적으로 논의하고 수정해나가는 겸허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 ‘불법이 아니니 괜찮다’는 인식으로 똘똘 뭉친 거대 정당 민주당은, 바로 그 오만한 사고방식을 국민에게 심판받아 5년 만에 여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했다.

이는 정호영 논란에 대해 ‘불법이 아니니 괜찮다’는 투로 언급한 윤석열의 발언을 문제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한, 조국 사태나 검수완박으로 인해 솟구친 국민적 분노가 언제라도 다시 국민의힘의 머리에 죽비처럼 내리꽂힐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4-21

'스펙 도핑' 적발된 조민…의사면허 박탈 결코 가혹하지 않다 [노정태가 고발한다]

'스펙 도핑' 적발된 조민…의사면허 박탈 결코 가혹하지 않다 [노정태가 고발한다]

지난 1월 전공의 선발 면접을 보기 위해 경상대병원에 모습을 드러낸 조민씨. 배경은 숙명여고 쌍둥이 성적 비리 관련 시위 장면. 그래픽=김은교 기자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두 명의 자녀를 본인이 재직 중이던 경북대 의대에 편입시키는 데에 그가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의혹 탓이다. 정 후보자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억울하다"고 호소했으나 논란은 오히려 계속 번지고 있다.

논의가 격해지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서울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부녀 사례를 떠올릴 수밖에 없어서다. 한편에서는 "조국 가족과 같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명백한 서류 위조 등 불법이 드러난) 조국 사태와는 다르다"는 항변이 들려온다.
자녀의 의대 입시 부정 의혹에 대해 해명하는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뉴시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과연 조국 사태를, 특히 조 전 장관의 딸 조민씨의 부정입학 사건을 과연 제대로 처리했을까, 아니 올바로 이해하기나 했을까? 이를 답하기 위해선 몇 가지 질문을 우선 던져야 한다.
조민에게 가혹? 그 반대 아닌가?
첫째, 조민씨는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을 받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입시 부정으로 고려대와 부산대 의전원 입학이 취소됨에 따라 그의 의사면허도 조만간 박탈될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선 의전원을 나와 이미 인턴 수련까지 한 마당에 의사를 못 하게 하는 건 가혹하다고 비판한다. 부모가 저지른 잘못을 자식이 대신 처벌받는다는 투다.

하지만 조민씨의 의사 자격 상실은 결코 '처벌'이 아니다. '자격 상실'이다. 대학 입시를 비롯해 모든 시험은 수험자에게 특정한 자격과 행동 방침을 요구한다. 가령 수능 시험장에는 지정된 필기구와 아날로그 시계 외에는 그 무엇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만약 누군가 전자시계를 차고 있다가 발견되거나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가 걸리면, 설령 그 기기가 시험에 전혀 쓰이지 않아 결과를 바꿀 수 없었다 할지라도 해당 시험은 무효 처리가 된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이 상식이 왜 조민씨의 입시에만 예외가 되어야 하는가. 그 어떤 입시든 허위 서류를 제출하면 안 된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설령 조 전 장관이 SNS를 통해 밝힌 변호인들 입장처럼, 제출된 부정 서류가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해도 부정행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부정행위를 했으면 실격 처리를 당하는 게 상식적인 경쟁의 룰이다. 도핑을 한 운동선수가 그 약물이 실제 경기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와 무관하게 실격 처리당하는 것과 같다. 쉽게 말해 조민씨와 그의 부모는 '스펙 도핑'을 한 것이고, 그게 적발돼 실격당한 것이다.

지난 2018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위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에서 두 명의 학생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했다"고 항변한들, 아버지인 숙명여고 교사의 시험지 유출 의혹이 법원에서 사실로 인정받은 이상 공정한 경쟁이 아니었다는 걸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조민씨에 대한 검찰의 기소를 촉구하는 국민의힘 의원들. [중앙포토]
진짜 희생자는 조민 때문에 낙방한 응시자
둘째, 조민씨는 단순히 부모 욕심이 빚어낸 희생자일 뿐인가? 여기에선 희생자라는 단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린 지금 외견상으로는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다른 가정을 한번 해보자. 만약 조국 교수가 법무부 장관 자리를 탐하지 않았다면 딸은 희생자가 될 일도 없었다. 오히려 의사라는 선망의 직업을 가진 '엄친딸'로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었을 거다. 물론 그도 인간이기에 현재 겪고 있을 내적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고통을 겪는다고 피해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오히려 가해자다. 조 전 장관과 그의 아내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시피 그는 입시 부정의 직접적 수혜자일 뿐만 아니라 본인의 입학 전후 사정을 잘 알고 가담한 정황이 있다.

이 사건의 진정한 희생자는 따로 있다. 조민씨 때문에 부산대 의전원에 입학하지 못한 미지의 수험생이 바로 그 희생자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는 없으나, 알 수 없는 그 응시자를 향해 때늦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조민은 '아이'가 아니다
셋째, 조민씨에 대한 비판은 인격적 모멸감을 주는 행위인가? 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하지만 여기엔 긴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그가 공적 영역의 인물이 아니라서 그렇다. 게다가 미모의 젊은 여성이라 그를 향한 대중적 손가락질에 부당한 정념이 실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많은 조국 지지자들이 하듯이 이미 30대에 접어든 지 오래인 조민씨를 불쌍한 '아이'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그를 인격적으로 낮춰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을 어른 취급하지 않는 것만큼 심한 인격 모독은 찾아보기 어렵다.

조민씨가 부산대 의전원에 입학한 건 2015년도다. 만 24세로, 어떤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미성년자가 아닌 어엿한 성인이었다. 그를 독립된 인격체로, 성인으로 대해야 한다. 이는 그가 연루된 범죄에 대해 성인으로서 응당 그 대가를 감당해야 한다는 소리다. 칸트 '법철학'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사람은 원인과 결과를 파악할 수 있는 지성을 지닌 존재다. 자신이 행한 일이 있다면, 그 결과가 좋건 나쁘건 자신의 어깨에 짊어질 때 온전한 인격체가 된다. 조민이라는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부산대 의전원 입시에 얼마나 연루되어 있는지 명백히 밝히고 정확한 죄책을 묻는 것이다.
'숙명여고 시험 정답 유출' 사건으로 기소된 쌍둥이 자매 중 한 명이 지난해 10월에 법정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이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다. 특정인을 향한 눈먼 비난으로 여겨질까 우려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부산대 의전원 입시 문제와 관련해 조민씨를 그저 '희생자'로 간주하고 슬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당시 미성년자였던 '숙명여고 쌍둥이'들도 끝내 혐의를 부인하자 재판 과정에서 참고인이 아닌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되었다.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거짓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던 조민씨 사례가 다른 식으로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입시는 공정과 상식의 잣대
우리는 부산대 의전원 입시 문제를 철저하게 밝히고 지나가야 한다. 조 전 장관 부부를 비롯해 당사자인 조민의 책임에 대해서도 공개적인, 법적인 논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호영 후보자뿐 아니라 그와 유사한 입시 의혹, 스펙 품앗이, 기타 등등 우리 사회의 공정을 의심케 하는 여러 사안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세울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뿐 아니라 국민의힘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불거져 나온 지금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공정과 상식을 다잡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부정의 팩트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으며 국민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윤석열 당선인만 모르고 있다뿐이지, 상식적인 국민 대다수는 그런 방향을 원하고 있다.

2022-04-16

문재인 대통령, 세월호 결자해지하라

문재인 대통령, 세월호 결자해지하라

[노정태의 뷰파인더] 단식 농성했던 文의 마지막 임무

● 아직 밝혀야 할 ‘진실’ 있다면…
● 무책임하고 비상식적이고 잔인한
● 해경은 할 수 있는 구조를 했다
● 김어준 등이 만든 온갖 음모론
● 과학적으로 명백한 결론 부정


세월호 참사 8주기를 이틀 앞둔 4월 14일 전남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를 찾은 추모객들이 노란 리본을 걸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11일 오후 2시, 대전시청 북문 앞. 대전지역 79개 종교·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국민주권실현 적폐청산 대전운동본부 ‘4‧16특별위원회’의 집회가 열렸다. 그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요구했다. “희생자와 국민 앞에 철저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약속하라.”

기자회견문에 따르면 “참사의 책임이 있는 정권이 촛불혁명으로 탄핵되고, 그 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약속했던 새 정부가 들어서서 벌써 5년의 임기를 마감하는 순간이 왔지만 진상규명은 제자리”였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당론으로 약속했던 정당이 180석에 달하는 국회의석을 가지고 있어도,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왜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왜곡했는지’ 등에 대한 진상규명은 단 한걸음도 진척되지 못한 채 속절 없이 8년의 세월이 흘러갔다”는 것이다.

이는 대전에서 벌어진 행사의 스케치이지만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매년 4월 중순 무렵이면 반복되는 모습이다. 특히 올해는 여야 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을 향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그런데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든다. 대체 ‘세월호 진상규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14년 사고 발생 후 벌써 8년이 흘렀다. 타국의 유사 사고 사례와 비교해볼 때 원인규명에 이례적으로 많은 비용을 들였다. 심지어 선체를 인양하기까지 했다. 마치 부검하듯 선체를 부품 단위로 떼어내 분석해 과학적으로 부정하기 어려운 침몰 원인까지 확인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혀야 할 ‘진실’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그런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진실’은 대체 무엇인가.

‘정상 사고’(normal accident)
분명한 사실 몇 개를 확인해 보자. 첫째, 세월호가 침몰한 이유는 분명하다. 둘째, 해경은 피해자를 구조했다. 셋째, 세월호 참사의 발생 및 구조 과정에서 정권 차원의 개입이나 기상천외한 음모는 없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원인과 과정에는 그 어떤 미스터리도 없다. 사고 당시 세월호에 실린 여러 화물들은 제대로 고박돼 있지 않았다. 단단하게 묶여 고정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해류가 빠르게 휘몰아치는 수역으로 들어갈 때, 세월호의 키는 3등 항해사가 잡고 있었다. 3등 항해사는 상대적으로 조작이 미숙했기 때문에 배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는데, 그러다가 단단히 묶여 있지 않은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 위로 더 나쁜 상황이 닥쳤다. 배의 키를 조종하는 장치인 ‘솔레노이드 밸브’가 고장이 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계 부품이 그렇듯 솔레노이드 밸브는 주기적으로 꺼내어 닦고 조이고 정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월호는 그렇게 잘 관리돼 있지 않았다. 조타기를 한껏 틀었을 때 솔레노이드 밸브는 한쪽으로 완전히 쏠린 채 굳어버렸다. 선실에서 아무리 조타기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 한들 키가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최악의 경우가 연이어 닥쳐왔다고 해도, 세월호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넘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 세월호는 일본에서 오래 써서 낡은 배였다. 중고선을 수입한 후 화물을 잔뜩 실을 수 있도록 무리하게 증축하고 개조했다. 배가 쓰러지지 않도록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바닥에 주입하는 평형수 용량 자체가 애초 설계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으며, 반대로 배의 높이를 올려버린 탓에 무게중심은 더욱 높아졌다. 내부의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린, 낡고 무게중심이 높은 배, 세월호는 기울어지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이 모든 사고 과정은 선박 사고의 전문가들이 사고 발생 직후부터 진단했던 바와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터질만한 사고가 터질만한 방식으로 터졌다는 소리다. 8년간의 기나긴 진상규명 과정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중요 사실은 솔레노이드 밸브의 고착이라는 요소를 확인한 것이다. 그것은 선체를 인양해 부품을 해체하고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이 지면의 다른 칼럼(‘광주 화정아이파크 참사에서 세월호가 어른거린다’)을 통해 지적한 것처럼, 세월호 참사 역시 ‘정상 사고’(normal accident)에 속하는 사건이었다. 개별적으로 놓고 보면 통제 가능한 사소한 실수나 잘못이 중첩되면서 막대한 피해를 낳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세월호에는 이준석 선장이 타고 있었다. 잘못된 사람이 총책임자의 자리에 앉아 권력을 휘두를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단지 무책임했을 뿐만 아니라 비상식이었으며, 무신경하게 잔인했다. ‘가만히 있으라’.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 참사는 그렇게 벌어졌다.

해경은 정말로 방관했나?
세월호 참사 8주기를 엿새 앞둔 4월 10일 오전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 앞 세월호 침몰 해역에서 선상 추모식이 열린 가운데 유가족들이 사고 해역을 알리는 노란부표를 바라보고 있다. [뉴스1]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해경을 향해 쏟아졌던 비난은 어떨까. 해경이 피해자 구조에 나서지 않았거나, 심지어 방관했다는 것은 사실일까. 그렇지 않다. 해경은 당시 그들에게 주어진 정보 및 여건에 따라 구조 활동을 했다. 다만 그 결과가 안타까울 뿐인데, 그렇다고 ‘구조하지 않았다’는 식의 비난이 가해지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당시 상황이다. 세월호 사고 신고가 접수된 후, 해경 구조 헬기는 약 30분, 구조정은 약 40분 뒤에 현장에 도착했다. 각 운송수단을 동원해 가장 빠른 속도로 직선으로 움직이면 그 속도가 된다. 해경이 무슨 히어로물의 영웅처럼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게 아닌 다음에야, ‘늑장 구조’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해경 경비정은 24노트의 전속력으로 달렸다. 신고 접수에서 도착까지 40분이 걸린 건 사고위치가 그만큼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해경 탓이 아니다.

해경이 선내에 진입하지 않았으니 잘못했다는 주장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해경 123정이 현장에 도착했을 무렵, 선체는 이미 60도 이상 기울어져 있었다. 게다가 현장은 바다다. 물에 젖은 갑판은 평평한 상태여도 미끄러진다. 해경은 해상 구조의 전문성을 지닌 집단이지만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걷기는커녕 매달려 있기도 힘들 만큼 기울어진 배 안으로 들어가, 어디 있는지도 확인되지 않은 피해자 전원을 찾아내 구조했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해경이 세월호 선내에 갇힌 사람은 전혀 구조하지 않았을까? 바다에 스스로 뛰어든 사람들만 건져냈을까? 그렇지 않다. 해경은 배에 갇힌 승객이 보일 때마다 배에 올라 망치와 파이프로 유리창을 깨며 구조했다. 연합뉴스에 2014년 8월 19일 보도된 ‘세월호 승무원 2명, 승객 구조 참여 정황 확인’이라는 기사를 읽어보자. “김씨는 123정이 세월호에 두 번째로 맞대어 객실 유리창을 깨고 5~6명을 구조한 것과 관련, ‘누가 유리창을 깼느냐’는 검사의 질문을 받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직원(해경) 두 명이랑 승객 두 명이 있었다’고 답했다.” 여기서 말하는 김씨는 당시 22세였던 목포해경 소속 의경 김모 씨. 해경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구조 활동을 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게 무슨 구조 활동이냐는 식으로 빈정거리는 이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4월의 먼 바다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배가 좌초된 상황이면 더욱 그렇다. 해상에는 온갖 부유물이 빠른 속도로 떠돌아다니며 타박상, 찰과상, 골절 등을 유발한다. 조난자는 구명조끼를 입었다 해도 찬 물과 스트레스로 인해 탈진하고 의식을 잃다가 죽는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피해자를 엄청나게 늘린 건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제때 바다에 뛰어들었다 해도 ‘전원구조’는 불가능했다. 현장에서 바다에 뛰어내리고도 사망한 사례가 있다.

한여름 해수욕장에 한 시간만 들어갔다 나와도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몸이 덜덜 떨린다. 체온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4월의 바닷물은 더욱 가혹하다. 몸이 바닷물에 닿는 한 하루 이상 실종자가 생존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고래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부실구조’를 이유로 목포해경 123정 김경일 정장에게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유죄를 선고한 법원의 판결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내인설’과 ‘열린 주장’
세월호 침몰 직후의 상황을 되짚어보자. 김어준을 비롯해 여러 ‘독립 언론인’들이 달려들어 세월호 침몰 원인과 관련한 온갖 음모론을 만들어 뿌려대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 잠수함이 들이받았다는 둥, 국가정보원이 관여돼 있다는 둥, 심지어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모종의 이유로 인신공양을 하려 했다는 둥, 입에 담기도 역겨운 소리들을 지어냈다.

그리하여, 세월호 참사를 어떤 음모론적 관점으로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그런 주장을 가진 이들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의사결정기구에 포진해 있다는 것이다. 총 6인으로 구성된 세월호 선체조사위의 경우, 4명은 앞서 설명한 세월호 자체의 결함 문제를 인정했다. 즉 ‘내인설’을 취했다. 반면 나머지 2명은 2018년까지 세월호가 다른 이유로 침몰했다는 ‘열린 주장’을 고수하며 선조위를 마무리 지었다.

그 뒤를 이어 등장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역시 난항에 부딪혔다. ‘세월호 잠수함 충돌설’부터 ‘CCTV 조작설’까지 온갖 음모론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이 과학적으로 명백한 결론을 부정하며 세월을 보냈다. 세월호 참사는 누구 한 사람만을 탓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이유로 벌어진 사고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세월호 참사의 발생과 전개 과정에는 그 어떤 미스터리도 없다. 세계 해상 사고의 역사상 보기 드물 정도로 오랜 기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구체적인 내역을 밝혀놓았다. 그럼에도 ‘진실규명’의 목소리가 가라앉지 않는 것은 더 밝혀야 할 사실이 있어서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범죄’가 아닌 ‘사고’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약 3주 후면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다. 이제 그가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으나, 단 한 가지 남은 과제가 있다. 세월호 참사와 그 수습 과정을 마무리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겠다며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마저 달래고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대표로서 세월호 단식 농성을 했던 문재인 대통령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도 바로 그것 아닐까. 정치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들에게 이렇게까지 잔인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애꿎은 희생자들과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이 이제는 편히 쉴 수 있게 해드려야 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입만 열면 종전·동맹·자유 떠들더니… 젤렌스키 홀대한 대한민국 국회

입만 열면 종전·동맹·자유 떠들더니… 젤렌스키 홀대한 대한민국 국회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처칠
우크라이나 외면한 한국

일러스트=유현호

1940년 5월 9일. 히틀러는 체코,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에 이어 벨기에로 총부리를 겨눴다. 무려 300만 대군이 집결해 있었다. 대대적 침략을 앞둔 가운데 영국 정계도 발칵 뒤집어졌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을 묵인하면 그 이상 야욕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는데, 그런 기대가 허구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체임벌린은 쫓겨나다시피 물러나고 다음 날 윈스턴 처칠이 총리가 됐다.

처칠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체임벌린이 유럽에 보내놓은 영국의 30만 육군은 됭케르크에서 포위당해 전멸당할 처지다. 칼레에도 병력 4000명이 갇혀 있다. 고립된 것은 처칠 본인도 마찬가지. 보수당 주류는 여전히 독일과 평화 협상을 하자고 주장한다. 체임벌린을 등에 업은 외무장관 핼리팩스는 입만 열면 처칠을 ‘전쟁광’으로 몰아붙이며 당내 여론을 선동한다. “대화만이 해결책입니다. 왜 불필요한 전쟁을 합니까?”

영화 <다키스트 아워>가 숨 가쁘게 그려내는 2차 세계대전 초기의 암울한 풍경이다. 영화에서 생략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을 짚어보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것은 1939년 일. 영국과 폴란드는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니 영국과 독일은 전쟁 상태였다. 하지만 체임벌린 내각은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은 징병제를 통해 병력을 끌어올리고 프랑스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영국군 중 제대로 전쟁을 하고 있던 것은 해군뿐이었다. 내각을 이루는 보수당 의원 중 평화라는 환상에 휩싸이지 않고 싸워야 할 전쟁을 대비하고 있던 사람은 해군장관 처칠뿐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전쟁은 절대적인 악으로, 평화는 절대적인 선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평화를 외치고만 있다 해서 평화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또 실행해야 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수없이 확인된 영원한 진리다.

여기서 철학적 질문이 나온다. 정당한 전쟁은 존재하는가? 네덜란드의 법학자 휘호 흐로티위스(Hugo Grotius)는 1625년 초판 발간된 <전쟁과 평화의 법>에서 정당한 전쟁을 논하기 위한 요건을 크게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 타국이 침략할 때 당하고만 있는 어리석은 평화를 옹호할 수는 없다. 자기 방어를 위한 전쟁은 정당하다. 둘째, 정당한 권리를 빼앗겼을 때 그것을 되찾는 방법이 전쟁밖에 없다면, 권리 회복을 위한 전쟁도 때에 따라 정당하다. 셋째, 인류 보편의 눈으로 볼 때 도저히 용납 불가능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면 그것을 막기 위한 전쟁에도 정당성이 부여된다.

흐로티위스 눈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면 어떨까? 우크라이나 동부 영토는 러시아 것이며, 우크라이나의 나치를 쫓아내겠다는 것이 푸틴의 명분이었다. 둘째와 셋째 이유를 들이댄 것이다. 그런데 젤렌스키 대통령은 아우슈비츠 생존자 집안 출신 유대인이다. 나치 운운하는 것은 거짓말을 넘어 모욕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하는 국가는 북한을 비롯한 극소수뿐이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침략을 당한 처지다. 젤렌스키의 전쟁은 의문의 여지 없이 정당하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젤렌스키는 글로벌 리더로 부상했다. 처칠의 명언을 인용한 영국 하원 화상 연설은 그러한 행보의 백미로 꼽힌다. “우리는 해변에서도, 벌판에서도,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 국민의 의지를 모아 항전하는 리더의 등장에 자유 진영이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우크라이나는 키이우를 향한 러시아의 공세를 꺾었고, 키이우를 방문한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젤렌스키를 만나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이 추세에 역행하는 나라가 있다. 대한민국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내뱉은 ‘초보 대통령이 러시아 자극해 전쟁 벌어졌다’ 발언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지난 11일 국회에서 열린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화상 연설을 보면, 우리 현실은 참담할 정도다.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여야 의원 300명은 고사하고 고작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기립 박수조차 나오지 않는 썰렁한 행사를 만들고 만 것이다.

자유 진영에 속하는 나라 중 젤렌스키를 이렇게까지 홀대한 건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일차적 이유는 곧 야당이 될 거대 여당, 더불어민주당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민간인 학살은 조작된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사람을 우크라이나 대통령 연설 당일 초청해 토론회 자리에 앉혀놓는 그런 정당이 국회에서 과반을 점하고 있다. 입만 열면 한반도 종전 선언을 지지해달라던 자들이, 정작 다른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모르쇠로 일관한다. 국제사회의 눈으로 볼 때 실로 가증스러울 것이다.

러시아와 맺은 관계가 우려되고 경제적 영향을 고민해야 한다는 항변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없다면 유럽 모든 국가는 당장 올겨울부터 국민들이 말 그대로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자유 진영의 우방국들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우크라이나와 함께하는 중이다. 한국전쟁 당시 세계 각국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난 대한민국 집권 여당은 지금 대체 뭐 하는 짓인가.

곧 여당이 될 국민의힘의 실상 역시 만만치 않다. 참석자 면면을 보면 현역 의원을 다 합쳐도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보다 참석자가 적었다. 입만 열면 안보, 동맹, 자유를 떠들더니 대선 끝났다고 남의 집에 난 불 취급하는 것인지. 젤렌스키를 지지하고 응원한다던 윤석열 당선인 또한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처칠은 어디 있는가? 우리에게는 핼리팩스와 체임벌린만 있단 말인가?

<다키스트 아워>로 돌아가 보자. 전시 지하 벙커에서 핼리팩스는 처칠에게 평화라는 이름의 항복을 강요한다. 갈등하던 처칠은 평생 타본 적 없는 지하철에 올라타 시민들을 만난다.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결연한 투쟁 의지에 감동한 처칠은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 장면은 영화적 각색이지만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다. 결국 히틀러는 영국을 꺾지 못했다. 그 어떤 독재자도 자발적으로 뭉친 국민을 이겨낼 수는 없는 것이다. 처칠의 말이 옳다. 승리가 없다면 생존도 없다. 우크라이나의 정당한 전쟁을 지지한다.

2022-04-09

‘어용 지식인’ 유시민이 윤석열 時代에 준 교훈

‘어용 지식인’ 유시민이 윤석열 時代에 준 교훈

[노정태의 뷰파인더] 당파성이 훈장 돼버린 2017-2022

● 정파 이익 복무하겠다는 자기배반
● 피포위의식 모범적 예제
● 편파적이지만 과정은 공정하다?
● ‘알릴레오형’ ‘알쓸신잡형’ 득세
● 지식생산 헤게모니 싸움 밀린 보수


한동훈 검사장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고발된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지난해 1021일 첫 공판에 참석하고자 서울서부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2017년 5월 5일, 제19대 대선을 나흘 앞둔 날. 친노·친문 성향의 작가 유시민이 인터넷 방송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직후인데다, 더불어민주당은 단일대오를 구성하고 있지만 반(反)민주당 표심은 안철수와 홍준표 두 후보로 갈린 상황.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낙승이 예상되는 가운데 유시민은 선언했다. “진보 어용 지식인이 되려 한다.”

유시민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진보 지식인이라는 자들은 “언제나 권력과 거리를 두고 고고하게, 깨끗하게 지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아무리 진보적인 정권이더라도 ‘내가 진보 지식인으로서 권력에 굴종하면 안 되지’라고 해서 사정없이 깔 것”인데, 그건 옳지 않다. 왜냐하면 2017년 5월 현재, “한국 사회는 복잡하고 여러 층위의 권력들이 있는데, (정권이) 바뀌더라도 청와대 권력 딱 하나만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무릇 지식인이나 언론인은 권력과 거리를 둬야 하고 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대선에서 이기더라도) 모두 다 그대로 있고 대통령만 바뀌는 것이다. 대통령은 권력자가 맞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대통령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바꿀 수도 없고,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기득권 권력이 사방에 포진하고 연합해 괴롭힐 것이다. 아마 야권 정당들이 서로 손잡고 연정을 하지 않겠나. 제가 정의당 평당원이기는 하지만, 범진보 정부의 어용 지식인이 되려 한다.”

‘선량한 우리 편’과 ‘사악한 적’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물질적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대신 지적 활동에 매진하는 계층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지식인’은 공부나 글쓰기 등을 전업으로 삼는 사람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신분제가 폐지된 시민사회를 배경으로 공적 사안에 대해 대중의 이해를 돕고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는 이들, 즉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을 뜻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의 ‘어용 지식인’ 선언은 그런 면에서 형용모순이다. ‘어용’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임금의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지식인이 시민사회 일반이 아닌 특정 정파, 그것도 곧 집권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통령과 정파의 이익에 복무하겠다는 자기배반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이 끝을 향해 달려간다. 대신 다가올 윤석열의 5년이 있다. ‘윤석열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주제에 대한 답은, 그러므로 ‘문재인 시대의 지식인’에 대한 고민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유시민과 그의 아류가 택한 길은 무엇이었을까. 어찌하여 그들은 그런 모습이 됐을까. 그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할까.

유시민의 발언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자. 정권이 바뀌어도 대통령만 바뀐 것이며, 대통령보다 더 강한 기득권 세력은 건재하므로, 대통령을 지키고자 뭐든지 해야 한다는 단순명쾌한 사고방식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뇌물 수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논리다.

이러한 집단의식에 제대로 된 명칭이 부여된 것은 2020년 이후의 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집권 세력이 된 민주당과 청와대를 두고 ‘피포위의식’(siege mentality)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덕분이다. 본디 피포위의식은 군사 용어로, 적에 포위당한 군대가 위기감과 공포에 쫓겨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악수를 두는 경우를 일컫는다. 미국 심리학자 대니얼 크리스티는 이 개념을 확장했다. 피포위의식은 ‘선량한 우리 편’이 ‘사악한 적’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유시민의 ‘어용 지식인’ 선언은 피포위의식을 설명하는 모범적 예제나 다름없다. 물론 그는 “사실에 의거해 제대로 비판하고 옹호하겠다”는 단서를 붙였다. 하지만 전통적 공공 지식인의 역할을 버리겠다는 취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더 중요한 건 유시민 스스로가 말한 ‘어용 지식인’의 일이라는 것이 ‘사실에 의거한 비판과 옹호’와 양립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우리는 편파중계다”
시간을 건너뛰어 2020년 1월 1일로 향해보자. 서울 상암동 JTBC 스튜디오. 신년 특집 토론이 한창이었다. 시청자들의 이목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와 유시민의 대결로 쏠려 있었다.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 일하던 유시민은 노무현재단의 유튜브 채널인 ‘알릴레오’를 통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및 그의 가족과 관련한 검찰의 수사 내용을 반박하는데 한창 열을 올렸다. 진중권은 바로 그 점을 문제 삼았다. “조국 일가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상인데 (‘알릴레오’ 등은) 조국은 얼마나 청렴한가로 가고 있다.”

그에 대한 유시민의 답. “우리는 편파중계다. 편파적이지만 그 과정은 공정하려고 노력한다. 다른 팀의 편파중계도 있어서 전체적으론 균형을 이루고 있다.” ‘알릴레오’와 유시민은 검찰에서 발표된 수사 내용이라는 이유로 조국 일가를 향한 혐의를 송두리째 부정하거나 그 의미를 축소했다. 그런 상황에서 ‘편파적이지만 과정은 공정하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른 팀도 편파적이므로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룬다'는 말도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유시민과 친(親)민주당 성향의 언론 및 유튜브에서 주장하듯 검찰이 사실을 왜곡하고 혐의를 과장하고 있다 한들, 그 반대편에서 사실을 왜곡하고 혐의를 축소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상대가 진실을 왜곡했다면 이쪽은 올바른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음수와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되지만, 거짓말을 반박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면 두 개의 거짓말이 남을 뿐 진실은 아니다. 이쪽의 왜곡과 저쪽의 왜곡이 서로 균형을 이뤄 올바른 진실을 찾아간다는 논리는 결국 자신들의 거짓과 왜곡을 무마하기 위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2022년 4월 현재, 조국의 부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는 수감 중이다. 조국의 딸 조민 씨 역시 입시전형 당시 제출했던 서류에 허위 내용이 담겼다는 이유로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에 이어 고려대에서 입학 취소 결정을 받았다. 유시민 본인은 ‘노무현재단 계좌 검찰 조회’ 발언 등으로 재판 받고 있으며, 법적 책임을 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어용 지식인의 길은 처참한 실패로 마무리되고 만 것이다.

지식 소매상 노릇 하기 애매해진 까닭
한국 대중문화와 출판의 역사에서 유시민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1980년대 말부터 급격하게 성장한 상업 출판, 그 중에서도 대중 교양서 시장의 ‘대장주’ 격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내 머리로 읽는 역사 이야기’ 등 유시민은 대학교 신입생 혹은 조숙한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춰 이해하기 쉽도록 교양서를 써내는 능력이 있다.

대중 교양서 저자 유시민은 그 어떤 분야의 전문가도 아님을 떳떳하게 인정했다. 대신 스스로를 ‘지식 소매상’이라고 부르며 전문가들 앞에는 겸손한 태도, 대중 앞에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어렵고 복잡한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지식을 소화하기 쉽도록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본인의 본령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문제는 문재인 정권 들어 그 ‘지식 소매상’이 너무도 노골적인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물론 유시민은 자타가 공인하는 진보 논객이며 그의 책을 구입할 사람들도 진보 독자층이다. 문재인 정권을 전후로 유시민 스스로가 무색무취한 지식과 교양이 아닌 적극적인 정치적 텍스트를 생산했다. 유시민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식 소매상’ 노릇을 하기 애매해졌다.

인문 교양서 시장의 독자층 역시 급격한 성향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라는 두 명의 보수 정권 대통령을 겪는 동안 진보 성향의 비소설 독자층은 일종의 ‘저항의 논리’를 원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었다. 세상의 잘못된 점을 탐구하고, 고발하고, 후벼 파는 ‘독한’ 책의 수요가 자연스럽게 줄었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인해 출판 시장 전체의 규모가 축소되기도 했다.

평범한 혹은 진보적인 독자층에게 그리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지식과 교양을 전달하는 것은, TV나 유튜브, 팟캐스트 등을 통해 이미 인지도를 쌓은 저자들의 몫으로 넘어왔다. 바야흐로 예능 인문학, 혹은 ‘인포테이너’의 시대가 열렸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기획회의’ 2018년 9월호에서 그러한 현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도움을 주는 책들이 인기였다. 이런바 실용인문학, 소프트 인문학이 붐을 이뤘다. (...) 이제 인문서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방송에 출연해 얼굴을 알린 이들의 인문학 서적들이다. 이른바 ‘예능 인문학’의 시대다. 방송에 얼굴을 알린 이가 쓴 책이 아니면 잘 팔리지 않는 세상이 됐다.”

선동에 나서거나 아닌 척 하거나
학원 강사로서 많은 팬층을 확보한 최진기라던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줄여서 ‘지대넓얕’이라는 제목의 팟캐스트로 선풍적 인기를 끈 채사장 등, 인문 교양서 시장의 새로운 강자는 단지 글만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추세에 조응한 것은 유시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대넓얕’과 유사한 어감을 지닌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 출연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을 뿐더러, 같이 출연한 다른 지식인들 역시 많은 경우 베스트셀러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대중 교양이란 말 그대로 대중이 원하는 재미있는 지식을 발굴하고 전달하는 분야다. 오늘날의 추세에 맞춰 저자 군이 달라지고 홍보 방식에 변화를 주는 것을 탓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첫째, 엔터테인먼트와 흥미에 집중하다보니 잘못된 사실을 전하거나 오류를 범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둘째로는 그러한 ‘실수’에 정치적 함의가 종종 담기곤 했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뀐 직후인 2017년 6월 30일 방영된 ‘알쓸신잡 경주편’이 대표적 사례다. 출연자인 유시민,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 가수 유희열이 경북 경주시 원자력 발전소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유시민은 원자력 발전소 사고 위험을 거론하고, 정재승은 ‘한국처럼 원전을 많이 쓰는 나라 프랑스는 원전을 전면적으로 줄여 나가겠다고 한다’며 운을 띄운다. 그러자 유희열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 반색한다. “아, 최근에 문재인 대통령이 탈석탄, 탈원전 정책을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탈원전은 문재인 정권의 핵심 공약이자 중점 과제 중 하나다. 해당 에피소드를 통해 전달된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온갖 장밋빛 청사진이 에너지 산업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 또한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 문재인 정권 출범 직후 방영된 ‘알쓸신잡’의 해당 에피소드가 ‘정치적으로 중립’이었다고 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 5년의 지식인 사회는 그렇게 돌아갔다. 노골적으로 정치색을 드러내고 사실을 왜곡하며 지지자를 선동하는 ‘알릴레오형 지식인’, 정치색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일정 수준의 정치 편향성을 지니고 대중 교양 시장을 공략하는 ‘알쓸신잡형 지식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유시민은 두 영역 모두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렸으니, 문재인 정권의 지식인이란 결국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어용 지식인’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대중이 지식인의 정치 성향 소비할 경우
지난해 9월 10일 서울 금천구 즐스튜디오에서 열린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국민 시그널 면접’에 참가한 윤석열 당시 후보가 진보논객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이 현장에서 중계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은 0.74%p라는 초박빙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4월 8일 현재 민주당 의석수는 172석이다. 여기에 정의당(6석)과 민주당 출신 무소속 의원들을 합하면 180석이 넘는 세력이 곧 야당이 된다. 전례를 찾기 쉽지 않은 여소야대 정국이다. 게다가 6월 1일에는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예정돼 있는데, 정권교체 여론이 매우 컸던 대선과 달리 국민의힘의 승리를 낙관할 수 있는 근거가 그리 많지도 않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하면, 윤석열의 지지자들 역시 5년 전 문재인 지지자들과 마찬가지로 피포위의식에 사로잡히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새 정부 지지자들 중에는 문재인 정권의 정책 실패, 특히 부동산과 관련된 실정에 실망한 중도층만 있는 게 아니다. 열렬한 보수층이 대거 포함돼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저들이 했던 일 우리가 그대로 갚아주리라’는 일종의 원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윤석열 시대의 지식인 사회가 또 다른 ‘어용 지식인’ 대열을 이루거나, 아닌 척 하면서 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인포테이너’의 연대를 갖추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여론의 기준을 제시하는 공공 지식인이 노골적 정치색을 드러내며 당파적 편향성을 훈장처럼 내세우기 시작하면 지식 사회 본연의 기능이 마비되고 흔들린다. 대중이 지식인의 지식이나 통찰을 따르는 게 아니라 정치적 성향을 소비할수록 지식인과 대중의 수준은 동반 하락한다.

더 슬픈 소식도 있다. 윤석열을 옹위하기 위해 ‘보수 어용 지식인’을 꾸려 싸우겠노라는 발상은 실현 불가능하다. 그럴만한 역량도 인적 자원도 없기 때문이다. 범 보수 진영, 혹은 민주당 지지 성향을 띄지 않는 중도·보수 진영은, 지식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 헤게모니 싸움에서 완전히 밀린 상태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권경애 법무법인 해미르 변호사,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김경율 회계사(왼쪽부터)가 2020년 9월 25일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일명 조국흑서) 출간 관련 기자 간담회를 하고 있다. [홍진환 동아일보 기자]

조국 사태를 계기로 진보 진영의 ‘어용 지식인’들이 제시하는 논리를 허물고, 입을 다물게 하고, 그 허위를 까발린 주체가 누구인가. 진중권을 비롯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이른바 ‘조국 흑서’를 쓴 5총사다. 대선 과정을 거치며 참여자들의 입장과 태도와 진영이 서로 많이 갈라졌으나, 적어도 그 책을 쓸 당시만 해도 ‘조국 흑서팀’은 모두 진보 논객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진보와의 담론 투쟁에서 보수 논객들은 스스로 그 무엇도 해내지 못했다.

대선이 끝나기 전 진중권은 정의당으로 복당했다. ‘조국 흑서’를 쓴 이들은 각자의 길을 갔으나, 단일 대오를 형성하고 민주당과 싸우던 시절의 아우라는 잃은 지 오래다. 요컨대 현재 보수는 진보와 같은 방식으로 지식인을 동원하고 담론 투쟁에 나설 수 없다.

해법은 어디 있을까. 지식인 본연의 가치를 되살리는 것만이 답이다. 윤석열 본인의 신조이기도 한 자유주의와 법치주의를 확고히 되새기며, 동시에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함부로 배척하지 않는 인간적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 공약이나 ‘이대남’들의 관심 사항으로 여겨지는 ‘공정’을 매우 좁게 해석하며 문자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인위적 개입과 관리가 필수다. 새 정권의 출범과 함께 ‘어용 지식인’의 시대가 끝나고 진정한 ‘공공 지식인’의 시대가 돌아와, 이러한 정치적, 철학적 토론이 왕성하게 이뤄지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4-06

자칭 민주정권의 ‘좀스럽고 민망한’ 권위주의 5년[朝鮮칼럼 The Column]

자칭 민주정권의 ‘좀스럽고 민망한’ 권위주의 5년[朝鮮칼럼 The Column]

국민이 대통령 조롱해도 내버려두는 게 진짜 ‘권위’
시민을 모욕죄로 고소한 文은 비민주적 ‘권위주의’
소위 ‘깨시민’ 덩달아 위세… 尹은 진정한 권위 누리길

 
현지 시각 지난 3월 27일,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핑킷 스미스의 짧은 머리를 두고 농담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같이 웃던 윌 스미스, 아내의 눈치를 보더니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무대 위로 올라가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리고, 자리에 돌아와서도 계속 목청을 높였다. “다시는 내 아내의 이름을 꺼내지 마!”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취임 4주년 특별연설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미국은 ‘조크’에 관대한 문화적 전통을 지닌 나라다. 여기서 말하는 조크란 모두가 적당히 기분 좋게 웃고 넘어가는 무해한 농담이 아니다. 조롱거리가 되는 사람이 감추고자 하는, 혹은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 치부를 드러내고 까발리며 조롱하는 것이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처럼 권위 있는 자리일수록 그렇다. 당사자가 불쾌해할 뿐 아니라 때로는 듣는 이도 웃어넘기기 어려울 만큼 독한 조크가 난무한다. 연예인들만 조크의 과녁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백악관 공식 행사에 코미디언을 사회자로 부르면 대통령과 영부인을 놀림감으로 삼는다. 미국식 조크에는 성역도 없고 금기도 없다.

2017년 8월 18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 청와대 오픈하우스 행사에 참석한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경내를 둘러보고 있다. /청와대

 
왜일까?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나라지만 동시에 권위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더 나아가 미국 사회가 권위를 지키는 방식이다. 중세 시대의 왕이나 권력자들이 광대를 옆에 두고 남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농담하도록 내버려둔 것과 같은 원리다. 스타들의 치부를 대놓고 언급하면서, 대통령이나 유명 인사들을 바보로 만들면서, ‘권위주의’의 긴장감을 털어버리고 ‘권위’를 세우는 것이다.

권위주의와 권위는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를 떠올려볼 수 있다. 권위주의와 자존심은 남들이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굽실거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반면 권위와 자존감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타인으로부터 존중을 얻는다.

생각해보면 미국만 그런 건 아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스스로를 ‘보통 사람’이라 부르며 방송과 출판 등에서 대통령을 풍자하는 걸 기꺼이 허용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농담인 ‘YS 시리즈’까지 나왔지만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비춘 적이 없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등 그 뒤를 이은 대통령들 역시 모두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권위주의를 내려놓는 것, 국민들이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그렇게 권위를 확인하는 것과 같았다.

이 공식이 달라진 건 문재인 대통령 이후다. 문재인 정권의 여러 잘못 중, 문화적 영역에서 남긴 가장 큰 해악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권위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1983년에 태어나 모든 대통령 선거와 그 후의 분위기를 경험했던 필자로서,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렇게까지 권위주의가 팽배했던 적은 없었다.

문재인 본인부터가 문제다. “북조선의 개 한국대통령 문재인의 새빨간 정체”라는 문구가 담긴 전단지를 만들고 뿌렸다는 이유로 대통령이 일개 시민을 모욕죄로 고소했다. 현직 대통령이 시민을 고소하는 것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그 어떤 민주국가에서도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그야말로 ‘좀스럽고 민망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안을 두고 문재인 본인이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 후로도 잊을 만하면 ‘격노’를 일삼더니, 퇴임을 앞두고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라는 제목의 책까지 냈다.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운 권위주의를 의인화하면 바로 이런 캐릭터가 될 듯하다.

대통령 스스로가 이렇다보니 지지자들의 행태는 한층 더 저열해졌다. 자칭 ‘깨어있는 시민’들이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대감댁 행랑채의 왈짜들처럼 떠세를 부려댔다. 정권을 향한 비판, 풍자, 농담에 대고 “대통령님이 네 친구냐?”며 시비를 걸고 다녔다. 크리스 록의 조크를 듣고 웃다가 제이다 핑킷의 눈치를 보더니 무대에 올라가 뺨을 때린 윌 스미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는커녕, ‘아무도 웃을 수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있다.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는 중이다. 새 대통령 윤석열은 자칭 민주정권의 비민주적인 권위주의를 확실히 털어내주기를, 국민 속에서 진정한 권위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시어머니만 둘…교육 정치판 만든 '교육감 직선제' 없애라 [노정태가 고발한다]

시어머니만 둘…교육 정치판 만든 '교육감 직선제' 없애라 [노정태가 고발한다]

그래픽=김현서

지난달 30일 '서울시 교육감 중도·보수 진영 단일화 기구' 주관 행사가 열렸다. 행사 내용이 곧 단체 이름이었다. 3선에 도전하는 진보 진영 조희연 현 서울시 교육감에 맞설 중도·보수 진영의 단일 후보를 뽑는 경선이 치러졌다. 지난 18대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의원을 지낸 조전혁 혁신공정교육위원장이 이날 단일 후보가 됐다. 그런데도 보수 지지자들은 불안해한다. 보수 진영 조영달 서울대 사범대 교수가 단일화에 불참한 탓이다. 만약 조 교수가 출마하면 보수표가 나뉘어 조 교육감이 반사이익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
오는 6월 1일 치러질 교육감 선거 풍경이다. 늘 해왔으니 그러려니 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우리 아이들 교육에 이런 진영 대결 선거가 도움이 될까? 교육감 직선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그렇다'고 대답할지 모르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육감 직선제 10년은 '교육의 정치화'라는 폐해만 낳았다. 일각에서 직선제 폐지 주장이 고개를 드는 이유다.
직선제 유지론자들은 헌법 제31조 4항을 언급한다. '교육의 자주성ㆍ전문성ㆍ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했으니 교육감은 직접 뽑아야지, 시·도지사가 임명하거나 간선제로 뽑으면 안 된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지난 교육감 선거를 되짚어보자.
교육의 자주성? 교육감의 등장으로 자주성이 생기기보단 시어머니만 둘(교육부와 교육감)로 늘어났다.
교육의 전문성? 현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그리고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의 전직을 떠올려보자. 초중고 교육 현장과 무관하게 연구하던 대학교수였다. 대학 교육도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교육감 업무와는 괴리가 있다.

교육을 정치판 만든 직선제
2017년 9월 청와대 앞에서 함께 시위중인 곽노현·조희연 전·현직 서울시교육감. 두 사람 모두 진보 성향 교수 출신이다. [연합뉴스]
정치적 중립성은 어떨까? 특히 이 부분에서 헛웃음이 난다. 조희연 교육감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참여연대를 만든 장본인이고, 조전혁 후보는 18대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다른 지자체에서 출마하는 교육감 후보들 역시 정치색이 뚜렷하다. 현재 특정 정당 소속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치적 중립성' 보장 운운하는 건 얄팍한 자기기만이다.
물론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반드시 교육감 직선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다. 오히려 직선제 탓에 교육이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걸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목격했다. 그 과정에서 학생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교육 전체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피해를 봤다.

모든 선거는 기본적으로 고비용 저효율이다. 후보들은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 관리를 위해선 별도의 시스템이 필요하다. 유권자의 투표 행위만도 상당한 사회적 비용이 든다. 모든 자리와 정책을 투표로 결정하는 게 반드시 바람직하지도 또 민주적이지도 않다.

사실 전국의 교육감을 한날한시에 동시에 선거로 뽑는 나라는 흔치 않다. 미국은 연방 국가답게 교육 정책 관련 권한은 각 주가 지니고 있다. 25개 주(州)는 주 교육위원회가, 11개 주는 주지사가 교육감을 임명한다. 직선으로 뽑는 주는 14개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 역시 마찬가지다. 각 주 교육장(교육감)은 주 교육부 장관이 임명한다. 영국·프랑스·일본도 마찬가지다. 특히 국가 중심의 교육 전통이 강한 프랑스는 총 30개의 학구장(교육감) 모두를 대통령이 임명한다.
근시안적 교육 정책 쏟아내는 폐해
선진국들은 왜 교육감을 직선제로 뽑지 않을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교육 정책은 그 나라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단기적으로는 학생과 학부모의 행복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장기적으로는 국가 경쟁력에 막대한 차이를 불러온다. 교육감 선거 결과에 따라 교육 내용이 달라지는 현 체제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이며, 가장 철저하게 지방자치제를 운용하는 미국에서도 교육 정책만큼은 '국가 대계'로 인식해 국가 차원의 전략을 수립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시행한다.
2007~2010년 미국 워싱턴 D.C. 교육감을 지낸 재미교포 미셸 리(이양희). 교사 출신으로 공교육 개혁에 앞장서 화제가 됐다. 애드리언 펜티(Adrian M. Fenty) 당시 워싱턴 D.C. 시장이 그를 임명했다. [중앙포토]
우리는 정반대다. 교육감의 교육 철학,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정치적 성향에 따라 특정 방향의 교육을 학생들에게 강요한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다른 교육을 받는다. 이게 '다양성'이 늘어난 걸까? 아니다. 교육감 선거가 만든 불필요한 교육 편차의 폐해를 교육 소비자인 학생들이 감당한다는 소리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세계 교육의 화두는 정보교육(computing)이다. 컴퓨터 사용법이 아니라 그 원리를 가르친다. 우리도 그 추세에 발맞춰 2018년부터 정보 과목을 초중고 정규 교과목으로 지정했다. 수업 일수는 교육감의 판단과 자율에 맡겼다. 그 결과, 교육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편차가 벌어졌다. 대구·세종처럼 정보 과목을 충실히 가르치는 도시도 있었지만 그 외 지역은 등한시한다. 교육감 취향에 정보교육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생들은 이렇게 손해를 본다. 내 마음에 안 드는 교육감이 선출되었다고 선뜻 이사할 수도 없으니 학생과 학부모 입장에선 교육감 선거로 교육 선택권이 늘어난 건 전혀 없다. 다만 정치적으로 줄 잘 서고, 단일화 잘하고, 선거 잘 치러서 교육감이 된 누군가가 애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 실험'을 할 자유만 얻었을 뿐이다.

학생 볼모로 한 교육 실험 옳은가
이는 루터의 종교 개혁 초창기를 연상케 한다. 당시 루터가 말한 '종교의 자유'란 평민들이 알아서 교회를 택할 자유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각 지역의 영주들이 가톨릭에서 벗어나 원하는 교회를 택할 자유를 의미했다. 평민들은 꼼짝없이 자기 영주가 고른 교회에 다녀야 했다. 평민 입장에서 보자면 루터 이전이나 이후나 종교의 자유란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독일과 유럽이 30년 전쟁에 빠져든 것처럼 지금 대한민국도 10년째 교육 전쟁에 휩싸여 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지난 10년간 사교육은 줄지 않았고 학생들의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다는 증거도 없다.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대명제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20세기 내내 유지해왔던 국가 중심의 일률적 교육 체제가 지니고 있던 폐단 역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교육감 직선제만 정답인 것처럼 주장하는 건 옳지 않다. 교육감은 투표로 뽑을 자리가 아니다. 광역지자체장이 선발하거나, 정치적 중립성을 담지할 수 있는 교육위원회가 임명하는 등 더 나은 해답을 찾아야 한다.

2022-04-02

왜 다를까? 윌 스미스에 분노한 미국인 vs 온정적인 한국인

왜 다를까? 윌 스미스에 분노한 미국인 vs 온정적인 한국인

[노정태의 뷰파인더] 시상식의 웃음거리와 권위주의

● 美 여론조사, 83%가 윌 스미스 비판
● 여자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묶어둬
●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가부장제 옹호!
● 조크에 관대한 美 문화적 전통, 왜?


배우 윌 스미스(오른쪽)가 3월 27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아내에게 과도한 농담을 한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뺨을 후려쳤다. [AP 뉴시스]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 제94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한창이었다. 진행자는 유명 코미디언 크리스 록. 록은 여러 참석자를 향해 끊임없이 ‘선 넘는’ 농담을 던졌다. 그러던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가수, 배우, 최근에는 유튜버로 큰 성공을 거둔(4월 2일 현재 구독자 986만 명, 즉 1000만에 가깝다) 윌 스미스가, 무대에 올라 크리스 록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록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짧은 머리를 두고 “‘G. I. 제인’ 속편이 기대된다”고 농담한 게 화근이었다. ‘G. I. 제인’은 ‘제인’이라는 여성이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데미 무어가 삭발하고 나와 화제를 끈 영화다. 제이다 핀켓 스미스도 그 자리에서 삭발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제이다가 윌 스미스의 아내였다는 것, 그리고 제이다의 탈모는 일종의 면역성 질환으로 인한 것이라는 데 있다.

아카데미상은 거의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다. 당연히 여러 해프닝이 있었지만 참석자가 진행자의 뺨을 때리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카데미상뿐 아니라 세계 방송의 역사를 모두 짚어 봐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건이다.

더 놀라운 일도 있다. 이 사건에 대한 국내 반응이다. 공식 여론조사가 진행된 바 없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인터넷 뉴스에 달린 댓글을 대략 확인해보면 ‘윌 스미스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크리스 록이 심했다’ ‘내가 윌 스미스의 처지여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등의 반응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에서는 온정적 반응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으나 미국 현지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다. 미국 연예 매체인 TMZ가 3월 28일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미스가 록의 뺨을 때린 행위에 대해 “록이 맞을 만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 134000여명 가운데 17%에 그친 반면, 그러한 행위를 폭행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의견은 83%에 달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폭력을 썼다는 윌 스미스의 해명에 대해서도 오직 15%만이 동조했다.

병 때문에 탈모를 겪고 있는 제이다 스미스를 향한 농담이 설령 지나치다 해도, 그런 농담을 하는 코미디언을 때리는 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미국 사회에 두루 퍼져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사건 발생한 직후 ‘미국인들이 윌 스미스에게 동정적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국, 미국 문화는, 현실 속의 미국 문화와 전혀 달랐다.

페미니즘으로 폭력을 변호?
배우 윌 스미스(왼쪽)와 그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 뉴시스]
윌 스미스는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렸다. 너 댓살짜리 아이가 해도 혼날 짓인데, 50대 중반의 성인이다. 대체 이런 행동을 어떻게 옹호할 수 있단 말인가?

여성주의적 관점을 둘러대며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윌 스미스를 옹호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윌 스미스 본인부터가 그랬다. 그는 이번에 영화 ‘킹 리처드’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테니스의 전설인 윌리엄스 자매를 길러낸 아버지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그는 그런 영화를 찍으며 가족의 가치를 절감했는데, 아내를 조롱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폭력을 휘둘렀다고 수상 소감에서 스스로에 대한 변명을 했다.

그러한 주장은 페미니즘과 거리가 멀다. 아니, 정반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내와 자식 등 가족의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가부장의 의무가 있다며 다른 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가부장제 옹호 발언이다.

이러한 주장은 엉터리일 뿐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아내가 집 밖에서 명예를 잃었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가부장의 행태를 용납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살펴보면 그 위험성을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다. 인도, 파키스탄, 그 외 여러 곳에서 바로 그런 이유로 ‘명예살인’이 벌어진다. 아내나 딸이 외간 남자와 바람이 나거나 연애를 하거나 혹은 눈만 마주쳐도 ‘가문의 명예’가 실추됐다는 이유로 상대방 남자뿐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인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없지 않다. 윌 스미스는 그런 사회의 가부장들과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설적인 NBA 선수이며 미국 흑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인 카림 압둘 자바 역시 윌 스미스의 발언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메일 뉴스레터 서비스 ‘섭스텍’을 통해 3월 29일 공개한 글에서, 압둘 자바는 윌 스미스의 변명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진정 여성을 보호하는 남자들은 1500만 명의 시청자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거들먹대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입을 다물고 있다. (...) 여성 보호를 앞세워 자기가 올바른 일을 했다고 말하면서, 윌 스미스는 실제로는 자기 이익을 위해 그 여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그 연설은 그저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부 페미니스트의 견해는 다를 수 있다. 국내에도 ‘나쁜 페미니스트’ 등의 책으로 잘 알려진 작가 록산 게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3월 29일 ‘뉴욕타임스’에 ‘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윌 스미스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분명히 한 후, 그는 ‘농담’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걸고 약자를 조롱하는 짓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록산 게이의 말에도 귀담아 들을 점이 있다. 하지만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리는 것이 용납돼서는 안 된다.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묶어놓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가족을 위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남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에게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페미니즘, 더 나아가 모든 정치적 진보는 이런 폭력과 선을 긋는 것에서 출발해야 마땅하다.

슈퍼스타라는 어떤 웃음거리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 장편 영화상 시상 전 입담을 펼치고 있다. [AP 뉴시스]
크리스 록은 대체 왜 그런 농담을 한 걸까? 원래부터 ‘정치적 올바름’의 선을 교묘하게 넘나드는 농담을 해왔던 코미디언이지만, 그가 제이다 스미스를 농담거리로 삼은 것은 본인의 스타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코미디언이 사회를 보았더라도 여러 출연자들을 향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농담을 했을 것이다. 그건 일종의 ‘미국적 전통’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윌 스미스의 집안은 여러모로 복잡한 속사정을 지니고 있다. 두 자녀 모두 스스로의 정체성을 성소수자로 밝힌 바 있으며, 자녀들은 스미스의 아내와 함께 ‘폴리아모리’를 선언한 상태다. 폴리아모리란 가부장적인 일부일처제에 종속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동시에 성관계를 포함한 친밀한 애정 관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제이다 스미스의 폴리아모리는 단지 선언에 머물지 않았다. 제이다는 어떤 남자와 연애했는데, 그는 제이다보다 21세나 어렸을 뿐 아니라, 실은 윌 스미스의 아들인 제이든 스미스의 친구였다. 아들의 친구와 바람이 난 아내. 윌 스미스는 ‘아내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대범한 모습을 연출했는데, 물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판받을 일이 아니지만 대중적 시각에서 보면 충분히 농담거리로 삼을만한 일이며, 어김없이 그 또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입방아에 오르고 말았다.

미국의 연예인과 셀레브리티들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며 산다. 하지만 그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파파라치들이 따라붙어 그들의 사생활을 취재하고 팔아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공개 석상에서 혹독하게 조롱당하기 일쑤다. 사생활을 존중하는 미국에서 이게 무슨 일일까? 미국은 자유의 나라 아닌가?

미국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조크에 관대하다는 것이다. 엄격하고 근엄한 자리일수록 농담을 섞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전통은 미국 영화산업과 대중문화의 큰 축제인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도드라졌다. 지금껏 수많은 코미디언들이 진행자가 되어 무대 위에 올랐다. 지금껏 아카데미 시상식은 늘 그랬다. 그 하루를 위해 굶고 꾸미고 갖춰 입은 영화계의 슈퍼스타들을 두고, 그들의 치부를 한껏 드러내고 까뒤집으며 웃음거리로 삼아왔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 사회가 권위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정반대로, 할리우드와 아카데미의 권위가 드높기 때문에 출연자들에게 망신을 주는 농담을 허용하는 것이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삶을 생각해보자. ‘스타’라는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시피, 평소에는 저 하늘의 별처럼 고고하게 떠 있는 존재다. 대중은 그들의 삶에 대해 그저 엿보기만 할 뿐 다가갈 수 없다. 스타들은 그런 대중적 관심과 인기를 바탕으로 천문학적 출연료를 받고 상상하기 어려운 라이프 스타일을 즐긴다.

애정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인들이 아무리 ‘쿨’하다 해도 이렇듯 공공연한 특권층의 존재는 어딘가 배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자리를 빌려 한 번쯤 적나라하게 치부를 드러내고 비웃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가끔 벌어지는 탈춤을 금하지 않고, 오히려 돈을 줘가며 광대를 불러 춤판을 벌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말뚝이 탈을 쓴 광대가 양반탈을 쓴 광대를 조롱하고 비웃고 골탕 먹이도록 하는 것은 양반의 권위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다. 피지배층의 억압된 불만을 해소하면서, 현실 속 신분 차이를 더욱 확실히 느끼게끔 한다. 예외적인 상황에서 ‘권위주의’를 내려놓음으로써 ‘권위’를 공고히 다지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조크 통해 해악 줄이다
권위 그 자체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세상을 경직시킨다. 미국은 이렇게 조크를 통해 권위주의의 해악을 줄이면서 권위에 힘을 실어주는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제이다 스미스에게 크리스 록이 던진 농담은 분명 과도한 측면이 있다. 또한 한국은 미국과 다른 나라이며, 미국의 모든 것을 쫓아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문화와 교양을 중시하며 ‘정치적 올바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왜 이렇게 과격한 농담을 전통으로 유지하는지, 그 의미를 한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아름다운 작별은 없다… 죽음의 존엄마저 농락한 K방역

아름다운 작별은 없다… 죽음의 존엄마저 농락한 K방역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대선 직전 방역 고삐 푼 文정권
장례대란으로 고통받는 유족들

첼리스트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는 악단 해산으로 갑자기 실업자가 됐다. 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집이 있으니, 생활비가 저렴한 시골에서 어찌어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고향인 야마가타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자리를 구하던 다이고의 눈에 구인 광고 하나가 들어왔다. 연령 제한 없음, 고수익 보장, 실질 노동 시간 짧음. 게다가 정규직이다. 평생 음악만 하고 살았던 그는 이렇게 좋은 말만 쓰여 있는 일자리가 무슨 뜻인지 모른 채 ‘NK 에이전트’의 문을 두드린다. ‘여행의 도우미’라던 그 회사의 일은 납관, 고인의 몸을 닦고 잘 단장하는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장례는 매우 다르다. 한 사람이 생을 마치고 떠나는 자리에 다들 모여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마시며 고인을 추억하는 것이 한국의 장례 문화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장례식을 ‘축제’로 여겨온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장례를 치르는 전문 인력을 사회적으로 천시하지 않았다. 오늘날은 국가에서 공인하는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로 존중받는다.

일러스트=유현호

반면 일본은 고인을 잘 씻기고 곱게 단장하여 유족과 대면하는 절차를 갖는다. 슬픔과 엄숙이 지배하는 장례식의 분위기 때문인지, 고인을 염하고 화장하는 이들을 천시하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내(히로스에 료코)가 질겁하고 사장인 이쿠에이(야마자키 쓰토무)에게 매일 혼나지만, 다이고는 얼결에 갖게 된 직업을 통해 인생의 깊이를 배워나간다. 한 차례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던 영화 <굿’바이: Good&Bye>의 내용이다.

우리는 삶의 존엄과 죽음의 존엄을 함께 고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논란이 되는 죽음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존엄사와 안락사로 나누어진다. 존엄사는 지난 2009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9대4로 첫 허용 판결이 나온 후, 10여 년의 논의를 거쳐 2018년부터 법에 따라 시행 중이다. 본인과 가족의 의사에 따라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약하면 심폐소생술, 항암제, 수혈 등 몇 종의 제한된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소극적인 개념이다.

반면 안락사(Euthanasia)는 보다 적극적이다. 환자의 소생 가능성을 염두에 두긴 하나 그것이 본질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시점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생을 마감할 권리, 그 또한 양보할 수 없는 인권이라는 철학적 논의를 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프랑스의 배우 알랭 들롱은 안락사 결정을 밝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사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2019년 뇌졸중 수술을 받은 후 투병 중일 뿐이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면서 본인의 결정하에 세상을 뜨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존엄사와 안락사의 논의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 존엄사는 현대 의학의 연명 치료가 고도로 발달한 탓에 생긴 부수적 현상에 가깝다. 전통적으로 효와 가족을 중시하던 한국에서도 비교적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적극적 안락사는 다르다. ‘생명’이 지속되면서 내가 생각하는 아름답고 행복하며 바람직한 ‘삶’을 망가뜨릴 때, ‘삶’을 위해 ‘생명’을 포기할 권리가 개인에게 있다는 발상의 산물이다. 자유와 선택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에 둔다.

안락사 옹호론은 얼핏 보면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인다.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 등 많은 이성주의자들이 소극적인 존엄사를 넘어 적극적 안락사를 옹호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안락사의 허용은 결국 의사의 도움을 받아 고통 없이 자살할 권리를 주는 셈이다. 의사에게 죽음의 서비스를 제공할 권리를 허락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수천 년 넘게 유지해온 가장 기본적인 도덕률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이 쉽게 끝나지 않는 이유다. 나의 존엄한 삶을 위해 내 생명을 스스로 빼앗는 것은 정당한가? 자살을 할 때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마련한다면, 사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 충만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는 것. 그 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좋은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추로서 우리는 ‘좋은 죽음’을 열망한다는 것. 모든 철학과 윤리의 고민이 결국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로 향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문재인 정권은 공교롭게도 대선을 앞두고 방역의 고삐를 풀어버렸다. 고작 수백 명의 확진자가 나와도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게 하던 그들이, 이제는 수십만의 확진자와 함께 매일 수백 명씩 사망자가 쏟아져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4월 2일부로 현행 거리 두기를 중단할 예정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K방역 홍보 대신 백신 확보부터 했어야 한다. 치료제를 충분히 구비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들은 최대한 아름답게 유족과 작별할 수 있도록 대비했어야 마땅하다. 현실은 정반대다. 코로나 사망자를 화장 대신 매장해도 된다고 규칙을 바꿔놓고 2개월간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다. 이는 3일장이 6일장, 7일장으로 늘어나 고통받은 유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망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너무도 원통하다. 자녀들에게 더 큰 부담을 안겨주는 작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테니 말이다.

코로나 사망자의 대부분은 고령층이다. 한국·전쟁을 직접 겪었거나 잿더미가 된 조국에서 맨주먹으로 태어난 이들이다. 황무지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이루어낸 주역들이, 생의 마지막에 아름다운 작별을 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대체 무슨 권리로 이러는가. 왜 마지막까지 국민의 삶의 존엄을, 심지어 죽음의 존엄까지 농락하는가.

<굿바이>로 돌아와 보자. 익숙지 않은 일을 배우며 힘들어하던 다이고는 어느 날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를 보고 말한다. “죽기 위해 강을 거스르다니 서글프네요. 어차피 죽을 거면 편하게 죽지.” 어리석은 질문에 이쿠에이가 던지는 현명한 답. “돌아가고 싶겠지, 고향으로!” 다이고의 인생도 마찬가지. 고향으로 돌아와 납관이라는 일본 사회가 천시하는 일을 하며 스스로의 인생을 되찾았다. 태어난 곳에서 미래의 씨앗을 뿌리고 숨을 거두는 삶과 죽음의 존엄을 회복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