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만 열면 종전·동맹·자유 떠들더니… 젤렌스키 홀대한 대한민국 국회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처칠
우크라이나 외면한 한국
일러스트=유현호
1940년 5월 9일. 히틀러는 체코,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에 이어 벨기에로 총부리를 겨눴다. 무려 300만 대군이 집결해 있었다. 대대적 침략을 앞둔 가운데 영국 정계도 발칵 뒤집어졌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을 묵인하면 그 이상 야욕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는데, 그런 기대가 허구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체임벌린은 쫓겨나다시피 물러나고 다음 날 윈스턴 처칠이 총리가 됐다.
처칠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체임벌린이 유럽에 보내놓은 영국의 30만 육군은 됭케르크에서 포위당해 전멸당할 처지다. 칼레에도 병력 4000명이 갇혀 있다. 고립된 것은 처칠 본인도 마찬가지. 보수당 주류는 여전히 독일과 평화 협상을 하자고 주장한다. 체임벌린을 등에 업은 외무장관 핼리팩스는 입만 열면 처칠을 ‘전쟁광’으로 몰아붙이며 당내 여론을 선동한다. “대화만이 해결책입니다. 왜 불필요한 전쟁을 합니까?”
영화 <다키스트 아워>가 숨 가쁘게 그려내는 2차 세계대전 초기의 암울한 풍경이다. 영화에서 생략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을 짚어보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것은 1939년 일. 영국과 폴란드는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니 영국과 독일은 전쟁 상태였다. 하지만 체임벌린 내각은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은 징병제를 통해 병력을 끌어올리고 프랑스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영국군 중 제대로 전쟁을 하고 있던 것은 해군뿐이었다. 내각을 이루는 보수당 의원 중 평화라는 환상에 휩싸이지 않고 싸워야 할 전쟁을 대비하고 있던 사람은 해군장관 처칠뿐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전쟁은 절대적인 악으로, 평화는 절대적인 선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평화를 외치고만 있다 해서 평화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또 실행해야 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수없이 확인된 영원한 진리다.
여기서 철학적 질문이 나온다. 정당한 전쟁은 존재하는가? 네덜란드의 법학자 휘호 흐로티위스(Hugo Grotius)는 1625년 초판 발간된 <전쟁과 평화의 법>에서 정당한 전쟁을 논하기 위한 요건을 크게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 타국이 침략할 때 당하고만 있는 어리석은 평화를 옹호할 수는 없다. 자기 방어를 위한 전쟁은 정당하다. 둘째, 정당한 권리를 빼앗겼을 때 그것을 되찾는 방법이 전쟁밖에 없다면, 권리 회복을 위한 전쟁도 때에 따라 정당하다. 셋째, 인류 보편의 눈으로 볼 때 도저히 용납 불가능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면 그것을 막기 위한 전쟁에도 정당성이 부여된다.
흐로티위스 눈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면 어떨까? 우크라이나 동부 영토는 러시아 것이며, 우크라이나의 나치를 쫓아내겠다는 것이 푸틴의 명분이었다. 둘째와 셋째 이유를 들이댄 것이다. 그런데 젤렌스키 대통령은 아우슈비츠 생존자 집안 출신 유대인이다. 나치 운운하는 것은 거짓말을 넘어 모욕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하는 국가는 북한을 비롯한 극소수뿐이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침략을 당한 처지다. 젤렌스키의 전쟁은 의문의 여지 없이 정당하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젤렌스키는 글로벌 리더로 부상했다. 처칠의 명언을 인용한 영국 하원 화상 연설은 그러한 행보의 백미로 꼽힌다. “우리는 해변에서도, 벌판에서도,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 국민의 의지를 모아 항전하는 리더의 등장에 자유 진영이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우크라이나는 키이우를 향한 러시아의 공세를 꺾었고, 키이우를 방문한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젤렌스키를 만나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이 추세에 역행하는 나라가 있다. 대한민국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내뱉은 ‘초보 대통령이 러시아 자극해 전쟁 벌어졌다’ 발언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지난 11일 국회에서 열린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화상 연설을 보면, 우리 현실은 참담할 정도다.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여야 의원 300명은 고사하고 고작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기립 박수조차 나오지 않는 썰렁한 행사를 만들고 만 것이다.
자유 진영에 속하는 나라 중 젤렌스키를 이렇게까지 홀대한 건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일차적 이유는 곧 야당이 될 거대 여당, 더불어민주당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민간인 학살은 조작된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사람을 우크라이나 대통령 연설 당일 초청해 토론회 자리에 앉혀놓는 그런 정당이 국회에서 과반을 점하고 있다. 입만 열면 한반도 종전 선언을 지지해달라던 자들이, 정작 다른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모르쇠로 일관한다. 국제사회의 눈으로 볼 때 실로 가증스러울 것이다.
러시아와 맺은 관계가 우려되고 경제적 영향을 고민해야 한다는 항변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없다면 유럽 모든 국가는 당장 올겨울부터 국민들이 말 그대로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자유 진영의 우방국들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우크라이나와 함께하는 중이다. 한국전쟁 당시 세계 각국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난 대한민국 집권 여당은 지금 대체 뭐 하는 짓인가.
곧 여당이 될 국민의힘의 실상 역시 만만치 않다. 참석자 면면을 보면 현역 의원을 다 합쳐도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보다 참석자가 적었다. 입만 열면 안보, 동맹, 자유를 떠들더니 대선 끝났다고 남의 집에 난 불 취급하는 것인지. 젤렌스키를 지지하고 응원한다던 윤석열 당선인 또한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처칠은 어디 있는가? 우리에게는 핼리팩스와 체임벌린만 있단 말인가?
<다키스트 아워>로 돌아가 보자. 전시 지하 벙커에서 핼리팩스는 처칠에게 평화라는 이름의 항복을 강요한다. 갈등하던 처칠은 평생 타본 적 없는 지하철에 올라타 시민들을 만난다.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결연한 투쟁 의지에 감동한 처칠은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 장면은 영화적 각색이지만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다. 결국 히틀러는 영국을 꺾지 못했다. 그 어떤 독재자도 자발적으로 뭉친 국민을 이겨낼 수는 없는 것이다. 처칠의 말이 옳다. 승리가 없다면 생존도 없다. 우크라이나의 정당한 전쟁을 지지한다.
우크라이나 외면한 한국
1940년 5월 9일. 히틀러는 체코,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에 이어 벨기에로 총부리를 겨눴다. 무려 300만 대군이 집결해 있었다. 대대적 침략을 앞둔 가운데 영국 정계도 발칵 뒤집어졌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을 묵인하면 그 이상 야욕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는데, 그런 기대가 허구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체임벌린은 쫓겨나다시피 물러나고 다음 날 윈스턴 처칠이 총리가 됐다.
처칠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체임벌린이 유럽에 보내놓은 영국의 30만 육군은 됭케르크에서 포위당해 전멸당할 처지다. 칼레에도 병력 4000명이 갇혀 있다. 고립된 것은 처칠 본인도 마찬가지. 보수당 주류는 여전히 독일과 평화 협상을 하자고 주장한다. 체임벌린을 등에 업은 외무장관 핼리팩스는 입만 열면 처칠을 ‘전쟁광’으로 몰아붙이며 당내 여론을 선동한다. “대화만이 해결책입니다. 왜 불필요한 전쟁을 합니까?”
영화 <다키스트 아워>가 숨 가쁘게 그려내는 2차 세계대전 초기의 암울한 풍경이다. 영화에서 생략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을 짚어보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것은 1939년 일. 영국과 폴란드는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니 영국과 독일은 전쟁 상태였다. 하지만 체임벌린 내각은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은 징병제를 통해 병력을 끌어올리고 프랑스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영국군 중 제대로 전쟁을 하고 있던 것은 해군뿐이었다. 내각을 이루는 보수당 의원 중 평화라는 환상에 휩싸이지 않고 싸워야 할 전쟁을 대비하고 있던 사람은 해군장관 처칠뿐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전쟁은 절대적인 악으로, 평화는 절대적인 선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평화를 외치고만 있다 해서 평화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또 실행해야 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수없이 확인된 영원한 진리다.
여기서 철학적 질문이 나온다. 정당한 전쟁은 존재하는가? 네덜란드의 법학자 휘호 흐로티위스(Hugo Grotius)는 1625년 초판 발간된 <전쟁과 평화의 법>에서 정당한 전쟁을 논하기 위한 요건을 크게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 타국이 침략할 때 당하고만 있는 어리석은 평화를 옹호할 수는 없다. 자기 방어를 위한 전쟁은 정당하다. 둘째, 정당한 권리를 빼앗겼을 때 그것을 되찾는 방법이 전쟁밖에 없다면, 권리 회복을 위한 전쟁도 때에 따라 정당하다. 셋째, 인류 보편의 눈으로 볼 때 도저히 용납 불가능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면 그것을 막기 위한 전쟁에도 정당성이 부여된다.
흐로티위스 눈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면 어떨까? 우크라이나 동부 영토는 러시아 것이며, 우크라이나의 나치를 쫓아내겠다는 것이 푸틴의 명분이었다. 둘째와 셋째 이유를 들이댄 것이다. 그런데 젤렌스키 대통령은 아우슈비츠 생존자 집안 출신 유대인이다. 나치 운운하는 것은 거짓말을 넘어 모욕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하는 국가는 북한을 비롯한 극소수뿐이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침략을 당한 처지다. 젤렌스키의 전쟁은 의문의 여지 없이 정당하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젤렌스키는 글로벌 리더로 부상했다. 처칠의 명언을 인용한 영국 하원 화상 연설은 그러한 행보의 백미로 꼽힌다. “우리는 해변에서도, 벌판에서도,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 국민의 의지를 모아 항전하는 리더의 등장에 자유 진영이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우크라이나는 키이우를 향한 러시아의 공세를 꺾었고, 키이우를 방문한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젤렌스키를 만나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이 추세에 역행하는 나라가 있다. 대한민국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내뱉은 ‘초보 대통령이 러시아 자극해 전쟁 벌어졌다’ 발언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지난 11일 국회에서 열린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화상 연설을 보면, 우리 현실은 참담할 정도다.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여야 의원 300명은 고사하고 고작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기립 박수조차 나오지 않는 썰렁한 행사를 만들고 만 것이다.
자유 진영에 속하는 나라 중 젤렌스키를 이렇게까지 홀대한 건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일차적 이유는 곧 야당이 될 거대 여당, 더불어민주당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민간인 학살은 조작된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사람을 우크라이나 대통령 연설 당일 초청해 토론회 자리에 앉혀놓는 그런 정당이 국회에서 과반을 점하고 있다. 입만 열면 한반도 종전 선언을 지지해달라던 자들이, 정작 다른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모르쇠로 일관한다. 국제사회의 눈으로 볼 때 실로 가증스러울 것이다.
러시아와 맺은 관계가 우려되고 경제적 영향을 고민해야 한다는 항변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없다면 유럽 모든 국가는 당장 올겨울부터 국민들이 말 그대로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자유 진영의 우방국들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우크라이나와 함께하는 중이다. 한국전쟁 당시 세계 각국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난 대한민국 집권 여당은 지금 대체 뭐 하는 짓인가.
곧 여당이 될 국민의힘의 실상 역시 만만치 않다. 참석자 면면을 보면 현역 의원을 다 합쳐도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보다 참석자가 적었다. 입만 열면 안보, 동맹, 자유를 떠들더니 대선 끝났다고 남의 집에 난 불 취급하는 것인지. 젤렌스키를 지지하고 응원한다던 윤석열 당선인 또한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처칠은 어디 있는가? 우리에게는 핼리팩스와 체임벌린만 있단 말인가?
<다키스트 아워>로 돌아가 보자. 전시 지하 벙커에서 핼리팩스는 처칠에게 평화라는 이름의 항복을 강요한다. 갈등하던 처칠은 평생 타본 적 없는 지하철에 올라타 시민들을 만난다.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결연한 투쟁 의지에 감동한 처칠은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 장면은 영화적 각색이지만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다. 결국 히틀러는 영국을 꺾지 못했다. 그 어떤 독재자도 자발적으로 뭉친 국민을 이겨낼 수는 없는 것이다. 처칠의 말이 옳다. 승리가 없다면 생존도 없다. 우크라이나의 정당한 전쟁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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