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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6

[별별시선]세월호 침몰, 음모인가 사고인가

[별별시선]세월호 침몰, 음모인가 사고인가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원인’을 찾느냐 아니면 ‘범인’을 찾느냐에 따라 근대인과 전근대인의 경계선이 나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학적인 세계관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파악하고 제거하려 한다. 반면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몸에 익히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문제와 맞닥뜨리면 원인이 아닌 ‘범인’을 파악하고 솎아내는 일에 골몰하게 마련이다.

세월호 침몰 이후의 한국 사회가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세월호가 왜 침몰했느냐 하는 것, 사고의 ‘이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누가’ 세월호 침몰을 만들었는가, 침몰 원인이 아닌 ‘범인’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비난의 화살이 날아다니는 경로가, 적어도 이번 사건에서는 눈에 띄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박근혜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사고 현장에서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공유하고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침몰하는 거대 함선 속에 뛰어들어 승객을 구조하지 않은 것은 해경의 명백한 직무 태만이라는 책임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것은 대중적 차원에서 보자면 온 국민이 격양된 상황 속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 세월호 침몰의 이면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 채, 국가정보원부터 청와대까지 온갖 주체가 개입한 음모론을 만들고 유포하는 사람들이다. 마치 1987년 항쟁 이후 첫 대선을 앞두고 KAL기 폭파 사건이 터졌듯, 그렇게 국민들의 시선을 정치로부터 특정 사건으로 돌려놓기 위한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수많은 오피니언 리더 가운데 특히 팟캐스트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진행하는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이런 입장을 널리 퍼뜨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정작 세월호 사고가 난 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하락 일변도로 치닫고 있다. 대통령 직속으로 운영되는 국가정보원에서 이렇게 대통령에게 불리한 조작 사건을 만들 이유가 있을까? 둘째, 비행기가 폭파되자마자 폭파범 ‘마유미’를 체포해 국민 앞에 사냥감처럼 전시하였던 1987년과 달리, 지금은 멀쩡히 국내에서 도피 중인 것으로 여겨지는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도 잡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된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일단 유병언의 신병을 확보한 다음 ‘거사’를 치렀어야 하지 않을까?

요컨대 국가정보원이 지금처럼 막대한 위험을 부담하면서까지, 만약 세월호 침몰이 어떠한 종류의 정치 공작이라면, 이런 공작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김어준뿐 아니라 세월호 침몰에 관한 음모론을 이야기하는 모든 이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세월호 침몰 배후에 거대한 음모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며 주장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은 언론인의 의무라는 말이다.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기 위한 서명이 진행되고 있다. 국정조사도 곧 시작될 예정이다. 그런데 과연 세월호 침몰은 어떤 사고였는지, 우리는 최소한의 합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 단원고 학생들을 해치고자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으며,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은폐하고 있는 사고인가? 아니면 어떤 대단히 큰 규모의 해상 운송 사고인데, 그것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 대단히 많을 뿐인가?

전자를 택한다면 우리는 ‘범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후자를 택하면 우리는 ‘원인’을 밝혀야 하고, 그 과정과 결과는 그리 후련하고 속 시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범인’보다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모든 세월호 승객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다. 또한 우리는 사방팔방으로 ‘범인’이 누군지 묻고 따지는 그런 식의 음모론에 대해, 성숙한 시민사회의 반론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비극을 비극으로, 사고를 사고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올바른 대응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7062042245&code=990100&s_code=ao122

2014-06-08

[별별시선]검찰총장도 선거로 뽑자

[별별시선]검찰총장도 선거로 뽑자


6·4 지방선거가 끝났다. 보수적인 성향의 언론들은 일제히 교육감 직선제를 공격하고 있다. 교육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며, 4년마다 교육감이 예상치 못한 사람으로 바뀌니 교육공무원들이 혼란스럽다는 등의 논리가 동원된다. 보수적인 성향의 정부에서 임명한 교육부 장관과 진보적인 교육감의 손발이 안 맞으면 비효율적이라는 비판도 빠지지 않는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다 틀린 말이다. 물론 학생과 학부모는 교육감 선거의 직접적 이해관계자이지만, 교육은 아주 장기간에 걸친 국가적 방향을 움직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결국 국민 모두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상관없는 사람이 투표하기 때문에 교육감 직선제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언론 중, 그 상관없는 사람들의 교육감 투표권을 뺏는 대신, 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이 단 하나라도 있던가? 교육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국민에게는 그 과정에 개입할 권리가 있다.

중앙 정부와 손발이 맞지 않는다는 논리 또한 그렇다. 온 나라가 똑같은 유형의 사람을 붕어빵처럼 찍어내려 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는 산업역군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면, 교육이 ‘중앙’의 명령에 따라야만 할 이유를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교육 행정의 안정성이 흔들린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안정성과 관료적 경직성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4년에 한 번씩 선거로 뽑으면, 적어도 직선제를 하지 않을 때보다는, 내부 파벌이 고착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무언가를 보수 언론이 싫어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보적일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교육감 선거의 반대 근거를 종합해보면 우리는 어떤 경향성을 발견하게 된다. 직선제로 어떤 조직의 장을 뽑으면, ‘윗선’에서 누군가가 낙점되어 내려올 때에 비해, 시끌벅적하고 어찌 보면 난잡하다. 선거에 드는 비용 자체가 낭비로 보일 수도 있다. 해당 조직의 구성원들은 누가 자신들의 ‘보스’가 될지 섣불리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혼돈은 결국 민주주의의 필요조건들이다. 결국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철저히 검증된 교육감 진영을 갖춘 채, 그들에게 학생들과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있게 되었다.

교육감 직선제에 대한 반발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떤 조직을 ‘민주화’하려면, 그 조직의 최종적인 책임자를 직선제로 뽑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의 교육은 그렇게 민주주의의 길로 접어들었다. 선거를 통해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당선되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아닌 국민 전체가, 교육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육감 선거를 통해 교육은 비로소 ‘우리의 문제’가 되었다. 그렇게 뽑힌 교육감의 성향 때문이 아니라, 교육감을 직선제로 뽑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향한 진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사회는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교육감 직선제를 지켜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많은 직선제 선거를 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령 검찰총장을 국민 직선제로 뽑는다면 어떨까? 국민의 표로 심판받는 검찰 조직이 과연 지금처럼 권력의 해바라기 노릇만 할 수 있을까? 정치적 야심을 가진 젊은 검사라면 누가 시키기도 전에 일선에 나서서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이다. ‘국민 검사’가 발에 차이고 넘쳐날 것이다.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은 검찰총장, 다음번 선거에서도 재선되고 싶은 검찰총장은, 현역 대통령의 비리까지 성역 없이 수사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검찰의 모습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번 6·4 지방선거가 주는 교훈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선거가 필요하다. 더 많은 권력이 선거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양되어야 한다. 이른바 ‘권력기관’이라는 검찰의 수장은 국민이 뽑아야 마땅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면, 그 권력의 칼자루를 국민이 직접 손에 쥐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일이니 말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082030455&code=990100&s_code=ao122

2014-04-20

[별별시선]‘침몰 원인’과 ‘참사 원인’은 구분해야

[별별시선]‘침몰 원인’과 ‘참사 원인’은 구분해야


4월20일 새벽,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관계들을 놓고 이야기해보자. 세월호 선장 이모씨를 포함해, 세월호 침몰이 시작된 직후 탈출한 선원들은, 탑승객 구조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특히 비난의 화살은 선장에게 집중적으로 쏠리고 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법에 따라 엄정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구조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면 세월호 선장 및 승무원들의 잘못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안내방송을 듣고 선실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학생들을 생각하면 나 역시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눈물이 핑 돈다. 어쩌면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적시에 구조 작업이 진행되지 못했고, 지금의 막대한 인명 피해가 빚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일부 언론 역시 세월호 선장 및 귀환 선원들의 책임과 처벌에 집중하는 듯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사고 수습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현장을 떠난 선원들, 특히 선장의 책임은 그 어떤 수사학을 동원한다 해도 변론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월호 선장에게 돌을 던지는 여론에 동참하기 전에 한 가지 사실을 먼저 떠올려보자.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에게 구조 의무가 발생한 이유는 배가 침몰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세월호의 정확한 침몰 원인을 모른다. 이대로라면 제2, 제3의 세월호 침몰사건이 또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실종자, 사망자, 구조자,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우리는 세월호가 침몰한 이유를 확인해야만 한다.

사회학자 찰스 페로는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원제: Normal Accident)에서, 일상적이고 사소하지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실수와 오류가 몇 개 이상 중첩될 경우 대형사고가 발생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이른바 ‘정상 사고’ 이론이다. 그에 따라 세월호 침몰을 검토해보자.

세월호는 일본에서 18년간 운항한 후 국내에 수입되었다. 한편 2009년 해운법 시행규칙이 변경되어 여객선 선령 제한이 20년에서 30년으로 늘어났고, 그래서 2014년에도 세월호는 퇴역하지 않고 인천-제주 간 승객 및 화물선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세월호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후 선실을 증축하였는데, 그로 인해 배의 무게중심이 높아졌다. JTBC의 보도에 따르면 세월호의 선원들은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 탱크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해왔다. 또한 대형 로로선이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을 주는 ‘스테빌라이저’ 역시 작년부터 고장난 상태였다는 증언이 있다.

세월호는 로로선이었다. 로로선이란 자동차들이 자가 동력으로 승·하선할 수 있도록 설계된 선박이다. 흘수선 가까운 곳에 출입구가 마련되며, 그에 따라 다른 여객선에 비해 침수 가능성이 더 높다. 배가 흔들릴 경우 차량이라는, 본래부터 이동을 목적으로 만든 대형 화물이 쏠릴 가능성 또한 커지는 것이다. 게다가 세월호 선원 중에는 탑재된 컨테이너가 쇠사슬이 아닌 밧줄로 묶여 있었음을 증언한 사람이 있고, 승객 가운데 일부는 컨테이너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사고 발생 전날, 짙은 안개 속에 예정보다 2시간 늦게 인천항에서 출항했다. 도착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는지 평소에는 택하지 않는 다도해로 들어섰다. 그중에서도 물살이 빠른 맹골수로를 운항할 때에는 항해 순번에 따라 해당 해협에서 항해 경험이 없는 20대의 3등 항해사가 키를 잡았다. 세월호는, 취객처럼 비틀거렸고, 바다 위에 쓰러졌다.

세월호가 침몰하게 된 원인을 분석해보면, 이 선장의 잘못은, 컨테이너를 밧줄로 묶은 해운사 직원이나, 스테빌라이저 수리를 거부한 선박 회사의 그것과 같이, 그저 ‘사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상화된 잘못이 쌓여 큰 재앙을 낳은 또 하나의 사례일지도 모른다. 그의 도주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주자는 말이 아니다. ‘침몰 원인’과 ‘참사 원인’을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선장에 대한 처벌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배가 침몰하게 된 ‘사소한’ 원인과 잘못을 냉정하게 조사하고 원인을 규명하며, 매뉴얼을 준수하는 위험 관리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사고’가 ‘정상’인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4202100295&code=990100&s_code=ao122

2014-03-30

[별별시선] 탯줄을 끊어라

[별별시선] 탯줄을 끊어라

포유동물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어미의 자궁에서 태어난 새끼가 어미의 젖을 먹고 크는 동물이라고 말이다. 물론 오리너구리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포유류는 그렇다. 그리하여 포유류는 배꼽을 가지고 있다. 어미의 자궁 속에서 산소와 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성장하기 위한 생명줄이 탯줄이며, 탯줄이 떨어져나간 흔적이 배꼽이다.

포유동물의 아기들은 종종 태어나는 과정에서 탯줄이 목에 감겨 죽곤 한다. 여태까지는 생명선 노릇을 했던 탯줄 때문에 스스로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당하고 마는 것이다. 한 번 끊어진 탯줄은 다시는 복원될 수 없다. 태어나는 것은 곧 이별이다. 탯줄을 제때 끊지 못하면, 그것이 목에 감기기라도 하면, 새로운 생명은 탄생할 수 없다.
 

청년들과 학생들이 대화를 나눌 때, ‘걔는 탯줄을 잘 잡아서’ 같은 표현을 하는 광경을 종종 목격했다. 탯줄을 잘 잡았다니, 무슨 말일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부모를 잘 만나서, 어려서부터 풍족하게 누리고 부족함 없는 기회를 제공받았다는 소리다.

궁지에 몰린 자신에게, 마치 동화 ‘햇님 달님’처럼,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는 일 따위는 없다는 것을 청년 세대는 철저히 체감하고 있다. 모든 것은 태어날 때 결정된다. 탯줄을 잘못 잡으면 떨어지고, 탯줄을 잘 잡으면 올라간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탯줄 결정론’이라고 명명해보자. 그렇다면 그것은 요즘 젊은이들이 무기력하기 때문에 호응을 얻는, 최근 들어 퍼지기 시작한 삐뚤어진 사고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한반도의, 혹은 지구 전체의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시간을 지배해왔던 관념일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양반과 상놈은 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 기타 등등.

탯줄 결정론을 극복하기 위해 박혁거세는 본인이 포유류라는 사실을 부정해야 했다. 포유동물이 아니라 난생동물이라고, 알에서 태어났다고 탄생 설화를 퍼뜨린 것은, 그의 부계 혈통이 그다지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똑같이 나라를 세웠어도 백제의 비류와 온조는 부여의 왕족임을 천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탯줄을 잘 잡은 비류와 온조는 탯줄을 과시했지만, 탯줄을 잘못 잡았던 박혁거세는 스스로를 반인반신으로 포장해야 했을 터이다.

그 후로는 탯줄 달고 태어나는 포유동물의 역사였다. 비로소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후반의 일이다. 한반도의 북쪽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었고, 남쪽은 미국을 등에 업은 대한민국으로 거듭났다.

미국은 동아시아 국가들에 핵우산을 포함한 군사적 안보를 제공하는 대신, 그들이 값싼 공산품을 생산하여 주기를 원했다. 북한과 맞서기 위해 경제와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박정희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했다. 고도성장이 시작되었고, 노력하면 개천에서 용 날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 온 것만 같았다.

2014년은 단기로 4347년이다. 4347년에 걸친 한민족의 역사 가운데 대다수의 인구 구성원들이 탯줄 결정론을 부정할 수 있었던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공부하면 ‘팔자’가 달라진다고 믿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은, 극히 예외적이었다. 문제는 그 예외적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요구해야 할, 당위에 가깝다는 것이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곳일 테지만, 세상이 원래 불공평한 곳이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래, 너는 탯줄을 잘 잡았구나, 너희 집이 원래 부자라서 그런가보구나, 비아냥거리고 냉소하는 젊은 세대의 태도 자체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청년들은 실로, 그들의 목에 감긴 탯줄로 인해 질식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튼튼하고 좋은 탯줄을 잡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승자의 자리에 머물도록 예정된 그런 포유동물들이 존재한다. 누군가가 탯줄에 목이 졸려 죽어갈 때, 다른 이는 좋은 탯줄을 잡고 그들만의 천국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4000년의 부조리와 불공정한 질서가 돌아오고 있다. 대한민국이여, 탯줄을 끊어라.


2014-02-23

[별별시선]손기정, 김연아, 빅토르 안

[별별시선]손기정, 김연아, 빅토르 안

노정태 | 자유기고가

아마추어 선수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각자의 조국을 대표하여 경기하게 하는 올림픽은, 그 출발부터 국가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일종의 대리전이었다.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그랬고,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말이다.

학창 시절 국사 교과서를 통해 질리도록 보고 듣고 배운 바로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나라를 빼앗겼기에 조국의 깃발이 아닌 정복자의 국기를 달고 뛰는 마라토너 손기정. 그가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낭보를 듣고도 끝내 기뻐하지 못하는 식민지 조선 사람들. 그 소식을 전하면서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버린 동아일보 기자들. 그로 인한 탄압, 고취되는 민족의식, 기타 등등.

그런데 이번 소치올림픽에서는 퍽 다른 양상이 전개됐다. 태극기를 달고 빙판을 누비던 쇼트트랙 최강자 안현수 선수가, 본인의 말에 따르자면 “정말 좋아하는 운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기에, 러시아로 귀화해 그 나라의 국가대표가 됐다. 그는 부상에 시달렸고 소속팀이었던 성남시청이 해산되는 불운을 겪었다. 일각에서는 안현수가 한국빙상연맹 파벌 싸움의 희생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온 운동을 계속하고자 새로운 조국의 품에 안겼고, 러시아인들에게 친숙한 가수 빅토르 최의 이름을 따 스스로를 ‘빅토르 안’이라고 부르게 됐다.

냉전이 끝나고 ‘평평해진’ 세계 속에서, 자신의 선수 생활을 보장하는 나라로 엘리트 체육인이 귀화하는 일은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빅토르 안의 경우처럼 주목받은 사례가 많지 않아서 그렇지, 한국계 체육인이 어느 외국의 국가대표가 되는 일은 그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로도 발생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특별했다. 나 자신을 포함해 TV나 인터넷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어느새 대한민국 국가대표팀보다 오히려 러시아 국가대표인 빅토르 안을 응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SNS를 통해 확인되는 여론은 그랬다.

한편 많은 이들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진 바, 김연아 선수는 한국빙상연맹에서 체계적이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는커녕,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홀로 짊어지고 있었다. 요컨대 대한민국이 김연아에게 해준 것은 김연아가 대한민국에 해준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이것은 적어도 김연아의 팬들 사이에서, 넓게는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종목 및 기타 스포츠 전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이후의 세계에 국민국가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모든 인간은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등록되며, 그에 따르는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 그래서 마라토너 손기정은 본인의 뜻과 달리 일본인으로서 경기를 치러야 했고, 한국인 안현수는 러시아인 빅토르 안이 되어 빙판 위를 누볐으며, 그의 라이벌이라는 아사다 마오 선수에 비교해볼 때 터무니없이 빈약한 지원을 받은 김연아는 그래도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손기정에서 빅토르 안까지. 그리고 ‘국적이 안티’라는 말을 종종 듣는 김연아까지. 1936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라, 갓 독립할 당시만 해도 최빈국 중 하나였던 그 나라는, 현재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는, 적어도 올림픽이라는 ‘국가주의의 격전지’를 놓고 볼 때, 사뭇 다르다. 나라 잃은 설움을 곱씹고 공분하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지금은 적지 않은 국민들이, 한국 국적을 포기한 선수를 응원하며, 오히려 그런 탁월한 이를 놓친 조국을 비웃는다.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 너는 한 명의 대한민국이다”라는 광고를 보며 마치 내 일처럼 분통을 터뜨린다.

개인의 행복과 성공보다 애국심과 헌신을 앞세울 수 있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한민국’을 재정의할 것인가? 2014년 2월24일 막을 내리는 소치올림픽이 던진 숙제가 바로 그것이다.

2014-01-26

[별별시선]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별별시선]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철학자 루소는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만약 누군가 ‘나는 나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너의 노예가 되겠다’고 계약한다면, 그 계약은 과연 유효한가? 계약을 쌍방이 서로에게 특정한 의무를 지고, 상대에게 그 의무의 이행을 요구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본다면, 노예계약은 형용모순이다. 계약에 의해 노예가 되는 순간 그는 아무런 권리를, 가령 하루에 세 끼는 밥을 먹여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 따위조차,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자유민이 노예계약을 맺으면, 그는 노예계약의 권리와 의무를 누릴 자격마저 잃어버리므로, 그것은 원천무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여 루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노예제도와 권리라는 이 두 말은 양립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서로 상반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하든, 아니면 한 인간이 한 나라 인민 전체에게 하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언제나 터무니없는 일이다. ‘너와 계약을 하나 맺겠어. 그런데 모든 부담은 네가 떠안고, 이익이란 이익은 모두 내가 갖는 거야. 또 나는 내가 원하는 한에서만 그 계약을 지키겠어. 그러니 너도 네가 원하는 한은 그것을 지키도록 해.’ ”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다. 또한 인간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완전히 박탈할 수 없다. 설령 그가 왕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루소의 생각은 그랬다. 그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사회계약을 통해 공동체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내려온 권리에 의해, 오직 국왕만이 자유를 누리며 국민들을 통치할 권리를 갖는다는 기존의 정치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왕은 무엇이든 내키는 대로 누리며, 국민들은 오직 의무만을 갖는 사회계약, 즉 전제군주에 대한 노예계약은 성립할 수조차 없다. 루소의 혁명적 발상이었다.

원래부터 온 인류에게 공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한국인의 개인정보가 한 번 더 유출되었기로서니, 루소가 어쩌고 사회계약이 저쩌고 떠들어대는 것은 속된 말로 ‘오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규모가 큰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지만, 사실 사건 자체만을 놓고 보면 그렇다. 카드 회사들은 개인정보 관리 업체를 고용했고, 그 업체에서 일하던 직원이 개인용 USB에 수천만 명의 개인정보를 복사하여 자기 집에 들고 갔다. 동원된 방식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로-테크(low-tech)하긴 하지만, 어쨌건 본질적으로 해킹을 통한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커지자,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소비자도 정보제공단계부터 신중해야 한다. 모두 다 정보제공에 동의해줬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동의’를 클릭하거나 체크하지 않으면 금융 거래가 불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그렇게 제공된 개인정보를 제대로 간수하지 않은 금융기관이 아니라, 개인들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형식이 얼마나 불공정하건 간에, 너는 ‘동의’했으니, 책임은 네가 지는 것이며 카드 회사들에는 그 정보를 잘 간수했어야 할 의무를 묻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한국의 지배 계층이 국민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너는 한국에 태어났고, 한국인이며, 한국인으로서 온갖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하지만 국가는 책임을 지지 않고, 국민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며, 국가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건 국민에게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지만, 18세기의 철학자 루소가 말한 불공정한 노예계약을, 지금 이 순간에도 강요당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사건은 피해 규모와 무관하게, 본질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오늘날 빈번하게 발생하는 개인정보 해킹 사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현오석의 ‘망언’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치인들의 ‘명언’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계약과,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계약이 본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 사건은 너무도 투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호히 외쳐야 할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