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9

마트 사재기, 우리도 했었다.

'미국, 유럽인들은 왜 사재기를 할까,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한국인들은 안 그러는데?' 같은 소리 하면서 국뽕 빠는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우리도 그짓 다 했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2월 23일자 기사를 보자.

대량 구매 행렬은 대구에 이어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22일 경남 창원시 마산구의 한 마트에서도 라면, 생수 등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섰다. 같은 날 창원구 진해구의 한 온라인 카페에는 마트 내 유제품 판매대가 텅텅 빈 사진이 올라왔다. 서울 서초구 코스트코 양재점에서도 매장 개점 이후 한 시간 만에 생수 수백 세트가 동났다. 서초구 거주자 박모 씨는 “서울도 이제 사재기 붐이 이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마스크나 생활용품 구매에 수백만 원을 쓰는 경우도 있다. 지난 주말 회원 수가 190만 명에 달하는 네이버 온라인 커뮤니티 ‘파우더룸’에 ‘코로나19 때문에 100만 원을 썼다’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밖으로) 최대한 안 나갈 수 있도록 비상식량, 비누, 세정제, 마스크, 생활용품 등을 사 놓았더니 100만 원이 넘었다”고 했다. 이에 다른 회원들은 “나는 200만 원을 썼다” “남 일 같지가 않다” 등의 댓글을 남겼다.

실제로 온라인 주문이 최근 눈에 띄게 늘었다. G마켓에 따르면 20일 즉석밥과 라면 매출은 일주일 전인 13일 대비 각각 54%, 80% 늘었다. SSG닷컴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처음 발생한 1월 20일부터 2월 20일까지 식품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98% 증가했다.

"마트 먹거리 매대 ‘텅텅’…코로나19 확산에 ‘사재기’ 행렬 잇따라", 동아일보, 2020년 2월 23일

다들 좀 최소한의 품위를 갖고 살면 좋겠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 불안하면 일단 주변 사람들 보고 따라한다. 주변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러 가면 나도 사러 가야 안 불안하다.

미국인들이 사재기를 하는 것은 대체로 미국인들이 집이 넓고, 넓은 지역을 점유해서 살기 때문에 한국처럼 모든 것을 온라인 배송으로 해결하는 게 만만치 않아서, 즉 '생필품 서플라이' 그 자체가 하나의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 역시 한국처럼 모든 것을 인터넷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마트에 직접 가서 우르르 사고 있을 뿐이다.

그들도 사람이고, 당신도 사람이다. 외국 네티즌들이 한국 약국 앞에 마스크 사겠다고 줄 선 거 보면서 낄낄거리면 기분 좋겠나? 정말이지, 너무도 천박하다.

마트 사재기, 우리도 했다. 한 달도 채 안 된 일이다. 윤리의 많은 부분은 기억력에서 나온다. 기억을 좀 하면서 살자.

댓글 4개:

  1. "'난 그것을 했다'라고 내 기억은 말한다. '내가 그것을 했을 리 없다'고 내 자존심은 말하며 좀체로 굽히려 들지 않는다. 결국 기억이 지고 만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中

    물론 훗날 니체는 초인에 대해 역설하며 망각의 중요성 역시 설명하지만,
    그를 위해선 최소한 자존심(=허영심)을 냉정하게 밀어둘 수 있는 용기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그것이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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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악의 저편은 읽지 않았던 터라 저런 좋은 구절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니체는 망각의 중요성을 역설했지만, 동시에 '일관성'이 윤리의 근간이라고 초기부터 꾸준히 강조해왔습니다. 니체가 강조한 '망각'은 원한감정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로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이렇게 해석하게 되죠.

      지금 이탈리아는 쏟아져나오는 사망자를 다 처리하지도 못할만큼 심각한 상황입니다. 유럽 각국들이 애쓰고 있지만 비슷한 운명을 겪지 말라는 법이 없고요. 한국도 안심할 단계는 절대 아니고 말이죠. 사람들이 이번 사태 앞에서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너무 망가지는 모습들을 많이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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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렇죠. 망각은 어디까지나 건강하게 있기 위한 수단일 뿐, 그것이 특정 과제는 결단코 아닙니다.
      꼭 '과거가 사람들이 윤리적이었다'는 합리의 나선문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윤리를 의식하는 시민citizen으로서는 윤리에 대해 많이 가볍게 여기게 된 건 부인하기 힘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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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니체의 사고방식도 고대 그리스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 미화, 혹은 왜곡에 기반한 것이니, 말씀하신 정도의 '옛 윤리에 대한 희구'는 사회통념상 충분히 이해되고 허용될 수 있는 범주에 속하리라고 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불과 한 달 전 뉴스도 기억하지 못한 채, 인터넷에 떠도는 밈에 따라 반응하고, 그게 정치를 거쳐 정책이 되어버리는 좀 무서운 '집단망각'의 시대라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네요.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직업의 큰 부분인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큰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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