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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6

시어머니만 둘…교육 정치판 만든 '교육감 직선제' 없애라 [노정태가 고발한다]

시어머니만 둘…교육 정치판 만든 '교육감 직선제' 없애라 [노정태가 고발한다]

그래픽=김현서

지난달 30일 '서울시 교육감 중도·보수 진영 단일화 기구' 주관 행사가 열렸다. 행사 내용이 곧 단체 이름이었다. 3선에 도전하는 진보 진영 조희연 현 서울시 교육감에 맞설 중도·보수 진영의 단일 후보를 뽑는 경선이 치러졌다. 지난 18대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의원을 지낸 조전혁 혁신공정교육위원장이 이날 단일 후보가 됐다. 그런데도 보수 지지자들은 불안해한다. 보수 진영 조영달 서울대 사범대 교수가 단일화에 불참한 탓이다. 만약 조 교수가 출마하면 보수표가 나뉘어 조 교육감이 반사이익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
오는 6월 1일 치러질 교육감 선거 풍경이다. 늘 해왔으니 그러려니 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우리 아이들 교육에 이런 진영 대결 선거가 도움이 될까? 교육감 직선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그렇다'고 대답할지 모르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육감 직선제 10년은 '교육의 정치화'라는 폐해만 낳았다. 일각에서 직선제 폐지 주장이 고개를 드는 이유다.
직선제 유지론자들은 헌법 제31조 4항을 언급한다. '교육의 자주성ㆍ전문성ㆍ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했으니 교육감은 직접 뽑아야지, 시·도지사가 임명하거나 간선제로 뽑으면 안 된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지난 교육감 선거를 되짚어보자.
교육의 자주성? 교육감의 등장으로 자주성이 생기기보단 시어머니만 둘(교육부와 교육감)로 늘어났다.
교육의 전문성? 현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그리고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의 전직을 떠올려보자. 초중고 교육 현장과 무관하게 연구하던 대학교수였다. 대학 교육도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교육감 업무와는 괴리가 있다.

교육을 정치판 만든 직선제
2017년 9월 청와대 앞에서 함께 시위중인 곽노현·조희연 전·현직 서울시교육감. 두 사람 모두 진보 성향 교수 출신이다. [연합뉴스]
정치적 중립성은 어떨까? 특히 이 부분에서 헛웃음이 난다. 조희연 교육감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참여연대를 만든 장본인이고, 조전혁 후보는 18대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다른 지자체에서 출마하는 교육감 후보들 역시 정치색이 뚜렷하다. 현재 특정 정당 소속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치적 중립성' 보장 운운하는 건 얄팍한 자기기만이다.
물론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반드시 교육감 직선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다. 오히려 직선제 탓에 교육이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걸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목격했다. 그 과정에서 학생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교육 전체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피해를 봤다.

모든 선거는 기본적으로 고비용 저효율이다. 후보들은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 관리를 위해선 별도의 시스템이 필요하다. 유권자의 투표 행위만도 상당한 사회적 비용이 든다. 모든 자리와 정책을 투표로 결정하는 게 반드시 바람직하지도 또 민주적이지도 않다.

사실 전국의 교육감을 한날한시에 동시에 선거로 뽑는 나라는 흔치 않다. 미국은 연방 국가답게 교육 정책 관련 권한은 각 주가 지니고 있다. 25개 주(州)는 주 교육위원회가, 11개 주는 주지사가 교육감을 임명한다. 직선으로 뽑는 주는 14개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 역시 마찬가지다. 각 주 교육장(교육감)은 주 교육부 장관이 임명한다. 영국·프랑스·일본도 마찬가지다. 특히 국가 중심의 교육 전통이 강한 프랑스는 총 30개의 학구장(교육감) 모두를 대통령이 임명한다.
근시안적 교육 정책 쏟아내는 폐해
선진국들은 왜 교육감을 직선제로 뽑지 않을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교육 정책은 그 나라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단기적으로는 학생과 학부모의 행복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장기적으로는 국가 경쟁력에 막대한 차이를 불러온다. 교육감 선거 결과에 따라 교육 내용이 달라지는 현 체제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이며, 가장 철저하게 지방자치제를 운용하는 미국에서도 교육 정책만큼은 '국가 대계'로 인식해 국가 차원의 전략을 수립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시행한다.
2007~2010년 미국 워싱턴 D.C. 교육감을 지낸 재미교포 미셸 리(이양희). 교사 출신으로 공교육 개혁에 앞장서 화제가 됐다. 애드리언 펜티(Adrian M. Fenty) 당시 워싱턴 D.C. 시장이 그를 임명했다. [중앙포토]
우리는 정반대다. 교육감의 교육 철학,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정치적 성향에 따라 특정 방향의 교육을 학생들에게 강요한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다른 교육을 받는다. 이게 '다양성'이 늘어난 걸까? 아니다. 교육감 선거가 만든 불필요한 교육 편차의 폐해를 교육 소비자인 학생들이 감당한다는 소리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세계 교육의 화두는 정보교육(computing)이다. 컴퓨터 사용법이 아니라 그 원리를 가르친다. 우리도 그 추세에 발맞춰 2018년부터 정보 과목을 초중고 정규 교과목으로 지정했다. 수업 일수는 교육감의 판단과 자율에 맡겼다. 그 결과, 교육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편차가 벌어졌다. 대구·세종처럼 정보 과목을 충실히 가르치는 도시도 있었지만 그 외 지역은 등한시한다. 교육감 취향에 정보교육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생들은 이렇게 손해를 본다. 내 마음에 안 드는 교육감이 선출되었다고 선뜻 이사할 수도 없으니 학생과 학부모 입장에선 교육감 선거로 교육 선택권이 늘어난 건 전혀 없다. 다만 정치적으로 줄 잘 서고, 단일화 잘하고, 선거 잘 치러서 교육감이 된 누군가가 애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 실험'을 할 자유만 얻었을 뿐이다.

학생 볼모로 한 교육 실험 옳은가
이는 루터의 종교 개혁 초창기를 연상케 한다. 당시 루터가 말한 '종교의 자유'란 평민들이 알아서 교회를 택할 자유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각 지역의 영주들이 가톨릭에서 벗어나 원하는 교회를 택할 자유를 의미했다. 평민들은 꼼짝없이 자기 영주가 고른 교회에 다녀야 했다. 평민 입장에서 보자면 루터 이전이나 이후나 종교의 자유란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독일과 유럽이 30년 전쟁에 빠져든 것처럼 지금 대한민국도 10년째 교육 전쟁에 휩싸여 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지난 10년간 사교육은 줄지 않았고 학생들의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다는 증거도 없다.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대명제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20세기 내내 유지해왔던 국가 중심의 일률적 교육 체제가 지니고 있던 폐단 역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교육감 직선제만 정답인 것처럼 주장하는 건 옳지 않다. 교육감은 투표로 뽑을 자리가 아니다. 광역지자체장이 선발하거나, 정치적 중립성을 담지할 수 있는 교육위원회가 임명하는 등 더 나은 해답을 찾아야 한다.

2022-04-02

왜 다를까? 윌 스미스에 분노한 미국인 vs 온정적인 한국인

왜 다를까? 윌 스미스에 분노한 미국인 vs 온정적인 한국인

[노정태의 뷰파인더] 시상식의 웃음거리와 권위주의

● 美 여론조사, 83%가 윌 스미스 비판
● 여자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묶어둬
●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가부장제 옹호!
● 조크에 관대한 美 문화적 전통, 왜?


배우 윌 스미스(오른쪽)가 3월 27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아내에게 과도한 농담을 한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뺨을 후려쳤다. [AP 뉴시스]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 제94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한창이었다. 진행자는 유명 코미디언 크리스 록. 록은 여러 참석자를 향해 끊임없이 ‘선 넘는’ 농담을 던졌다. 그러던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가수, 배우, 최근에는 유튜버로 큰 성공을 거둔(4월 2일 현재 구독자 986만 명, 즉 1000만에 가깝다) 윌 스미스가, 무대에 올라 크리스 록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록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짧은 머리를 두고 “‘G. I. 제인’ 속편이 기대된다”고 농담한 게 화근이었다. ‘G. I. 제인’은 ‘제인’이라는 여성이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데미 무어가 삭발하고 나와 화제를 끈 영화다. 제이다 핀켓 스미스도 그 자리에서 삭발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제이다가 윌 스미스의 아내였다는 것, 그리고 제이다의 탈모는 일종의 면역성 질환으로 인한 것이라는 데 있다.

아카데미상은 거의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다. 당연히 여러 해프닝이 있었지만 참석자가 진행자의 뺨을 때리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카데미상뿐 아니라 세계 방송의 역사를 모두 짚어 봐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건이다.

더 놀라운 일도 있다. 이 사건에 대한 국내 반응이다. 공식 여론조사가 진행된 바 없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인터넷 뉴스에 달린 댓글을 대략 확인해보면 ‘윌 스미스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크리스 록이 심했다’ ‘내가 윌 스미스의 처지여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등의 반응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에서는 온정적 반응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으나 미국 현지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다. 미국 연예 매체인 TMZ가 3월 28일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미스가 록의 뺨을 때린 행위에 대해 “록이 맞을 만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 134000여명 가운데 17%에 그친 반면, 그러한 행위를 폭행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의견은 83%에 달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폭력을 썼다는 윌 스미스의 해명에 대해서도 오직 15%만이 동조했다.

병 때문에 탈모를 겪고 있는 제이다 스미스를 향한 농담이 설령 지나치다 해도, 그런 농담을 하는 코미디언을 때리는 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미국 사회에 두루 퍼져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사건 발생한 직후 ‘미국인들이 윌 스미스에게 동정적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국, 미국 문화는, 현실 속의 미국 문화와 전혀 달랐다.

페미니즘으로 폭력을 변호?
배우 윌 스미스(왼쪽)와 그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 뉴시스]
윌 스미스는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렸다. 너 댓살짜리 아이가 해도 혼날 짓인데, 50대 중반의 성인이다. 대체 이런 행동을 어떻게 옹호할 수 있단 말인가?

여성주의적 관점을 둘러대며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윌 스미스를 옹호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윌 스미스 본인부터가 그랬다. 그는 이번에 영화 ‘킹 리처드’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테니스의 전설인 윌리엄스 자매를 길러낸 아버지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그는 그런 영화를 찍으며 가족의 가치를 절감했는데, 아내를 조롱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폭력을 휘둘렀다고 수상 소감에서 스스로에 대한 변명을 했다.

그러한 주장은 페미니즘과 거리가 멀다. 아니, 정반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내와 자식 등 가족의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가부장의 의무가 있다며 다른 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가부장제 옹호 발언이다.

이러한 주장은 엉터리일 뿐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아내가 집 밖에서 명예를 잃었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가부장의 행태를 용납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살펴보면 그 위험성을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다. 인도, 파키스탄, 그 외 여러 곳에서 바로 그런 이유로 ‘명예살인’이 벌어진다. 아내나 딸이 외간 남자와 바람이 나거나 연애를 하거나 혹은 눈만 마주쳐도 ‘가문의 명예’가 실추됐다는 이유로 상대방 남자뿐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인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없지 않다. 윌 스미스는 그런 사회의 가부장들과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설적인 NBA 선수이며 미국 흑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인 카림 압둘 자바 역시 윌 스미스의 발언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메일 뉴스레터 서비스 ‘섭스텍’을 통해 3월 29일 공개한 글에서, 압둘 자바는 윌 스미스의 변명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진정 여성을 보호하는 남자들은 1500만 명의 시청자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거들먹대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입을 다물고 있다. (...) 여성 보호를 앞세워 자기가 올바른 일을 했다고 말하면서, 윌 스미스는 실제로는 자기 이익을 위해 그 여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그 연설은 그저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부 페미니스트의 견해는 다를 수 있다. 국내에도 ‘나쁜 페미니스트’ 등의 책으로 잘 알려진 작가 록산 게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3월 29일 ‘뉴욕타임스’에 ‘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윌 스미스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분명히 한 후, 그는 ‘농담’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걸고 약자를 조롱하는 짓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록산 게이의 말에도 귀담아 들을 점이 있다. 하지만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리는 것이 용납돼서는 안 된다.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묶어놓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가족을 위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남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에게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페미니즘, 더 나아가 모든 정치적 진보는 이런 폭력과 선을 긋는 것에서 출발해야 마땅하다.

슈퍼스타라는 어떤 웃음거리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 장편 영화상 시상 전 입담을 펼치고 있다. [AP 뉴시스]
크리스 록은 대체 왜 그런 농담을 한 걸까? 원래부터 ‘정치적 올바름’의 선을 교묘하게 넘나드는 농담을 해왔던 코미디언이지만, 그가 제이다 스미스를 농담거리로 삼은 것은 본인의 스타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코미디언이 사회를 보았더라도 여러 출연자들을 향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농담을 했을 것이다. 그건 일종의 ‘미국적 전통’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윌 스미스의 집안은 여러모로 복잡한 속사정을 지니고 있다. 두 자녀 모두 스스로의 정체성을 성소수자로 밝힌 바 있으며, 자녀들은 스미스의 아내와 함께 ‘폴리아모리’를 선언한 상태다. 폴리아모리란 가부장적인 일부일처제에 종속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동시에 성관계를 포함한 친밀한 애정 관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제이다 스미스의 폴리아모리는 단지 선언에 머물지 않았다. 제이다는 어떤 남자와 연애했는데, 그는 제이다보다 21세나 어렸을 뿐 아니라, 실은 윌 스미스의 아들인 제이든 스미스의 친구였다. 아들의 친구와 바람이 난 아내. 윌 스미스는 ‘아내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대범한 모습을 연출했는데, 물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판받을 일이 아니지만 대중적 시각에서 보면 충분히 농담거리로 삼을만한 일이며, 어김없이 그 또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입방아에 오르고 말았다.

미국의 연예인과 셀레브리티들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며 산다. 하지만 그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파파라치들이 따라붙어 그들의 사생활을 취재하고 팔아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공개 석상에서 혹독하게 조롱당하기 일쑤다. 사생활을 존중하는 미국에서 이게 무슨 일일까? 미국은 자유의 나라 아닌가?

미국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조크에 관대하다는 것이다. 엄격하고 근엄한 자리일수록 농담을 섞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전통은 미국 영화산업과 대중문화의 큰 축제인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도드라졌다. 지금껏 수많은 코미디언들이 진행자가 되어 무대 위에 올랐다. 지금껏 아카데미 시상식은 늘 그랬다. 그 하루를 위해 굶고 꾸미고 갖춰 입은 영화계의 슈퍼스타들을 두고, 그들의 치부를 한껏 드러내고 까뒤집으며 웃음거리로 삼아왔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 사회가 권위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정반대로, 할리우드와 아카데미의 권위가 드높기 때문에 출연자들에게 망신을 주는 농담을 허용하는 것이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삶을 생각해보자. ‘스타’라는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시피, 평소에는 저 하늘의 별처럼 고고하게 떠 있는 존재다. 대중은 그들의 삶에 대해 그저 엿보기만 할 뿐 다가갈 수 없다. 스타들은 그런 대중적 관심과 인기를 바탕으로 천문학적 출연료를 받고 상상하기 어려운 라이프 스타일을 즐긴다.

애정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인들이 아무리 ‘쿨’하다 해도 이렇듯 공공연한 특권층의 존재는 어딘가 배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자리를 빌려 한 번쯤 적나라하게 치부를 드러내고 비웃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가끔 벌어지는 탈춤을 금하지 않고, 오히려 돈을 줘가며 광대를 불러 춤판을 벌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말뚝이 탈을 쓴 광대가 양반탈을 쓴 광대를 조롱하고 비웃고 골탕 먹이도록 하는 것은 양반의 권위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다. 피지배층의 억압된 불만을 해소하면서, 현실 속 신분 차이를 더욱 확실히 느끼게끔 한다. 예외적인 상황에서 ‘권위주의’를 내려놓음으로써 ‘권위’를 공고히 다지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조크 통해 해악 줄이다
권위 그 자체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세상을 경직시킨다. 미국은 이렇게 조크를 통해 권위주의의 해악을 줄이면서 권위에 힘을 실어주는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제이다 스미스에게 크리스 록이 던진 농담은 분명 과도한 측면이 있다. 또한 한국은 미국과 다른 나라이며, 미국의 모든 것을 쫓아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문화와 교양을 중시하며 ‘정치적 올바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왜 이렇게 과격한 농담을 전통으로 유지하는지, 그 의미를 한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아름다운 작별은 없다… 죽음의 존엄마저 농락한 K방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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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대선 직전 방역 고삐 푼 文정권
장례대란으로 고통받는 유족들

첼리스트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는 악단 해산으로 갑자기 실업자가 됐다. 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집이 있으니, 생활비가 저렴한 시골에서 어찌어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고향인 야마가타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자리를 구하던 다이고의 눈에 구인 광고 하나가 들어왔다. 연령 제한 없음, 고수익 보장, 실질 노동 시간 짧음. 게다가 정규직이다. 평생 음악만 하고 살았던 그는 이렇게 좋은 말만 쓰여 있는 일자리가 무슨 뜻인지 모른 채 ‘NK 에이전트’의 문을 두드린다. ‘여행의 도우미’라던 그 회사의 일은 납관, 고인의 몸을 닦고 잘 단장하는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장례는 매우 다르다. 한 사람이 생을 마치고 떠나는 자리에 다들 모여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마시며 고인을 추억하는 것이 한국의 장례 문화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장례식을 ‘축제’로 여겨온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장례를 치르는 전문 인력을 사회적으로 천시하지 않았다. 오늘날은 국가에서 공인하는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로 존중받는다.

일러스트=유현호

반면 일본은 고인을 잘 씻기고 곱게 단장하여 유족과 대면하는 절차를 갖는다. 슬픔과 엄숙이 지배하는 장례식의 분위기 때문인지, 고인을 염하고 화장하는 이들을 천시하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내(히로스에 료코)가 질겁하고 사장인 이쿠에이(야마자키 쓰토무)에게 매일 혼나지만, 다이고는 얼결에 갖게 된 직업을 통해 인생의 깊이를 배워나간다. 한 차례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던 영화 <굿’바이: Good&Bye>의 내용이다.

우리는 삶의 존엄과 죽음의 존엄을 함께 고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논란이 되는 죽음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존엄사와 안락사로 나누어진다. 존엄사는 지난 2009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9대4로 첫 허용 판결이 나온 후, 10여 년의 논의를 거쳐 2018년부터 법에 따라 시행 중이다. 본인과 가족의 의사에 따라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약하면 심폐소생술, 항암제, 수혈 등 몇 종의 제한된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소극적인 개념이다.

반면 안락사(Euthanasia)는 보다 적극적이다. 환자의 소생 가능성을 염두에 두긴 하나 그것이 본질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시점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생을 마감할 권리, 그 또한 양보할 수 없는 인권이라는 철학적 논의를 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프랑스의 배우 알랭 들롱은 안락사 결정을 밝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사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2019년 뇌졸중 수술을 받은 후 투병 중일 뿐이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면서 본인의 결정하에 세상을 뜨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존엄사와 안락사의 논의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 존엄사는 현대 의학의 연명 치료가 고도로 발달한 탓에 생긴 부수적 현상에 가깝다. 전통적으로 효와 가족을 중시하던 한국에서도 비교적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적극적 안락사는 다르다. ‘생명’이 지속되면서 내가 생각하는 아름답고 행복하며 바람직한 ‘삶’을 망가뜨릴 때, ‘삶’을 위해 ‘생명’을 포기할 권리가 개인에게 있다는 발상의 산물이다. 자유와 선택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에 둔다.

안락사 옹호론은 얼핏 보면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인다.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 등 많은 이성주의자들이 소극적인 존엄사를 넘어 적극적 안락사를 옹호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안락사의 허용은 결국 의사의 도움을 받아 고통 없이 자살할 권리를 주는 셈이다. 의사에게 죽음의 서비스를 제공할 권리를 허락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수천 년 넘게 유지해온 가장 기본적인 도덕률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이 쉽게 끝나지 않는 이유다. 나의 존엄한 삶을 위해 내 생명을 스스로 빼앗는 것은 정당한가? 자살을 할 때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마련한다면, 사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 충만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는 것. 그 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좋은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추로서 우리는 ‘좋은 죽음’을 열망한다는 것. 모든 철학과 윤리의 고민이 결국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로 향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문재인 정권은 공교롭게도 대선을 앞두고 방역의 고삐를 풀어버렸다. 고작 수백 명의 확진자가 나와도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게 하던 그들이, 이제는 수십만의 확진자와 함께 매일 수백 명씩 사망자가 쏟아져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4월 2일부로 현행 거리 두기를 중단할 예정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K방역 홍보 대신 백신 확보부터 했어야 한다. 치료제를 충분히 구비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들은 최대한 아름답게 유족과 작별할 수 있도록 대비했어야 마땅하다. 현실은 정반대다. 코로나 사망자를 화장 대신 매장해도 된다고 규칙을 바꿔놓고 2개월간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다. 이는 3일장이 6일장, 7일장으로 늘어나 고통받은 유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망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너무도 원통하다. 자녀들에게 더 큰 부담을 안겨주는 작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테니 말이다.

코로나 사망자의 대부분은 고령층이다. 한국·전쟁을 직접 겪었거나 잿더미가 된 조국에서 맨주먹으로 태어난 이들이다. 황무지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이루어낸 주역들이, 생의 마지막에 아름다운 작별을 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대체 무슨 권리로 이러는가. 왜 마지막까지 국민의 삶의 존엄을, 심지어 죽음의 존엄까지 농락하는가.

<굿바이>로 돌아와 보자. 익숙지 않은 일을 배우며 힘들어하던 다이고는 어느 날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를 보고 말한다. “죽기 위해 강을 거스르다니 서글프네요. 어차피 죽을 거면 편하게 죽지.” 어리석은 질문에 이쿠에이가 던지는 현명한 답. “돌아가고 싶겠지, 고향으로!” 다이고의 인생도 마찬가지. 고향으로 돌아와 납관이라는 일본 사회가 천시하는 일을 하며 스스로의 인생을 되찾았다. 태어난 곳에서 미래의 씨앗을 뿌리고 숨을 거두는 삶과 죽음의 존엄을 회복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22-03-26

노무현의 라면, 윤석열의 김치찌개는 경호 대상인가

노무현의 라면, 윤석열의 김치찌개는 경호 대상인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통령 위에 있는 경호처

● 尹 스텐팬 계란말이의 운명
● 구중궁궐에서 외로웠던 盧
● 무소불위 차지철이 빚은 실패史
● 민주화 이후에도 ‘밀착권력’
● 뻔한 무속 공세나 펴는 민주당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2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집무실 앞에 설치된 프레스다방을 찾아 취재진과 즉석 차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의 스텐팬 계란말이.’ 대선 과정에서 방송을 통해 공개된 후 많은 이를 놀라게 한 ‘사건’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취미 겸 특기는 다름 아닌 요리. 오랜 세월 독신으로 살면서 술을 즐겨온 중년 남자답지 않게, 그는 본인과 배우자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의 식사를 직접 준비해왔다. 깊은 맛이 나도록 끓인 김치찌개에 각 잡힌 계란말이. 누가 봐도 소주 안주 같지만 공깃밥을 놓으니 그럴듯한 가정식 정찬이 됐다. 윤석열을 지지하지 않던 사람들도 감탄한 ‘윤식당’이다.

3월 2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윤석열은 임시로 마련된 기자실에서 잠깐 티타임을 가졌다. 요즘도 ‘혼밥’ 안 하느냐는 질문에 “아침은 혼자 먹지만 개들이 먹던 걸 달라고 해서 나눠준다”고 답한 윤석열은, 서울 용산에 대통령실이 열리면 구내식당을 이용해 김치찌개를 대량 조리해 기자들에게 대접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물론 그 많은 양을 손수 할 수는 없을 테고, 말하자면 본인이 조리장이 돼 감독한다는 뜻이겠지만, ‘윤식당’을 재개장하겠다는 의지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후보 시절에도 직접 만든 음식을 시민에게 대접하는 콘셉트의 유튜브 콘텐츠 ‘석열이형네 밥집’을 공개한 바 있다.

만약 윤석열이 통상적인 경로를 밟아 청와대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윤식당’ 재개장은 불가능하다. 아니, 당분간 폐업이다. 윤석열의 스텐팬은 5년간 계란말이뿐 아니라 그 어떤 요리도 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의 업무가 과중하고 바빠서가 아니다. 대통령과 그 가족은 취사를 위해 불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요리는 고사하고 라면조차 끓이지 못한다.

어째서일까. 법으로 금지돼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단, 대통령경호처의 경호 규칙에 위반된다. 경호처는 대통령과 가족이 불을 쓰지 못하게 한다. 이유는 늘 그렇다시피 ‘대통령 경호 목적’이다. 대체로 열 살 정도면 자기 손으로 라면을 끓이기 시작하는 것이 한국인의 인생이지만, 국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오른 사람과 그 가족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냄비에 물 붓고 불 켜는 단순한 행동조차 하면 안 된다. 오늘은 바로 이 문제, 경호와 민주주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경호실에 사정했지요, 한번만 봐달라고…”
20031119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 여사의 배웅을 받으며 관저를 나서고 있다. [동아DB]
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대통령 경호 규칙.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것 같지만, 이는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심지어 군인 출신 대통령 전두환도 그랬다. ‘신동아’ 2007년 5월호에 실린 ‘전직 경호원들이 털어놓은 대통령 경호 비화’의 내용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관사는 호텔 객실처럼 취사시설을 갖추지 않았다. 대통령 가족은 검식관이 마치 조선시대 기미상궁처럼 검식을 마친 음식만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니 요리사와 검식관이 퇴근하고 난 후에는 무엇도 먹을 수 없어서, 전두환의 자녀들은 하교하자마자 청와대로 와야 했지만 밤에는 라면조차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화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서민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화. 그는 라면 마니아였다. 출출해도 라면, 심심해도 라면, 해외에 나가서도 라면을 먹었다. 200610월도 그랬다. 경북 김천에 갔다가 대통령 전용 KTX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그는 수행참모들에게 ‘특별 메뉴’가 준비돼 있다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나온 음식은 라면. 실망하는 이들에게 대통령은 이런 설명을 들려줬다.

​​“달리는 열차에서 먹는 라면 맛이 어떻습니까? 맛있지요? 대통령 빽 아니면 이런 맛 볼 수 없어요! 오늘따라 라면이 먹고 싶어서…. 서울 올라올 때에는 열차에서 저녁식사로 라면 먹을 수 없냐고 물었더니, 경호실에서 안 된대요. 그래서 사정했지요. 한번만 봐달라고….”

경호실에 따르면 달리는 열차에서 컵라면 정도는 괜찮지만 우리가 흔히 먹는, 냄비에 면을 넣고 삶는 라면은 안 된다. 안전 문제 상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독자 여러분은 이 설명이 납득이 되시는가. 물론 열차에서 부탄가스 등 직접 불을 사용하면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식사를 하는 공간은 조리를 하는 공간과 떨어져 있다. 불꽃이 발생하지 않는 전열 조리기구를 사용해 라면을 끓인다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설마, 누군가 대통령에게 뜨거운 라면을 끼얹는 테러를 저지를까봐 안 된다는 걸까.

실제로 경호처는 대통령과 그 가족이 요리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왔다. 노무현 스스로가 그러한 처사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내 손으로 라면 하나 못 끓여먹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불만을 필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들은 바 있다.

물론 최근 한 전직 청와대 요리사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무현이 주말이나 일과 시간 후 자기 손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고 이야기했다. 어쩌면 임기 말에 이르러 경호처가 다소 느슨한 태도를 취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자기 손으로 편하게 라면 하나 끓여먹지 못했던 노무현은 큰 불만을 느꼈고, 이는 분명한 사실로 남아 있다. 마치 구중궁궐에 갇혀 있던 ‘마지막 황제’의 푸이처럼,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비서 노릇까지 겸하는 경호원?
대통령을 쥐락펴락하는 대통령경호처의 힘. 이 권력의 기원은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다.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전쟁을 통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휴전 이후에도 북한과 지속적으로 대치했고, 북한은 여러 방향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의 목숨을 노렸다.

육영수 여사의 시해로 마무리된 문세광의 1974년 광복절 저격을 놓고는 그 배후에 대해 논란이 있다. 하지만 김신조 일당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산을 타고 넘어왔던 사건이라거나, 전두환을 노리고 벌어졌던 아웅산 테러 사건 등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북한이 일종의 비정규전투를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을 살해하려 든 것이다.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자신의 심복을 경호실에 앉히고 일종의 호위부대 격으로 굴리면서 경호실이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다. 북한으로부터의 직접적 위협이 크게 줄어든 후에도 경호실의 권한과 역할은 줄어들지 않았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의 차지철 경호실장처럼 대놓고 권력을 휘두르는 경호실장이 나오는 세상이 끝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라면 끓이기’의 사례처럼, 대통령경호처는 대통령을 경호한다는 명목 하에 대통령의 동선과 행동을 미시적으로 통제하는 일종의 ‘밀착권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신동아’ 기사를 조금 더 읽어보자. 한 전직 경호원은 한국과 미국의 경호 시스템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 경호원은 오로지 경호만 합니다. 우리나라 경호원은 비서(의전) 노릇을 겸하거든요. 가령 대통령이 악수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악수를 하려 하면 경호원이 대통령의 손을 터치할 수 있어요. 하지만 미국은 절대 안 됩니다. 말 그대로 경호만 하는 거죠.”

이 말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2007년 당시, 한국의 대통령 경호원은 ‘대통령이 악수해야 할 사람’과 ‘악수하면 안 될 사람’을 판단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둘째, 대통령이 ‘악수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악수하려 할 경우, 경호원은 그 엉뚱한 사람 대신 대통령을 제재할 수도 있었다. 셋째, 전 세계 모든 민주국가가 표준으로 삼고 있는 미국에서도 대통령을 이런 식으로 경호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 측면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미국은 지금까지 총 46명의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그 중 4명이 암살당한 나라다. 누군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일하다가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8.69%나 된다. 최전방 전선에 투입된 군인이 아닌 다음에야 경험하기 힘든 사망률이다. 그런 미국에서조차 경호원이 대통령의 손을 터치 못 하는데, 한국에서는 왜 가능한가.

경호 목적으로 대통령과 가족이 요리를 못 하게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퇴근 후 마트에 들러 장을 보는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부러워했다. 반면 우리나라 대통령은 자기 손으로 식칼도 못 잡고 가스레인지도 못 켠다. 대통령경호처가 ‘대통령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대통령과 그 가족이 먹는 음식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대통령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하에, 대통령 가족을 과잉보호하며 ‘가스라이팅’하는 것 같은 인상마저 주지 않는가.

지난해 1229일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직접 만든 음식을 시민에게 대접하는 콘셉트의 유튜브 콘텐츠 ‘석열이형네 밥집’을 공개한 바 있다. [국민의힘]
용산 시대의 ‘윤식당’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말해두자. 나는 한국인이다. 우리의 대통령이 안전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경호 시스템이 과연 대통령에게 유익한지 의문을 표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가운데 대통령 박정희는 현실감각을 잃어갔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총을 뽑아 쏠 때 차지철은 박정희뿐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지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악의 경호 실패 사례는, 대통령 경호실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해서 벌어진 것이다.

단 하루도 청와대에 들어갈 수 없다는 윤석열을 두고 뻔한 무속 공세나 펴는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층의 태도를 보면 더욱 한심하다.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이 ‘도사가 청와대에 가지 말라고 해서 안 가는 것 아니냐’는 식상한 흑색선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현실은 정반대다. 최순실 사건을 보면 분명하다. 소중하게 끌어안아야 할 무속인 혹은 비선실세가 있다면 청와대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 대통령경호처를 설득해서 그 비선 실세가 원할 때 ‘프리패스’로 청와대에 들락거리게 해주면 아무도 모른다. 지난 정권 시기에 벌어졌던 대통령경호처의 방만한 행태는 결국 박근혜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말았으니, 이 또한 대통령 경호 실패 사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정희 시절과 마찬가지로 경호실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해서, 문고리 권력의 일부로 작동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대통령 됐다고 가스레인지에 불도 못 켜게 하는 식으로 ‘탈인간화’하는 경호 체제는 민주주의적이지 않다. 대통령은 많은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국민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대통령이 야근하다 1층 매점으로 내려와 직원들과 함께 전자레인지에 삼각김밥 돌려서 컵라면을 곁들여 먹으며 일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다. 용산 시대의 개막과 함께 ‘윤식당’이 성공리에 재개장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3-21

청와대에 남으면 윤석열도 결국 ‘왕’이 된다

청와대에 남으면 윤석열도 결국 ‘왕’이 된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통령 집무실 옮겨야 하는 까닭

● 풍수 언급한 건 승효상·유홍준
YS·DJ·盧도 광화문으로 이전 구상
● ‘시민과의 만남’은 집무실 목적 아냐
● 文은 ‘창성동 청와대’ 속사정 알까


현재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전경.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미신과 풍수에 따라 청와대를 옮기려 한 정권. 어떤 정권이었을까? 문재인 정권이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그렇다. 201710월, 건축가 승효상은 청와대 ‘상춘포럼’에서 “청와대 터가 풍수상 문제가 되니 옮겨야 한다”고 했다. 친(親)민주당계 인사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승리한 뒤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위원장이 돼 청와대 이전을 논의하다가, 2019년 1월 4일 공약 파기를 발표했다. “청와대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면서도 “풍수상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옮겨야 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퇴임을 앞둔 문재인 정부를 먼저 비판하면서 글을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윤석열 무속 논란’의 백해무익한 면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윤석열 무속 논란’을 진지하게 거론하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다. 방귀 뀐 자가 성 낸다는 속담이 떠오를 지경이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하루 이틀 된 논의가 아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는 광화문 청사에 집무실을 마련하겠다고 공약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청와대는 여러 건물로 이루어진 시설이다. 1990년 춘추관 및 관저, 1991년 본관이 완공됐다. 그러니까 김영삼은 콘크리트가 속까지 다 굳지도 않았을 시점에 이사를 가네 마네 했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당선 직후 광화문 청사로 집무실을 옮기는 방안을 논의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

청와대에서 나와 새로운 집무실을 마련하고자 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청와대 용산 이전’이라는 이슈를 ‘윤석열 무속 논란’으로 묻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수많은 대통령 당선인이 청와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사람 만나면서 피해야 하는 대통령의 모순
2019년 1월 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유홍준 당시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위원장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날 유 위원장은 “청와대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면서도 “풍수상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옮겨야 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직접적으로 ‘풍수’를 거론했던 문재인 정권을 빼고 나면, 대부분 정권이 탈(脫) 청와대를 외친 이유는 비슷하다. ‘국민과의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경복궁 뒤편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보니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고 민심의 동향으로부터 어두워져, 결국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리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다. 그런데 그런 이유라면 대통령이 스타벅스 같은 커피숍에서 노트북 펴놓고 일하는 건 어떨까? 아니면 지하철 노선 세 개가 지나가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물로 청와대를 옮기는 건 어떨까?

말만 들어도 헛웃음이 날 것이다. 그렇다. ‘시민과의 만남’은 대통령 집무 공간의 목적이 아니고, 그것을 이유로 대통령 집무 공간을 옮겨서도 안 된다. 완전히 경호를 포기하지 않는 한 대통령이 ‘일반 시민’과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사실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중적 접근성은 새로운 대통령 집무 공간 선택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소리다.

괜한 말장난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의 집무 공간을 옮겨야 한다는 쪽이다. 현재 대안으로 제시된 용산 국방부 안을 지지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해볼 필요가 있기에 하는 이야기다. ‘대통령이 국민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용산 뿐 아니라 어디로 이전해도 부족하고, 또 부적절하다.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 정의상 ‘국민 속’에 있으면 안 된다. 대통령도 불편하고 국민도 불편하다. 그러나 동시에 대통령은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문고리 권력’을 만들지 말아야 하고, 그러니 ‘인의 장막’에도 갇혀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사람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야 한다. 모순이다. 그런데 대부분 선진국은 어렵지 않게,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에 걸쳐 잘 해나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또 반대로, 왜 대한민국 대통령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실패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청와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진지하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사실상 두 개
우리는 흔히 ‘청와대’라고 하면 사진에서 본 파란 기와 건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건물은 청와대 본관으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청와대 건물은 그것만이 아니다. 청와대에 부속해 있는 건물 중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총 12곳. 그 중에는 ‘위민관’에서 ‘여민관’으로 이름이 바뀐 비서실도 포함돼 있는데, 그 건물만 해도 세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통령의 집무실은 관저에 마련돼 있다. 반면 대통령의 비서들은 비서실에 있다. 그 거리만 해도 500m인데 보안상의 이유로 중간에 또 한 차례 검문을 받아야 한다. ‘문고리 권력’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구조다. 그런 불편을 해소하고자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초기 여민관 내에 집무실을 마련해 출근하면서 정부종합청사로 집무실을 완전히 옮길 계획이라 밝혔지만 결국에는 청와대에 머물고 말았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청와대의 부속 건물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우편번호 03048. 여기까지는 흔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하나 더 있다. 서울 종로구 창성동 67번지. 네이버·카카오 지도로 보면 건물 모양만 그려져 있을 뿐 뭐 하는 곳인지 설명조차 나와 있지 않은 곳. 딱히 명칭도 없는 그곳은 흔히 ‘청와대 부속청사’, ‘창성동 별관’ 등으로 통한다. 지난 2018년과 2019년, 사상 초유의 청와대 압수수색을 하네 마네 할 때 뉴스에 등장했던 바로 그곳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적어도 두 개 있다. 건물이 아니라 부지를 단위로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우리가 아는 청와대. 서울 종로구 창성동 67번지, 가끔 뉴스에 나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도 언급하지도 않는 ‘창성동 청와대’.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청와대’와 ‘대통령’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권위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군가 대통령이 되면, 특히 정치권 사람들은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도 않는다. 심지어 ‘BH’라느니 ‘VIP’라느니 하는 식으로 부르는 이상한 관습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본인은 대통령이 아닌데 청와대에 한 다리 걸친 사람들만 신이 난다. 한껏 부풀어 오른 자아를 뽐내며 호가호위할 수 있다. 우리가 지난 정부와 지지난 정부, 아니 1987년 민주화 이후 경험해온 수많은 측근 비리와 판단 착오, 인사 실패 등을 떠올려보자. 모두 같은 패턴이다. ‘청와대’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결정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모른다. 권력의 단맛은 청와대가 누리고, 그 책임은 대통령이 뒤집어쓴다.

청와대의 구조를 가장 악용한 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겠지만, 문재인이라고 해서 나을 건 없다. 단적으로 물어보자. 문재인은 과연 ‘창성동 청와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조직 장악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현재 청와대는 하나가 아니다. 건물이 나뉘어 있는 것을 넘어 별도의 부지까지 사용한다. 이러한 이중구조는 대통령이 된 사람에게 득이 될까, 아니면 청와대에서 일하거나 들락거리는 대통령이 아닌 사람들에게 좋을까?

민주국가 행정수반은 ‘오피스’에 있다
현재의 건물 및 인력 배치 구조상,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가는 순간 ‘청와대’에 잡아먹힌다. 분명 대통령의 부하 직원이라고 돼있는데, 자신의 부하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보기도 어렵고, 누가 누구를 어떻게 통제하는지 불시에 질문할 수도 없다. 옥상옥 위의 옥상옥으로 이어지는 한없는 계단식 구조 속에 대통령은 마치 구중궁궐의 왕처럼 고립된다.

이 문제는 대통령이 아무리 시내 번화가에서 근무한다 한들 풀리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청와대’와의 접촉면을 늘려 조직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해결된다. 대통령 본인이 모든 직원을 다 파악하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대통령 집무실의 공간은 비좁아야 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부대껴야 한다. A가 B와 ‘썸’을 타고 있고, C와 D가 서로 암투를 벌이고 있으며, E와 F는 공직을 벗어던지고 벤처기업을 차리고 싶어 한다는 등, 온갖 잡다한 대화가 오가는 사무실의 분위기. 그 속에 대통령이 있어야 한다. 그들의 미묘한 분위기를 파악하고 아니다 싶으면 제3자를 붙잡고 물어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의 장막’을 치고 싶어 하는 권력의 불나방들이 권모술수를 부릴 수 없게 된다.

1948년 첫 대통령 선거 이후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은 ‘궁궐’에 있었다. 궁궐이 궁궐인 한 그 궁궐이 어디에 있건 대통령은 성공하기 어렵다. 해법은 대통령 집무실이 궁궐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다. 대통령이 수많은 직원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미국의 백악관처럼, ‘오피스’로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의 일은 다른 모든 지식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결국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미국의 백악관, 영국의 다우닝가 10번지, 독일의 연방총리관저 ‘분데스칸츨러암트(Bundeskanzleramt)’ 모두 복닥거리는 사무실이다. 민주국가의 행정수반은 그런 곳에서, 마치 국민이 그렇듯,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해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의 해답은 ‘일하는 대통령’인 것이다.

청와대는 애초에 ‘오피스’로 만들어진 시설이 아니다. 그 설계부터가 궁궐이다. 거대한 부지의 입구에 마치 양반댁 행랑채처럼 비서동을 배치하고, 가장 깊숙한 곳에 사저와 본관을 뒀다.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이지만 끔찍하리만치 봉건적이다. 분명 민주주의 국가인데 5년마다 한 번씩 선거로 왕을 뽑은 후 새 왕이 뽑히면 지난 왕의 목을 치는 ‘87년 체제’의 비극은 바로 그런 구조적 모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3월 17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인근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국방부 앞 전경.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국방부 신청사로 옮기는 것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신원건 동아일보 기자]
87년 체제’와 ‘궁궐’
청와대를 재활용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겠지만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세 동으로 이루어진 여민관과 창성동 별관, 그리고 대통령 관저의 업무 공간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단일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년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과감히 청와대에서 뛰쳐나와 새로운 공간에서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대통령의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

87년 체제’의 모순을 끝내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궁궐’에서 끌어내야 한다. 다행히 용산 국방부 청사에는 헬기 이착륙장, 지하 벙커, 그 외 필요 시설이 이미 갖춰져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오피스’행을 지지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3-19

‘이대녀’들의 응징투표가 남긴 교훈… “정치는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

‘이대녀’들의 응징투표가 남긴 교훈… “정치는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판타지 로맨스 ‘왓 위민 원트’와
대한민국 남녀갈등 해법은?

멋진 남자, 하지만 나쁜 남자. 잘나가는 광고맨 닉 마셜(멜 깁슨)은 마초에 바람둥이다. 이혼한 전처가 재혼하고, 딸이 아빠를 경멸한다는 것만 빼면 아무 문제없던 닉의 인생에 급제동이 걸린다. 닉의 회사가 경쟁사의 달시 맥과이어(헬렌 헌트)를 채용하더니, 닉이 노리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앉힌 것이다. 술, 담배, 자동차 광고만 신경 쓰면 그만이던 시절은 갔다. 400억달러 규모로 커진 여성 광고 시장을 두고 싸워야 한다. 남성 우월주의자 닉의 인생이 암초에 부딪혔다. ‘여자들이 원하는 것, 그게 대체 뭐지?’

일러스트=유현호

술에 취한 채 매니큐어를 바르고 다리의 털을 뜯어내며 팬티스타킹을 신어보던 닉. 갑자기 집에 찾아온 딸 때문에 당황했다가, 그만 헤어드라이어를 켠 채 욕조에 빠지고 만다. 빠지직!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다음 날 정신을 차려보니 뭔가 이상하다.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 더 끔찍한 건 여자들의 ‘본심’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퍽 다르다는 것이다. 웃는 얼굴로 닉의 야한 농담도 받아주던 가정부는 닉을 경멸하고, 택시를 잡아주던 아파트 수위는 속으로 닉을 성희롱하고 있다.

영화 ‘왓 위민 원트’의 내용이다. 제목에 쓰여 있듯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 주제지만, 좀 더 크게 볼 수도 있다. 공감(empathy)과 연민(sympathy)이라는 철학적 주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두 개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푸틴의 전쟁으로 인해 EPL팀 첼시의 구단주 아브라모비치는 재산이 동결되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푸틴 정권과 함께 호의호식했던 아브라모비치를 비난하는 사람일지라도, 갑자기 재산을 잃게 생긴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다.

연민은 좀 더 직접적이고 감성적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추위에 떠는 길 잃은 개를 볼 때, 전쟁의 포화에 휘말린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소식을 접할 때, 때 이른 부고를 접하고 장례식장에서 유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할 때, 우리는 당사자의 감정을 마치 내 것인 양 ‘느낀다’. 공감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육체적이기까지 한 감정의 전염, 그것이 바로 연민인 것이다.

공감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부터 출현한 개념이다. 반면 연민은 18세기 영국에서 철학적으로 주목받았다. 대체 인간은 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가?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흄이 볼 때 우리의 도덕은 한낱 관습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상의 도덕률이 갑자기 잔인하고 포악하게 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아끼고 배려하는 감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런 관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국부론>의 핵심 원리다. ‘보이지 않는 손’, 말하자면 이기주의의 법칙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배려한다. <국부론>보다 먼저 펴낸 <도덕감정론>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보고 종종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런 예를 들 필요도 없을 만큼 명백한 사실이다.” 연민은 도덕의 토대가 된다. 서로 공유하는 도덕이 있어야 사회가 성립하고 자본주의 또한 가능해진다.

공감과 연민은 서로 다르고 서로를 보완한다. ‘왓 위민 원트’로 돌아가 보자. 닉에게는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 공감 능력이 0에서 100으로 솟구친 셈이다.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이내 그 잠재력을 깨달았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여자를 쉽게 유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로만 이해하고 접근하는 닉에게 딸은 넌더리를 낸다. 딸의 감정을 ‘이해’하고 반응했을 뿐 인간적인 교감을 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공감과 연민의 힘을 모두 되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진정한 공감과 연민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지난 대선 과정을 떠올려 보자. 국민의힘은 여론조사에서 큰 폭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박빙이었다. 3월 8일 여성의날을 하루 앞둔 7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여성들은 온라인에서 단합하는 것 같아도 오프라인 표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도발적 발언을 한 것이 원인 중 하나다. 이재명을 지지하는 20대 여성 표가 일주일 전 여론조사에 비해 약 20%p 뛰어올랐다. 기권하거나 정의당을 찍었을 ‘이대녀’들이 더불어민주당을 찍어서 ‘응징 투표’를 한 것이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 특정 유권자 집단을 비하하면 큰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정동영 전 장관의 ‘노인 투표 발언’, 유시민 전 장관의 ‘나이를 먹으면 뇌가 썩는다’ 발언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지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박영선 후보가 ‘20대는 역사적 경험치가 낮다’는 발언을 했다가 응징 투표를 당한 것을 보고도 배운 게 없단 말인가. 공감도 연민도 없는 발언으로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다. 선거가 휘청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발언자 본인의 정치 인생에도 두고두고 족쇄가 된다.

이번 대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청년층 내에서 성별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치의 역할은 그것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 막판에 남녀 갈등에 휘발유를 끼얹는 소리를 해버렸으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은 당연한 일. 정치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분석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도 알던 사실을 21세기 사람들이 왜 모르는 걸까.

닉은 여자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땅 짚고 헤엄치듯 여자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없다. 닉에게 애정을 느낀 달시의 입장에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어제까지만 해도 솔메이트처럼 내 마음을 짚어내던 이 남자가 오늘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버벅거린다. 두 사람은 차분하게 대화하고, 오해를 풀고, 사과하고, 용서하며 서로를 향해 나아간다. ‘왓 위민 원트’는 판타지 로맨스 코미디 영화지만 공감과 연민의 힘은 진짜다. 대한민국의 남녀 갈등 역시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것이다.

2022-03-12

윤석열은 난제에 빠졌고 이재명은 기회를 얻었다

윤석열은 난제에 빠졌고 이재명은 기회를 얻었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尹 시대, 한국정치 개와 늑대의 시간

● 역대급 초박빙 대선의 후폭풍
● 진보성향 유튜버의 송영길 습격
● 일부 친문 “여니 없으면 여리 찍는다”
● 이재명 ‘1600만 표’의 정치적 의미
● 野, ‘굴러온 돌’ 안철수라는 딜레마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당선 인사 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3월 9일 치러진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3월 10일 새벽 4시가 돼서야 당선자가 확정됐다. 1%p 이내, 고작 247077표 차이로 당락이 갈린 역대급 초박빙 대선이다. 이로 인해 기호 1번과 2번, 그러니까 여당과 야당이 5년 만에 교체됐다.

‘권력교체’가 이루어진 곳은 청와대만이 아니다. 이제는 ‘과거의 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 내의 권력 구도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선후보가 2위로 낙선하긴 했지만 무려 16147738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제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가 당선될 때 얻은 13423800표를 훌쩍 웃돈다. 이재명이 차기 대선에서 재기를 도모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한 대목이다.

반면 원내 제3당 정의당의 현실은 턱없이 초라하다. 2.37%, 803358표. 선거비용 보전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이 완주해 표가 나뉘는 바람에 대선 결과가 달라졌다는 식의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야당이지만 일종의 준 여당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던 정의당과 민주당의 밀월관계는 정권교체와 함께 끝난 셈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건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윤석열이 압도적인 득표를 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면 그를 중심으로 국민의힘이 완전히 개편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24만여 표차의 신승을 거둔 탓에 ‘윤석열발(發) 정계개편 시나리오’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난항에 부딪히고 말았다. 윤석열은 압도적 의석의 거대 야당과 맞서면서, 동시에 110석의 여당을 ‘대통령의 정당’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이중 과제에 놓였다.

‘표삿갓’ 테러의 상징효과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프랑스어 표현이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 해가 떠오르고 있거나 지고 있을 때, 뭔가 보이지만 뚜렷하지는 않은 시간을 뜻한다. 저 언덕 너머로 보이는 것이 나를 지켜주는 개인지, 나를 물어뜯으러 오는 늑대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시간이 바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대선 이후 한국 정치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접어들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시간. 내게 다가오는 저 사람과 저 지지층이 나의 편인지 적인지, 나의 편인 척 하면서 나를 물어뜯으려 하는 것인지, 나를 공격했던 저들의 손을 잡아도 되는 것인지, 끝없이 고민하며 결국에는 모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점이지대(漸移地帶)로 향하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부터 살펴보자. 지난 3월 7일, 서울 신촌에서 거리 유세 중이던 송영길 당시 민주당 대표가 봉변을 당했다. ‘표삿갓’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70대 유튜버가 검은색 비닐로 싼 망치를 이용해 송영길의 머리를 여러 차례 가격했던 것이다. 다행히 송영길의 부상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선거를 치러야 하는 처지의 그는 하루 만에 퇴원해 유세와 연설을 이어나갔다. 송 전 대표의 쾌유를 빈다.

‘표삿갓’은 한미연합훈련을 반대하고 종전 선언을 촉구하는 등의 내용을 유튜브에 올려온 인물이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될 당시에도 “한미 군사훈련을 반대한다”, “청년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 없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가 아닌 진보라는 점, 국민의힘이 아닌 민주당 지지층에 속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 사건은 한 개인의 일탈적 범죄 행위다. 이와 동시에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극도로 심각해져 있는 민주당 내 계파 갈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표삿갓이 내세운 ‘한미연합훈련 반대’, ‘종전선언’ 등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내내 추구했던 대북 외교 현안이다. 그를 문재인의 골수 지지자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반면 이재명은 정치 이력을 시작할 때부터 ‘친노’, ‘친문’ 주류와는 거리가 있다. 본인에게 정치적 위기가 닥쳐오자 문재인의 아들인 미디어아티스트 문준용 씨를 거론하는 등, 친문 세력 및 지지자들과 썩 좋지 않은 감정이 쌓여 있는 상태기도 하다. 이재명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송영길이 정치적 테러의 대상이 된 것은 이러한 당내 정치 지형과 무관하다 보기 어렵다.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민주당의 내분은 이뿐만이 아니다. ‘더레프트’라는 아이디로 잘 알려진 친문 인플루언서를 비롯해, 다수의 친문 지지자들이 이재명을 버리고 윤석열 지지로 ‘갈아타는’ 이변이 벌어졌다. 2018년부터 이재명과 대립해오던 더레프트 및 이른바 ‘극문’ 지지층은 올해 1월부터 본격적으로 윤석열 지지를 표명하고 당선 운동에 나섰다. 그들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에게 ‘여니’, 운석열에게는 ‘여리’라는 별명을 붙이고는,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다. “여니 없으면 여리 찍는다.”

투항과 전향 사이
대선에서 패배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오른쪽)가 3월 10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해 도열한 의원들의 손을 잡으며 감사를 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민주당에서 이탈한 반(反) 이재명 지지층이 실제로 얼마나 투표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윤석열을 겨냥한 민주당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데에는 분명 일정한 기여를 했다.

윤석열의 아내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를 향한 인신공격이 쏟아지던 지난 1월 무렵이 그랬다. 더레프트를 비롯해 친문 ‘네임드’ 지지자 중에는 인터넷에 유포되기 적합한 이미지와 문구 등을 잘 만들어내는, 이른바 ‘능력자’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 그들은 김건희를 향해 쏟아지는 비방과 흑색선전의 내용을 되받아치거나, 윤석열-김건희 부부를 귀엽게 묘사하는 여러 ‘짤방’을 만들고 유포했다. 온라인 선전전에서 취약했던 국민의힘과 그 지지자들 처지에서 보자면 가히 ‘외계인들이 외계 무기를 들고 와서 도와주는’ 형국이었다.

이낙연계의 유명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윤석열 지지 선언을 한 것은 그런 면에서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민주당 기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변화와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니 말이다. 이낙연의 측근으로 불린 정운현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괴물보단 식물 대통령을 택하겠다”는 그의 말에는 뼈가 있고 가시가 세워져 있다.

이렇듯 민주당의 내분은 대선 이후에도 심각한 상태다. 선거 이후 이재명의 지지자 중 일부는 여당 의원들을 향해 문자 폭탄을 보냈다. 서울에 지역구를 둔 한 민주당 의원은 ‘송영길 대표 사퇴는 안 된다’, ‘패배 원인은 무조건 이낙연 전 총리’라는 취지의 문자를 하루에 300여 통 이상 받았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는 점잖은 말로 바뀌어 서술돼 있으나, 실제로는 온갖 욕설과 폭언이 담겨 있으리라 예상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윤석열이 50% 이상의 과반 득표를 하고, 이재명은 40% 이하의 득표를 했다면 어땠을까? 대선에 참패한 민주당의 내분은 본격적으로 더 크게 드러났을 것이다. 이낙연의 열혈 지지층은 이재명이 부패하고 부도덕하다고 비난해왔다. 게다가 선거 결과로 무능이 드러나기까지 했다면, 이재명과 이재명계를 쫓아내거나 자신들이 따로 짐을 싸서 나가버리거나, 아무튼 한 집 살림을 이어가지 않겠다는 결정에 보다 쉽게 도달할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이재명은 정권교체 여론이 압도적인 가운데에서도 1600만여 표를 얻는 성과를 냈다. 이재명은 대선에서 졌지만 민주당을 움켜쥔 ‘그립’을 놓치지 않고 더 단단히 다져나갈 수 있다. 3월 10일 새벽 4시 KBS의 당선 예측이 나오자마자 후보자 본인이 빠르게 승복 선언을 하고, 같은 날 송영길을 비롯해 당 지도부가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진다며 총사퇴한 것은, 오히려 자신감의 표현에 가깝다. 선거에서 졌지만 결과가 나쁘지 않으니, 패배를 빨리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반면 문재인의 임기는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권력은 이미 야당으로, 윤석열의 인수위로 넘어간 상태다. 현직 대통령과 ‘친노 적통’을 믿고 버텨온 친문 혹은 극문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이재명 쪽에 투항해야 할까? 아니면 이미 한번 지지했으니, 윤석열이 새로운 그림을 그려줄 것이라 믿고, 문재인이 임명한 검찰총장 윤석열의 지지자로 포지션을 변경해야 할까? 저들은 나의 아군인가? 나는 저들에게 늑대인가, 개인가? 시계(視界) 제로.

이준석을 둘러싼 갈등 지형
대선을 이틀 앞둔 3월 7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경기 화성시 동탄센트럴파크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연설을 들으며 박수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안개 속처럼 뿌연 상태인 것은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세간에 잘 알려져 있듯 윤석열의 지근거리에는 소위 ‘윤핵관’(윤석열 측 핵심관계자)으로 통칭되는 측근 그룹이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그 점을 연신 지적해왔고, 윤석열이 윤핵관과 거리를 두지 않는 것에 불만을 표하고자 지방으로 떠나는 식의 행보를 보여줬다. ‘윤핵관’과 ‘이핵관’, 그리고 윤석열의 당선에 기여한 다른 세력들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은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권교체에 성공했기 ‘ 때문에’ 앞날을 예단하기 어렵다. 윤석열이 압도적인 득표율과 개인의 카리스마로 당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직과 그에 따른 ‘전리품’은 그대로 있는데, 누가 그것을 차지해야 하는가? 윤석열이 교통정리를 해서 완벽히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초박빙 승부로 결정된 여소야대 정권은 위기에 직면하기 쉬운 구조다. 정치에 입문한지 고작 8개월 만에 대통령이 된 ‘초보 정치인’ 윤석열이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이준석의 영향력은 크게 상처 입은 상태다. 호남에서 30% 이상의 득표를 올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세대포위론’의 힘으로 전체 득표율에서 10% 이상의 격차를 벌려 압승하리라는 호언장담은 무참히 깨졌다. 국민의힘의 호남 진격은 약 15% 정도의 득표율로 귀결됐다. 이는 그간 국민의힘 계열 정당이 얻은 호남 득표에 비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국민의힘이 호남을 끌어안는 전국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이대남’ 구애 전략 혹은 여성주의 고립 전략이다. 이준석과 극적으로 화해한 윤석열이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짧은 메시지를 올려 여론을 반등시킬 때만 해도 이 전략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대성공처럼 보였다.

그러나 3월 4일과 5일 사전투표가 시행된 후, 3월 7일 CBS ‘한판승부’에 출연한 이준석이 “여성의 투표 의향이 남성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며 “저는 그런 (여성들의 이재명 민주당 후보 지지 성향 관련) 조직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이 온라인에서는 보일 수 있겠으나 실제 투표 성향으로 나타나기는 어렵다고 본다”는 발언을 하면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이재명 선대위는 선거운동 막바지에 이르러 여성들이 겪는 디지털성폭력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렇게 민주당은 20대 여성표심을 겨냥했고 서서히 판세가 움직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준석은 젊은 여성들의 표심을 ‘어차피 투표하러 안 나오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일축했다. 역풍을 불러올만한 발언이었다.

여론조사 공표기간 금지 전인 3월 2일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이재명은 20대 여성으로부터 39.1%, 윤석열은 26.7%의 지지를 받았다.(여론조사 관련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그러나 1주일 후인 대선 당일 출구조사에 따르면 이재명을 향한 20대 여성의 지지는 58.0%로 폭증한 반면, 윤석열의 표는 33.8%로 완만하게 늘었다. 안철수와 단일화를 했지만 안철수가 갖고 있던 20대 여성표는 윤석열에게 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준석 심판을 위해 이재명에게 결집하면서 이번 대선을 초박빙 승부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준석이 끌어들인 남녀 갈등은 국민의힘의 ‘짐’으로 남게 될 것이다.

정의당의 고통스러운 홀로서기
‘정치 초보’ 윤석열이 풀어야 할 난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 단일화와 합당까지 합의한 안철수를 어떻게 예우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선거가 워낙 박빙으로 끝난 탓에 안철수가 어떤 기여를 했고 어느 정도의 지분을 요구할 수 있는지 이해관계자들 간의 해석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안철수와 ‘굴러온 돌’들은 단일화가 승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겠지만, 국민의힘의 ‘박힌 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307542표나 쏟아져 나온 무효표를 근거로, 안철수의 기여가 낮으니 많은 지분을 제공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국민의힘 바깥 뿐 아니라 안에서도 적과 동지의 경계선은 흐릿해지면서 많은 이들을 혼란과 번민으로 몰아넣을 전망이다.

정의당은 더욱 험난한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2012년 창당된 후 10년간 정의당은 민주당 및 그 지지층과 전략적 우호 관계를 수립하며 동반 성장하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는데, 이제는 그 전략이 유효성을 상실했다. 민주당은 야당이 됐고,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에 대선 패배 책임론을 언급하고 있다. 정의당은 이제 고통스러운 홀로서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과연 진보정당으로서 독자 노선을 수립하고 지지층을 다시 쌓아나갈 수 있을까?

‘개와 늑대의 시간’은 해뜰녘과 해질녘, 하루에 두 번 있다. 저 멀리 다가오는 것이 나의 친구인지 적인지 알 수 없으나, 해뜰녘의 불확실성은 조금만 기다리면 확실히 마무리된다. 반면 해질녘의 흐릿한 시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진다. 오래도록 지속될 짙은 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겪게 될 개와 늑대의 시간이 해질녘의 어둠이 아닌 해뜰녘의 어둠이기를, 곧 해가 뜨고 많은 것이 분명해지며 더 나은 대한민국을 이룰 토대가 마련되기를 기원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우크라이나 참전한 이근에게 살인죄를 묻겠다고요? [노정태가 고발한다]

우크라이나 참전한 이근에게 살인죄를 묻겠다고요? [노정태가 고발한다]

SNS에 우크라이나 도착 소식을 올린 이근. 배경은 러시아군 포격으로 불타는 하르키우시. 그래픽=전유진  

먼저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나는 '이근 대위'라는 유튜브 셀럽(유명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젊은 남성을 중심으로 폭발적 인기를 끈 유튜브 방송 '가짜사나이'에서 그가 반복하던 "너 인성에 문제 있어?" 같은 유행어는 사실 왜 유행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침공당한 우크라이나로 떠났다. 참전이 목적이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외교부는 여권법 위반에 대한 행정 제재를 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지난 8일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정부의 규정된 사전허가 없이 우크라이나에 입국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외교부는 현재 여권법에 따라 법무부 등 관계부처와 협의를 통해 여권에 대한 행정제재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여권법 위반에 따른 행정 제재는 여권 반납 명령→(불응시) 여권 무효화→새 여권 발급 제한 등 3단계 조치로 이뤄진다.
오웰도 처벌해야 했을까
우크라이나 국제 의용군으로 참전한 캐나다 코미디언 앤서니 워커. [트위터 캡처]
 
하지만 나는 이근의 우크라이나 의용군 참전을 반대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정부가 이근이나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다른 이들의 참전을 막는 것에도 회의적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싸울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라서 그렇다. 왜 대한민국은 국민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남의 나라 전쟁에 나설 권리를 허용하지 않는 걸까.

이쯤에서 조지 오웰을 한번 소환해보자. 193612월, 그는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의용군에 입대했다. 처음엔 저널리스트로 그곳에 갔지만 난생처음 가본 카탈루냐에 발을 딛자마자 의용군에 들어가 버렸다. 당시 사회주의자였던 오웰은 무정부주의적인 카탈루냐에 매료됐고, 프랑코 정권에 맞서 카탈루냐를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걸 가치가 있다고 느껴서 기자가 아닌 군인으로서 스페인 내전에 가담했다.

전쟁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전장의 공포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같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 투쟁과 내분이었다. 특히 소련의 지원을 받는 스탈린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공통의 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프랑코 정권의 파시스트들보다 때로는 더 악독했다. 결국 오웰은 몸과 마음의 부상을 끌어안은 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원고를 쓰려고 그의 『카탈루냐 찬가』를 다시 읽어봤다. 어디에도 영국 정부가 오웰의 스페인 의용군 입대를 처벌했다는 내용이 없다. 누군가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타국에서 목숨을 거는 일은, 권장할만한 일이 아닐 수는 있어도 금지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상식으로 깔려 있어서일 것이다.

영국·캐나다·미국 등은 여전히 그런 상식이 통한다. 심지어 영국과 캐나다는 우크라이나 참전을 원하면 참여해도 좋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미국 역시 법적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러시아와 국가 차원의 전쟁을 벌일 수는 없지만 침략자 러시아와 싸우고 싶은 국민이 있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외인부대 되는데 '이근'은 안 된다?
지난 8일 화상으로 영국 하원 연설을 하고 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연합뉴스]
 
이런 상식은 한국에서는 상식이 아니다. 비단 강경한 정부의 태도뿐만이 아니라 이근의 우크라이나 입국을 다룬 기사에 달린 일반 국민의 댓글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대략 세 가지 이유로 그의 우크라이나 행을 비난한다. 첫째, 한국인의 우크라이나 참전은 외교 분쟁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둘째, 실제 전쟁에 뛰어들면 총, 칼, 폭약 등을 사용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그건 범죄다. 셋째, 한국인이라면 한국을 지켜야 한다.

이 비판을 하나하나 따져보자. 이근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모인 2만여 명의 외국인 입대 지원자들은 모두 전쟁을 하려고 우크라이나에 도착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침공에 맞서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입국한 외국인 자원봉사자들이 우크라이나 시민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속성으로 시민권을 발급받은 외국인들은 '국제 군단'(International Legion) 등 별도 편제로 묶여 우크라이나군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법적·제도적 절차를 갖추면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반론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된다. 원래 한국인이라도 우크라이나 군복을 입고 작전을 수행하면서 러시아군을 사살한다면 그것은 통상적인 교전 행위일 뿐이다.

프랑스에는 외국인으로 이루어진 '외인부대'가 있다. 이들 외인부대는 대개 프랑스 국경 바깥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그 과정에서 실제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한국인 중에도 이 외인부대에 자원입대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프랑스군의 일원으로서 다른 어떤 나라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고 때로는 사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한국과 제3국의 외교 갈등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전쟁 중 적군을 살상하고 오면 살인죄를 물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군인이 작전 중 수행한 행위는 통상적 법의 테두리 안에서 말할 수 없다.

분단국가라는 대한민국의 엄혹한 현실이 있는데 이를 내버려 두고 굳이 외국의 전쟁에 뛰어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은 어떨까.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에겐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복무를 마친 사람에게까지 그런 논리를 적용하는 건 무리다. 대한민국 남성은 국가의 '병역 자원'이기에 앞서 양심과 의지를 지닌 독립된 인격체다.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권리를 송두리째 부정당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참전에 살인죄를 묻겠다니
지난 1일 영국 거주 우크라이나인들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반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영국 등 주요 유럽 국가들은 자국민의 참전을 허용하고 있다. [EPA]
 
문제는 법이다. 우리 법은 안타깝게도 그런 권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형법 제 111조 사전죄(私戰罪)다. 이에 따르면 "외국에 대하여 사전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금고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용군으로 외국 군대에 들어가 참전하면 외교상 문제를 일으켜 국익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게 이 조항이 만들어진 주된 이유다.

그런데 지금도 한국인들은 프랑스 외인부대, 혹은 한국 국적을 가진 채로 미군에 입대하기도 한다. 지금껏 그 누구도 그런 선택을 한다는 이유로 비난받거나, 조롱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배척당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의 국제 군단을 프랑스 외인부대나 미군과 다르게 취급해야 할 이유나 근거가 무엇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한국인의 우크라이나 참전을 찬성하지 않는다. 누군가 조언을 구한다면 국내법을 어기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겠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쟁에 뛰어들어 우크라이나를 돕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의지를 국가가 법으로 틀어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설가 김영하의 책 제목처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과를 감수하고서라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머나먼 땅,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틈에서 그 나라 군복을 입고 전쟁터에 뒹굴다 목숨을 잃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국가가 자국민의 양심적 병역 거부마저 존중하는 시대에, 양심적 병역 수행 역시 존중해야 하는 게 아닌지 묻고 싶다. 나도 안다.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자유주의자로서 우리 사회에 작은 생각의 균열을 내고 싶다.
이근을 비롯해 우크라이나군에 자원입대한 이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한다.

2022-03-05

민주당에 묻는다…코미디언은 대통령 되면 안 되는가?

민주당에 묻는다…코미디언은 대통령 되면 안 되는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젤렌스키 조롱은 反민주적이다

● ‘젤렌스키 무능론’은 與 당론?
● 민주주의, ‘부적격자에 자격주는’ 역사
● 프랑스 마크롱도 ‘초보 정치인’이었다
● 나라 리셋 하고 싶다는 대중적 열망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AP 뉴시스]
“6개월 된 초보 정치인이 대통령이 돼 나토(NATO)가 가입을 해주려 하지 않는데 가입을 공언하고,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충돌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 2월 25TV토론에서 한 말이다. 우상호 민주당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2월 28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여러 미숙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이재명을 두둔하고 나섰다.

러시아를 탓하는 척하면서 우크라이나에도 슬쩍 책임을 돌리고, 젤렌스키에게 ‘정치 경력 없는 초보 무능 대통령’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박용진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 역시 2월 25일 광주방송에 출연해 이재명과 동일한 내용의 발언을 한 바 있으니 말이다. “잠깐 인기 있고, 잠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나라의 운영을 맡길 수 없습니다.”

민주당이 마치 당론처럼 밀어붙이는 ‘젤렌스키 무능론’은 왜 등장한 것일까? 속내는 박용진의 인터뷰를 통해 의문의 여지없이 해소된다.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치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에게 ‘외적의 도발을 불러일으키는 무능한 초보 정치인’ 딱지를 붙이기 위해,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견강부회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후보 최근 방송 토론 보시면 건성건성 대답해요. (중략) 이 중요한 국가 경제 문제와 안보 문제를 이런 식으로 맡길 수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호렌카에서 3월 2일 우크라이나 군인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일부 뼈대만 남은 집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남부 헤르손을 장악한 러시아는 인근 마리우폴, 키이우, 동부 하르키우 등에 전방위적 공격을 퍼부었다. [AP 뉴시스]
‘인민의 일꾼’에서 대통령직까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젤렌스키는 ‘인민의 일꾼’이라는 정치 풍자 시트콤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같은 이름의 정당을 창당해 단번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라는 말이 틀린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젤렌스키에 빗대 윤석열을 폄하하려 하는 이재명과 민주당의 공격은 퍽 부당하다. 타국민이 겪는 전쟁과 고통을 국내 정쟁에 활용하는 비윤리적 면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다. 국가, 특히 민주주의 국가의 리더십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철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과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고대 그리스를 제외하고 나면, 민주주의의 역사란 곧 ‘부적격자에게 자격을 주는’ 역사다. 참정권과 투표권이 지속적으로 확대돼온 궤적을 놓고 보면 그렇다는 소리다.

민주주의가 ‘외래 문물’로 수입된 한국에서는 잘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소위 ‘민주주의 선진국’일수록 소수자들은 정치적 참정권을 뒤늦게, 순차적으로 획득했다. 처음에는 유산계급 남자에게만 참정권이 있었다. 그러다 유색인종 유산계급 남자, 무산계급 남자, 유산계급 여자, 무산계급 여자 순서로 참정권을 획득하고 온전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게 됐다.

선거에 나온 다른 이에게 투표할 수 있는 권리와, 그 선거에 출마해서 다른 이의 표를 받아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권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러니 ‘아니, 코미디언 출신이 대통령이 된다고? 저 나라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따위 반응을 하는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말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속으로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를 구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일종의 사농공상 내지는 카스트 제도를 내면에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다시 말하지만 범죄를 저질러서 참정권이 제한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선거에 나오면 안 될 사람’은 없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누군가 선거에 나왔다면 그 사람을 지지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그런 선택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며 그 또한 정치적 자유의 일부다. 하지만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정치인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구분 짓고 웃음거리로 삼아 정쟁의 도구로 쓰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상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

트럼프, 오바마 그리고 마크롱
이른바 ‘선진국’에서도 ‘자격’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일은 드물지 않게 벌어져 왔다. 21세기의 인상적인 선거를 놓고 보자면 오히려 최근의 역사는 ‘자격 있어 보이는’ 정치인들이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 트렌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 대통령직을 역임한 도널드 트럼프만 해도 그렇다. 한국인 중 상당수는 트럼프라는 이름을 영화 ‘나홀로 집에 2’에 깜짝 출연한 부동산 사업가 정도로만 기억했다. 그래서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을 이변이라고 보도하는 해외 언론들을 보면서, 그게 어느 정도의 이변인지 제대로 실감하는 이를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에서 트럼프는 ‘나홀로 집에 2’가 아니라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인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13년이나 꾸준히 방영된 인기 프로그램이다. 내용은 이렇다. 트럼프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회사 중 하나의 경영자가 되기 위해 16에서 18명의 지원자가 접수한다. 트럼프는 그들을 어르고 달래다가도 골탕 먹이고, 속이고, 혼내고, 해고한다. “유 아 파이어드!”(You are fired: 당신은 해고야!)가 ‘어프렌티스’를 상징하는 명대사인 것은 그래서다. 백만장자 트럼프가 ‘노답’, ‘고구마’인 지원자들을 속 시원하게 해고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어프렌티스’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로 돌아가 보자. 트럼프가 만들어낸 진정한 이변은 대선이 아니라 공화당 경선이다. 조직도 경험도 없는 트럼프가 쟁쟁한, ‘자격’ 있는 정치인들을 제치고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트럼프 본인도 과연 그 정도 성공을 예상했을 지에 대해 정치 전문가와 기자마다 의견이 갈릴 정도다.

그러나 중요한 건 대중의 마음이다. 미국인, 특히 공화당 지지자들은 워싱턴 DC에 모여 있는 기성 정치인들, ‘자격’이 충분한 그들을 싸잡아서 싫어했다. 그 모든 이들을 향해 ‘유 아 파이어드!’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 열망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워싱턴 기득권’에 대한 분노의 열풍은 트럼프만의 독창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의 선임자인 버락 오바마 역시 ‘기득권 대 정치 신인’의 구도를 타고 순식간에 권력을 잡은 케이스다. 물론 오바마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고, 그 후 시카고에서 인권변호사 겸 헌법학 교수로 일해 왔다. 일리노이 주 의회 상원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이력은 ‘중앙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존중받을만한 것이 아니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뿐 아니라, 경선 과정에서 나가떨어진 수많은 후보 중 그 누구도 오바마에 비해 경험과 ‘자격’ 면에서 부족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경험도 조직도 없는 오바마를 택했다. 그가 잘 생긴 젊은 남자인 점도 영향을 미쳤겠으나, 근본적인 동력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그것과 동일했다. ‘기성 정치권’의 때가 묻지 않은 누군가를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앉혀, 나라 전체를 리셋하고 싶다는 대중적 열망 말이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역시 비슷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국립행정원(ENA) 졸업 후 경제부처 공무원으로 일하다,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경력을 쌓고, 프랑수와 올랑드가 이끄는 사회당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부실장과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 모든 이력을 통틀어 마크롱은 자기 이름을 걸고 선거에 나간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 2016년 8월 장관직을 내던지고 ‘전진하는 공화국’이라는 정당을 만들더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이 그가 경험한 최초의 선거다. 마크롱은 젤렌스키와 다를 바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능력 있는 자’가 아닌 열망을 조직하는 자
이렇듯 민주국가의 선거는 ‘자격 있는 자’, ‘능력 있는 자’만을 선호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특정 시점에 국민들이 지니고 있는 열망을 잘 조직하고 반영하는 이가 승리를 거두게 돼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사회 안정을 추구하며 계층과 계급의 격차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편을 선호하는 정치 세력, 즉 보수 진영일수록 선거에 부정적인 경향을 보여 왔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은 진보 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선거 회의론자 중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몇 명의 후보를 선거로 뽑은 후, 최종 결과는 추첨에 의해 결정하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제안한 바 있다. 어차피 최종 후보에 속할 정도면 ‘자격’은 충분한 사람일 테니 극한의 대립과 정쟁을 벌이지 말고 최종 승자의 결정은 운에 맡기자는 내용이다. ‘일본 정신의 기원’에서 고진은 추첨제를 제안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성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실현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권력욕 같은 것이 그렇다. 그러나 제3장 투표와 제비뽑기에서도 썼지만, 인간성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러한 인간성이 나올 여지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176쪽)

퍽 나이브한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진지한 대안으로 모색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선거는 정치력, 경제력, 기타 여러 요소에 의해 참여자를 제한하기에 완벽하게 민주적일 수 없다는 취지다.

과연 그런 비판이 옳은가? 대안으로 제시되는 추첨제가 선거보다 나은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선거마저도 필요 없다’, ‘적당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추첨하면 된다’ 이런 주장까지 해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선거는 유권자의 열망을 조직하여 국가적 분위기와 정책의 큰 방향을 결정짓는 행사다. 민주주의 선거에 '부적격자'는 없다. 젤렌스키 같은 배우 겸 TV 프로그램 제작자건, 가라타니 고진 같은 문학평론가건, 누구라도 국민의 선택을 받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젤렌스키를 조롱거리로 삼아 국내 정치에 끼워 맞추려 들었던 이들의 반성을 촉구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아무튼, 주말] 젤렌스키가 초보 대통령? 한국 정치는 분통만 터지는 저질 삼류 코미디

[아무튼, 주말] 젤렌스키가 초보 대통령? 한국 정치는 분통만 터지는 저질 삼류 코미디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킹스스피치’의 청중 효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청중 비용’

일러스트=유현호
 

1925년, 영국. 조지 5세의 둘째 아들 버티(콜린 퍼스)는 말을 더듬는 장애가 있다. 아내 엘리자베스(헬레나 보넘 카터)는 남편을 위해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러그(제프리 러시)를 찾아냈다. 라이오넬은 공인 자격 없는 아마추어 치료사지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냈다. 이것은 몸이 아닌 마음 문제인 것이다.

버티는 네 살 무렵부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기대만 크고 강압적인 아버지 조지 5세와, 왕족의 책임 따위 무시한 채 자유분방하게 살면서 동생을 쪼아대는 형 데이비드에게 억눌리면서 생긴 심인성 말더듬증이다. 조지 5세는 장성하여 두 딸까지 두고도 여전히 말을 더듬는 작은아들을 보며 탄식한다. “과거의 왕은 옷만 잘 입고 말만 잘 타면 그만이었어. 지금은 집에 있는 대중의 환심을 끌어내야만 해. 이제 우리 왕족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해. 우리는 배우가 된 거야.”

바다 건너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아가는 가운데 조지 5세는 세상을 뜬다. 그 뒤를 이어 에드워드 8세로 왕위에 오른 형 데이비드는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 여성인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해버린다. 버티는 형의 자리를 이어받아 조지 6세가 되어 마이크 앞에 서야 한다. 영화 <킹스 스피치>의 내용이다.

버티의 문제는 무엇일까? 라이오넬과 버티의 첫 수업. 라이오넬은 버티가 헤드폰을 쓰게 한 후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주면서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대목을 낭독하게 한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축음기에 녹음된 버티의 목소리는 유창했던 것이다. 단 한마디도 더듬지 않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청중 효과(audience effect)가 부정적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중 효과란 말 그대로 청중의 존재 때문에 발생하는 효과를 의미한다. 어떤 운동선수들은 관객의 환호성이 울려 퍼질 때 최고 기량을 발휘하는 반면, 어떤 선수는 연습할 때는 펄펄 날지만 관객이 들어오는 실제 시합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버티는 누군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부담을 느껴 말을 더듬는다.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심리 현상이다.

이 개념을 국제정치학 영역으로 확장해보면 어떨까? 국제정치학의 거대 담론 중 하나인 ‘민주 평화론’을 떠올려 보자.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 여론에 따라 움직이므로, 적어도 잘 발전한 민주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고전적 이론이다. 1994년 스탠퍼드 대학교의 제임스 피어론 교수는 이마누엘 칸트로 거슬러 올라가는 민주 평화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청중 효과를 연상케 하는 ‘청중 비용(audience cost)’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전쟁을 일으켜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 국민에게 의사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민주국가가 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국민이 정치권의 청중이 되어 부정적 피드백을 제공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국가가 절대 전쟁을 하지 않거나 전쟁을 무조건 피한다는 뜻은 아니다. 국민들 스스로가 외국의 침략에 맞서거나, 최악의 경우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한다면, 설령 지도자가 평화를 원한다 해도 전쟁 여론을 억누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국민의 압력 때문이다.

요컨대 민주국가는 독재국가에 비해 청중 혹은 국민이 정치권에 요구하는 바가 많고,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정치인이 국민 여론을 거스르고자 한다면 정치적으로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대신 국민이 원하는 방향의 정책이나 전쟁이라면 독재국가보다 더 전폭적인 지지와 희생을 얻어낼 수 있다. 민주국가의 지도자가 지불해야 하는 높은 청중 비용은 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따라서 민주국가는 독재국가처럼 적국을 기만하여 기습 전쟁을 벌이기 어렵지만, 공개적으로 전쟁에 나서면 독재국가보다 더 강한 힘을 보여줄 수도 있다.

<킹스 스피치>로 돌아가 보자. 조지 6세가 왕위에 오른 후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조지 6세는 라이오넬의 도움을 받아 더듬거리면서도 성공적으로 전쟁 연설을 해낸다. 입헌군주정의 군주가 치러야 할 높은 청중 비용이다. 그와 함께 전쟁을 이끈 처칠 총리도 마찬가지다. 처칠은 영국인들에게 ‘나쁜 평화가 좋은 전쟁보다 낫다’는 식의 달콤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땀과 눈물뿐’이라며 국민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했다.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정직해야 한다. 높은 청중 비용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을 하나로 모아 국난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지난 2월 러시아는 기어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우크라이나가 무너질 것이라고 보았다. 단, 젤렌스키 대통령만은 예외였다. 그는 소셜미디어(SNS)로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수도 키이우(키예프) 사수 의지를 드높였다. 미국에서 항공편을 제시하자 ‘탈출이 아니라 탄약이 필요하다’고 단호히 거절하는 모습에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전의가 불타올랐다. 작은 승전보가 쌓이면서 국제사회의 여론 또한 푸틴과 러시아를 비난하고 책임을 묻는 쪽으로 쏠리고 있다. 점점 커지는 전쟁의 청중 비용이 우크라이나를 북돋고 러시아를 억누르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이고도 감동적인 장면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지난 2월 25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은 TV 토론에서 ‘초보 대통령이 러시아를 자극해 전쟁이 벌어졌다’는 상식 이하 발언을 내뱉었다. 그러자 민주당 측 인사들은 마치 당론으로 정하기라도 한듯 젤렌스키를 ‘코미디언 대통령’이라고 조롱하며 러시아를 두둔하거나 양비론적으로 발을 빼는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다. 외국인들 보기에 너무도 부끄럽다. 우크라이나는 코미디언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우리는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들이 코미디를 하고 있지 않는가.

한국 정치는 웃기지도 않고 분통만 터지는 저질 삼류 코미디다. 거짓말로 호객하고 자리에 앉으면 정체불명 약을 파는 약장수 광대들을 대체 어찌해야 할까. 3월 4일과 5일, 대통령 선거 사전 투표일이다. 9일에는 본투표가 있다. ‘청중’인 국민이 ‘주인’ 대접을 받을 몇 안 되는 기회,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다.

2022-02-26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美 달러 패권은 ‘공짜’가 아니다

● “내가 얘기한 게 아니라 전경련이…”
1976년 시작된 ‘페트로달러’ 시스템
● 중동 산유국 보호 美 군사력이 기반
● 결국 제국, 패권국의 화폐이거늘


2월 21TV 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우리가 곧 기축통화국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발언하며 ‘기축통화 논쟁’이 불거졌다. [채널A 화면 캡처]
“한국이 기축통화국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월 21일 대선후보 TV 토론에서 한 말이다. 국가 채무를 더 높이지 말아야 한다는 다른 후보들의 견해에 맞서는 본인의 논거로서 ‘기축통화국 편입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발언의 파장은 컸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 경제학자이기도 한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이 “역대급 똥볼”이라고 질타한 것을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비판과 조롱이 쏟아졌다. 상황이 우호적으로 돌아가지 않자 이재명은 2월 23일 “내가 얘기한 게 아니라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이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얼마 전 전경련은 보도자료에서 ‘원화가 IMF 특별인출권(SDR)에 편입될 근거’를 언급했고 본인은 그것을 인용했을 뿐이라는 소리다. 애석하게도 이재명의 인용은 전경련의 본의와는 차이가 있다.

‘기축통화국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발언을 옹호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탓도 없지 않다. 이재명의 지지자 사이에서는 ‘기축통화는 아니지만 한국 돈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맞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보인다. 해외여행을 갔을 때 한국 돈을 냈다, 호텔에서 팁으로 한국 돈을 주고 나왔는데 좋아하더라, 같은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한다. ‘우리 돈의 힘이 세진 것이 맞으니 장기적으로 보면 한국도 기축통화국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취지다.

대한민국은 2022년 현재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다. 메모리 반도체와 LNG선으로 대표되는 몇 개의 독보적 수출 품목이 있고, 자동차, 유조선, 기타 공업생산품 역시 준수한 대외경쟁력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확장된 경제력과 인터넷의 힘을 타고 한국의 문화 상품이 해외에서 널리 사랑받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니고, 앞으로도 될 가능성은 없다. 왜일까?

국제 거래에서 원화의 위상
현실 속에서 기축통화란 결국 패권국가의 돈을 의미한다. 로마 제국의 디나르, 오늘날의 미국 달러가 이에 해당한다. [동아DB]
기축통화란 무엇인가. 사전적 개념에 따르면, 외환 시장에서 B라는 나라의 화폐와 C라는 나라의 화폐를 거래할 때 기준이 되는 A라는 화폐, 그것이 기축통화다. 우리가 한국의 원화를 일본의 엔화로 교환한다고 해보자. 우리의 눈에 보이는 환율표에는 한국 돈 얼마로 일본 돈 얼마를 살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실제로는 원화 대 달러, 엔화 대 달러의 교환비율이 먼저 존재한다. 달러를 매개로 원화의 가치, 엔화의 가치를 평가한 후, 비로소 원화 대 엔화의 환율이 나온다. 이 기준에 따를 때 한국 원화는 기축통화가 아니다.

일상적으로는 ‘국제 거래에서 많이 쓰이는 화폐’라는 뜻으로 기축통화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개념 정의를 따르더라도 원화는 기축통화로 인정될 수 없다. 국제 거래에서 원화의 위상은 우리의 수출이나 GDP(국내총생산) 규모보다 작기 때문이다. 전 세계 외환거래액 비중을 보면 그렇다. 1월 현재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미국의 달러가 39.92%로 1위, 유로가 36.56%로 2위다. 1위와 2위 이후로는 격차가 한없이 벌어진다. 영국의 파운드는 3위지만 비중으로 따지면 고작 6.3%에 지나지 않는다. 원화는 이 순위표에서 20위권에도 들지 못한다.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니며 앞으로도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경제학’의 눈으로 바라본 설명에 불과하다. 노골적인 힘의 정치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경제는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현실 속에서 기축통화란 결국 패권국가의 돈을 의미한다. 어떤 시대를 지배하는 국가 혹은 제국의 화폐는 그 영향권 속에서 보편적인 가치 저장 및 교환의 수단으로 인정받는다. 로마 제국의 디나르부터 오늘날의 미국 달러까지 변치 않는 냉정한 현실이다.

게다가 달러는 다른 제국의 기축통화와는 다른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 가치를 귀금속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로마의 디나르는 기본적으로 은화였다. 로마가 강력하던 시절에는 디나르의 은 함량이 높고 정품성을 보장받기 쉬웠기 때문에 로마 제국 바깥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로마의 힘이 기울어지면서 점점 은 함유도가 떨어지고 로마의 해외 구매력 역시 꺾이는 악순환이 펼쳐졌다. 달러 역시 연방준비제도와 포트 녹스에 쌓여 있는 금괴를 통해 가치를 최종적으로 담보했으나 베트남 전쟁 비용 및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로 인해 1971년 금태환을 중단했다.

석유를 확보하고 지킬 군사력
그렇다면 대체 외국인들은 무엇을 믿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사용해야 한단 말인가. 1970년대, 세상에는 금보다 더 소중한 재화가 하나 있었다. 플라스틱의 원료이며, 자동차, 배, 비행기 등 거의 모든 교통수단의 연료인데다가, 심지어 비료를 생산할 때도 필요한 ‘검은 황금’. 석유가 바로 그것이다. 석유를 갖지 못한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은 석유를 확보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반면 미국은 자국 영토 내에서 석유를 생산하는 나라다. 그 위에 중동,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쏟아져 나오는 막대한 석유의 지배력을 더하면 어떻게 될까.

1976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사우디 왕가와 협약을 맺는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안전을 보장하며 무기를 제공하고, 대신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오직 달러로만 거래하기로 약조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뒤를 이어 석유 수출국 기구(OPEC)에 속한 나라들도 달러를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기로 하면서, 달러는 금이 아니라 원유로 태환되는 기축통화의 반열에 올랐다. 이른바 ‘페트로달러’(Petro-Dollar) 시스템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전 세계의 원유 거래는 오직 달러로만 이루어진다.

몇몇 나라들은 페트로달러 시스템으로부터 이탈을 꾀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런 나라들의 말로는 썩 좋지 않았다. 2000년 9월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산 원유 결제 수단을 달러에서 유로로 바꾸겠다고 했는데,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고 후세인 정권은 몰락하고 말았다. 리비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디나르 금화’라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원유를 거래하자고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이 뒤집히고 카다피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미국이 그런 이유로 전쟁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나친 음모론적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미국의 기축통화국 지위는 페트로달러 시스템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또한 미국의 페트로달러 시스템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중동 산유국을 군사적으로 보호하거나 묶어놓을 수 있는 미국의 엄청난 군사력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미국이 갖는 기축통화국으로서의 힘이란 미국 달러로만 살 수 있는 석유의 힘, 석유를 확보하고 지킬 수 있는 미국의 군사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희생과 헌신을 대가로 유지하다
이재명의 ‘기축통화국’ 발언이 문제적인 것은 그래서다. 재정 적자를 늘려 당장 복지 예산으로 뿌리자는 취지로 기축통화국 발언을 했다는 점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이재명과 그가 주창했던 기본소득 등에 동의하는 이들은 기축통화를 그저 ‘맘 놓고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 돈’, 일종의 ‘재정 화수분’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재명에게 기축통화국이란 ‘공짜로 돈 찍어내는 나라’로 여겨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앞서 살펴보았듯 기축통화란 결국 제국, 패권국의 화폐다. 패권국이 패권국의 지위에 오르고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진 두 개의 전쟁을 모두 수행하며 승리를 거뒀고, 자연스럽게 패권국의 지위에 올랐다. 미국이 패권국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결국 무승부로 끝나버린 6‧25전쟁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베트남에서는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폭탄을 퍼부으면서도 굴욕적 퇴각을 맛보아야 했다.

지금도 미국은 중동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평화 유지’를 위해 군대를 보내고, 여러 비밀스러운 작전을 통해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며, 대내외적인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 미국의 달러 패권은 그런 면에서 결코 ‘공짜’가 아니다. 미국인들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미군, 군대에서 젊음을 바치며 때로는 부상당하고 목숨을 잃는 군인들의 희생과 헌신, 그것을 대가로 얻어냈고 지금껏 유지하는 것이다.

기축통화국이 되면 한국 돈의 대외적 신뢰도가 높아지니 마치 ‘공짜 돈’이 생긴 것처럼 재정 부채 비율을 100%까지 높일 수 있다는 식으로 들리는 이재명의 주장은 너무도 가벼운 소리다. 패권국의 화폐, 기축통화는 그런 게 아니다. 패권을 잡고 지키기 위해서는 자국민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적대국 혹은 제3국의 피해 역시 불가피하게 수반된다.

입만 열면 반미 자주를 외치며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한국은 기축통화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너무도 철부지 같은 소리다. 달러에 대한 세계의 신뢰는 결국 달러로만 구입할 수 있는 석유에 대한 신뢰다. 석유를 틀어쥔 패권에 도전하지 않는 한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질서 안에서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암묵적 협의의 산물이다.

한국이 기축통화국이 된다는 건, 미국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갖고, 미국의 패권을 빼앗아온 후,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특히 진보적 가치관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썩 달가운 미래도 아닐 것이다.

상업적으로 번영하는 국제 체제
이 글의 목적은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질서와 페트로달러 시스템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원치 않게 패권국이 된 미국은 전 세계의 바다를 점령했으면서도 ‘사용료’를 받는 대신 각국이 자유롭게 무역하고 상업적으로 번영하는 국제 체제를 만들었다. 그 시스템 속에서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됐다. 이것은 우리가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된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패권과 질서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도덕적으로 결백하다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같은 나라였지만 소련의 영향 하에 공산권으로 편입된 북한의 엇갈린 운명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듯, 그 시점에 주어진 다른 선택지에 비하면 분명히 낫다. 우리는 그 속에서 평화와 번영을 이루었고, 앞으로도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정권 인사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크라 조롱…그 입 다물라 [노정태가 고발한다]

정권 인사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크라 조롱…그 입 다물라 [노정태가 고발한다]



왼쪽부터 박범계 법무부 장관, 문재인 대통령, 홍현익 국립외교원장. 그래픽=김영옥 기자
 
"러 침공 예측 못 하고 위기 키운 '아마추어 대통령'". 국내 한 언론이 지난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외신을 종합한 짧은 기사에 단 헤드라인이다. 동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현 법무부 장관인 여당 소속 박범계 의원이 트위터에 이 기사를 포스팅한 건 전혀 다른 일이다.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공인이, 침략당한 외국 대통령을 조롱하는 모양새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 와중에 청와대는 미국 주도의 대러시아 제재 불참을 말하다 뒤늦게 제재 동참으로 선회해 인심만 잃었다.
외교원장이 "우크라이나의 어리석음"
러시아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를 조롱한 건 박 장관뿐만이 아니다. 홍현익 국립외교원장도 SNS 댓글로 "우크라이나의 어리석음이 오히려 주요인이고, 그다음 미국과 러시아의 국익을 내세운 위정자들의 정치적 계산의 합작품…. "이라고 평했다. 이 정부나 더불어민주당에 속해 있거나 정권 친화적인 인사들이 이와 비슷한 과격한 표현을 쏟아내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직 코미디언이었다는 점을 특히 조롱거리로 삼는다. 가령 역사학자라며 노골적인 어용 행보를 일삼는 전우용은 트위터에 "무식하고 무능한 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처지가 안타깝다"다며 "국민이 무식한 통치자를 선택하면, 무식한 통치자는 대개 '재앙'으로 보답한다"는 극단적인 비하 발언을 내뱉었다.
박범계 SNS

홍현익 국립외교원장이 단 댓글. [페이스북 캡처]
 
개전 직후 속절없이 무너지는 우크라이나를 보며 손가락질하기는 쉽다. 우크라이나에 대해 잠깐 검색한 후 현 대통령 젤렌스키가 정치 경력이 전혀 없는 희극 배우였다는 사실을 끄집어내 웃음거리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 혹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료나 지식인이라면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그런 식으로만 묘사해서는 안 된다.
개도국 멸시하는 '꼰대 의식' 투영
그런데 왜 재야 지식인부터 장관에 이르기까지 다들 이런 행태를 보이는 걸까. 나는 586 세대, 더 나아가 진보 진영 일각에 팽배한 예능인 혐오와 개발도상국 멸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거라고 본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 붕괴로 탄생한 나라다. 건국 30년을 갓 넘긴 신생국이다. 정치·경제 등 사회 전반이 제자리를 잡을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숱한 대내외적 풍파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우크라이나의 현황은 비참하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부패가 심각한 나라다. 짐작할 수 있듯이 1등은 러시아다. 하지만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석유 및 천연가스를 가진 나라지만, 우크라이나는 다르다.

그런 우크라이나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긴 어렵다. 정치적으론 친서방파와 친러시아파로 나누어져 혼란스럽다. 한편 우크라이나 경제는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재벌, 즉 올리가리히에 의해 지배된다. 전임 대통령 포로셴코 역시 올리가리히 중 한 사람으로, 동유럽 최대의 초콜릿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기업인 출신이 대통령이 된다 하여 그 나라가 반드시 부패하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그랬다. 친서방파가 집권하든 친러파가 집권하든 고질적인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으니 국민들은 염증을 냈다.

우크라이나 정치는 러시아의 영향력에 휘둘려왔으나, 2013년 유로마이단 시위 후 유럽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러자 러시아는 2014년 군사력을 동원해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했고, 이후 우크라이나 동쪽 돈바스 지역에서는 반정부세력을 조직, 포섭, 지원하는 방식으로 비정규전쟁을 벌여왔다. 2022년 2월 현재 전면전이 벌어졌으나 사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8년째 계속되고 있었던 셈이다.
코미디언 대통령 당선은 부패 반작용
젤린스키의 대통령 당선은 이런 맥락에서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정치 경력이 전혀 없는 배우 출신으로, 2015년부터 '인민의 일꾼'(Servant of People)에 출연해 큰 인기를 누려왔다. '인민의 일꾼'은 시골학교 선생님이 SNS에 올린 정치 비판 영상을 통해 국민적 인기를 얻어 정치권으로 진출하여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은 정치 풍자 시트콤이다. 답답하고 암울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사이다'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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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지하철역 안에 시민들이 대피해 있다. 이날 새벽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군사작전을 선언하면서 침공이 시작됐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렇다고 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개그와 다큐를 구분하지 못하나? 박범계 장관과 전우용을 비롯한 대다수 586들이 이런 경멸을 대놓고 드러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크라이나 문제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뿐만이 아니다. 건국 이후 30년간 얽히고설킨 정경유착을 해결하지 않는 한 미래가 없다.

2019년 대선 당시 젤렌스키는 1차 투표에서 1위를 하고, 2차 결선 투표에서 73.19%의 득표율로 전임 대통령 포로셴코(24.48%)를 압도적 표차로 눌렀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시트콤과 현실을 구분 못 하는 바보 멍청이여서가 아니다. 처음 정치에 뛰어든 신인을 지지하여 단번에 정치적 구도를 뒤흔들지 않으면 고질적인 정경유착을 끊을 수 없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젤렌스키가 법학 석사 엘리트라는 점을 알고 보면 더욱 그렇다. '코미디'라는 키워드를 빼고 본다면, 우크라이나의 2019년 선거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슷한 일은 프랑스에서도 있었다. 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투자회사 출신 엘리트 마크롱이 전광석화처럼 나타나 대통령이 되고 본인의 지지 정당을 원내 제1당으로 만들었던 것과 사실상 동일한 현상이다. 기존 정치권에 통째로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열망이 뭉쳐, 기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결과를 낳은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몹시 열악하다. 2013년, 우크라이나의 이웃 폴란드에는 약 22만 명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2019년 현재 120만여 명으로 늘었다. 유출 인구 상당수는 고학력, 고소득, 고급 인력이다. 이 추세가 지속할수록 친서방파는 선거에 이기기도, 설령 이긴다 해도 우크라이나를 개혁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도 어렵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5일 새벽 연설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 인스타그램 캡처]
 
물론 젤렌스키 정권은 여러 약점을 드러냈다. 특히 인재풀이 부족한 탓에 젤렌스키와 가까운 방송 관계자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했다는 뉴욕타임스 보도는 젤렌스키의 무능 이미지에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젤렌스키를 택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그가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에 뽑지 않았나. 실제로 젤렌스키는 이전 정권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강력한 올리가리히 규제 법안을 연이어 내놓았다. 유효성과는 별개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원하던 방향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정치 전체를 뒤집어버릴 '아웃사이더'를 원했는데, 우리가 과연 그 선택을 비합리적이거나 어리석다고 비난하고 조롱할 수 있을까?
선거용 견강부회, 혐오 발언
해방 직후 영국의 한 언론인이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했던 발언은 수많은 한국인의 마음속에 두고두고 응어리로 남았다. 일제 식민지배가 끝나자마자 북한의 침략을 겪고 황무지가 된 국토 위에 두 주먹만 가지고 서 있는 것도 서러운데, 그런 비참한 처지의 대한민국을 이런 식으로 조롱했던 말을, 우리는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박범계, 전우용, 그 외 민주당 의원들과 그 지지자들이 내뱉는 폭언 역시 마찬가지다. 근엄한 유교적 사농공상 세계관을 깔고는 무려 한 국가의 대통령을 예능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광대''천민'으로 취급하는 혐오를 내비친다. 더 나쁜 건 우크라이나의 사정과 역사적 맥락을 알지도 못하면서, 젤렌스키를 대통령으로 뽑은 우크라이나 국민을 통째로 멸시하는 태도다.

입으로는 온갖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노골적인 차별과 혐오와 멸시를 드러내는 사람들 아닌가. 침략당한 외국을 두고 선거용 견강부회를 위해 그런 혐오 발언을 하는 걸 보면 너무 끔찍해서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다. 모든 한국인이 그렇지 않다는 걸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가 독립된 주권국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바란다.

2022-02-22

[朝鮮칼럼 The Column] 무속과 신천지는 혐오해도 되나

[朝鮮칼럼 The Column] 무속과 신천지는 혐오해도 되나

2020년 2월 19일 코로나19 확진자가 다수 나온 대구 남구 신천지예수교회 다대오지성전 앞을 대구 남구청 관계자들이 방역하고 있다./김동환 기자
 
“신천지 비호세력에 나라를 맡길 수 없습니다” “술과 주술에 빠진 대통령을 원하십니까”. 선관위에 따르면 이번 대선 기간 우리 국민 모두가 내걸 수 있는 현수막 문구다.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해온 표현들이다. 이런 걸 ‘게시 가능’이라 판단한 선관위도 문제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민주당에 있다. 특정 종교나 신앙 및 그것을 추종하는 이들을 향한 무차별적 혐오 발언을 공론장에 퍼뜨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민주당과 지지자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당의 당원을 향해서도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친여 방송인 김어준이 지난 18일 유튜브 ‘다스뵈이다’를 통해 한 말을 되짚어보자. 그는 지난해 10월 민주당 대선 경선 3차 선거인단 투표에서 성분 분석이 안 되는 10만 표가 나왔다며, 그때 머릿속에 세 글자 ‘신천지’가 떠올랐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패널로 나온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 여론조사업체 윈지코리아컨설팅 박시영 대표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 사회 상식의 하한선이 어디인지 의심케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겠다. 나는 신천지나 무속 등을 지지하지도 옹호하지도 않는다. 신천지 특유의 포교 방식으로 인해 포섭된 이들이 인생을 허비하고 금전적 피해를 입으며 육체적·정신적 학대를 당하고 있는 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공권력의 적절한 개입과 수사 및 처벌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무속인에 의한 사기·협박·폭력·갈취 등의 범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피해자의 심리를 파고드는 악질 범죄로 반드시 엄단해야 한다.

이런 견해는 필자의 독창적인 생각이나 입장이 아니다.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어떤 종교를 믿을지, 더 나아가 어떤 종교를 창시할지도 개인의 자유에 포함된다. 단, 그 종교 활동 과정에서 범죄를 저질렀거나 그럴 우려가 있다면 공권력의 제지를 받아야 마땅하다. 설령 그런 경우라 해도 종교 자체를 비하·폄훼·매도하거나 누군가 어떤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당연한 상식이 왜 집권 민주당에서는 통용되지 않은 것일까?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문재인 대통령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재작년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국내에 상륙하고 퍼져나가던 무렵으로 돌아가 보자. 청와대는 중국발 외국인 입국을 막으라는 의료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외국인 혐오’ ‘제노포비아’라며 묵살하고 있었다. 그러다 막상 국내에 전파된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하자 희생양 찾기에 나섰다.

마침 대구에서 코로나가 크게 확산되었고 그중에도 신천지를 통해 퍼졌다는 사실이 역학조사를 통해 드러나자, 환자의 개인정보 보호 같은 현대 국가의 상식은 모두 뒷전으로 밀려났다. 질병관리청은 짐짓 중립적인 태도로 신천지를 지목하고, 여당 지지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대구 코로나’ ‘신천지 코로나’ 같은 혐오 표현을 만들고 퍼다 날랐으며, 그 모든 과정을 청와대는 묵인하거나 부추겼다. 국민 상당수가 그런 비인격적 혐오 몰이에 동참하거나 방관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만 아니면 돼’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 문제야’라는 식으로 도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서로 모여 기도하고 노래하며 공동생활하는 소수 종교와 종파일수록 감염병에 취약하다. 이것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공통의 현상이다. 뉴욕에서는 보수적인 유대교 종파가, 유럽에서는 이주민들의 무슬림 사원이 초기 코로나 폭발의 도화선 노릇을 했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한, 그 어떤 문명국가도 정부가 앞장서 특정 집단을 향해 ‘너희가 문제야’라는 시그널을 보내지는 않았다. 병을 퍼뜨린 이들이 밉지 않아서가 아니다. 한번 혐오의 씨앗이 뿌려지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참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심지어 반려동물로부터 지지 선언을 받네 마네 하는 ‘인권 감수성’을 뽐내다가도, 민주당은 신천지와 무속인을 만나면 오히려 잔인한 공격성을 드러낸다. 마치 흑인은 총에 맞아도 개는 총에 맞지 않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무속과 신천지는 혐오해도 되는가? 이 질문을 마주하지 않는 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모든 담론은 허구다.

2022-02-19

이재명 석사논문, 표절보다 심각한 것은…

이재명 석사논문, 표절보다 심각한 것은…

[노정태의 뷰파인더] ‘행정학 석사 李’를 들여다보다

● 주제, ‘지방정치 부정부패 극복방안’
● 백기완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
● “지방정치에 주민 직접참여 활성화”
● 자칫 ‘지역 영주’ 부채질하는 주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석사학위 논문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방안에 관한 연구’ 표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석사 학위논문 표절 여부에 대한 검증은 대선 후로 미뤄졌다. 지난해 말 가천대가 교육부에 제출한 조사 계획에 따르면 그렇다. 가천대는 4월 7일까지 조사위원회의 검증을 마치고 4월 17일까지 연구윤리위원회 승인 등 절차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아내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의 논문 재조사 결과 발표도 대선 이후인 3월 31일로 미뤄졌다.

두 사람의 논문을 같은 층위에서 비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이재명은 대선후보인 반면 김건희는 후보의 부인일 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김건희의 논문과 학위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상태에서 학력 부족의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취득했다는 인상을 준다. 논문 표절 시비가 불거진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비판받을만한 일이지만 비슷한 목적으로 학위를 딴 수많은 이들과 비교해야 할 사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인용 표시 안했고, 표절 인정한다”
이재명의 논문은 다르다. 이재명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 이재명은 201611월 4일 부산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자신의 논문에 대한 자부심까지 드러낸 바 있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를 졸업했고 사법시험을 합격한 변호사”라서 “어디 이름도 모르는 대학의 석사 학위”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부정부패 극복 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야간 특수대학원을 갔고, 2년 반 동안 연구한 끝에 굳이 논문을 썼다는 것이다. 다만 인용문의 따옴표를 못 친 게 있어서 표절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재명은 지난해 1229MBC 라디오에 나와서는 “(학교 측에) 필요 없다, 제발 취소해달라, 그러고 있는 중”이라며 “제가 인정한다. 제대로 인용 표시 안했고 표절 인정한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몇몇 구절을 가져다 놓고 비교하거나 ‘카피킬러’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표절지수를 산출해볼 수는 있지만, 최종적인 판단은 4월 17일 이후에나 내려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재명의 석사논문이 표절이라고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 이 글의 목적 또한 표절 여부를 따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재명이 쓴 석사논문의 표절 여부와 무관하게 그 내용을 읽고 검토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200512월 경원대(현 가천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에 행정학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방안에 관한 연구’를 펼쳐보자. 일각에서는 이 논문의 영어 부제가 문법에 맞지 않게 번역됐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와 같은 지엽적 문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결론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는 것은 건설적인 담론을 형성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재명은 이 논문을 쓰고 2006년 2월 행정학 석사가 됐다. 그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같은 해 열린 5·31 지방선거에서 당시 여당(현 민주당) 공천을 받아 성남시장에 출마했기 때문이다. 지자체장 출마를 준비하는 정치인이 지자체 부정부패 해결 방안을 연구하고 학위까지 받았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학부를 졸업하고 곧장 대학원에 오는 대신 사회생활을 하다가 만학의 길을 걷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중 상당수는 자신이 사회에서 경험했던 내용을 심화·확장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 결국 본인의 전문 분야에 대해 논문을 쓰게 되는 것이다.

아주 초보적 지적 정직성 문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초선 성남시장 때인 201310월 2일 한 행사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동아DB]
2006년 낙선한 이재명은 2010년에 결국 성남시장이 됐다. 그렇다면 그가 쓴 부정부패에 대한 논문이 시 행정의 현장에서 실현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2010년 성남시장 이재명’과 ‘2006년 행정학 석사 이재명’이 동명이인이 아니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여러모로 곱씹어볼만한 일이다. 정치적 지지 여부와 무관하게 이재명의 학구열을 지지한다.

그렇지만 석사과정 학생 이재명의 타 저작 인용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위에서 말한 ‘따옴표를 빼먹은’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보다 더 심각한 오류가 논문에서 눈에 띈다. 가령 13쪽, 이재명은 이렇게 적고 있다.

“특히 지방정부의 부패는 세무, 경찰, 위생, 환경, 건설 등의 분야에서 관행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백기완 외, 2000: 85-87).”

호기심을 참지 못해 논문을 읽다 말고 말미에 붙어 있는 참고문헌 목록으로 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기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썼다는 책의 제목을 찾아볼 수 없다. 참고문헌 목록은 저자의 이름을 가나다 순서로 나열하고 있는데, 단행본의 경우는 ‘김판석’에서 ‘백린’으로, 논문의 경우는 ‘김해동’에서 ‘박홍식’을 지나 ‘서울행정학회’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 중간에 들어가야 할 백기완의 이름과 그가 공저한 책의 제목은 어디에도 없다.

이재명이 직접 고르고 인용한 참고문헌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니, 퍽 실망스러운 일이다. 혹시 논문 제출 직전에 백기완이 행정학 석사 논문에 인용할만한 저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참고문헌 목록뿐 아니라 본문에서도 인용문을 지웠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지적 정직성과 스칼라십(Scholarship)의 문제다.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인이 쓴 논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란은 지금껏 퍽 말초적인 수준에서 이뤄져 왔다. ‘표절이냐, 아니냐’만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이재명의 경우처럼 논문에서 펼친 주장을 직접 실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된 경우라면 표절 여부만 따져서는 안 된다. 논문을 꼼꼼히 읽어보고 그 ‘내용’을 논박해야 한다. 내용을 논해야 설령 해당 논문이 표절로 판명된다 해도 우리 사회에 유의미한 공적 담론이 남는다.

‘상향식 공천’ 듣기에는 좋은 말
그러한 문제의식을 유지한 채 ‘지방정치 부정·부패 유형과 실태분석’을 다룬 3장을 펼쳐보자. 2005년 논문을 쓸 당시 이재명은 전국 정당이 지방선거 후보자를 공천하는 과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상향식 공천과 같은 공천결과의 합리성이 보장되지 않은 채 하향식 공천이 대세를 이루기 때문에 공천과정과 관련된 부패행위가 만연하고 있다”(20쪽)는 것이다.

그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한 방안과 좌절을 논하는 대목에서 이재명은 다소 평정을 잃는 듯하다. 길게 인용해보자.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일각에서 기초단체장에 대해서는 주민자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전국 정당에 의한 정당공천을 배제하자는 논의가 많았고, 특히 집권여당은 공천배제를 당론으로 정하기까지 하였는데 선거법협상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한나라당과의 합의를 통해 기초의원까지 정당공천을 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말았다.”(21-22쪽)

요컨대 이재명은 지방선거에 있어서 최대한 전국정당의 공천을 배제해야 한다는 쪽이다. ‘하향식’ 공천 대신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상향식’ 공천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중앙정부와 전국정당의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은 채, 지방 단위에서 무한대의 경쟁과 돈 선거가 벌어지며, 그 재원 마련을 위해 부정부패가 더욱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재명 스스로도 이 난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논문의 서론에서 한 문단을 인용해보자.

“지방정치과정에서의 부패는 중앙정치와는 달리 극복방안이 마땅치 않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중략) ①지방의 선출직 공직자의 경우에는 형사상 유죄판결을 받는 경우 외에는 어떠한 견제수단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②재정자립도가 높은 지방의 경우에는 중앙정부에 의한 간섭적 정치적 통제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③이 때문에 지방정치에 주민들의 직접참여를 활성화함으로써 주민에 의한 정치적 통제를 조직할 필요가 커지고 있다.”(2쪽, 원문자는 인용자)

사정이 이러한데 지방의회 등에서 상향식 공천이 과연 올바로 작동할 수 있을까? ①에서 이재명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시피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게 된다고 해도 무방한 지자체장이,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온갖 영향력을 발휘해 지방의회까지 손에 쥐고 ‘지역 영주’로 자리매김하도록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②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가령 IT(정보기술) 대기업이 몰려 있고 재정자립도가 높은 성남시 같은 곳의 지자체장은 더욱 감시와 견제로부터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③에서 제안하고 있는 주민 직접 참여를 위한 주민의 정치적 조직화라는 것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시장의 재선을 위해, 혹은 시장의 ‘더 큰 꿈’을 위해 공적 자원이 투입되는 일까지도 벌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행정학 석사’ 이재명의 제언을 따르면, ‘성남시장’ 이재명의 권력은 줄어들기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느끼게 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월 16일 서울 지하철 잠실새내역 7번 출구 앞에서 집중유세를 갖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정치적으로 조직된 시민’이라는 명분
부정부패, 특히 지방정치의 부정부패를 근절하는 것은 한 편의 논문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론보다는 실천이, 연구실보다는 현장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도 있다. 이재명의 논문은 그런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썩 만족스럽지 않다. 선거로 뽑히고 임기를 보장받은 부유한 지자체의 수장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고 키워나가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을 때, ‘정치적으로 조직된 시민’이 그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 아닐까.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건 당장 현업에서 쓰기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건, 모든 공부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 문제는 유명인의 공부와 논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태도다. 마치 조선의 선비와 유생들이 한자로 쓰인 중국 책의 현실성에는 아무 상관없이 그걸 누가 더 잘 외웠느냐를 놓고 겨루던 것을 연상케 한다. 누가 무슨 공부를 했고 그 내용이 논문에 어떻게 정리돼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표절이냐 아니냐’만 물고 늘어진다. 그런 소모적인 논쟁 대신, ‘행정학 석사 이재명’의 눈으로 ‘성남시장 이재명’ ‘경기도지사 이재명’을 검토하고 비판했더라면 더 유익한 논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좀 더 지적이고 정직하며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선진국의 모습일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