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18

『예수전』 일별

예수전 - 10점
김규항 지음/돌베개



오래간만에 여유가 생겨서 교보문고에 들렀다. 김규항의 신작 『예수전』이 매대에 놓여 있었다. 디자인과 만듬새가 좋아서 들춰보았는데, 저자가 전제로 삼고 있는 내용에 대해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규항은 마르코의 복음서(마가복음)가 가장 오래 전에 작성되었으며, 종교적인 가필이 없기 때문에 예수의 생애를 살펴보는데 가장 좋은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4복음서중 마가복음이 가장 이른 시점에 나왔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마가복음이 '덜 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설교하는 대신 전도하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열혈남아인데, 그것은 마가복음을 편찬한 집단이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경 연구자들은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의 출처를 대략 다음과 같이 짐작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예루살렘의 기독교 집단에서 편찬되었으며,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이방민족을 위한 전도를 염두에 두었던 분파의 것이고, 누가복음은 좀 더 후기의 로마 기독교인들이 집성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에 따라 각 복음서의 개별적 성격이 형성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마태복음은 말도 안 되게 예수의 탄생설화를 비비 꽈서 '다윗의 14대손'으로 맞춰놓는다. 예루살렘에서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이다. 반면 누가복음은 로마, 혹은 로마에서 가까운 어딘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로마인들과 이방인(즉 할례받지 않은 비유대인)들에게 온정적이다. '덜 종교적'인 마가복음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 복음서 안에서 예수는 그 자신이 한 사람의 사도처럼 열성적으로 뛰어다닌다.

중요한 건 이러한 모습이 '덜 종교적'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보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가 덜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러한 개념적 장치를 동원하여 엄연히 자신이 종교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예수("내가 율법을 폐하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를 종교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굳이 비교하자면, 정치인들이 탈정치적인 제스추어를 취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이 시대의 모습과, 종교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긴 한 사람을 탈종교적인 누군가로 만들려 하는 것 사이에, 모종의 유사성이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탈정치의 시대가 정치적 타락을 낳았듯, 이러한 탈종교적 해석이 정치적 선보다는 종교적 악을 낳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우려한다.

나 또한 그 책을 꼼꼼하게 읽어본 것은 아니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첫째, '인간 예수'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인간 예수'는 자신이 불러올 파장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가장 급진적인 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 마가복음에 대한 김규항의 취향은 존중해줄 수 있지만, 오직 그것만이 '올바른' 예수를 담고 있으며, 나머지는 종교에 의해 오염된 것인 양 말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김규항의 논법대로 작성 시기가 가장 앞서기 때문에 마가복음에 다른 복음서를 압도하는 권위를 부여한다면, 마가복음보다 앞서 저술·편찬되었을 뿐 아니라 저자가 누구인지도 확실히 밝혀진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 그보다 더 높은 권위를 부여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김규항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마가복음의 기술이 마태, 누가의 내용이 첨가된 것이라고 말하며 그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가복음보다 앞서 쓰여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고린도전서) 15장 1절에서 8절까지의 내용은, 이후 복음서에 등장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술과 일치하며, 더구나 저자인 바오로를 포함한 오백 명이 넘는 증인을 열거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마가복음의 뒷부분이 가필된 것일 가능성이야 적지 않겠지만, 그것을 '불순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예수와 함께 살고 밥을 먹고 마셨던 사람들이 겪었던 일이 전승으로 남아 있었고, 그게 바로 '종교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들이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분명히 그렇다.

2009-05-07

돼지독감, 아프가니스탄 동물원

미디어스에 격주로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다. 첫 꼭지로 '돼지독감'에 대해 썼다. "돼지가 독감에 걸린 날"(미디어스, 2009년 5월 6일) 참조. 블로그 링크는 여기. FP 마감을 하느라 밤을 새면서 쓴 것이어서, 완전히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링크를 걸어도 어차피 안 읽을 사람들은 죽어도 안 읽을 것이므로 결론만 요약해보자.

국내의 현 의료 체계를 놓고 볼 때 신종 인플루엔자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사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전 국민에게 의료 접근권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므로, 현재 추진되는 의료법 개정은 철회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칼럼에는 두 번째 문장의 주장을 대놓고 개진하지 않았지만 요점은 그거다.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감염되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감염된 사람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고 인구 밀집 지역에서 병을 '참고' 있을 때이다. 감염자가 늘어날 뿐 아니라 변종이 생길 가능성도 비약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겁나서 병원 못 가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위험하긴 하지만 '독감'에 불과한 질병이 '재앙'으로 거듭날 가능성도 커지는 것이다.

'돼지독감'이라는 이름 때문에 여기 저기서 코미디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가령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탈레반이 지배하는 나라답게 '공식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존재하는 돼지는 단 1마리이며, 당연히 동물원에 있다. 로이터의 보도에 따르면, 돼지독감을 우려해서 동물원측은 그 외롭고 쓸쓸한 돼지에 대한 격리 조치를 단행했다고 한다.


바로 그 공포의 돼지 (ⓒ로이터)



기사를 읽어보면 더 골때리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1992년에서 94년까지 벌어진 아프가니스탄 내전 기간 동안 동물들이 많은 수모를 당했다. 무자헤딘 전사들이 동물원에 쳐들어가 사슴과 토끼를 잡아먹고 코끼리를 쏘아 죽인 것이다.

거기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어떤 무자헤딘 전사는 사자 우리의 철창을 넘어 들어갔다가 마르잔이라는 이름의 사자에게 물려 죽었다. 그러자 다음날 그 남자의 형이 쳐들어와 사자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마르잔은 이빨 빠진 장님 사자가 되어버렸다. 마르잔은 이후 2002년 고령으로 죽었고, 지금은 동물원에 대신 두 마리의 사자가 들어와 있다고 한다.


아프간 내전의 희생자, 애꿎은 사자 (ⓒ로이터)



여기까지 쓰고 보니 어떻게 결론을 내야 할지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다. 억지로라도 마무리를 지어보자. 오늘의 교훈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의료법 개정은 더 많은 국민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 둘째, '돼지독감'이라는 말만 듣고 동물을 괴롭히거나 하지 말자. 아무리 내전중이라고 해도 동물원에 침입해서 동물을 잡아먹거나 사자우리에 뛰어들거나 해서는 안 된다. (음...)

2009-05-06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돼지가 독감에 걸린 날

돼지들만 억울하게 됐다. 돼지독감(swine flu)라고 초기에 명명된 것과는 달리, WHO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신종 인플루엔자가 돼지에서 비롯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공식 명칭을 변경했다. 늦은 일이다. 많은 이들은 이미 이 질병을 '돼지독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918~1919년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스페인 독감의 경우도 그랬다.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독감이라고 이름 붙여졌고, 지금껏 그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WHO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2009년 발병한 신종 인플루엔자는 꾸준히 ‘돼지독감’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을 때, 국내 언론의 보도 태도는 기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40대 버스 운전기사 모씨가 신종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되었을 때, 대형 일간지들은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1면에 보도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안타깝게도(?) 그 환자는 단순한 독감 환자에 지나지 않았다.

우선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정리해보자. 현재 발생한 신종 인플루엔자는, 기본적으로는 평범한 독감과 다를 바 없다. 인플루엔자는 그 바이러스의 종류를 통해 크게 A형, B형, C형으로 분류된다. 이것들 중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A형이다. B형은 우리가 매년 예방접종을 맞는 평범한 독감 바이러스이며, C형은 그냥 ‘감기’의 원인이 될 뿐이다. B형과 C형은 오랜 세월 동안 인류와 함께 살아왔고, 인간에게는 그 각각에 대응할 수 있는 항체가 있다.

문제는 A형 독감이다. 이것들은 주로 조류를 숙주로 삼으며, 간혹 돼지에게 걸려 있는 경우도 있다. 인플루엔자 A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아직도 야생 상태에 있으며, 지금도 끝없이 진화중이다. 통상적으로는 A형 인플루엔자가 인간에게 감염될 수 없다. 단백질의 구조가 인간의 기관지로 침입할 수 없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그 침투가 가능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것이 바로 인플루엔자 대유행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 <조류독감>에 따르면, “인플루엔자(독감) 대유행은 흔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혀 면역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HA 아형의 출현 또는 재부상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플루엔자 유행이 ‘돌연변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면역성을 지니지 않은 독감에 걸린 채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길어도 한 달 내에 그 사람은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그 기간 동안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자기증식하고, 그 과정에서 계속 돌연변이가 발생한다. 최대한 빨리 감염자의 신원을 확인하여 격리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몸은 바이러스를 배양, 증식할 수 있는 최고의 배양기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멕시코 정부가 감염자 숫자를 제대로 집계하지 않았다는 의혹에 휩싸여 큰 비난에 직면한 것도 바로 그래서이다. 인플루엔자와의 싸움은 결국 환자 관리에 달려 있다. 감염자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을 격리하여 치료해야만 파국을 방지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시점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과연 온 국민에게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의료적 혜택이 주어질 수 있느냐이다.

이명박 정부의 ‘의료 개혁’이 단행되지 않은 지금 신종 인플루엔자 문제가 불거진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직은 전국에 보건소가 깔려 있고, 사람들은 누구라도 5000원 미만의 돈을 내고 병원에서 잘 훈련된 의사의 진단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 온 국민의 의료 접근권이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다.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는 인구 1억 명이 모여 사는 곳이다. 멕시코 또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 인해 사회적 안전망이 파괴된 나라 중 하나이다. 현재 발생한 인플루엔자의 위험성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다.

거대 언론의 선정적 보도로 인해 애꿎은 ‘타미플루’만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고 한다. 마치 1994년 북핵 위기 당시 라면을 사재기하는 일이 벌어졌듯이,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그 독감에 걸리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많은 사람들이 독감에 걸렸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국의 의료 체계 하에서는, 본인이 스스로의 증세를 일찍 자각한다면, 신종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도 큰 무리 없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문제는 그놈의 ‘개혁’이다.

   
<드라마틱>에서 수습기자 및 취재기자로 일했고, <Foreign Policy> 한국어판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1세기를 규정짓게 될 키워드에 대한 단행본을 집필 중이며, 옮긴 책으로는 <아웃라이어>가 있다. 고려대 법학과 졸업, 현재 서강대 철학과 재학중.

 

노정태/ForeignPolicy한국어판편집장  mediaus@mediaus.co.kr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09-04-30

용산 100일, 그리고 재보선 결과

1.

하루 종일 정신 없이 돌아다녔다. 낮에는 홍대의 한 카페에서 아마미야 카린 씨와 마쓰모토 하지메 씨를 만났다.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아니고, 프레시안에서 나를 포함해 두 명의 20대를 더 붙여서 좌담회를 열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단단했고 어른스러웠다. '활동가'의 모습이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신선했다.

무선 인터넷을 켜고 다시 한 번 확인차 gyuhang.net에 접속했다. 4월 29일은 용산 참사 100일이 되는 날이었고, 나는 김규항 씨의 블로그에서 관련 정보를 봤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4월 29일 시청앞 광장"이라고 써 있었다. 저녁을 잘 얻어먹고, 커피도 잘 얻어마신 다음 길을 나섰다.


2.

시청역에 내려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전경 버스만이 둥근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가, 허탕을 쳤다는 듯 시동을 걸고 있었다. 뭐야 씨발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인터넷에 접속 가능한 친구에게 연락해서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을 해달라고 했다. 서울역 광장이었다. 대체 이유가 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낚였고, 괜히 시청 앞에 갔다가 서울역으로 향했다.


대체_무슨_의도로_이런_공지를.jpg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불교, 개신교, 원불교, 천주교 등 4대 종교단체에서 번갈아가며 위령제를 치르는 것이 용산 100일 행사의 내용이었다. 나는 원불교의 위령제가 시작되기 전, 영상물이 막 상영되는 찰나에 현장에 도착했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과 땅 사이에 떠돌고 있는 동안, 벌써 100일이 흘렀다. 그들의 육신은 아직도 영안실에 고기처럼 냉동되어 있다.

그런 끔찍한 사실을 아는 것, 굳이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것,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어쩌면 이상한 방식의 자기 학대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침 나는 이런 구절을 읽고 있었다.

상기하기는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며, 그 안에 자체만의 윤리적 가치를 안고 있다. 기억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이다. 따라서 상기하기가 일종의 윤리적 행위라는 믿음은 우리도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세상 이치에 따라 우리 눈앞에서 죽은 사람들(조부모, 부모, 선생님, 오랜 친구 등)을 애도하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닌 본성 한가운데에 깊숙이 놓여 있다. 무정함과 망각은 함께 가기 마련인 듯하다. [168p.]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trans. 이재원 (서울: 이후, 2004).


3.

용산 참사 100일이 되는 날 재보선이 있었고, 진보신당은 값진 의석 하나를 얻어냈다. 나 또한 이 승리가 기쁘다. 이 승리를 통해, 진보신당과 그에 기대를 거는 이들은 완전히 패배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진실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지지 않았다고 외치기 위해서는 이겨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최대한 버틴 것, 그리고 단일화에 결국 승복한 것은 모두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최소한의 합리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렇다. 조승수로 단일화할 경우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후보가 버티고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경우, 조승수를 아예 떨어뜨리면 둘 다 소득이 0이니 그것은 선택지에 포함되지 않는다. 반면 너무 일찍 단일화를 해버리면, 어차피 애가 타는 쪽은 진보신당이므로, 원하는 만큼 무언가를 뜯어낼 수 있을 가능성을 포기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민주노동당 입장에서는 '상하기 직전', 즉 가장 맛있는 타이밍에 열매를 수확했다고 볼 수 있다(이 표현은 어떤 분의 블로그에 달린 답플에서 줏어왔음을 밝힌다).

문제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이런 생생한 정치공학적 선택이 과연 진보신당의 지지자들에게 어떤 정서적 영향을 미칠 것인가. 둘째, 이번 단일화를 통해 더욱 거세질 '진보정당 통합', 더 나아가서 '범 개혁세력 통합'의 논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셋째, 단일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에 제안한 '댓가'가 무엇인지 드러날 경우, 특히 진보신당의 평당원들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진보신당은 값진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독이 든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내 입장은 분열되어 있다. 한 사람의 평당원으로서, 원칙에 따라 나뉜 정당들 사이의 단일화는 말도 안 된다고 본다. 반면 진보신당을 '응원'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해서라도 이겼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고 싶어진다.

민주당과의 단일화건 민주노동당과의 단일화건 정당의 존재 자체가 정치적 의견의 표현이라면,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가 그러하였듯이, 모든 종류의 단일화는 이념정치의 자리를 박탈하고 대신 정치적 잇속 계산을 위한 주판알을 깔아놓게 된다. '상식'과 '희망'을 울부짖으며 시작한 노무현 시대는 숱한 방사능 낙진을 남겨놓았는데, '단일화' 또한 그 시대의 삐뚤어진 유산에 속한다. 정몽준으로 단일화 되었으면 어쩔려고 그랬나? 우리의 승부사 노무현은 그에 대해 말이 없다. 이겼으니까 됐다는 거다.

직업적 정치인들은 어느 정도 승부사 감각을 보여줄 필요가 있고, 가끔 미친 짓도 해야 하며, 술수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문제는 노무현 시대 이후 판돈이 너무 커져버렸다는 것이다. '후보 단일화'는, 그것도 이념이 판이하거나 화해하기에는 너무도 서로 주고받은 것이 많은 집단 사이에서의 단일화는, 백 년에 한 번 꺼낼까 말까 하는 그런 카드로 남아있었어야 한다. 하지만 진보신당은 이미 두 번의 단일화 논의를 거쳤고, 한 번은 실패했으며 다른 한 번은 성공했다.

지금 내 머리속에서는 두 개의 '원칙'이 충돌하고 있다. 진짜 '원칙'대로라면 단일화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실정치를 고려해서, 정말 불가피할 경우 할 수 있긴 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굳이 말해보자면 이런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또 원칙적으로는 전쟁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진보신당이 두 번째의 원칙에 너무 자주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 이상의 단일화 논의는 없어야 한다.


4.

나 또한 한 사람의 진보신당 지지자이며, 당원이다. 선거 승리는 기쁜 일이다. 이미 한 번 당선되었다가 의석을 박탈당한 조승수가 울산에서 부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은 큰 경사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조승수가 다시 국회의원 뱃지를 얻어낸 날은, 용산에서 사람들이 불에 타 죽은지 100일이 된 날이기도 하다. 그 5명의 시신은 지금도 땅에 묻히지 못한 채 냉동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이 죽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단일화라는 도박을 통해 진보신당이, 비록 승리했을지언정, 많은 것을 잃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이 진보신당에 대해 품게될 더 큰 반감 또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게다가 이른바 '범 개혁세력'의 대동단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퍼질 가능성이 있다.

용산을 잊지 않는 것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용산의 죽음은 이른바 '개혁 세력'이 집권하고 있을 때부터 이미 싹이 뿌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어청수는 노무현이 키웠다. 서울 시내 부동산 가격이 들썩거리게 된 것 또한 이미 지난 정권부터 시작된 일이다. 원칙을 어기며 의석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용산의 죽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4월 30일, 오늘로 용산 참사 이후 101일에 접어들었다.

2009-04-29

The defining moment - 결정적 순간

The defining moment

결정적 순간



One addendum to today's column: the truth, which I think everyone in the political/media establishments knows in their hearts, is that the nine months or so between the summer of 2002 and the beginning of the Iraq insurgency were a great national moral test -- a test that most people in influential positions failed.

오늘자 칼럼에 한 마디 덧붙임. 내가 생각하기에, 정치/미디어 분야에 속한 모든 이들은 그 아홉 달, 말하자면 2002년 여름부터 이라크 침공의 시작까지의 기간이 국가적 도덕성 시험이었다는 것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알고 있다고 본다. 영향력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한 그 시험.

The bush ministrations was obviously -- yes, obviously -- telling tall tales in order to promote the war it wanted: the constant insinuations of an Iraq-9/11 link, the hyping of discredited claims about a nuclear program, etc.. And the question was, should you stand up against that? Not many did -- and those who did were treated as if they were crazy.

부시 행정부는 분명히 -- 그렇다, 분명히 -- 그들이 원하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긴 이야기를 읊어댔다. 이라크와 9/11 사이의 연관성을 슬금슬금 지속적으로 흘리기, 핵 프로그램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주장에 목청 드높이기, 등등. 여기서 질문은, 그것에 반대했어야만 했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반대자들은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다.

For me and many others that was a radicalizing experience; I'll never trust "sensible" opinion again. But for those who stayed "sensible" through the test, it's a moment they'd like to see forgotten. That, I believe, is the real reason so many want to let torture and everything else go down the memory hole.

나와 많은 다른 이들에게 그 경험은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나는 "이성적인" 주장을 결코 다시는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험을 거치는 동안 "이성적"으로 남아있었던 사람들은, 그 순간이 잊혀진 것처럼 보이기를 바랄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고문과 그 밖의 것을 기억의 저편으로 내던지고 싶어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let's hope that doesn't happen.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기대해보자.


출처: 폴 크루그먼 블로그. 2009년 4월 24일, "The defining moment".
칼럼을 읽고, 블로그 게시물을 보고, 문장을 텍스트 에디터에 베낀 후, 한국어로 옮겨 이 블로그에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