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 김규항 지음/돌베개 |
오래간만에 여유가 생겨서 교보문고에 들렀다. 김규항의 신작 『예수전』이 매대에 놓여 있었다. 디자인과 만듬새가 좋아서 들춰보았는데, 저자가 전제로 삼고 있는 내용에 대해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규항은 마르코의 복음서(마가복음)가 가장 오래 전에 작성되었으며, 종교적인 가필이 없기 때문에 예수의 생애를 살펴보는데 가장 좋은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4복음서중 마가복음이 가장 이른 시점에 나왔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마가복음이 '덜 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설교하는 대신 전도하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열혈남아인데, 그것은 마가복음을 편찬한 집단이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경 연구자들은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의 출처를 대략 다음과 같이 짐작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예루살렘의 기독교 집단에서 편찬되었으며,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이방민족을 위한 전도를 염두에 두었던 분파의 것이고, 누가복음은 좀 더 후기의 로마 기독교인들이 집성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에 따라 각 복음서의 개별적 성격이 형성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마태복음은 말도 안 되게 예수의 탄생설화를 비비 꽈서 '다윗의 14대손'으로 맞춰놓는다. 예루살렘에서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이다. 반면 누가복음은 로마, 혹은 로마에서 가까운 어딘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로마인들과 이방인(즉 할례받지 않은 비유대인)들에게 온정적이다. '덜 종교적'인 마가복음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 복음서 안에서 예수는 그 자신이 한 사람의 사도처럼 열성적으로 뛰어다닌다.
중요한 건 이러한 모습이 '덜 종교적'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보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가 덜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러한 개념적 장치를 동원하여 엄연히 자신이 종교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예수("내가 율법을 폐하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를 종교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굳이 비교하자면, 정치인들이 탈정치적인 제스추어를 취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이 시대의 모습과, 종교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긴 한 사람을 탈종교적인 누군가로 만들려 하는 것 사이에, 모종의 유사성이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탈정치의 시대가 정치적 타락을 낳았듯, 이러한 탈종교적 해석이 정치적 선보다는 종교적 악을 낳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우려한다.
나 또한 그 책을 꼼꼼하게 읽어본 것은 아니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첫째, '인간 예수'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인간 예수'는 자신이 불러올 파장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가장 급진적인 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 마가복음에 대한 김규항의 취향은 존중해줄 수 있지만, 오직 그것만이 '올바른' 예수를 담고 있으며, 나머지는 종교에 의해 오염된 것인 양 말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김규항의 논법대로 작성 시기가 가장 앞서기 때문에 마가복음에 다른 복음서를 압도하는 권위를 부여한다면, 마가복음보다 앞서 저술·편찬되었을 뿐 아니라 저자가 누구인지도 확실히 밝혀진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 그보다 더 높은 권위를 부여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김규항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마가복음의 기술이 마태, 누가의 내용이 첨가된 것이라고 말하며 그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가복음보다 앞서 쓰여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고린도전서) 15장 1절에서 8절까지의 내용은, 이후 복음서에 등장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술과 일치하며, 더구나 저자인 바오로를 포함한 오백 명이 넘는 증인을 열거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마가복음의 뒷부분이 가필된 것일 가능성이야 적지 않겠지만, 그것을 '불순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예수와 함께 살고 밥을 먹고 마셨던 사람들이 겪었던 일이 전승으로 남아 있었고, 그게 바로 '종교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들이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분명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