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10

미디어로서의 상품

"라스킨은 컴퓨터가 대중에게 파고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파했는데, 그의 견해는 매우 독특했다.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은 제품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제품이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사람들이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요지의 말을 자주 했다. 불행한 일일지는 몰라도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는 길은 돈을 버는 방법 이외에는 없는 셈이다.

라스킨은 단적인 예로 매킨토시를 예로 들었다. 매킨토시 이전에 자신이 아무리 비트맵 스크린이 좋다고 이야기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제록스에서 아무리 많은 기사와 글들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매킨토시가 의외로 많이 팔려나가자 사람들은 써보거나 기계를 구경한 다음 비트맵 스크린과 그래픽의 아이디어를 이해했고, 그래픽과 텍스트가 분리될 필요가 없으며 문자는 그래픽의 다른 예라는 사실과 함께 별도의 하드웨어를 쓰지 않고도 폰트를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일 뿐만 아니라 포츈이나 월스트리트 저널에 오르내리지 않는다면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라면 진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믿으려 할 것이라는 말을 라스킨은 자주 하고 다녔다."
MS-애플 「GUI 경쟁의 역사」에서 인용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으로서의 상품. '맑스도 자본론이 대형 서점에서 팔리기를 원했을 것이다'라는 탐 모렐로의 말을 연상시킨다. 이런 종류의 타당함은 여느 회의주의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파괴적이다. 더욱 끔찍한 것은, 부러 좋은 상품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결과 당대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경지를 이룩한 그 무엇은, 언젠가 좋은 골동품이 되어 훨씬 비싼 가격에 유통된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마저도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2007-07-03

Bach violin sonata no.1 in G minor Fuga Allegro



셰링 연주.

쫀쫀하게 긴장하고 있는 선율의 푸가.

2007-06-30

블루

키리코 나나난의 만화는, '괜히 봤다'라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오게 할만큼 강한 정서적 호소력을 지닌다. 과다한 노출로 인해 번져버린 사진같은 필체는, 원래 예쁜 그림을 그려놓고는 그저 평범할 뿐이라고 우기는, 그래서 결국 위화감을 조성하는 여성만화의 관습적 문법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타다 유미의 작품들이 아무리 '쎄도',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패션 모델 말고는 그 어떤 직업에도 적합하지 않은 몸매를 지니고 있는 탓에 몰입을 해치는 것과 정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호박과 마요네즈'와 '블루'를 보면, 이 작가의 세계에 특별하고 거대한 사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평범한 이들이 연애하고 살아가는 이야기일 뿐인데, 다만 그 속에서 움직이는 감정의 묘사가, 마치 물 위에 여러 마리의 종이학을 띄워두고 서로 부딛치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위태롭고 안타까울 뿐. 정말 괜히 봤다. 원고 쓸 게 많은데.

2007-06-26

여전히 아름다운지



정황상 멀쩡히 잘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전 여자친구에게 "변한 건 없니, 날 웃게했던 예전 그 말투도 여전히 그대로니. 난 달라졌어. 예전만큼 웃지 않고 좀 야위었어, 널 만날 때보다"라고 징징거리는, 루저 마인드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토이의 이 곡은, 그러나 '식스 센스' 뺨칠만한 대 반전을 품고 있는 가요계의 숨겨진 문제작이기도 하다. 곡의 말미에 다다르면 화자는, "그는 어떠니, 우리 함께한 날들 잊을만큼 너에게 잘해주니. 행복해야 해, 나의 모자람 채워줄 좋은 사람 만났으니까"라고 실토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놈은 솔로가 아닌데, 문제는 이 개자식이 분명 아까는 "하지만 말야, 이른 아침 혼자 눈을 뜰 때 내 곁에 네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때에 (우우우) 나도 몰래 눈물이 흘러"라고 있는 청승 없는 청승 다 떨어놓은 그 루저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헤어진 이후 만난 애인은 "나의 모자람 채워줄"만큼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른 아침 혼자 눈을 뜰 때"에는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화자는 전 여자친구를 두고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을 것만 같은 가사를 읊고 있다. 되게 하고 싶은가보다.

2007-06-22

계통 없이

어딘가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김훈은 자신이 다양한 책들을 '계통 없이' 읽고 있다며, 항해술과 선박에 관한 것들을 그 예로 들었다. 읽고 있노라면 선원들의 땀과 근육이 보이는 것 같고, 그래서 그 어떤 소설보다도 더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하다는 식의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뜨끈하고 비릿한 것들에 탐닉하는 그의 취향을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저기서 그가 사용한 '계통 없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한 마디 덧붙일 필요가 있다. 그 어구는 "그러한 나의 반역성을 조소하는 듯이 스무살도 넘을까말까한 노는 계집애와 머리가 고슴도치처럼 부수수하게 일어난 쓰메에리의 학생복을 입은 청년이 들어와서 커피니 오트밀이니 사과니 어수선하게 벌여놓고 계통없이 처먹고 있다"(시골 선물)는 김수영의 싯귀를 연상시킨다. 바로 저 느낌이다. 김훈을 진정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