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29

Four Poems

Four Poems



I think it will be winter when he comes.
From the unbearable whiteness of the road
a dot will emerge, so black that eyes will blur,
and it will be approaching for a long, long time,
making his absence commensurate with his coming,
and for a long, long time it will remain a dot.
A speck of dust? A burning in the eye? And snow,
there will be nothing else but snow,
and for a long, long while there will be nothing,
and he will pull away the snowy curtain,
he will acquire size and three dimensions,
he will keep coming closer, closer . . .
This is the limit, he cannot get closer. But he keeps approaching,
now too vast to measure . . .



——



If there is something to desire,
there will be something to regret.
If there is something to regret,
there will be something to recall.
If there is something to recall,
there was nothing to regret.
If there was nothing to regret,
there was nothing to desire.



——



Let us touch each other
while we still have hands,
palms, forearms, elbows . . .
Let us love each other for misery,
torture each other, torment,
disfigure, maim,
to remember better,
to part with less pain.



——



We are rich: we have nothing to lose.
We are old: we have nowhere to rush.
We shall fluff the pillows of the past,
poke the embers of the days to come,
talk about what means the most,
as the indolent daylight fades.
We shall lay to rest our undying dead:
I shall bury you, you will bury me.




by Vera Pavlova
(Translated, from the Russian, by Steven Seymour.)

2007-08-26

'타인의 취향'이라는 칼럼을 니체가 읽는다면

타인의 취향

"말은 똥을 치워주는 사람이 아니라 채찍으로 때리는 사람을 주인으로 여긴다." 김규항과 진중권의 최근 행적을 니체가 봤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인터넷 세상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확인시켜주고, 다섯 명 대표선수 불러내서 밟아준 진중권은 대중들, 적어도 디씨인사이드 디워갤러로부터 일종의 존경심, 흑인 래퍼처럼 말하자면 리스펙트Respect를 얻었다. 반면 김규항이 뒤늦게 싸지른 이 대중영합적인 글은, 심지어는 이 글을 읽는 대중들에게도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 이미 '디 워'열풍이 끝난 후에야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이따위 짤막한 칼럼 따위가 뭐에 쓸모가 있단 말인가. '디 워'와 관련하여 진중권이 김규항의 이름을 단 한 번도 호명한 적이 없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이건 순전히 김규항의 치졸한 경쟁심에서 비롯한 지면 및 원고료 낭비일 뿐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온전히 김규항에게 있다. 본인의 말마따나 "동네 양아치들이 싸우다 파출소에 잡혀가도 ‘선빵'을 가리는법"이니 말이다. 간만에 만나는, 김규항다운 글이다.

jar, v.1

I. 1. intr. To make or emit a harsh grating sound; to make a musical discord; to sound harshly or in discord with other sounds. Also fig.

. . . 1816 BYRON Ch. Har. III. iv, Perchance my heart and harp have lost a string, And both may jar.

from the OED.

2007-08-25

2007-08-24

개와 늑대의 시간 12화 단상

* 스포일러 있음


날이 갈수록 마오와 자신을 동일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으로 빨려들어가던 이수현은, 정작 그 마오와 완전히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순간 케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튕겨져 나오게 된다. 그의 정체성의 물밑 부분들은 마오의 총구를 손으로 가로막던 그 순간의 트라우마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이수현이 어미결정과도 같은 과정을 통해 거의 완벽한 청방의 일원으로 거듭났다고 해도, 그가 마오라는 새로운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총구를 가로막은 서지우에게 이수현이 정서적 친화성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도 적어둘만한 일이다. 희생자인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아니라, 그런 종류의 감정은 양아버지가 살해되는 순간 이미 이수현의 척수를 훑고 지나간 바 있고, 다만 어머니를 해치려는 총구 앞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자신을, 거울에 비친 듯 마주하게 됨으로 인해 그는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아주 명확하게 확인한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기억을 잃기 전 마오를 향하고 있던 이수현의 끝없는 증오심이 단지 복수를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물론 시간 순서대로 사건과 감정을 훑으면 방금 내가 쓴 문장은 진실이 아니다. 하지만 이수현의 입장에서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 모든 일들을 재구성한다면, '닿을 수 없는 제2의 정체성'이라는 식으로 축약될 수 있는, 단순한 복수심만으로 해소될 수 없는 심리적 문제가 또아리를 맺는다. 그런 이유로, 기억을 찾은 수현은 쉽게 마오를 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갑수본좌 꽃무늬 넥타이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