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쓰여진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문구는 역설적으로, 자신들을 구원해줄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시사한다. 물론 예수는 그러한 역할을 거절한 채, 자신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한다. 베드로는 첫 닭이 울기 전에 세번이나 예수를 부인한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되살아난 스승이 자신들의 앞에 서도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 사도행전은 그렇게 되살아난 스승이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버린 후, 살아남은 자들이 한 줌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분투해야만 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 문학이다.
예수가 제시한 메시아는 세속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주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것은 새끼고양이의 뒷목을 잡아서 안전한 곳에 내려놓는 주인의 손길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의 모범이었고 견본이었으며 힘겹게 걸어야 할 좁은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자유로운 선택의 두려움, 불합리한 세계의 부조리 속에 내팽겨쳐져 있다는 사실은 성자의 구원 사업 이전에도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다만 우리는 이제 하나의 대답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의 부재를 인정하지 못한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투사에게 자신의 정치적 바램을 투사하던 이들 중 일부는,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끝없이 이곳저곳 들이받고 있을 뿐인, 한낱 '투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절대악'을 상정하고 그것의 위의를 한없이 높임으로써, 세계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고 그것을 정복하려 들기는 커녕, 자신들이 '상식'을 지키고 있는 성채로서 받아들여지기만을 갈구한다. 그들 중 일부가 문국현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메시아를 발견하여 그에게 '올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명박이 집권한 후 도래하게 될 암흑시대에 대한 공포를 조성하고, 온 국가가 토건 열풍에 휩싸임으로써 집값이 지금보다 더 높이 치솟아오를 것이라 경고하며, 따라서 그 자를 막을 수 있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절실하다는 것이 문국현 지지자들의 주된 논변이다. 요컨대 세상은 이미 말세로 치달았고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공세가 눈앞으로 다가와 있다. 여기까지 동의하고 나면 나머지 부분은 의외로 쉽다. 유한킴벌리가 얼마나 높은 생산성을 보유하고 있는지, IMF 때에도 단 한 명의 사원도 해고하지 않고 위기를 넘긴 유일한 기업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만 일하고 재교육을 받으며 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 보라는 요구가 끝없이 이어진다.
정치적 메시아가 제시하는 비전은 결국 유한할 수밖에 없다. 정통신학은 악을 존재의 결여로 정의한다. 악은 그 자체로서 실체가 아니며 다만 선이 충실히 달성되고 있지 못한 하나의 상태일 뿐이다. 노무현 당시에도 그랬고 문국현을 후보로 지지하고 있는 지금도 그러하다. 정치적 메시아를 희구하는 이들에게는 대한민국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밑그림이, 적그리스도가 불러올 지옥에 대한 반박으로서만 존재한다. 반면 그 후보가 가지고 있는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한 '상식적인 시선'은 말 그대로 상식선에 머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렇기에 노무현 지지자들은 노무현 개인에 대한 인성론에 그리도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그 현상은 문국현 지지자들에게서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기에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안타깝게도 후보 경선에서 탈락한 심상정이 그러하였던 것과 같이,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포함하고 있는 전반적인 정책을 공약의 형태로 이미 만들어놓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국현은 4%의 잠재성장률이라는 개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이명박의 747 플랜에 맞서기 위한 레토릭을 갈고 닦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주러 온 사람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였던 것이 아닐까.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에 하늘의 왕국을 지금 당장 건설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문구가 포함된, 아주 짤막한 기도문을 남겨놓았을 뿐이다.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이들의 시선을 오직 하늘로 향하게 하고, 그들에게 일찍 온 자건 늦게 온 자건 문을 두드리는 자는 모두 같은 상급을 받으리라는 것을 약속함으로써, 하늘을 상상하며 땅을 뒤엎을 수 있는 작은 힘을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메시아들은 언제나 하늘의 왕국이 아닌 지하의 지옥을 먼저 논하고, 그곳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믿고 따르라며 깃발을 흔든다. 우리는 그런 목소리에 이미 속았다. 두 번은 당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적 메시아를 희구하는 이들은 하나의 덩어리를 형성하여 한국 사회의 정치 구도가 이른바 '메시아적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영역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황우석 사태, 심형래의 '디 워' 소동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한국인들은 언제나 대한민국이 피죽도 못 얻어먹는 거지 나라가 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엄청난 외화를 벌어다 줌으로써 우리를 가난으로부터 구원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것이 영웅주의가 아니겠느냐고 하지만, 거기에는 실패한 영웅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가 정치 지도자가 아니며 로마인들을 단박에 쫓아내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유대인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듯이, 황우석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던 그 수많은 이들 또한 매우 기민한 동작으로 손에 돌을 집어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광신도'라 불리면서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일부 '황빠'들이 대견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우리는 희생양을 만드는 일에 너무도 익숙하다. 한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메시아적 정치는, 정치적 메시아를 지향하는 수많은 후보자들을 낳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적 메시아들의 구원 사업은 실패를 내재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모든 이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는 희생양이 되어버린다. 심지어는 현직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있는 이조차 그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는 그러한 희생양의 연쇄 구조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기를 거부하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열열히 사랑하고 지지함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한 후, 자신들이 바라던 그 왕이 아니라는 이유로 돌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 이중적인 심리구조가 극복되거나, 그러한 이들이 대세를 형성할 수 없게끔 하는 건전한 정치세력이 안정적으로 형성되지 않는 한, 정치적 메시아와 메시아적 정치의 연쇄고리는 쉽사리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2007-10-12
2007-10-09
소네트 18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Thou art more lovely and more temperate:
Rough winds do shake the darling of buds of May,
And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Sometime too hot the eye of heaven shines
And often is his golden complexion dimmed;
And every fair from fair sometimes declines,
By chance or nature's changing course untrimmed;
But thy eternal summer shall not fade,
Nor lose possession of that fair thou ow'st;
Nor shall death brag thou wander'st in his shade,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st:
So long as men can breathe, or eyes can see,
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to life to thee.
내 그대를 한여름날에 비겨볼까?
그대는 더 아름답고 더 화창하여라.
거친 바람이 5월의 고운 꽃봉오리를 흔들고,
여름의 기한은 너무나 짧아라.
때로 태양은 너무 뜨겁게 쬐고,
그의 금빛 얼굴은 흐려지기도 하여라.
어떤 아름다운 것도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이 기울어지고
우연이나 자연의 변화로 고운 치장 뺏기도다.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
그대가 지닌 미는 잃어지지 않으리라.
죽음도 뽐내진 못하리, 그대가 자기 그늘 속에 방황한다고
불멸의 시편 속에서 그대 시간에 동화되나니.
인간이 숨을 쉬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한
이 시는 살고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문국현 대통령?
고등학교 교실에 이런 학생이 있다고 치자. 수능을 50일 앞둔 시점에, 우선 20일 동안 시중에 출시된 모든 수학 문제집을 풀어서 기본기를 다진 다음, 20일은 오전에 영어 오후에 국어를 공부하며 언어 감각을 매만지고, 나머지 열흘간 암기과목에 총력을 기울인다면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런 학생이 있다고 쳐보자. 여기서 그가 펜을 손에 잡아본지 고작 석달 쯤 된, 초등학교 정도의 학력을 지니고 있는 그런 수재라고 한다면 이 비유는 아마도 더욱 정확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학생이 뭔가 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이들은 그가 '고등학교에서 비록 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책상에서 열심히 졸았다'라는 식으로 그의 학습 부진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덧붙인다면, 이제 문국현 지지자들이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믿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가 완성된다.
설령 내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어떤 이유에 의하여 문국현이 대통령이 됐다고 쳐보자. 다짜고짜 출마하여 당을 만들면서 선거에 나온 인물이, 성공적인 기업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사회가 과연 정상적인 곳일까? 문국현의 출마와 그를 둘러싼 바람몰이는 그 자체가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반영하고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는 것과 거의 같거나 더욱 나쁜 현실이 한국의 기저에 깔려 있음을 방증하는 사건일 수밖에 없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뽑아놓고도,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학습 효과가 국민들 사이에서 전혀 없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국현 지지자들은 5년 전 노무현이 단물을 다 빨아먹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다시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유한킴벌리 사장으로서 그가 보여준 치적이 그나마 작은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적지 않은 수의 상식적인 사람들은 일종의 정치적, 정신적 자위행위의 현장을 목격한다. 공교롭게도 유한킴벌리는 외로운 남성들의 생활 필수품, 두루마리 화장지를 만드는 회사이며, 그들의 제품은 전국 방방곳곳에 깔려 있다. 이게 다 문국현이 워낙 경영을 잘 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덧말) 상당한 수의 문국현 지지자들은 구 열린우리당 경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행을 문국현 지지의 이유로 삼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대항마'가 없다는 것. 하지만 이명박이라는 브라퀴가 여의주를 물기 전에 문국현이라는 선한 이무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는 대선 시나리오는 아무리 거듭 살펴봐도 '디 워'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2000년 전부터 벌써 구리기로 정평이 난 희곡 작법이었다는 점을 참고 삼아 적어둔다.
설령 내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어떤 이유에 의하여 문국현이 대통령이 됐다고 쳐보자. 다짜고짜 출마하여 당을 만들면서 선거에 나온 인물이, 성공적인 기업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사회가 과연 정상적인 곳일까? 문국현의 출마와 그를 둘러싼 바람몰이는 그 자체가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반영하고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는 것과 거의 같거나 더욱 나쁜 현실이 한국의 기저에 깔려 있음을 방증하는 사건일 수밖에 없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뽑아놓고도,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학습 효과가 국민들 사이에서 전혀 없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국현 지지자들은 5년 전 노무현이 단물을 다 빨아먹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다시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유한킴벌리 사장으로서 그가 보여준 치적이 그나마 작은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적지 않은 수의 상식적인 사람들은 일종의 정치적, 정신적 자위행위의 현장을 목격한다. 공교롭게도 유한킴벌리는 외로운 남성들의 생활 필수품, 두루마리 화장지를 만드는 회사이며, 그들의 제품은 전국 방방곳곳에 깔려 있다. 이게 다 문국현이 워낙 경영을 잘 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덧말) 상당한 수의 문국현 지지자들은 구 열린우리당 경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행을 문국현 지지의 이유로 삼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대항마'가 없다는 것. 하지만 이명박이라는 브라퀴가 여의주를 물기 전에 문국현이라는 선한 이무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는 대선 시나리오는 아무리 거듭 살펴봐도 '디 워'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2000년 전부터 벌써 구리기로 정평이 난 희곡 작법이었다는 점을 참고 삼아 적어둔다.
2007-10-05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 김상환의 '겨울밤' 분석에 관하여
한윤형으로부터 건내받은 김상환 교수의 논문, "An Essay on Culture: Through the Darkness of Winter Nights"를 읽었다. '부엉 부엉새가 우는 밤/ 부엉 춥다고서 우는데/ 우리들은 할머니 곁에/ 모두 옹기종기 앉아서/ 옛날 이야기를 듣지요'라는 가사의 동시 '겨울밤'을 화두로 삼아, 그는 추위/따스함, 동물의 울음/인간의 대화, 고독/사회, 아동/성인(원문의 순서를 바꿈)의 이분법을 찾아내고, 각각의 항목을 통해 그 시의 안팎을 넘나들며 문화의 의미를 설명한다. 논의의 초점은 결국 '옛날 이야기'로 향하고, 김소월의 '부모'를 통해 '동양 전통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도약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도약은 포스트모던 철학이 탈근대 시대의 겨울밤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되었다는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이 모든 과정은 미려한 영어로 서술되어 있고, 두 편의 시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부드럽게 이끌어내는 솜씨는 여느 문학평론가가 따라오기 어려운 흡입력을 보여준다. 즉 이 논문은 놀라운 감수성의 표현이자 동시에 지적인 작업의 결과물로서도 탁월하다. 하지만 추출된 이분법에 너무 의지한 나머지 '할머니 곁에'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인간 가족의 (엥겔스적인?) 기원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요컨대 이 글에서는, 구전사회의 '이야기'와 현대의 '담론'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간극이 다소 간과되고 있다. 고대의 이야기가 재서술이 아닌 그저 전승을 위한 것이었고, 그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분질서 및 소유관계를 포함한 이른바 하부구조를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구술문화의 '이야기'는 현실의 변화를 추동하지 않고, 심지어는 반영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러한 전통이 종교적 열망과 맞물려 가장 성공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유대교 사회의 경우, 그들의 랍비들이 암송하고 있던 구약이 기원전에 작성되어 1947년에 발견된 사해 쿰란문서와 거의 일치하는 기적을 창출해내기도 했다. 구술전통의 '이야기'가 근대의 '담론'과 이리도 다르다면, 탈근대의 서사가 계승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디지털 언어의 세계가 모든 이분법적 체계, 즉 정신과 육체, 인간과 동물, 음성과 형상, 현실과 가상 등의 그 모든 것들을 유효하지 않게 한다는 마지막 문단의 현대 문명 진단에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모든 맥락을 서술할 수는 없으나, 철학적으로 볼 때 컴퓨터의 발전은 이상적인 인공언어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애제자 앨런 튜링의 영향 하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다. 개별적인 프로그래밍 언어의 차이를 기술하는 용어는 '효율성', '작성에 용이한 스타일'등이지 '문화적 맥락' 따위가 아닌 것이다. 컴퓨터 안에서 모든 언어는 결국 0과 1로 치환된다. 그곳에는 바벨의 언어가 이미 존재한다-우리가 손으로 들고 다닐 수도 있는 그 네모난 상자 안에서는.
모든 정보가 전기 신호로 분해되어 순식간에 복사되고,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불가능하거나 의미를 상실하는 현상에 대한 고찰은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컴퓨터는 컴퓨터일 뿐이고, 그것은 현대 문명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지 그 자체를 표상하는 어떤 상징이 될 수는 없다. 그러한 시각은 일종의 우상화를 낳을 뿐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의 일부일 뿐이며, 실로 인터넷 공간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천년간 싸워온 인간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 물론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그 도구는 인간의 삶을 규정한다. 하지만 철학이 고민해온 문제가 디지털 시대의 개막과 함께 전부 뒤흔들리고 있다는 말은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 거듭 반복하지만, 컴퓨터는 오직 이분법적 체계로 완벽하게 환원될 수 있는 언어만을 이해한다. 디지털 체계는 현대의 문명을 지탱하는 한 축일 뿐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과제는, 고대로부터 이어온 메타 학문의 위상을 되찾고, 미시화되어가는 학문 세계를 종합할 수 있는 그 어떤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이 아닐까? 방금 나는 '한 발자국을 내딛다'라는 구체적이지 않은 술어의 사용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또한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성찰을 하는 이만이 타인의 정신적인 건강을 지켜줄 수 있듯, 자신의 본질 그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온 학문만이 후기산업사회의 목적 없는 표류로부터 인류의 방주를 아라랏산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겨울밤
부엉 부엉새가 우는 밤
부엉 춥다고서 우는데
우리들은 할머니 곁에
모두 옹기종기 앉아서
옛날 이야기를 듣지요.
부모
- 김소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날에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랴.
이 모든 과정은 미려한 영어로 서술되어 있고, 두 편의 시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부드럽게 이끌어내는 솜씨는 여느 문학평론가가 따라오기 어려운 흡입력을 보여준다. 즉 이 논문은 놀라운 감수성의 표현이자 동시에 지적인 작업의 결과물로서도 탁월하다. 하지만 추출된 이분법에 너무 의지한 나머지 '할머니 곁에'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인간 가족의 (엥겔스적인?) 기원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요컨대 이 글에서는, 구전사회의 '이야기'와 현대의 '담론'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간극이 다소 간과되고 있다. 고대의 이야기가 재서술이 아닌 그저 전승을 위한 것이었고, 그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분질서 및 소유관계를 포함한 이른바 하부구조를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구술문화의 '이야기'는 현실의 변화를 추동하지 않고, 심지어는 반영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러한 전통이 종교적 열망과 맞물려 가장 성공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유대교 사회의 경우, 그들의 랍비들이 암송하고 있던 구약이 기원전에 작성되어 1947년에 발견된 사해 쿰란문서와 거의 일치하는 기적을 창출해내기도 했다. 구술전통의 '이야기'가 근대의 '담론'과 이리도 다르다면, 탈근대의 서사가 계승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디지털 언어의 세계가 모든 이분법적 체계, 즉 정신과 육체, 인간과 동물, 음성과 형상, 현실과 가상 등의 그 모든 것들을 유효하지 않게 한다는 마지막 문단의 현대 문명 진단에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모든 맥락을 서술할 수는 없으나, 철학적으로 볼 때 컴퓨터의 발전은 이상적인 인공언어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애제자 앨런 튜링의 영향 하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다. 개별적인 프로그래밍 언어의 차이를 기술하는 용어는 '효율성', '작성에 용이한 스타일'등이지 '문화적 맥락' 따위가 아닌 것이다. 컴퓨터 안에서 모든 언어는 결국 0과 1로 치환된다. 그곳에는 바벨의 언어가 이미 존재한다-우리가 손으로 들고 다닐 수도 있는 그 네모난 상자 안에서는.
모든 정보가 전기 신호로 분해되어 순식간에 복사되고,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불가능하거나 의미를 상실하는 현상에 대한 고찰은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컴퓨터는 컴퓨터일 뿐이고, 그것은 현대 문명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지 그 자체를 표상하는 어떤 상징이 될 수는 없다. 그러한 시각은 일종의 우상화를 낳을 뿐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의 일부일 뿐이며, 실로 인터넷 공간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천년간 싸워온 인간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 물론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그 도구는 인간의 삶을 규정한다. 하지만 철학이 고민해온 문제가 디지털 시대의 개막과 함께 전부 뒤흔들리고 있다는 말은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 거듭 반복하지만, 컴퓨터는 오직 이분법적 체계로 완벽하게 환원될 수 있는 언어만을 이해한다. 디지털 체계는 현대의 문명을 지탱하는 한 축일 뿐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과제는, 고대로부터 이어온 메타 학문의 위상을 되찾고, 미시화되어가는 학문 세계를 종합할 수 있는 그 어떤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이 아닐까? 방금 나는 '한 발자국을 내딛다'라는 구체적이지 않은 술어의 사용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또한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성찰을 하는 이만이 타인의 정신적인 건강을 지켜줄 수 있듯, 자신의 본질 그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온 학문만이 후기산업사회의 목적 없는 표류로부터 인류의 방주를 아라랏산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겨울밤
부엉 부엉새가 우는 밤
부엉 춥다고서 우는데
우리들은 할머니 곁에
모두 옹기종기 앉아서
옛날 이야기를 듣지요.
부모
- 김소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날에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랴.
2007-09-26
노동가치론의 가장 약한 고리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통해 어떤 철학적 영감을 얻는 일이 옳거나 그르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정당한 철학적 논변이라면 마땅히 합당한 이론의 지지를 받고 있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혹은 동양철학의 4원소론은 현대 물리학의 원자론보다 어떤 면에서 더욱 아름답고 시적인 함의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으며 철학적으로 잘 다듬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기반하고 있는 물리학적 지식이 옳지 않기 때문에 합당한 철학적 논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에 대한 재해석에 기반하여 논지를 펼치고 있는 현대 철학자들은 일종의 양자택일을 해야만 한다. 그 논변이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 자신의 철학이 현실과는 큰 연관을 맺지 않는 지적 유희임을 실토하거나, 이미 명백하게 틀린 것으로 판명된 노동가치론을 끝까지 옳다고 우기거나.
장차 인생을 어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며 지난 노트를 계속 뒤적이고 있는데, 이런 부분이 나와서 그것을 다시 정리하여 블로그에 공개한다. 당시에는 책의 서지사항을 정확히 밝혀놓는 법을 익히지도 않았는데, 추정컨대 모든 출처는 비봉출판사에서 나온 김수행 번역 [자본론 1上]일 것이다. 2003년 5월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해 6월부터 날짜와 시간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상품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가 자기의 상품가치에 가격이라는 형태, 곧 상상적인 금 형태를 부여하더라도 아직은 자신의 상품을 금으로 전환시킨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그가 몇백만원어치의 상품가치를 금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도 현실적인 금은 한 조각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화폐는 가치척도의 기능에 있어서는 단지 상상적인, 곧 관념적인 화폐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엉터리 화폐이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단지 상상적일 뿐인 화폐가 가치척도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지라도 가격은 전적으로 실제의 화폐재료에 달려있다."[p.120]
여기서 말하는 '실제의 화폐재료'란 다름아닌 금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던 당시 세계 경제는 금태환제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모든 상품의 가치는 그것에 투여된 노동에 비례하므로, "실제의 화폐재료"는 그 어떤 경우에도 마땅히 존재해야만 하며 그것은 그 화폐와 교환되는 상품의 가치와 동일하거나 어느 정도 상응하는 노동력을 포함하고 있어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말한다. "금이 가치척도로서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금 그 자체가 노동생산물이며 따라서 가치가 잠재적으로 가변적이기 때문이다."[페이지 미상]
불환화폐, 즉 금이나 은으로 교환해주지 않고 전적으로 정부의 신용에 의지하여 발행되고 있는 현재의 화폐 체계 하에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급격하게 발 디딜 곳을 잃어버린다. 상품들 사이의 가치척도로 기능하는 화폐는,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 자체가 노동생산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화폐를 찍어내는 기능을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종이에 그림을 찍어내는 과정과는 다르다. 만원짜리 지폐를 돈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조폐공사 직원들의 노동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지불보증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폐공사 직원들의 노동력만큼은 하루에 수십억원 어치의 가치를 지니게 되노라고 우겨야만 한다. 혹은 "만약 12원으로 표현되는 금광을 생산하는데 24노동시간, 즉 2노동일이 걸린다면, 이 면사에는 2노동일이 대상회되어있는 셈이 된다. [p.239]"는 구체적인 예시를 포기하거나.
노동가치론이 화폐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벌이는 이러한 이론적 곡예는, 철학적으로 볼 때, 물질과 관념을 일대일로 대응시켜야만 한다는 이분법적 집착의 산물이다.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노동이 투여되지 않은 채 가치를 지니고 있는 그 무언가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상품의 가격으로 지급되는 화폐를 볼 때마다 그 뒤에 감추어져 있는 금광 노동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읽어내야만 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신용카드빚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은 직감적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에 대한 '철학적 재해석'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유효한 '경제학자'는 아닐지라도 한 사람의 '저자'로서만큼은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을 뿐이다.
장차 인생을 어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며 지난 노트를 계속 뒤적이고 있는데, 이런 부분이 나와서 그것을 다시 정리하여 블로그에 공개한다. 당시에는 책의 서지사항을 정확히 밝혀놓는 법을 익히지도 않았는데, 추정컨대 모든 출처는 비봉출판사에서 나온 김수행 번역 [자본론 1上]일 것이다. 2003년 5월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해 6월부터 날짜와 시간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상품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가 자기의 상품가치에 가격이라는 형태, 곧 상상적인 금 형태를 부여하더라도 아직은 자신의 상품을 금으로 전환시킨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그가 몇백만원어치의 상품가치를 금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도 현실적인 금은 한 조각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화폐는 가치척도의 기능에 있어서는 단지 상상적인, 곧 관념적인 화폐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엉터리 화폐이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단지 상상적일 뿐인 화폐가 가치척도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지라도 가격은 전적으로 실제의 화폐재료에 달려있다."[p.120]
여기서 말하는 '실제의 화폐재료'란 다름아닌 금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던 당시 세계 경제는 금태환제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모든 상품의 가치는 그것에 투여된 노동에 비례하므로, "실제의 화폐재료"는 그 어떤 경우에도 마땅히 존재해야만 하며 그것은 그 화폐와 교환되는 상품의 가치와 동일하거나 어느 정도 상응하는 노동력을 포함하고 있어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말한다. "금이 가치척도로서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금 그 자체가 노동생산물이며 따라서 가치가 잠재적으로 가변적이기 때문이다."[페이지 미상]
불환화폐, 즉 금이나 은으로 교환해주지 않고 전적으로 정부의 신용에 의지하여 발행되고 있는 현재의 화폐 체계 하에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급격하게 발 디딜 곳을 잃어버린다. 상품들 사이의 가치척도로 기능하는 화폐는,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 자체가 노동생산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화폐를 찍어내는 기능을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종이에 그림을 찍어내는 과정과는 다르다. 만원짜리 지폐를 돈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조폐공사 직원들의 노동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지불보증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폐공사 직원들의 노동력만큼은 하루에 수십억원 어치의 가치를 지니게 되노라고 우겨야만 한다. 혹은 "만약 12원으로 표현되는 금광을 생산하는데 24노동시간, 즉 2노동일이 걸린다면, 이 면사에는 2노동일이 대상회되어있는 셈이 된다. [p.239]"는 구체적인 예시를 포기하거나.
노동가치론이 화폐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벌이는 이러한 이론적 곡예는, 철학적으로 볼 때, 물질과 관념을 일대일로 대응시켜야만 한다는 이분법적 집착의 산물이다.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노동이 투여되지 않은 채 가치를 지니고 있는 그 무언가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상품의 가격으로 지급되는 화폐를 볼 때마다 그 뒤에 감추어져 있는 금광 노동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읽어내야만 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신용카드빚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은 직감적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에 대한 '철학적 재해석'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유효한 '경제학자'는 아닐지라도 한 사람의 '저자'로서만큼은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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