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27

일관성의 함정

내일,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 금융통화위원회가 은행채 매입을 골자로 하는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기준금리 인하가 대출금리 인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금리 인하에 찬성한다. 예전에 우리모두에서 활동하던, 다음 아고라의 SDE 같은 경우 금리 인하는 M2의 통제 포기이므로, 결국 원화는 더욱 폭락하고 그에 따라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기준금리 인하와 은행에 대한 정부의 직접 자본 투여 등, 이미 전 세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대책의 손을 들어주는 이도 없지 않다. 은행에 유동성이 말라붙은 것을 위기의 본질로 파악하는 이들은, 이번 한국은행의 은행채 매입을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논하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지난번 포스트에서와는 달리, 나는 오늘밤에는 판단을 유보한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고 있는 '감세와 재정확대 동시 추진'은 누가 봐도 미친짓이다. 감세를 하면서 재정확대를 하겠다는 건 국채를 더 찍겠다는 말과 똑같다. 하지만 한국 국채를 대체 누가 산단 말인가? 안 팔리는 국채는 금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시중금리의 폭등에 기름을 끼얹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걷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양도세를 더 낮추면, 버블이 꺼질 기미가 보이는 지역에서 이탈하기 위한 매물이 더 나온다. 가격은 더 떨어진다. 게다가 그렇게 아파트가 팔릴 때마다 정부에 들어오는 '실탄'의 양도 줄어든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에 대해, 이제는 더 뭐라고 말을 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말만은 확실히 할 수 있다. '감세'만을 외치는 이명박의 경제팀은 다 제정신이 아니다.

미국 은행들이 부도 위험에 직면했을 때는 밤에 잠이 안 오거나 하지 않았다. 내게 파장이 미친다면 여기서 터지나 저기서 터지나 마찬가지겠지만, 적어도 그쪽에서는 최소한의 시스템이 작동하리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게 없다. 이명박이라는 비-정치인이 집권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정책적 유연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입각해볼 때, 시장 근본주의는 분명히 퇴조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만은 예외다. 나는 이게 정말이지 두렵다.

(모든 '근본주의'는 몇 가지의 테제만을 주워섬길 뿐 그것이 이념화하고 있는 대상 자체에 대한 충실한 추구를 결코 뜻하지 않는다. 시장 근본주의자는 그러므로 시장을 마비시킨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이슬람의 정신을 결국 배신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유동성의 함정'에, 정치적으로는 '일관성의 함정'에 빠져있다. 이명박은 자신이 '경제 꼭 살리겠습니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건설경기 진작시키고 주가지수 띄우고 원-달러 환율 낮추겠다고 약속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불구덩이로 밀어넣고 있다. 그 말대로 안 되는 것을 보고 일부 네티즌, 혹은 노빠들이 '노무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라고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이명박:노무현=불황:호황'같은 공식을 만들어서 유포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치가 걸려버린 '일관성의 함정'을 극복하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이명박이 지금이라도 종부세와 양도세율, 그리고 소득세 누진률을 파격적으로 높이고, 정부 지원을 받은 은행들에게 부실건설사 구조조정을 명령하고, 근로소득자에 대한 환급 외의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가능한 한 직접적으로 저소득층에게 경제적 지원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그동안의 모든 원한을 잊고, 또 이명박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엄청난 혐오감을 억누르며, 이명박의 그 종합대책을 지지하고 그것을 '대통령에 대한 지지'로 전환할 용의가 충분히 있다.

이명박 대 반 이명박이라는 구도를 놓고 본다면, 어차피 이명박 입장에서는 임기 5년이 확보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국회의원 선거도 없고, 또 지지율이 더 떨어질 리도 없으므로 자신의 '일관성'을 지키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다. '일관성의 함정'은 바로 이렇게 작동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정치가 정상화되기를 바란다면, 이명박에게 일관성의 철회를 요구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일관성을 어느 정도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명박<->반 이명박(결국 노무현 ㅋㅋㅋ)' 같은 구도를 유포하고 있는 노빠들이 갖는 또 하나의 '일관성의 함정'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다.

'이명박이나 노무현이나 그게 그거'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이명박은 용납이 안 된다'라는 소박한 정치의식을 고수하고 있거나, 결국 이명박에게 현재 추진하고 있는 경제 정책을 포기할만한 유인동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내가 어제, 즉 토요일 청계광장에 나갔던 것은 단지 이명박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이명박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기에 촛불집회에, 기회가 되는대로 계속 나간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쉬쉬하고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경제적 난국이다. 이런 상황에서마저 행정부가 올바른 판단을 하건 그른 판단을 하건 절대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이명박에게 그 어떤 유인동기도 제공하지 못한다(비록 나는 앞서 이명박을 '비-정치인'이라 칭했지만, 그것은 발생론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지금은 조금이나마 '정치인'이 되어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이게 무슨 '본격 이명박 사랑하자는 글'도 아니고, 노빠가 싫다고 명빠가 되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위기 속에서, 그것을 부채질하고 있는 '정치 마비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중들 또한 정치적 선택의 정상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 정치적 선택을 넘어 윤리적 당위로까지 보일 수 있지만, 오직 그 윤리적 당위만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거니와 진보정당도 정당으로서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 없다.

계급투표는 철저히 계산적이고, 반 정서적이다. 그러므로 '반 이명박 정서'에 기대어 계급투표를 이끌어내겠다는 발상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민들이 정치적 계산을 통해 투표한다는 신뢰가 없다면, 정치가 올바로 기능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명박을 싫어하는 거라면 나도 남들 부럽지 않지만, 이명박을 싫어하는 것만으로 내 정치성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부정성의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긍정'을 해낼 수 있는가이며, 그 어떤 정당과 정치인도 그것을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관성의 함정'에 빠진 한국 정치를 묶는 키워드는 결국 '이명박'과 '노무현'으로 귀착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이다'라고 바이트 낭비를 하고 있는 노무현은, 결국 부정성의 정치를 회귀하게 하며 이명박 정부를 더욱 '일관성의 함정'으로 몰아넣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상적인 정치적 선택의 과정을 되살려내야 한다. 지금은 모든 국가의 경제가 '글로벌 스탠다드'로 움직이는 그런 격동기이므로, 만약 지금 이 신용경색과 실물경제 압박을 제대로 이겨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명박 정부의 '실력'에 대한 인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노무현 때에는 주가가 많이 올랐고 부동산 가격도 폭등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건설사 부실로 인한 신용경색은 이미 참여정부 당시부터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규제지역 한 두개 더 만들었다고 둘러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명박은 노무현과 말로는 대립각을 세우면서 바로 그 경제정책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사인'을 보냈고, 서울에 거주하는 유권자들이 그 '사인'을 이해하고 몰표를 준 것이 바로 이명박 당선의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명박은 주가지수, 부동산 가격, 환율 등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그 '숫자'에만 목을 매달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경제가 가지고 있던 본질적인 결함이 드러나고 있는 시점이며, 여기서 그 숫자들만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만약 이명박이 지금의 경제 위기를 올바로 극복할 수 있다면, 그는 거듭난 것이다.

그 '거듭난 이명박'을 받아들여줄 용기가 우리에게 없다면, 다시 말해 '일관성의 함정'에서 벗어난 이명박에게, 국민들 또한 '일관성의 함정'에서 벗어나 정당한 평가를 해줄 용기가 없다면, 대한민국이 처한 정치적 불능 상태는 해결될 수 없다. 또한 계급정치의 도래를 기대할 수도 없다. 부정성의 정치는 '일관성의 함정'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으며, 동시에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계급투표의 목을 오래도록 졸라온 바로 그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기독교 신자이며, 이 위기의 시대를 맞아 두손 꼭 잡고 기도를 한다고 쳐보자. ". . .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구절의 의미를 곱씹게 되는 새벽이 아닐 수 없다.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내는 그 시스템에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혹은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를 때리고 물대포도 뿌린 그 새끼마저도 용서하겠다는 각오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대통령님께 힘을 실어 드리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경제를 올바로 살려낸다면, 청와대의 그 인간도 '대통령'으로 인정할 각오를 하자는 말이다. '이명박 즐, (노무현 짱)'을 퍼뜨리고 다니는 자들의 농간에 놀아날만큼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그런 종류의 '일관성의 함정'이야말로, 이름만 꺼내도 지긋지긋한 '비판적 지지론'이 기대고 있던 '부정성의 정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명박 정부가 그 일을 해낼 수 없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솔직히 기대도 안한다. 하지만 나 자신의 태도만큼은, 약간의 일관성을 포기하고서라도 정치적 선을 위해 변경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려고 누웠다가 잠이 안 와서, 하이데거가 쓴 「칸트의 존재 테제」를 읽다가 이 글을 썼다. 잠들기 전에 기도를 한 번 더 해야겠다.

2008-10-16

천막이었던 것들

내가 충남슈퍼 정류장에 내린 시각은 오후 8시 30분.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내가 도착하면 그 시간에 맞춰서 문화제가 끝나는 징크스가 있다. '이쯤 서 있으면 되겠지' 했는데 다들 '비정규직 투쟁가'를 부르기 시작해 적잖이 당황했다.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적어도 100여명은 되는 것 같았지만, 곧 절반 이상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게 문화제 중심으로 운영되는 집회라서 그런가, 정말 익숙한 풍경이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가 쓱 하고 나타나 '다들 밥 먹으러 갔어'라고 말해줬다. 아홉시 반 넘게까지 거기 있었는데, '밥 먹으러 갔다'는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남아있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50명이 좀 안 되는 숫자였다고 기억한다.

행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천막이었던 것'에서 '천막이 될 수 있을만한 것'들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남자들 나와서 도와달라고 하길래 아무 생각 없이 갔다. 그 큰 천막이 그렇게 쳐지는 것이라는 걸 이번에 보고 처음 알았다.

철골과 지붕 역할을 하는 비닐을 펴 세우고, 바닥에 까는 나무, 플라스틱 구조물을 들고 왔다. 실제로 손을 더럽혀가며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차피 건질 만한 것들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


'천막이었던 것들', 기륭전자 앞. 2008년 10월 15일.


몇 번 왔다갔다 하면서 책상이나 의자, 화이트보드 등을 건져내고 있었다. 대학생들로 보이는 서너 명이 그 속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자기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작업에 속도를 붙였다. '이런 말 하기 뭐 하지만, 또 침탈당하면 말짱 꽝이니까 너무 더러운 것까지 일일이 꺼내지는 마.' 맞는 말이지만 듣는 나도 서글펐다.

칼라TV의 이명선씨를 만났다. 고생하고 울고 그래서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내가 잘못한 건 없으니 미안해할 것도 없어야 하겠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25일까지 구사대와 용역들이 계속 덮칠 예정이라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새벽 3시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서 답답하다.

중요한 건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서는 것보다, 조직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물리적으로 맞설 수 있는, 말하자면 '노조 아저씨들'이 개입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일이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 말로만 비정규직 투쟁에 앞장서는, 등의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왜 민주노총 산하 그 수많은 지부 중 어디도, 조직 차원에서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 걸까. 연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그 연대의 가치는 도드라진다. 이 역설이 지금 기륭전자에서 극대화되고 있다. 정규직 노동조합의 조직적 개입이 절실한 시점이다.



촛불자동차연합 회원들이 면허 취소를 당하는 이 팍팍한 시국에도, 어떤 용자분이 나서서 삭막한 현장에 작은 웃음을 던져주었다. 촛불인지 횃불인지 애매한 전등을 달고 나타난 한 대의 승용차가, 퇴근하는 기륭전자 관계자들의 차가운 눈초리를 맞으며 다시 건설된 천막을 향했다. 다시 건설된 천막 아래 사람들이 앉기 시작했고, 나는 손을 비벼 먼지를 떨어낸 다음 충남슈퍼 앞에서 마을버스를 탔다.

기륭전자에 직접 방문하는 것이 최선이고, 또 밤을 함께 새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잠깐이라도 들러서 더 많은 분들이 현장의 분위기를 체감해주셨으면 좋겠다. 좋은 글을 많이 퍼날라주시는 것도 바람직하고, 기륭 투쟁단과 칼라TV 등에 후원금을 많이 내 주셨으면 한다. 마음으로만 함께한다고 하지 말고, 통장으로도 함께합시다.

기륭전자 투쟁 후원금 계좌: 국민 362702-04-067271 (김소연)
칼라TV 후원금 계좌: 제일 403-20-446270 (박성훈칼라TV)

고양이들과 사는 옥탑방

심상정 전 의원의 보좌관이었던 손낙구는 <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에서, 부동산을 기준으로 삼아 사람들을 여섯 계급으로 나눈다. 그걸 보니 이런 제기랄, ‘부동산 6계급’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또 ‘부동산 6계급’에 묶여버리고 말았다. 약수동 달동네에서 이태원의 옥탑방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고양이들과 함께 살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책상 하나, 변기 한 개", 경향신문, 2008년 10월 16일


누가 보면 토굴에서 사는 줄 알겠다. 부동산 6계급에서 못 벗어났긴 하지만,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더 없이 좋다. 그것을 입증할만한 사진 몇 장을 블로그 독자들께 공개하고자 한다.

일단 문제의 그 '책상' 사진. 지금도 그 책상에 앉아 있다. 출연한 고양이는 가을이.


창문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입동이. 여느 옥탑과는 달리, 한쪽 벽면이 전부 창으로 되어 있거나 하지 않다. 비교적 난방비가 적게 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음.





현관 앞 옥상에 서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라본 모습. 이사온 다음 날, 즉 9월 27일 찍은 이태원 전경이다. 첫 번째 사진에서는 헤밀턴 호텔이 보이고, 첫 번째 사진과 두 번째 사진에서 이슬람 사원의 탑이 보인다. 한강이 지척이라 바람이 잘 불고, 바람이 잘 불어서인지 날씨만 좋으면 빨래가 고슬고슬 잘 마른다. 여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마지막 서비스컷으로 새 집에서 첫날 밤을 지낸 가을이.

2008-10-13

폴 크루그먼 노벨 경제학상 단독 수상

저질 폴빠인 제게 너무도 기쁜 소식.

"Princeton's Paul Krugman Wins Nobel Economics Prize"

게다가 '단독 수상'이라니, 이건 정말이지, 우왕!

크루그먼 본좌님 감축드리옵니다.



추가: 한림원에서 노벨상을, 뒤늦게 혹은 너무 빨리 준 취지는 이런 게 아닐까. "크루그먼 교수님, 앞으로도 꾸준히 좋은 칼럼 많이 써 주시기 바랍니다. 상금도 몰빵해서 드릴게요."

금융위기와 안티고네, 금산분리, 그 외

1.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해 국법과 대결하는 안티고네, 와 사실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영국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In a bleak new sign of the growing economic crisis, hard-up families are having to wait more than two months before receiving Government money for funerals.

Organisations representing undertakers accused the Government of putting them in an ‘impossible’ position by dragging their feet over burial costs for poor families.
("Bodies of the dead not being buried in echo of Winter of Discontent as effects of credit crunch spread across Britain", DailyMail, 13th Oct. 2008)

가난한 가족들은 정부에서 장례 보조금이 나올 때까지 두 달 가량 기다려야 하게 생겼다는 보도인데, 이것을 보도한 매체가 데일리 메일인 만큼 덥썩 믿거나 하긴 좀 그렇다. 블로그에 이 기사를 인용한 폴 크루그먼도 '내 아내가 영국에서 오래 살았고 아직도 타블로이드를 즐겨 본다'고 눙치고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실물경제로의 위기 확산에 대한 문제의식이 영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국이 이토록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닐까.


2.

국제적으로 대규모 은행 국유화가 단행되면서 주식시장이 안정되고 환율이 돌아오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눈에 띤 하루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나라 일이고,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는 이명박이 라디오를 통해 국민들이 "아침부터 재수있을 권리"를 박탈하고, 정부는 금산분리를 사실상 해제하는 법안을 떡하니 제출하고 앉아있다.

신자유주의의 기조를 완전히 뒤흔드는 '은행 국유화'에 대해, 그것이 수면 위로 떠오른 어제 그제 오늘 정도에 많은 사람들이 반응을 한 것 같은데, 사실 그것은 이미 7월부터 논의되고 있었던 해법 중 하나다. 내가 지난번에 블로그에서 잠시 소개한 이코노미스트의 기사 "Twin Twisters"에서, 이코노미스트는 프레니와 페니에 돈을 퍼주지 말고 그것들을 아예 국유화한 다음 운영을 정상화하여 비싼 값에 되팔라고 주문한 바 있다.

서방 세계의 '은행 국유화'를 보며 너무 좋아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이코노미스트는 익명으로 기사가 나가는지라 이렇게 노골적인 주장을 대놓고 펼칠 수가 있는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은행 국유화의 목적은 자본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상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정상'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합의된 바가 없다.

문제는 이 씨발 대한민국의 경우, 국유화 -> 정상화 -> 민영화의 세 단계 중 두 번째 것이 쏙 빠져있는 그 무언가를 금융위기 해법이랍시고 정부가 내놓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은행 중 대다수는 정부 소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것을 '정상화'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중과 공유하여 그 정상 상태에 대한 사회의 논의를 수렴하고 민주적 절차를 통해 의사를 모으기는 커녕, 그냥 지금 달러 짤짤이로 돈 왕창 번 대기업들에게 갖다가 넘기겠다, 이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의 꼴이다. 금산분리 철폐는 결코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다.


3.

요즘 내가 그 개념을 너무 남발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국제적 위기'를 핑계삼아 금산분리를 철폐하려 드는 이것은 그야말로 '쇼크 독트린'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앞서 나는 현재 (자본주의의) '정상성'이라는 단어가,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허공에 붕 떠버렸다는 것을 지적했다. 진보진영은 이 '쇼크' 속에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퍼부어줄 수 있는가? 한국과 그 외 여러 나라들에서 동시에 이 질문은 던져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 내용도 없고 알맹이도 없는 'Yes, we can'(워우워우예~) 이후 큰 사회적 진통을 겪게 될 것 같다. 한국의 경우, 이번주 시사인 설문조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개혁세력'들이 완전히 주저앉아버린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 공백을 진보정당이 채워넣지는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지지난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행복'이라는 테마를 가져갔다면, 이번에는 미리부터 '공공성'을 밑밥으로 뿌리고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웰빙 투게더' 는 어떨까.

담론적인 차원으로 들어와보자면,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가, 또 한국 사회의 담론이 이렇게 비정상이고 저렇게 잘못되어 있고 운운하는 차원을 넘어서, 앞서 말한 것처럼 '정상성'이라는 것을 손아귀에 넣기 위한 개념적 생산과 쟁취의 과정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램을 품고 있다. 지배계급이 쇼크 독트린을 무기삼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쇼크 독트린이 횡횡하는 속에서, 'shock proof'인 정보의 공유와 지식의 무장을 통해 그것과 맞서고, 공공성의 영역을 새롭게 획득하는 게 아닐까.

이명박과 그 일당들이 말하는 것이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게 아니고, 공기업 선진화가 '공공의 이익'과는 완전히 거리가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대체 그 '공공성'이라는 게 뭐냐고. 여기서 어떤 긍정적인 서술을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