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실: 석유는 고갈될 것이다.
2020년이 다가오고 있다. 2008년의 마지막날에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정말 2020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IEA의 2008년 보고서에 따르면, 매년 석유 생산량이 6.7%가량 감소할 전망이다. 그러면 늦어도 2030년 정도에는 석유 정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시장에서 가격에 따라 수요가 조절되는 것을 감안해본다면 2020년부터는 '정점'이 아닌 '고원'에서 유가가 오락가락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 IEA가 내놓는 보고서의 일관성이다. 국제 에너지 기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구체적인 날짜를 지목하여 석유 고갈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다. 게다가 그들은 작년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매년 생산량이 3.7%씩 감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3.7%와 6.7%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런 차이가 왜 발생하고 있는지 묻기 위해, 영국 저널리스트 조지 몬비오는 직접 IEA에 찾아가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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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IEA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패티 비롤(Fatih Birol)은, 전 세계 국가들이 정책 결정의 도구로 사용하는 보고서가, 여태까지는 현장 실사 없이 'assuming'에 의지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말을 고지식하게 털어놓았다. 지금까지는 추산해보니까 3.7% 떨어질 것 같았는데, 가서 조사해보니까 더 심각해서 6.7%로 올렸다는 거다. 그렇다면 대체 그동안 석유 고갈에 대해 미적거린 것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진단 말인가?
지구 기후 변화와 에너지 문제에 대해 가장 회의적인 목소리를 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집단에서조차, 2020년이면 유가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선에서 형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게 우리가 2008년의 마지막 날 기억하고 있어야 할 '현실'이다.
2. 임기: 1년 반 남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회에서는 한나라당의 방송법 날치기 통과를 막기 위해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한나라당은 급하다. 연말을 앞두고,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대규모 군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무리수를 연달아 두고 있다. 둘째. 한나라당의 패악질만을 놓고, 그것에 대항하는 전선만을 고려한다면 영원히 진보정당들은 민주당의 뒤에 설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이 왜 이리 급하게 구는 걸까? 청와대가 뒤에서 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왜 이렇게 급하게 구는 걸까? 대통령 연임이 불가능한 한국의 정치 제도상, 그리고 20퍼센트 선에서 왔다갔다하는 대통령 지지도를 감안해볼 때, 이명박의 레임덕이 찾아오는 시점은 기존의 대통령들보다 훨씬 빠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시에게 신발이 날아오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쉽다. 이명박은 정오를 넘기면 바로 '지는 태양'이고, 자유낙하하는 별똥별 신세가 된다. '앞으로 4년을 어떻게 더 견디냐'며 지나치게 괴로워할 필요 없다. 올라가는 길이 힘들었던 만큼 내려오는 길은 롤러코스터나 다름없을 테니까.
언론을 장악하고, 경찰을 장악하고, 지방 토호들을 장악하려 하는 이유는, 그나마 그거라도 없으면 나머지 임기의 절반 동안 처절하게 두들겨맞을 것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도 그렇다. 세계 경제가 회복된다 해도 그 영향이 한국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게다가 국내 부동산 거품이 꺼질 것도 고려해본다면, 이명박은 경제 문제를 해결 못 한다고 봐야 옳다. 따라서 그나마 '말빨'이 먹히는 지금, 꽉 잡을 수 있는 만큼 꽉 잡아놔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절망적인 만큼 이명박도 필사적이다.
그러므로 '반 이명박 연대'는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고, 지속되더라도 '이명박을 털어서 나온 전리품'을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느냐를 놓고 더 큰 정치적 분쟁만을 낳을 수밖에 없는 구도가 된다. 국회 점거 농성에 진보신당이 참여하고 있지 못하다 해서, '반 이명박 투쟁'에 장내에서 참여하고 있지 못하다 해서 좌절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3. 지향: 정치를 다시 생각하자
올해까지는 에너지 문제가 고작 유가환급금 정도와 관련된 부차적인 이슈였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것이고, 서서히 정치적인 주제로 떠오를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2020년이면 유가는 고원에 올라간다. 실감이 안 난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싼타 모자를 12번만 더 쓰고 나면, 기름값은 현재의 두 배 이상이 된다.
최근 '반 한나라당 전선'을 강조하며 심상정이 은평을 재보선에 출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신당의 당원들을 보며 내가 콧방귀를 뀌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앞서 2.에서 말한 것처럼, 이명박의 실제 임기는 시한부 환자의 생명줄과도 비슷하기 때문에, 그 전선에 섯불리 참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 당장 국회 꼴을 보더라도, 민주노동당이 같이 싸우고 있지만 보도되는 것은 '민주당' 뿐이다. 진보진영은 덩치가 작기 때문에, '전리품 나눠먹기'에서 큰 파이를 가져갈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성장'하기 전에 이명박이 먼저 쓰러지게 되어 있다. 손해보는 장사는 애초에 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진보신당이, 에너지 정치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더 많은 대비를 하고 있으며, 그 방면에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정당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에너지 문제가 정치적인 주제로 떠오른 상황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은 한나라당이네 반 한나라당이네 박근혜네 이명박이네 하고 싸우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담론의 하부구조는 지금과 다른 구조에서 작동하게 된다.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를 더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고, 그것에 반대하여 대체에너지 개발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전자의 범위가 대단히 넓다는 데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마치 한미 FTA나 이라크 파병에서 그러하였듯이, 원자력 발전 확대에 공히 찬성할 것이다. 핵무기를 보유하고자 시도했던 북한을 감싸고 돌아야 하는 민주노동당 또한, 원자력 발전에 대한 이미지를 나쁘게 하는 행동을 굳이 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통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제어하고 에너지 수요량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많은 수의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 이번호 포린폴리시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 중 하나라서, 매체가 나올 때까지 더 이상의 내용 누설을 할 수는 없다.
결론만 말하자면 원자력 발전은 미래의 에너지원이 될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또한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정치적 이슈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최장집의 정당정치론은, 정당 환원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치적 이슈를 결정하는 하부구조의 변동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장집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수용하는 20대들을 보며 우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에너지 정치는 정당 구조와는 다른 차원에서 결정될 것이다. 따라서 그때까지 '반 한나라당', '반 이명박' 전선을 붙들고 늘어진다면 낭패를 보게 된다. '우리 편'인줄 알았는데, 정권 잡고 부안에 전경 보내고 사람 때려 죽이는 일이 또 벌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민주당이 다시 급성장할 가능성은 없지만, 만약 그들이 회복하고 정권을 잡는다면, 분명히 '제2의 부안', '제3의 부안'이 속출한다. 반 한나라당 전선? 시신의 고환을 쓰다듬는 소리다. 제발 눈 좀 뜨고 살자.
4. 결론: Power to the People
'Power to the People'. 본래 이 말은 '민중에게 권력을' 정도로 번역된다. 하지만 에너지 정치와 맞물려 생각해본다면 그 함의는 더욱 커진다. '민중에게 힘을', 그리고 '민중에게 에너지를'. 진보신당 녹색특위의 유가환급금 태양열 발전소 운동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정치는 단순한 권력의 차원을 넘어, 에너지의 생산과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민주주의'의 해석을 놓고 이런 저런 의견이 분분했던 2008년이었다. 2009년의 주제는 'Power'가 될 것이다.
내년 당장은 그것이 부각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그렇다. 'Power to the People.' 이 말을 품고, 오늘 밤 재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가야겠다.
2008-12-31
2008-12-25
핵폭탄과 구공탄들
12월 25일자 경향신문 [판]에 실린 칼럼입니다. 이번부터는 신문 칼럼의 경우, 어떤 자료에 기반하여 논의를 펼치고 있는지 주를 달도록 하겠습니다. 일종의 'annotated' 버전인 거죠. 이렇게 칼럼까지 썼지만 정작 오늘 아침 둘리 본방을 사수하지 못했다는 것이 참 슬프군요. 재방송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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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핵폭탄과 구공탄들’
‘장기하와 얼굴들’ 이전에 ‘핵폭탄과 유도탄들’이 있었다. 그 시대의 감성을 쏙 빼다박은 가사와 가락에 절묘한 퍼포먼스까지 어우러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밴드라면 말이다. ‘핵폭탄과 유도탄들’은 <아기공룡 둘리>에서 마이콜, 둘리, 도우너가 만든 밴드의 이름이었다. ‘핵폭탄과 유도탄들’은 라면을 예찬하며 “라면은 구공탄에 끓여야 제맛”이라고 노래했다(1).
왜 구공탄일까? <아기공룡 둘리>의 원작은 1983년 ‘보물섬’에 연재되었고, 애니메이션은 두 차례에 걸쳐 87년과 88년에 KBS를 통해 방영되었다. 74년 제1차 오일쇼크, 80년 제2차 오일쇼크를 겪은 후 폭등한 유가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증산을 결정한 85년에 이르러서야 80년 수준으로 떨어진다(2). 석유는 우선적으로 운송수단에 투입되어야 했다.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매년 사망자가 속출했지만, 서민들은 구멍 뚫린 구공탄에 라면을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다.
2008년 12월의 풍경도 어째 그와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다. 올해 7월만 해도 배럴당 140달러까지 치솟았던 유가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와 맞물려 30달러선까지 하락했다. 하지만 국제에너지기구(IEA)의 2008년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석유 생산량은 올해부터 매년 6.7%가량 떨어지고 2020년 무렵이면 유가는 ‘고원’에 올라서게 된다(3). 지난해에 승승장구하던 펀드가 반토막난 것처럼 석유 공급 또한 앞날을 바라보기 어려워졌다. 우리는 한 해 만에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복고풍을 선호한다. 바야흐로 ‘핵폭탄과 구공탄들’이 돌아오고 있다.
12월22일, 한승수 총리에 따르면 정부는 “2030년까지 10여기 내외의 원전을 추가로 건설해 원자력 발전 비중을 현재 36%에서 59%까지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4). 물론 정부에서 말하는 원자로는 경수로 및 차세대 원자로에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원자로는 붕괴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적이다. 미국의 스리마일섬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현대의 대형 사고는 사악한 의지를 지닌 누군가의 농간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차’하는 작은 실수 몇 개가 조합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온다(5). 엎지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물이 아니라 방사능이라면 그 결과는 더욱 참담할 것이다.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지난해에 비해 연탄 수요가 10% 이상 늘었다(6). 정부가 정책적으로 연탄 사용을 장려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대체에너지의 효율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국민들이 석탄을 더 사용하도록 ‘시장 법칙’에 내맡기는 것은 올바른 정책이 아니다. 2002년 제너럴 일렉트릭(GE)이 뛰어들면서 현재 풍력발전은 kwh당 8센트에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천연가스보다 싸고, 석탄보다는 조금 비싸지만 곧 더욱 저렴해질 것이다(7).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드리는 시대를 지나, 풍력발전기를 놓아드리는 것이 마땅한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에너지 개발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를 잠재우고, 적극적으로 친환경 대체에너지 개발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진정 정부가 주도해야 할 ‘녹색성장’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수출하는 그 ‘녹색’은, 푸른 잎사귀의 싱그러운 녹색이 아니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진보신당의 녹색특위는 당원들의 유가환급금을 모아 태양열발전소를 건설하는 ‘정치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있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초능력도 없으면서 둘리처럼 ‘호이, 호이!’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2008년 12월25일, 즉 오늘 오전 10시30분 다시 만들어진 TV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가 방송된다. 나는 ‘핵폭탄과 유도탄들’의 귀환을 환영한다. 하지만 ‘핵폭탄과 구공탄들’은 올해까지만 활약했으면 싶다.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면 좋겠다.
<노정태 |포린폴리시 한국어판·편집장>
1. 자세한 내용은 아기공룡 둘리 8화 참조.
2. 주요 사건과 국제유가의 변동에 대해서는 다음 그래프를 참조할 것.
1970-2005 유가 변동 주요 사건
3. 자세한 정보는 At Last, A Date참조. 특히 조지 몬비오는, 작년 보고서까지만 해도 IEA가 매년 석유 생산량이 3.7%씩 감소한다고 예견했다가 갑자기 그 추정치를 두 배 가량 높인 이유를 캐묻는다. 그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놀랍게도, IEA는 이전까지는 현장 조사 없이 오직 '추측'만으로 석유 생산량 감소에 대해 논해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곧 이 블로그에 추가적인 글을 올릴 계획이다.
4. 2020년까지 중소형원자로 10여기 수출 추진 연합뉴스, 2008년 12월 22일.
5. 183쪽 각주, Malcolm Gladwell, Outliers(New York, NY.: Littel, Brown 2008) 참조.
6. '연탄이 다시 뜬다', MBC, 뉴스데스크, 2008년 11월 14일.
7. "Trade winds", The Economist, 2008년 7월 19일, The Special Report on The Future of Energy.
[판]‘핵폭탄과 구공탄들’
‘장기하와 얼굴들’ 이전에 ‘핵폭탄과 유도탄들’이 있었다. 그 시대의 감성을 쏙 빼다박은 가사와 가락에 절묘한 퍼포먼스까지 어우러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밴드라면 말이다. ‘핵폭탄과 유도탄들’은 <아기공룡 둘리>에서 마이콜, 둘리, 도우너가 만든 밴드의 이름이었다. ‘핵폭탄과 유도탄들’은 라면을 예찬하며 “라면은 구공탄에 끓여야 제맛”이라고 노래했다(1).
왜 구공탄일까? <아기공룡 둘리>의 원작은 1983년 ‘보물섬’에 연재되었고, 애니메이션은 두 차례에 걸쳐 87년과 88년에 KBS를 통해 방영되었다. 74년 제1차 오일쇼크, 80년 제2차 오일쇼크를 겪은 후 폭등한 유가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증산을 결정한 85년에 이르러서야 80년 수준으로 떨어진다(2). 석유는 우선적으로 운송수단에 투입되어야 했다.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매년 사망자가 속출했지만, 서민들은 구멍 뚫린 구공탄에 라면을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다.
2008년 12월의 풍경도 어째 그와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다. 올해 7월만 해도 배럴당 140달러까지 치솟았던 유가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와 맞물려 30달러선까지 하락했다. 하지만 국제에너지기구(IEA)의 2008년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석유 생산량은 올해부터 매년 6.7%가량 떨어지고 2020년 무렵이면 유가는 ‘고원’에 올라서게 된다(3). 지난해에 승승장구하던 펀드가 반토막난 것처럼 석유 공급 또한 앞날을 바라보기 어려워졌다. 우리는 한 해 만에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복고풍을 선호한다. 바야흐로 ‘핵폭탄과 구공탄들’이 돌아오고 있다.
12월22일, 한승수 총리에 따르면 정부는 “2030년까지 10여기 내외의 원전을 추가로 건설해 원자력 발전 비중을 현재 36%에서 59%까지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4). 물론 정부에서 말하는 원자로는 경수로 및 차세대 원자로에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원자로는 붕괴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적이다. 미국의 스리마일섬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현대의 대형 사고는 사악한 의지를 지닌 누군가의 농간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차’하는 작은 실수 몇 개가 조합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온다(5). 엎지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물이 아니라 방사능이라면 그 결과는 더욱 참담할 것이다.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지난해에 비해 연탄 수요가 10% 이상 늘었다(6). 정부가 정책적으로 연탄 사용을 장려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대체에너지의 효율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국민들이 석탄을 더 사용하도록 ‘시장 법칙’에 내맡기는 것은 올바른 정책이 아니다. 2002년 제너럴 일렉트릭(GE)이 뛰어들면서 현재 풍력발전은 kwh당 8센트에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천연가스보다 싸고, 석탄보다는 조금 비싸지만 곧 더욱 저렴해질 것이다(7).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드리는 시대를 지나, 풍력발전기를 놓아드리는 것이 마땅한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에너지 개발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를 잠재우고, 적극적으로 친환경 대체에너지 개발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진정 정부가 주도해야 할 ‘녹색성장’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수출하는 그 ‘녹색’은, 푸른 잎사귀의 싱그러운 녹색이 아니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진보신당의 녹색특위는 당원들의 유가환급금을 모아 태양열발전소를 건설하는 ‘정치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있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초능력도 없으면서 둘리처럼 ‘호이, 호이!’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2008년 12월25일, 즉 오늘 오전 10시30분 다시 만들어진 TV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가 방송된다. 나는 ‘핵폭탄과 유도탄들’의 귀환을 환영한다. 하지만 ‘핵폭탄과 구공탄들’은 올해까지만 활약했으면 싶다.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면 좋겠다.
<노정태 |포린폴리시 한국어판·편집장>
1. 자세한 내용은 아기공룡 둘리 8화 참조.
2. 주요 사건과 국제유가의 변동에 대해서는 다음 그래프를 참조할 것.
3. 자세한 정보는 At Last, A Date참조. 특히 조지 몬비오는, 작년 보고서까지만 해도 IEA가 매년 석유 생산량이 3.7%씩 감소한다고 예견했다가 갑자기 그 추정치를 두 배 가량 높인 이유를 캐묻는다. 그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놀랍게도, IEA는 이전까지는 현장 조사 없이 오직 '추측'만으로 석유 생산량 감소에 대해 논해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곧 이 블로그에 추가적인 글을 올릴 계획이다.
4. 2020년까지 중소형원자로 10여기 수출 추진 연합뉴스, 2008년 12월 22일.
5. 183쪽 각주, Malcolm Gladwell, Outliers(New York, NY.: Littel, Brown 2008) 참조.
6. '연탄이 다시 뜬다', MBC, 뉴스데스크, 2008년 11월 14일.
7. "Trade winds", The Economist, 2008년 7월 19일, The Special Report on The Future of Energy.
2008-12-17
저널리즘에 대하여
붙들고 있던 번역을 하나 끝냈다. 색인 등 몇가지 자잘한 부분들을 해서 넘기고, 역자후기를 쓰고 나면 내 역할은 끝난다. 내가 번역한 책의 이름은 Outliers다. 그 책을 번역하게 되어 개인적으로 영광이다. 김영사에서 내게 좋은 기회를 주었고, 정신없는 와중이었지만 나는 그 원고를 받아들었다. 1장을 읽고 나니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자 후기를 써야 하는데,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리에서 오가고 있어서 손에 잘 잡히지가 않는다. 이 책은 말콤 글래드웰의 이전 저작들에 비해 훨씬 '정치적'이다. 이 책이 '각하'의 손에 들어가고 '오해'를 유발한다면,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최대한 신중하게 역자 후기를 써야 한다. 월요일 저녁부터 지금까지 고심중인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으니 곧 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다.
이 책을 읽고 번역하면서 '저널리즘'의 가치에 대해 여러번 생각하게 되었다. 말콤 글래드웰은 자신이 특정 분야의 새로운 지식을 창출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대해,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재조명함으로써 물음표를 던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저널리즘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적인 지식을 생산하거나 그것에 대해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물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관점'을 창출해내는 창조적 작업이라고 말이다.
내가 스스로를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칭하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 맥락에서이다.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나와 같지 않다. 하지만 나는 많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문제삼고 싶다. 그렇다면, 철학과에 다니면서 칸트를 공부하고 있더라도, 어떤 순간마다 저널리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지성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지적인 담론들을 충실하게 소화해내어 평이한 언어로 전달해줄만한 저널리즘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볼 경우,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의 보완물이 된다.
가령 뉴욕타임즈의 유명 저널리스트들을 살펴보자. 폴 크루그먼도 크루그먼이지만, 데이비드 레온하르트(David Leonhardt)라는 탁월한 경제 전문 저널리스트가 매주 한 번씩 복잡한 보고서와 그래프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준다. 생물학과 진화론에 관한 지식은 올리비아 저드슨(Olivia Judson)의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일상언어로 번역된다. 내가 좋아하는 가디언의 조지 몬비오 같은 경우도 그렇다. 이들은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통속의 언어에 달통한 이들이다.
훌륭한 저널리스트들이 글을 쓰는 매체를 읽고 있으면, 따라서, 해당 분야의 논의에 직접 개입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어떤 주장에는 무슨 헛점이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한국에 '지성계'를 출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저널리즘이다.
이런 저런 전문가들은 지금도 많다. 하지만 그 전문가들 또한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면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저널리스트들이 저널(학술지)을 읽고, 그것을 저널리즘의 영역 안에서 소화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저널리즘이다. 이러한 하나의 순환 주기가 완성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지성계'의 존재를 논할 수 있게 된다. 대중과 지식인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래야 지식인과 지식인 사이의 거리도 좁혀질 수 있다.
《아웃라이어》의 참고문헌을 보면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말콤 글래드웰이 정보를 얻는 1차적인 경로는 책과 과학 저널들이다. 말콤 글래드웰이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또한 과학적인 논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원이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하나의 완성된 시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말콤 글래드웰같은 탁월한 저널리스트가 아니다. 그와 나의 차이를 결정적으로 가르는 요인은, 그는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반면, 나는 (특히 과학 분야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저널리즘은 외국의 저널리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국내에는 그 정도 논의도 못 따라오는 사람들, 국제적 기준에서 볼 때 몰상식한 소리를 너무도 쉽게 하면서 진보입네 좌파입네 하는 사람들이 참 많지만, 그들과 견주어 자신의 단점을 외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번역해야 할 책이 한 권 더 있고, 이미 쓰겠다고 계약서를 작성한 책도 한 권 있다. 하반기에 작업하게 될 다른 책에 대해서도 논의가 진행중이다. 일정이 미칠 듯이 돌아간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그 도전에 진지하게 대응해야 할 시점이다.
《아웃라이어》를 옮기면서, 장차 써야 할 책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용과 구성 뿐 아니라 편집이나 문체,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 등 많은 것을 배웠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지만, 약속이 있어서 일단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GQ에서 파티에 초대해줬다. 좋은 저널리스트들이 만드는 훌륭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이제 노트북을 덮고 슬슬 일어나야 한다.
덧. Outliers는 현재 3주째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하드커버 논픽션 1위를 달리고 있다. 자랑하고 싶어서 한 줄 더 남겨본다.
역자 후기를 써야 하는데,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리에서 오가고 있어서 손에 잘 잡히지가 않는다. 이 책은 말콤 글래드웰의 이전 저작들에 비해 훨씬 '정치적'이다. 이 책이 '각하'의 손에 들어가고 '오해'를 유발한다면,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최대한 신중하게 역자 후기를 써야 한다. 월요일 저녁부터 지금까지 고심중인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으니 곧 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다.
이 책을 읽고 번역하면서 '저널리즘'의 가치에 대해 여러번 생각하게 되었다. 말콤 글래드웰은 자신이 특정 분야의 새로운 지식을 창출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대해,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재조명함으로써 물음표를 던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저널리즘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적인 지식을 생산하거나 그것에 대해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물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관점'을 창출해내는 창조적 작업이라고 말이다.
내가 스스로를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칭하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 맥락에서이다.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나와 같지 않다. 하지만 나는 많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문제삼고 싶다. 그렇다면, 철학과에 다니면서 칸트를 공부하고 있더라도, 어떤 순간마다 저널리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지성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지적인 담론들을 충실하게 소화해내어 평이한 언어로 전달해줄만한 저널리즘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볼 경우,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의 보완물이 된다.
가령 뉴욕타임즈의 유명 저널리스트들을 살펴보자. 폴 크루그먼도 크루그먼이지만, 데이비드 레온하르트(David Leonhardt)라는 탁월한 경제 전문 저널리스트가 매주 한 번씩 복잡한 보고서와 그래프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준다. 생물학과 진화론에 관한 지식은 올리비아 저드슨(Olivia Judson)의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일상언어로 번역된다. 내가 좋아하는 가디언의 조지 몬비오 같은 경우도 그렇다. 이들은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통속의 언어에 달통한 이들이다.
훌륭한 저널리스트들이 글을 쓰는 매체를 읽고 있으면, 따라서, 해당 분야의 논의에 직접 개입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어떤 주장에는 무슨 헛점이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한국에 '지성계'를 출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저널리즘이다.
이런 저런 전문가들은 지금도 많다. 하지만 그 전문가들 또한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면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저널리스트들이 저널(학술지)을 읽고, 그것을 저널리즘의 영역 안에서 소화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저널리즘이다. 이러한 하나의 순환 주기가 완성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지성계'의 존재를 논할 수 있게 된다. 대중과 지식인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래야 지식인과 지식인 사이의 거리도 좁혀질 수 있다.
《아웃라이어》의 참고문헌을 보면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말콤 글래드웰이 정보를 얻는 1차적인 경로는 책과 과학 저널들이다. 말콤 글래드웰이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또한 과학적인 논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원이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하나의 완성된 시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말콤 글래드웰같은 탁월한 저널리스트가 아니다. 그와 나의 차이를 결정적으로 가르는 요인은, 그는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반면, 나는 (특히 과학 분야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저널리즘은 외국의 저널리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국내에는 그 정도 논의도 못 따라오는 사람들, 국제적 기준에서 볼 때 몰상식한 소리를 너무도 쉽게 하면서 진보입네 좌파입네 하는 사람들이 참 많지만, 그들과 견주어 자신의 단점을 외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번역해야 할 책이 한 권 더 있고, 이미 쓰겠다고 계약서를 작성한 책도 한 권 있다. 하반기에 작업하게 될 다른 책에 대해서도 논의가 진행중이다. 일정이 미칠 듯이 돌아간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그 도전에 진지하게 대응해야 할 시점이다.
《아웃라이어》를 옮기면서, 장차 써야 할 책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용과 구성 뿐 아니라 편집이나 문체,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 등 많은 것을 배웠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지만, 약속이 있어서 일단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GQ에서 파티에 초대해줬다. 좋은 저널리스트들이 만드는 훌륭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이제 노트북을 덮고 슬슬 일어나야 한다.
덧. Outliers는 현재 3주째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하드커버 논픽션 1위를 달리고 있다. 자랑하고 싶어서 한 줄 더 남겨본다.
2008-12-13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않은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곳곳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104쪽, 《정본 백석 시집》,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2007)
---------------------------------------------------
완성도를 논하기 이전에, 말 그대로 '청춘'에 대한 시인 듯. 오늘 밤도 일하다가 문득 손에 잡혀서, 잠시 적어 본다.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않은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곳곳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104쪽, 《정본 백석 시집》,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2007)
정본 백석 시집 -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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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도를 논하기 이전에, 말 그대로 '청춘'에 대한 시인 듯. 오늘 밤도 일하다가 문득 손에 잡혀서, 잠시 적어 본다.
2008-12-11
SDE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
오늘자 경향신문에, 다음 아고라에서 SDE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는 인터넷 논객의 인터뷰가 실렸다. 안티조선 우리모두 사이트에 들락거려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그는 '서지우'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고, 또 오랜 기간 눈팅을 해봤다면 그의 본명도 결국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걸 굳이 써놓을 필요는 없겠다. 아무튼, 인터넷에서 아이디로만 접하던 사람의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을 실제로 보니 놀랍고 반가웠다.
그는 안티조선 우리모두의 '소칼의 지적사기 논쟁'이라는 토론방에서도, 비선형 확률제어론에 입각하여 IMF를 금융위기로 정의하고 이런 저런 논의를 해왔다. 사구체논쟁과 관련해서는 주로 NL 진영에서 옹호하는 입장인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주장하여 나름 큰 충격을 불러왔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그가 꾸준히 주장하는 '기준금리 대폭 인상'에 대해 전혀 납득할 수가 없다.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어떤 식으로건 결국 대출금리도 올라간다. 현재 거품이 낀 아파트 가격의 절반 가량이 가계에서 대출을 받은 금액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인상분에 대한 이자 부담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주장하는대로 금리를 높이고 '자발적 구조조정'을 조장하면,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충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바꿔 말하자면, 아파트 가격 거품이 꺼지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빚 내서 아파트를 샀다가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져 죽는 것이 먼저가 될 수 있다. 금리를 확 인상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이너스 5% 경제성장으로 1년을 지나"는 극약처방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그가 너무 쉽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게 무슨 중학생 용돈 5% 깎는 것도 아니고.
SDE님뿐 아니라 그의 금리인상론에 동의하시는 분들께 정말이지 묻고 싶다. 엄연히 자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행정부와 중앙은행이, 환율을 지키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고(한국에서 금리를 1%나 전폭적으로 내렸는데, 오늘 원달러 환율은 35원씩이나 뚝 떨어졌다. 기준금리와 환율 사이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부터가 오류일 가능성을 그는 배제하고 있는 것 아닐까?), '마이너스 5% 성장'을 목표로 삼고,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을 유발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게다가 그런 충격요법을 쓰면 결국 '큰 놈'만 살아남게 된다. 즉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이 반드시 바람직한 경재 구조를 낳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굳이 충격요법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의문은 끊이지 않지만,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일단 여기까지만 쓰도록 한다.
*덧말: 손동우 사회에디터의 인터뷰였다. 이번에도 취재수첩에 새까맣게 필기를 하셨으려나. SDE님을 인터뷰한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지금 내가 적어놓은 이 질문을 전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주한미군 철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인물이라는 것도 취재 포인트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안티조선 우리모두의 '소칼의 지적사기 논쟁'이라는 토론방에서도, 비선형 확률제어론에 입각하여 IMF를 금융위기로 정의하고 이런 저런 논의를 해왔다. 사구체논쟁과 관련해서는 주로 NL 진영에서 옹호하는 입장인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주장하여 나름 큰 충격을 불러왔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그가 꾸준히 주장하는 '기준금리 대폭 인상'에 대해 전혀 납득할 수가 없다.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어떤 식으로건 결국 대출금리도 올라간다. 현재 거품이 낀 아파트 가격의 절반 가량이 가계에서 대출을 받은 금액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인상분에 대한 이자 부담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주장하는대로 금리를 높이고 '자발적 구조조정'을 조장하면,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충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바꿔 말하자면, 아파트 가격 거품이 꺼지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빚 내서 아파트를 샀다가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져 죽는 것이 먼저가 될 수 있다. 금리를 확 인상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이너스 5% 경제성장으로 1년을 지나"는 극약처방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그가 너무 쉽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게 무슨 중학생 용돈 5% 깎는 것도 아니고.
SDE님뿐 아니라 그의 금리인상론에 동의하시는 분들께 정말이지 묻고 싶다. 엄연히 자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행정부와 중앙은행이, 환율을 지키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고(한국에서 금리를 1%나 전폭적으로 내렸는데, 오늘 원달러 환율은 35원씩이나 뚝 떨어졌다. 기준금리와 환율 사이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부터가 오류일 가능성을 그는 배제하고 있는 것 아닐까?), '마이너스 5% 성장'을 목표로 삼고,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을 유발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게다가 그런 충격요법을 쓰면 결국 '큰 놈'만 살아남게 된다. 즉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이 반드시 바람직한 경재 구조를 낳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굳이 충격요법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의문은 끊이지 않지만,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일단 여기까지만 쓰도록 한다.
*덧말: 손동우 사회에디터의 인터뷰였다. 이번에도 취재수첩에 새까맣게 필기를 하셨으려나. SDE님을 인터뷰한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지금 내가 적어놓은 이 질문을 전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주한미군 철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인물이라는 것도 취재 포인트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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