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핵폭탄과 구공탄들’
‘장기하와 얼굴들’ 이전에 ‘핵폭탄과 유도탄들’이 있었다. 그 시대의 감성을 쏙 빼다박은 가사와 가락에 절묘한 퍼포먼스까지 어우러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밴드라면 말이다. ‘핵폭탄과 유도탄들’은 <아기공룡 둘리>에서 마이콜, 둘리, 도우너가 만든 밴드의 이름이었다. ‘핵폭탄과 유도탄들’은 라면을 예찬하며 “라면은 구공탄에 끓여야 제맛”이라고 노래했다(1).
왜 구공탄일까? <아기공룡 둘리>의 원작은 1983년 ‘보물섬’에 연재되었고, 애니메이션은 두 차례에 걸쳐 87년과 88년에 KBS를 통해 방영되었다. 74년 제1차 오일쇼크, 80년 제2차 오일쇼크를 겪은 후 폭등한 유가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증산을 결정한 85년에 이르러서야 80년 수준으로 떨어진다(2). 석유는 우선적으로 운송수단에 투입되어야 했다.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매년 사망자가 속출했지만, 서민들은 구멍 뚫린 구공탄에 라면을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다.
2008년 12월의 풍경도 어째 그와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다. 올해 7월만 해도 배럴당 140달러까지 치솟았던 유가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와 맞물려 30달러선까지 하락했다. 하지만 국제에너지기구(IEA)의 2008년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석유 생산량은 올해부터 매년 6.7%가량 떨어지고 2020년 무렵이면 유가는 ‘고원’에 올라서게 된다(3). 지난해에 승승장구하던 펀드가 반토막난 것처럼 석유 공급 또한 앞날을 바라보기 어려워졌다. 우리는 한 해 만에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복고풍을 선호한다. 바야흐로 ‘핵폭탄과 구공탄들’이 돌아오고 있다.
12월22일, 한승수 총리에 따르면 정부는 “2030년까지 10여기 내외의 원전을 추가로 건설해 원자력 발전 비중을 현재 36%에서 59%까지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4). 물론 정부에서 말하는 원자로는 경수로 및 차세대 원자로에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원자로는 붕괴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적이다. 미국의 스리마일섬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현대의 대형 사고는 사악한 의지를 지닌 누군가의 농간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차’하는 작은 실수 몇 개가 조합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온다(5). 엎지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물이 아니라 방사능이라면 그 결과는 더욱 참담할 것이다.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지난해에 비해 연탄 수요가 10% 이상 늘었다(6). 정부가 정책적으로 연탄 사용을 장려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대체에너지의 효율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국민들이 석탄을 더 사용하도록 ‘시장 법칙’에 내맡기는 것은 올바른 정책이 아니다. 2002년 제너럴 일렉트릭(GE)이 뛰어들면서 현재 풍력발전은 kwh당 8센트에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천연가스보다 싸고, 석탄보다는 조금 비싸지만 곧 더욱 저렴해질 것이다(7).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드리는 시대를 지나, 풍력발전기를 놓아드리는 것이 마땅한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에너지 개발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를 잠재우고, 적극적으로 친환경 대체에너지 개발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진정 정부가 주도해야 할 ‘녹색성장’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수출하는 그 ‘녹색’은, 푸른 잎사귀의 싱그러운 녹색이 아니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진보신당의 녹색특위는 당원들의 유가환급금을 모아 태양열발전소를 건설하는 ‘정치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있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초능력도 없으면서 둘리처럼 ‘호이, 호이!’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2008년 12월25일, 즉 오늘 오전 10시30분 다시 만들어진 TV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가 방송된다. 나는 ‘핵폭탄과 유도탄들’의 귀환을 환영한다. 하지만 ‘핵폭탄과 구공탄들’은 올해까지만 활약했으면 싶다.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면 좋겠다.
<노정태 |포린폴리시 한국어판·편집장>
1. 자세한 내용은 아기공룡 둘리 8화 참조.
2. 주요 사건과 국제유가의 변동에 대해서는 다음 그래프를 참조할 것.
3. 자세한 정보는 At Last, A Date참조. 특히 조지 몬비오는, 작년 보고서까지만 해도 IEA가 매년 석유 생산량이 3.7%씩 감소한다고 예견했다가 갑자기 그 추정치를 두 배 가량 높인 이유를 캐묻는다. 그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놀랍게도, IEA는 이전까지는 현장 조사 없이 오직 '추측'만으로 석유 생산량 감소에 대해 논해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곧 이 블로그에 추가적인 글을 올릴 계획이다.
4. 2020년까지 중소형원자로 10여기 수출 추진 연합뉴스, 2008년 12월 22일.
5. 183쪽 각주, Malcolm Gladwell, Outliers(New York, NY.: Littel, Brown 2008) 참조.
6. '연탄이 다시 뜬다', MBC, 뉴스데스크, 2008년 11월 14일.
7. "Trade winds", The Economist, 2008년 7월 19일, The Special Report on The Future of Energy.
얼마전에 우연히 님 블로그를 알게 되어 그 동안 쓰신 글들 잘 읽어 보았습니다. 나름 우여곡절도 많으셨지만 글 쓰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답글삭제전 놈놈놈 비평 글과 지금 이 글이 가장 맘에 들고, 지난 번 경향신문 [판] 칼럼이 가장 부적절했다고 여전히 생각합니다.
어쨌든 새해에도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신다니 보람이 있군요. 이 글은 이미 모아놓은 자료를 통해 쓴 것이기 때문에, 겉보기보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답글삭제저도 놈놈놈에 대해서는 적절한 지적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칼럼도 나쁘지 않고요. 반면 지난번 칼럼에 대해서는, 일부 독자들의 이해와 수용에 대해 약간의 섭섭함을 느꼈습니다. 첫째로는, 유머에 대한 수용이 부족한 것 같고, 둘째로는, 유머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부족한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잭 블랙이 나온 코미디라고 해서, DVD에 진지한 코멘터리가 붙지 말라는 법은 없죠.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를 상영한 다음 그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테일러-포디즘에 대한 BBC 다큐의 클립을 덧붙여 설명을 했더니, '이게 그럼 농담이냐 아니냐'라면서 정색을 하는 분들이 꽤 많더군요. 그 칼럼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은, 제 입장에서도 흥미로운 사건이었습니다.
또이또이님의 블로그에서 노래를 얻어들었습니다. 좋군요. 새해에도 추구하시는 일들마다 좋은 성취가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석유 감산 이야기가 좀 기다려지는군요 ^^
답글삭제건축설계판에서는 대체적으로 많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건축물의 에너지효율성이 너무 낮은데 비해, 정부의 정책적 입장에서는 재생에너지 사용과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것을 비교했을 때, 후자에 너무 신경을 안쓴다는 쪽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드리자면, 같은 돈을 들여서 집을 짓는데, 단열재를 두껍게 하고, 창틀을 좋은 것을 써서 단열효과를 높이는 것과, 지붕에 태양열 집열판을 놓는 것이 비슷한 돈이 든다고 했을 때, 규정상 후자쪽에만 지원이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실질적으로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데 효과적인 것은 전자란 말입니다.
친환경에너지나 재생에너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충분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딴지를 거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쓰고 있고, 앞으로 한동안 바뀔것 같지 않은 부분에 대한 정책을 기술적으로 강화하는 시각도 조금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은 글에 살짝 삐딱한 답글 달아봅니다 ^^
며칠 전부터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계속 미루고 있었습니다. 곧 정리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야죠.
답글삭제건축물의 에너지효율을 높이는 것이 더 효율적인 에너지 대책이라는 지적은 매우 타당합니다. 말씀하신 양자는 상보적인 관계에 있죠. 아무리 대체에너지를 사용한다 한들 그 에너지를 사용하는 곳의 효율이 낮다면 절감효과는 대폭 줄어들테니까요.
문제는 건축사들에게 에너지 효율적 건축을 '규제'하는 것에 이명박 정부가 과연 손 뻗고 나서느냐 하는 거죠. 구체적으로 자료를 접해본 적이 없어서 모를 일이긴 하지만 아마 손을 놓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분야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탐색이 필요할 것 같군요. 조만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궁금한게 생기면 문의해도 괜찮겠죠?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정태,안녕? 지난 파아티에서 만났던 동갑내기에요. 쑥스러워서 이렇게 인사하게 되네.ㅋ
답글삭제블로그를 주석달린 칼럼용 공간으로 이용한다라니, 신선하다 싶어서 응원의 글 올려요. 앞으로도 기대하고 있을게:)
+상관없지만, 요즘 주석 달린 셜록 홈즈 전집을 읽는 중이라 더 반갑군.ㅋ
신문 칼럼이라는게, 쓰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정보를 담으려고 노력해도 결국 지면의 한계가 있더라고. 근데 사람들은 그냥 원고지 10매짜리 원고 보고 '잘 썼네'라고 한 다음 슥 지나간단 말이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야.
답글삭제그나저나 그 파아티는 참 재미있었어. 그리고 너는 그 낯선 분위기 속에서 아주 잘 어울리더라. 약간 놀랐지.
올해 잘 마무리하고, 조만간 연락해서 또 보자구.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