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29

어떤 일

25일 밤부터 가을이가 화장실에 너무 자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26일, 27일 이틀동안 엄청난 양의 모래를 방바닥에 흩뿌리며, 5분에 한 번 꼴로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찔끔 소변을 보고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 혹시나 싶어서 수요일 오전에 병원에 데려갔다. 역시나 방광에 결석이 생겨 있었다.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고,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팔 수 있는 사료를 먹이고 있자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람과 달리 고양이는 말을 할 수 없다(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소리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개에 비해 현격하게 좁기 때문에, 아파도 제대로 낑낑거리지 못하고 이상한 행동만 하기 일쑤다. 가을이도 그랬다. 방광이 쓰라렸을 텐데, 칭얼거리지 않고 꾹 참고 있었다.

병원에 갔다 오고 나니 사태가 호전되고 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어제 아침에 비해 훨씬 화장실에 덜 들락거렸고, 편안한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행이다.

2009-01-23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는가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는가(경향신문, 2009년 1월 22일)


1월 20일,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인해 용산구 철거민 여섯 명이 사망했다. 이런 세상이다. 20대가 '왜' 보수화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은 우문(愚問)에 지나지 않는다. 그 참사를 겪고 난 다음에도, 용산구청은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제발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힌 현판을 떼지 않고 있다.[1] 돈 없으면 구청에서 민원을 해도 '생떼거리' 취급을 당하고,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한겨울에 철거당하고 빈 건물로 내몰린 다음 목숨을 잃게 된다. 순우리말 '생떼거리'의 어감이 이토록 징그러울 수가 없다.

20대 문제에 대해 올바른 답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질문을 고쳐 물어야 한다.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고 있는가? 지금의 20대는 투쟁의 주역에서 '투정'의 주역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용한 것이 바로 현 정부의 대선 캠프였다. 부산 사는 청년 백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영민씨. 그는 이명박 후보 지지 연설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직장을 잃었고, 어머니가 시장 바닥에서 반찬을 파는 것으로 가정의 생계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며 울먹였다.[2]

이명박 후보에 대한 이영민씨의 지지 연설은, 청년 실업 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을 포괄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는 "어서 정권이 바뀌어서, 누가 어머니께 '당신 아들 어디 다니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3]는 소망을 피력했다.

대기업 또는 공기업에 입사하거나, 공무원이 되지 않는 한 이 소원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예컨대 '포린폴리시 한국어판'에서 일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소개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반면 '삼성전자'나 '조선일보'에 다닌다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당당하고 말고는 개인의 태도 문제겠지만, 사회적인 대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연봉으로 환산해보면 1125만원이 나온다. 종업원 300인 미만의 536개 중소기업에 들어간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초봉 평균은 1977만원이지만, 500대 기업에 들어갈 경우 평균 연봉은 3102만원으로 뛰어오르기 때문이다.[4] 처음에는 1125만원으로 시작하지만 소득 격차는 연차가 쌓일수록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주상복합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하는 사람과, 삶의 터전을 잃기 싫어서 '생떼거리'를 부리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의 차이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문제는 그 '번듯한 직장'에서 사람을 뽑는 방식이다. 공직자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의 역사는 고려 광종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조선왕조 600년을 거쳐 일제시대를 통해 현대 한국에까지 고스란히 승계되고 있다. 사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대기업은 중소기업에서 유능한 경력사원을 선발하는 것보다는, 공채를 통해 신입사원을 뽑는 것을 선호한다. 이 시험들의 공통점은 응시자의 이력서를 꼼꼼하게 본다는 것과, 최후의 관문인 면접시험이 있다는 것이다.

20대는 바로 그 면접관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길들여지고 있다. 사법시험의 경우 올해는 10명, 작년에는 11명이 심층 면접에서 떨어졌다.[5]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은 '자기 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촛불시위에 나갔다가 체포되어 경찰 기록이 남기라도 한다면, 분명히 불이익이 돌아올 테니까. 대기업 입사시험을 준비하고 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재벌 그룹들은 나름의 인성 평가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금산분리 완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같은 질문 앞에서, 젊은이는 소신대로 답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회사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해야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통박'을 굴려야만 한다.[6]

20대가 '보수화'하고 있다는 표현은 그런 의미에서 적절하지 않다. 20대는 비굴해지고 있다. 한 손에는 월급 통장을, 한 손에는 물대포와 곤봉을 들고, 우리 사회는 20대를 '꺼삐딴 리'로 만들어가고 있다.





1. 안수찬.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민원인은 생떼쟁이?." 한겨레21, November 28, 2008.
2. 3. 변진경. "'청년 백수' MB맨 어디서 뭐하나 ." 시사IN, January 12, 2009.
4. "대졸자 초임 양극화 심화…대기업이 중소기업 1.5배 | 관점이 있는 뉴스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15115453§ion=02.
5. 서동욱. "사법시험 3차 심층면접, 10명 탈락." 머니투데이, November 25, 2008.
6. 송형석. "[취업! 길은 있다] 인성·적성검사‥회사와 궁합맞는 인재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 한국경제, September 16, 2008.

2009-01-20

서울 속 팔레스타인


1월 20일 새벽, 용산 현장 (서울=연합뉴스)


이스라엘은 탱크와 헬리콥터와 최신식 무기를 가지고 있다. 또한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발사하는 로켓을 단순한 '폭력'으로 치부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경찰은 방패와 물대포와 최루탄과 몽둥이를 가지고 있으며, 최후의 경우 총을 쏠 수도 있다. 경찰은 시민을 상대로 싸워서 질 수 없는 집단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싸워서 질 수 없듯이, 경찰도 시민을 상대로 싸워서 질 수가 없다.

화염병을 썼으니까 죽어도 싸다는 사람들, 정말 역겹다. 이스라엘 쪽으로 로켓을 쏘니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어도 좋다는 말과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습격은 미국의 정권 교체와 맞물려 책임 추궁이 늦어지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로, 경찰청장 교체기에 벌어진 이 사건의 책임 추궁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폭력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들이 현존하는 폭력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들의 비폭력에 반대한다.

2009-01-18

소액금융, 한국에서 성공하기 힘든 이유

두 은행 이야기: 정보와 인센티브 관점에서에 트랙백

그라민 은행의 성공 사례가 인구에 회자되면서, 국내에서도 소액금융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 각각은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원인은 간단하다.

소액대출은 그 성질상 신용대출일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신체포기각서라도 받지 않는 한) 채무액에 상당하는 담보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용대출로 향할 수밖에 없는데, 그라민 은행이 취한 것 같은 구조는 현재 한국 및 기존 개발국가에서 성립하기 어렵다.

그라민 은행의 신용대출 방식은, 굳이 말하자면 '오가작통법'에 의거하고 있다. 다섯 명의 대출자가 서로 연대보증을 서주는 방식이다. sonnet님이 요약한 내용에 따르면,

그라민은행은 기본적으로 대출 희망자가 나타나면 다섯 명의 대출희망자를 모아 그룹을 조직할 것을 요구한다. 일단 그룹이 결성되면 이들에게 그라민 은행과 그들이 받는 대출에 대해 교육시킨다. 그리고 그룹원 다섯 명을 개별적으로 면접하고 구두 시험을 통해 이들이 내용을 숙지했는지를 평가하여 합격했을 경우에만 대출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은행 측은 개개인의 가난 극복과 자립에 대한 의지를 면밀히 관찰한다. 대출 과정 또한 독특하다. 그라민 은행은 일단 다섯 명 중 한 명에게 융자를 제공한다. 이어 두 사람에게 융자를 준다. 6주 동안 원리금 상환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이 확인되면 마지막 두 명에게 융자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채무불이행이 발생하면 그룹 멤버 전원에 대해 대출이 중단된다.
"두 은행 이야기: 정보와 인센티브 관점에서"(a quarantine station, 2009년 1월 18일)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이런 짓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라민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그룹은 십중팔구 같은 마을에 살거나, 친척이거나, 두 집합의 교집합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혈족의 유대감, 지역 공동체 거주민들끼리의 유대감이 모두 사라져버린 현대 한국에서 위와 같은 구조는 성립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친척이라고 해서 특별히 가까운 거리에 살거나 하지 않는다. '친척에게 연대보증 서주었다가 쫄딱 망하는' 괴담이 횡횡하고 있는 사회가 현대 한국 사회인 것도 사실이다. 친척이란 한 해에 두 번, 설날과 추석에 만나는 사람들이지, 경제적인 운명을 함께할 '공동체'가 아니다.

덧붙여 한국의 산업 구조가 이미 고도화되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유누스가 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가 지금 내 손에 없어서 정확한 인용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책에 등장하는 성공 사례들은 대부분, 한 마리의 암소를 사서 잘 기르거나, 몇 마리의 암탉을 사서 알을 뽑아내거나, 또띠아 포장마차를 열어서 장사를 하는 등, 소농을 포함한 소액 사업들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러나 한국처럼 이미 발전한 산업사회의 경우, 그런 작은 사업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돈을 빌리는 것은 굳이 친척들의 도움과 감시를 필요로 할만한 일이 아니다. 가령 붕어빵틀을 빌리는 것. 수십만원이면 가능하고 그것은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인보증을 요하지 않는 신용대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미 '마이크로 크레딧'은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런 작은 규모의 사업을 해서 그 돈을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산업이 고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규모 사업의 수익성은 날로 약화되고 있다. 그것은 자본 투입으로부터 회수까지의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동네 구멍가게라도 하나 차리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한데, 그것은 소액금융에서 염두에 두는 그런 작은 빚의 범주를 넘어선다. 사업을 할만한 돈을 빌리는 것은 이미 소액금융의 범주를 넘어서는 액수에 해당한다.

최근 시작된 '인터넷 대안금융'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것은 확실해진다. 이 기사("인터넷 대안금융 '품앗이 금융'이 떴다", 한겨레)에서 인용된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소액금융은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외면하는 이들에게 급한 돈을 빌려주는 ‘현대판 품앗이’"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사이트에서 인용된 사례는 이런 것이다. 오빠의 수술비를 대야 하는데, 자신이 신용불량 상태에 빠져있어서 사채를 빌렸다. 그 사람이 사채빚을 갚기 위해 인터넷에서 자신이 올린 사연을 보고 평가할 다수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돈을 빌린다.
김씨는 이런 사연과 함께 가계 수입·지출 내역, 자신이 부담할 이자율과 몇 달에 나누어 갚을 것인지를 올렸다.

글을 본 회원들은 김씨가 돈을 제대로 갚을지를 두고 사이버 투표를 벌이고, 게시판을 통해 당사자에게 질문을 하고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회원 38명이 2만~4만원씩 모아 100만원을 빌려줬다. 이 사이트에선 한 사람이 보통 100만~200만원을 빌리지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30~50명이다. 돈을 갚을 능력이나 의지가 의심돼 대출자들을 못 모으면 빌릴 수 없다. 김씨가 다달이 내는 원리금은 사이트를 통해 대출자들에게 분배된다.
"인터넷 대안금융 ‘품앗이 대출’ 떴다", 한겨레

기사에서 인용된 것 같은 사례에서, 대출자가 그 돈을 갚을 수 있을만한 여력이 있는 경우, 혹은 고정적인 수입원을 가지고 있는 경우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라민 은행이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사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라민 은행의 소액금융은 '급전을 막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자립의 첫 단계를 시작하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종합해보면, 한국에서 방글라데시와 같은 그런 소액금융은 성공하기 어렵다. 그것은 한국 뿐 아니라 여타 산업적으로 이미 발전한 국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것은 지나친 고액의 부채를 갚기 위한 소액금융인데, 그것 또한 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미 확립되어 있는 성공적인 소액금융의 구조는, 전통적인 사회 구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2009-01-16

누가 타인의 비극을 평가하는가?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간인 피해와 그 참상에 대해서는, 이 한 장의 그래프면 충분할 것 같다.


출처: “Is Israel guilty of war crimes in Gaza?: But is it a crime?,” The Economist, January 2009, http://www.economist.com/world/mideast-africa/displaystory.cfm?story_id=12957301&fsrc=rss.

UN 학교에 민간인들이 모여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몰랐을 리가 없고, 또 그곳을 '실수로' 공격했을 가능성도 사실상 없다. 이스라엘을 ICC로 끌고갈 수도 없고 설령 기소한다 해도 유죄를 입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이건 정말이지, 끔찍한 범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유태인들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가 과연 그렇게까지 엄청난 비극인가?'라는 식의 비아냥 내지는 회의주의가 없잖아 있는 듯하다. 나는 그런 시각에 절대 찬성할 수 없다.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만행을 고발하는 것과, 그들이 국가 건설 이전에 당했던 비극을 폄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가령 허지웅님의 이 의견을 살펴보자.

또 2차 세계대전 이야기다. 또 유태인 학살 이야기다. 또 유태인을 지켜낸 영웅 이야기다. 어휴 지겨워. 유태인 학살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자 기억되어야만 할 기록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세계사의 그 숱하게 많은 학살을 다 외면하고 유독 유태인의 희생만 숭고한 듯 꾸준히 복기하는 할리우드의 도덕률은 볼수록 지루하고 의도가 짜증스럽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분쟁, 그리고 미국 정부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자면 더욱 그렇다.
"디파이언스, 살아남는다는 사실의 숭고함", ozzyz review, 2009년 1월 16일.


'중요한 사건', '기억되어야만 할 일' 정도의 수식어를 붙여줬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건설하고자 했던 시온주의자들은, 본디 800만명 정도의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최대치로 추산해볼 때) 600만명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일은 예상만큼 쉽게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생긴 나라가 아니라, '홀로코스트에도 불구하고' 탄생한 나라인 것이다(참고: "이스라엘을 다시 생각한다",《Foreign Policy》, 2008년 5/6월호). 유태인 자본이 영화계에 손을 뻗치고 있고, 그래서 그렇게 지겹게 홀로코스트니 유태인이니 나치의 잔혹함이니 하는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설명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말 끔찍한 일을 겪고 살아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비극을 논함에 있어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인간적인 품위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유독 유태인의 희생만 숭고한 듯 꾸준히 복기하는 할리우드의 도덕률"이라는 표현의 이면에 담긴 정서를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너만 슬퍼? 세상에 당한 사람이 너만 있는 줄 알아?'라고 핏대를 세우는 그런 광경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피해자 정서'라는 것이 있고, 한국인들의 징그러운 질투심은 그 피해자 정서에마저도 적용된다. 나도 피해자인데, 나도 당했는데, 누가 나보다 더 큰 소리로 '힘들다, 괴롭다, 당했다'라고 토로하는 광경을 보면 곱게 넘기지를 못하는 것이다.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여야 직성이 풀린다. '너만 괴로운 거 아니야. 유난 떨지 마.'

홀로코스트를 보며 미국 이주민들의 인디언 학살이라거나, 한국전쟁 당시에 자행된 양민 학살, 또는 그 외 세계사의 숱한 학살 사례들을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이지 불편해진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으로 인류사에 만연한 학살을 보며 괴로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즐겨 보는 헐리우드 영화에, 유태인'만' 피해자인양 묘사되는 것을 마땅치 않아 하고 있을 따름인 것 같다. 게다가 그 유태인들이 세운 인공국가 이스라엘은 세계 최고의 학살 주범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것은 좌파적, 진보적, 도덕적이며 심지어 쿨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을 비판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를 '평가'하려고 들고, 다른 비극과의 경중을 논하려 드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상 벌어진 학살들은 각각의 이유와 전개와 논리와 수수께끼를 포함하고 있다. 일부에 대한 관심이 다른 것에 대해 지대하다 해서, 하나의 가치가 다른 것에 비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것이 저평가당하는 것도 아니다. 도덕적인 관심과 학문적, 또는 예술적인 관심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인해 가자 지구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성과 어린이 사망자 수의 그래프를 인용했다. 나는 현대 국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한다.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희생자 정서'를 드러내며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다른 것에 비해 과도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둥, 유태인이라서 그렇게 관심받는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이스라엘의 만행을 비판하고 싶거든, 스스로 먼저 인간의 기본을 지켜야 한다. 가해자로 돌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서 또한 결국은 '피해자 정서'에 불과하다. 자신들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는 이유는, 반유대주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범죄 단체를 소탕하다가 민간인의 피해가 생기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비일비재했지만, 하필이면 자신들이 유태인이기 때문에 그게 도드라져 보인다, 이런 논리를 구사한다.

유태인이라서 홀로코스트가 더 주목받는다는 논리나, 유태인이라서 가자 지구 폭격이 더 비난받는다는 논리나, 둘 다 인종주의이면서 동시에 발화 주체 각각의 피해자 정서를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한국인들은 (사실 자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역사상의 학살을 빌미로 유태인들이 겪었던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저울질한다. 한편 유태인들은 (다소 극화되어 있는) 유태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토대로,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가자 지구의 비극을 가볍게 넘기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묻고 싶다. 누가 감히 타인의 비극을 그런 식으로 저울질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