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06

시대착오에 대하여

잘못된 시대에 태어났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올해로 한국 나이 스물 일곱이 된 나는, 정말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것 같다. 내가 사랑하고 동경하는 세계들이 내게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그것들이 멀어지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향해 다가가고 있지 않아서도 아니고, 또 그것들이 나로부터 부러 멀어지고 있어서도 아니다. 내가 사랑하고 동경하는 어떤 세계, 단정한 문장 속에 뜨거운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사람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시대가 점점 흐릿하게만 보이는 것은, 그것이 통째로 부서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황혼을, 청춘의 한복판에서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저널리즘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시에 지식인의 위기 또한, 프랑스에서는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2000년대부터 꾸준히 논의되어 왔다. 저널리스트와 지식인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전자가 사실을 직접 발굴하여 의견을 생산하는 사람들이라면, 후자는 이미 만들어진 텍스트 속에서 다시 언어를 발굴해내고 다듬는 것을 주된 업무로 삼는다. 저널리스트인 동시에 지식인일 수 있고, 지식인인 동시에 저널리스트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어쨌건 둘 다 언어를 일구어내는 사람들인 것이다.

미국인의 시민사회가 국부로 섬기는 사람은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그는 죽을 때 자신의 묘비명을 A Printer라고 새겨달라고 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익혔고, 신문 기사를 쓰며 자신의 관점을 남에게 전달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저널리즘과 지식인의 성장이 서로 얽혀있는 것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관지를 편집했다. 당시의 편집자들은, 지금도 종종 그렇지만, 펑크난 기사를 자기 손으로 채워넣어야 하는 노가다꾼 역할까지 해야 했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와 함께 《상황》을 창간한다. 한편 네오콘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기 위해 《위클리 스텐다드》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아주 넓게 보자면, 특정 분야의 학문 연구자들 또한 대단히 제한된 의미의 저널리스트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들 또한 어떤 '저널'에 글을 쓰기 위해 그 모든 연구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Kant Studien》은 칸트에 대한 독일어권의 연구를 다룬다. 한편 《Nature》는 포괄적인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에 대한 최신 소식을 담아내는 저널이다. 그 '잡지'에서 다 다룰 수 없는 내용들은 개별적인 저널들에 실린다. 어느 저널에 어떤 논문을 실었는가, 그것을 읽은 이들이 다른 저널에 또 기사를 쓸 때 자신의 글을 어느 정도 참조하는가에 따라 학자의 인생이 갈린다.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저널리스트'들이 대중을 상대로 '저널'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학자들은 해당 저널에서 다루는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동료 학자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저널'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을 뒤흔들어놓는데에는 한 권의 책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을 꾸준히 모아내고, 다듬고,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정기간행물이 필요하다. 《뉴욕 타임즈》를 읽지 않는 뉴요커 지식인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Medline이 저널 이름인지 DB이름인지도 모르는 심리학도를 상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저널을 읽는 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그 저널에 글을 쓰는 것은 그 사람이 여느 '독자'는 아님을, 하나의 완결된 순환 체계를 갖춘 이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저널리즘에는 황혼이 드리워지고 있다. 저널리즘의 왕국이라 할만한 미국에서도 이미 여러 개의 적신호가 켜진 상태다. 《Time》지의 편집장인 월터 아이작슨은 "How to Save Your Newspaper" (2009년 2월 5일)에서, 이미 미국에서조차 신문을 돈 주고 사서 보는 사람보다 온라인에서 공짜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고, 심지어 자신마저도 뉴욕타임즈의 정기구독을 해지했다고, 가판 판매와 정기구독, 광고 수입의 세 다리로 버티고 있던 앉은뱅이 의자가 쓰러질 상황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문 기사를 많이 읽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돈을 내고 읽지는 않는다. 신문 기사를 공짜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바그다드에 특파원을 보내거나 르완다에 프리랜서 리포터를 보내는 일이 공짜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뉴욕타임즈 또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데이빗 스웬슨과 마이클 슈미트는 "News You Can Endow"라는 기고 칼럼을 통해, 차라리 이 수익성 없는 사업을 공공 기금이 운영하는 공적 사업으로 전환해버리자는 획기적인 주장을 펼쳤다. 물론 공공 기금이 신문을 운영하게 된다면, 지금처럼 '정치적 의견'을 담은 칼럼을 실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블로그와 인터넷 공간에 그런 '의견'은 넘쳐나는데 뭐가 문제인가? 그들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저널리즘의 핵심은 사실을 추적하여 그것을 보도하는 데 있다. 그 기능만큼은 온전히 살려 놓아야 시민사회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최소한의 발판이 마련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전통적인 저널리즘이 죽어가고 있고, 그마나도 인터넷 광고주에게 목을 매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공익성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도발적인 주장에 대해 수많은 독자 편지가 답래했고, 그것은 "Imagining Newspapers of the Future"라는 제목의 독자 편지란으로 집결되었다. 다양한 해법을 독자들이 제시하였고, 그 중에는 '아하' 하며 무릎을 치게 하는 것도 종종 있지만, 저널리즘을 뒤덮고 있는 우울한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저널리즘은 죽어가고 있다. 동시에 지식인이라는 존재 또한 시장 논리에 의해,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시장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상황으로 인해, 입지를 잃어가고 있다.

사르트르 가 말한 것처럼, 지식인이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영역 밖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탄생하는 사회적 존재다. 문제는 과연 그 '전문가'가, 자신의 영역 밖으로 목소리를 낼 때, 어떻게 그가 '상식적'인 선을 지키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상식을 바꾸어낼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저널리즘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좋은 저널리즘이 튼튼하게 버티고 있지 않다면, 전문가는 자기 영역 밖의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낼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지식이 과연 확실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 마이크 데이비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나는 방금 책꽂이에서 그의 칼럼 모음집 In Praise of Babarians(HaymarketBooks, 2007)를 꺼냈다. 그리고 가장 뒷 페이지를 펼쳐 참고문헌 목록을 들여다보았다. 제일 처음 등장하는 인용 매체는 다름 아닌 《The New Yorker》다. 두 칸 내려가면 WSJ가 나오고, 8번 각주는 LA Times가 차지하고 있다. 나는 마이크 데이비스의 스칼라십을 문제 삼고 있지 않으며, 동시에 국내 저자들 또한(특히 강준만의 경우) 국내 매체를 적극적으로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쳐낸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굳이 지적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거리에 대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마르크스는 최초로 정부 발행물을 학술적 저작물에 인용하기 시작한 학자였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른바 '주류 언론'의 기사를 인용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흔히 말하는 '중심부 국가'의 전문적인 학자들이 '지식인' 행세를 할 수 있는 데에는, 이렇듯 신뢰할 수 있는 저널리즘이 그 뒤를 받쳐주고 있다는 것 또한 이유로 지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과 의견은 명료하게 분리되어 있고, 그래서 그 매체의 논조를 탐탁찮게 여긴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 사실만을 추려내어 자신의 입장을 구성할 수 있다. 공연히 '진실 게임' 따위에 말려들 필요 없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상식'은 그야말로 '상식'으로서 단단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그와 정 반대이다. 언론은 사실과 의견을 전혀 분리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신문을 읽고 세상에 대해 논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참여'가 아니라, 복덕방 노친네의 '꼰대질'로 전락하기 일쑤다. 심지어 신문 기자들마저도 서로의 신문에서, 혹은 자신이 속한 회사에서 만들어낸 신문의 내용이 사실을 충실하게 담고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모든 사실은 왜곡되어 있고, 그 왜곡은 모두 정치적이다. 모든 것은 정치적이고 그래서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고급 정보'를 손에 넣고자 다들 방방 뛴다.

미네르바를 둘러싼 헛소동을 돌이켜보자. 그 사건은 그 미네르바가 가지고 있던 '정보'가 고작 인터넷 서핑질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는 '진실'이 폭로되면서 정점으로 치달았다. 언론들은 그것을 통해 그가 '대한민국 1%'가 아니라고, 진짜 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깎아내렸다. 물론 그의 경제학적 지식의 기본적 소양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타당하고 옳다. 하지만 정보의 출처가 고작 '인터넷 뉴스'라고 깎아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WSJ를 제외한 대부분의 서방 언론이 무료로 컨텐츠를 공개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첩보원'들이 하는 일도 결국 그것과 유사하다. 상대방 국가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모든 일간지와 정기간행물 및 서적을 훑어보며 그것을 재가공해서 '정보'로 만드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탐닉하는 '고급 정보'는 물론 어떤 국면에서 중요하지만, 오픈되어 있는 정보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문제는 과연 그 열린 정보가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느냐이다. 지식인이 활동할 수 있는 사회와 그럴 수 없는 사회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갈라진다.

저널리즘의 몰락은 세계적인 추세로 전개되고 있다. 학자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결국 한 사람의 학자가 되고자 하는 나로서는, 그 몰락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다. 한국어로 만들어지는 저널리즘은 그 수준에 도달해보지도 못한 상태로 허물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읽으면서 한나라당과 싸우고 싶지, 조선일보가 '진실 게임'으로 용산 참사의 프레임을 몰고 가는 모습을 보며 분노하고 싶지 않다. 논조야 어찌 되었건 담백한 정보가 우선 전달되는 저널리즘이,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에서는 성립한 적도 없었고, 수익 모델이 박살나고 있는 현 상황을 놓고 볼 때 앞으로도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NYT와 Times는 저널리즘의 위기에 대해 '공영화', 'iTunes식의 클릭뷰' 같은 해법을 내놓는다. 반면 한국의 신문사들은 방송법을 뜯어고쳐서 방송사를 집어삼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미국에서 재채기를 하면 한국 증시는 감기에 걸린다. 미국 저널리즘이 다리를 절면 한국의 신문사들은 개처럼 기어다니며 풀을 뜯기 시작한다. 저널리즘에 대한 불신과 그 산업의 붕괴가 한국만의 일이라면 훌쩍 털고 도망가겠다는 꿈이라도 꿀 수 있겠지만, 이것은 전 지구적인 현상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상념에 빠져들게 된다.

아도르노에 대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에세이는 그런 우울에 빠져드는 내게 잠깐의 위로가 되어주었다. 사이드에 따르면,

아도르노는 일차적으로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란 그에 따르면 "대상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것에 관심을 두는" 형식이며, "내밀한 형식적 법칙은 이단이다." 아도르노의 의미로 볼 때 에세이스트라는 존재는 당대에 유행하는 모든 것에 영원히 맞서 싸우고 화해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그는 보통 "에세이가 당대에 갖는 의미는 시대착오에 있다"고 말한다. (강조는 인용자) 
140-141p. 에드워드 사이드, 장호연 옮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서울: 마티, 2008)

즉 에세이를 쓰고자 한다면 언제나 시대착오적이어야 한다. 이 말은 잠깐의 위로가 된다. 하지만 시대착오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 그러므로 '에세이를 써야 한다'는 해법을 내가 나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에드워드 사이드는 아름다운 문장과 차분한 해설력을 갖춘 지식인 비르투오조답게, 내가 들어보지도 못한 작가와 알지도 못하는 곡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독자를 유혹하고, 설득하고, 주먹을 꼭 쥔 채 책을 덮게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시대착오적인 에세이는, 같은 의미에서 배은망덕한 것이기도 하다. 귀를 기울이는 독자들에게 불협화음을 들려주고, 눈을 떼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러 추한 것과 끔찍한 것을 현시한다. 당혹스러워하는 독자를 향해 지식인은 피식 비웃는다. '아무튼 너는 내 글이 실린 잡지를 산 거야. 독자님, 감사합니다.' 지식인의 삶의 양태를 지탱해주는 물질적 토대가, 원고지 한 장에 얼마씩이라도 온전히 주어지던 시대에는, 그런 배덕자들 또한 얄팍한 지갑의 틈바구니에 숨어 시민권을 보존하고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나약한 20대라서 이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솔직하게, 느끼는 그대로 말해보도록 하자. 공짜가 아니면 읽지 않고, 공짜가 아니면 보지 않는 이 세상은, 바로 그 배은망덕한 자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나는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것 같다.




언급된 기사와 책들


Isaacson, Walter. “How to Save Your Newspaper.” Time, February 5, 2009. http://www.time.com/time/business/article/0,8599,1877191-4,00.html.

Swensen, David, and Michael Schmidt. “News You Can Endow.” The New York Times, January 28, 2009, sec. Opinion. http://www.nytimes.com/2009/01/28/opinion/28swensen.html.

“Imagining Newspapers of the Future.” The New York Times, January 31, 2009, sec. Opinion. http://www.nytimes.com/2009/01/31/opinion/l31endow.html.

Davis, Mike. In Praise of Barbarians: Essays against Empire. Haymarket Books, 2007.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 10점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장호연 옮김/마티

2009-01-30

간단한 설문 조사

"구경꾼의 구성"에서 몇 분의 방문자들이 같은 내용으로 반복해서 리플을 달고 있지만,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이미 충분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한다. 적극적 참여자인 A와, '민주 시민'으로서 경찰의 공권력 남용 문제에 관심이 많은 C가 주를 이루는 구경꾼 집단은, '오지라퍼'인 B보다 훨씬 철거민 문제에 적극적이며 또한 피해자들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이 내 주장이다.

그것을 확인해보기 위해 간단한 설문조사를 진행해보자. 메모장같은 간단한 프로그램을 띄우거나, 메모를 할 수 있는 종이를 준비하면 좋다. 어제 그린 표를 다시 인용한다.


 
경찰의 공권력 남용, 공공의 선
 
관심 있음
관심 없음
갈등의 축
사적 이익 배분 및 조정 문제
관심 있음
A: 적극 참여자
B: 오지라퍼
‘진실 게임’
관심 없음
C: ‘민주 시민’
D: 방관자
‘꼭 투표하세요’
 
갈등의 축
진짜 진보 논쟁
그 글쎄...
 


이 표를 1분간 잘 살펴본 후, 자신이 어느 사분면에 속하는지 적어두자. 나 같은 경우, 말하는 건 C에 가깝지만 실상은 A에 속한다. 철거민들이 받았던 보상금이 턱없이 부족했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물론 난 이 블로그에서 그것을 '입증'할 생각도 없고, '반증'하겠다는 사람에게 대응할 생각도 없다).

그리고 아래 계좌 번호를 그 메모장에 적는다.

농협 067-02-302163 예금주 이종회

용산 철거민 문제 대책위원회의 후원계좌 주소가 바로 이거다. 다 적었으면, 이 계좌에 후원금을 입금한다. 적어도 1만원은 되어야 하겠다. 대개의 경우 결혼식이나 장례식의 축의금/부의금처럼, 3만원에서 5만원 정도가 적정선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입금을 해보자.

그리고 자신이 입금한 시간을 (액수는 사생활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굳이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까 그 메모장에 적는다. 그러면 이런 정보가 나올 것이다.

이름 | 구경꾼 유형 | 후원금 입금 일시

가령 나 같은 경우, 이름은 노정태고, 구경꾼 유형은 A이며, 후원금은 2009년 1월 28일에 입금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후원금을 이미 입금하였거나 앞으로 그럴 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A나 C에 속할 것이다.

"경찰의 폭력적 진압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나는 철거민들이 받는 보상금이 너무 적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을 후원한다"고 말할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내 가설에 대해 살아있는 반례를 제공하기 위해 후원금을 보낼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사분면 B에 속하는 구경꾼보다는 C에 속하는 사람들이 더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거지에게 동전을 던져주네 마네 하는 폭력적이고 몰상식한 언술을 보며 나는 정말 화가 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연대이지, 값싼 동정과 적선이 아니다.


* 이미 입금하신 분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입금하신 분들, 모두 리플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구경꾼의 구성

"구경꾼의 역할"(sonnet)에 트랙백


sonnet 님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이 세웠던 전략을 '구경꾼 끼워들이기'라는 큰 틀에서 설명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모든 갈등의 결과는 이에 관여하는 구경꾼의 규모에 따라 결정"되며, 또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은 갈등의 범위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위 두 가지 명제는 모두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약한 쪽은 구경꾼을 많이 동원할 경우에만 커다란 잠재적 힘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강한 경쟁자는 자신이 상대방을 구경꾼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므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데 주저할 수 있다"는 샤츠슈나이더의 말은 매우 타당하다. 용산 철거민들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농성전을 시작한 것은 '구경꾼'으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반면 경찰은 구경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새벽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해산 작전에 돌입했다.

이 지점까지는 sonnet님의 분석에 나 또한 무리 없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sonnet님은 "사적인 갈등에서 경쟁자들 간 힘의 관계는 언제나 불평등하기 마련이므로, 당연히 가장 강력한 특수이익은 사적인 해결을 원한다" 는 사실에 주목하여, "보상금의 액수와 보상 방식 등은, 개발 조합과 세입자들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었어야 할 사항"이라는 내 주장을 검토한다.

내가 말한 대로 보상금 문제를 당사자간의 문제로 취급한다면, '용산구청의 수수방관'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사라지게 되며, 구경꾼을 더 확보하여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했던 철거민들의 전략은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문단을 길게 인용해보자.

이 문제가 개발조합과 세입자들의 사적 협상을 통해 결정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했다면, 왜 용산구청에 저런 강력한 비난과 책임을 묻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반대로 구청이 세입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사적 협상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빛을 잃게 된다. 사실 사적 협상에서 한 쪽의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쪽만 잘 정의된 재산권을 갖고 있는데, 양 쪽의 협상력이 대등하다면 그게 신기한 일이 아닐까?


여기서 sonnet님은 두 가지 요소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구경꾼'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용산 철거민의 보상금 문제 중 실질적인 부분, 즉 권리금과 기타등등 금전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과, 용산구청 또는 전철연처럼 협상 당사자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들이 실제 협상 과정에 개입하고 영향을 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비유하자면, 전자는 법정 객석에 앉아있는 방청객과도 같고, 후자는 원고나 피고의 옆에 앉아있는 변호사와 마찬가지이다. 내 글 "당신들의 인민재판" 의 취지는 '거기, 방청석 좀 조용히 합시다'였지, '변호사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가 아닌 것이다. 가령 "철거 문제 자체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언급이나, "정작 문제가 터지고 나면 이런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신문 몇 줄 찾아 읽은 고시생들이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인민재판을 주도하기에 바쁜 듯하다"는 비아냥을 통해 의도한 바도 그런 것이었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팩트'를 운운하는 인민재판을 멈추어라'는 주장은, '용산구청은 세입자들의 편에서 개입했어야 한다'는 주장과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 하나는 구경꾼들의 입장과 관련된 정치적 발화인 반면, 다른 하나는 공권력의 작동에 대한 시민적 발화에 더욱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해산 작전이 실패하고 사람이 여럿 죽게 되어 갈등의 전면적인 사회화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일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지점에서 이상적인 '구경꾼 만들기'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샤츠슈나이더의 말처럼, "약한 쪽은 구경꾼을 많이 동원할 경우에만 커다란 잠재적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가장 이상적인 구경꾼을 구성할 수 있을까?

 
경찰의 공권력 남용, 공공의 선
 
관심 있음
관심 없음
갈등의 축
사적 이익 배분 및 조정 문제
관심 있음
A: 적극 참여자
B: 오지라퍼
‘진실 게임’
관심 없음
C: ‘민주 시민’
D: 방관자
‘꼭 투표하세요’
 
갈등의 축
진짜 진보 논쟁
그 글쎄...
 


위 표를 통해 1월 20일 화재 발생 이후 이 사건의 구경꾼들을 분류해보도록 하자. 경찰의 공권력 남용, 또는 공공의 선, 넓게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 표현 등에 관심이 있는지 여부를 가로축에 놓는다. 철거민들이 받은 보상액의 크기, 전철연의 폭력성, 용산구청 공무원들의 짜증 등에 대한 관심 여부를 세로축에 놓는다. 이 경우 우리는 2*2짜리 표를 하나 얻을 수 있다.

두 가지 사항에 모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A에 해당한다. 우리는 그들을 '적극 참여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열성적인 관심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한편 경찰이 컨테이너로 망루를 흔들어서 불이 났건 말건,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3000만원이면 충분한 것 아닌가', '권리금이란 무엇인가?' '적절한 보상 액수가 얼마가 되어야 하는가?'등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B에 속한다. 나는 그들을 편의상 '오지라퍼'라고 부르겠다.

반면 철거 대상 지역의 세입자들이 받았어야 할 보상금의 액수 문제 등에는 관심이 없고, 경찰이 사람 잡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좌파'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판이 가능하다. 철거 문제는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며, 이명박 정부만 사람 잡은 것도 아니다, 이런 비판 말이다. 그 모든 의미를 종합하여, C에 속하는 사람들을 '민주 시민'이라고 해보자.

마지막으로 그러거나 말거나, 아침에 용산역 부근 지나갈 때 차가 막혀서 짜증이 났을 뿐,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을 D라고 하고, 그냥 '방관자'라고 이름을 붙여 놓는다.

이 경우 조선일보를 포함하여 '팩트'를 유포하는 신문들이 구성하고자 하는 구경꾼은 B에 속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신문들은 경찰이 과잉진압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거론되지 않거나, 거론되더라도 철거민의 보상금이 애초부터 넉넉했는데 더 달라고 지랄하다가 죽었다, 이런 식으로 해석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sonnet 님의 표현대로 "해산 작전이 실패하고 사람이 여럿 죽게 되어 갈등의 전면적인 사회화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일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러므로 구경꾼의 수를 그냥 줄일 수는 없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구경꾼인 B를 형성하는데 주력할 것이다(실제로도 그랬다).

'당신들이 '팩트'에 집착하는 것은 인민재판과 다를 바 없다, 공권력의 폭력적 행사에 주목하라'는 주장은, B에 속하는 구경꾼을 해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한편으로는 A에 속하는 구경꾼과 B에 속하는 구경꾼 사이에서 벌어지던 논쟁, 이른바 '진실 게임'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구경꾼에 속하지 않고 있었던 이들을 추가적으로 C로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내 포스트가 올라온 후, 기존에는 다소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던 블로거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그들이 C의 구경꾼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갈등의 축이 계속 A-B에 머물러 있다면, 공권력 남용 문제에 관심이 있다 해도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없다. B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꾸 다른 '팩트'를 들이대며 '진실 게임'을 하자고 나서기 때문이다.

'전철연, 과연 6000만원으로 무엇을 했는가?' 이따위 질문이 날아오면 '6, 70먹은 노인들이 골프공 좀 던진다고 그렇게 나와야 하냐?'라는 대답이 등장할 수 있다. 그러면 아마 B에 속하는 사람들은 '전철연이 투석전 훈련도 시켰다'느니 운운할테고, 논쟁은 바로 이 수준에서 벌어진다. 이건 참 피곤한 일이다.

sonnet님이 인용하는 맥락을 보면, 샤츠슈나이더는 '구경꾼이 더 많이 참여할수록 사회적 약자의 협상력 강화에는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비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A-B의 갈등 구조, 즉 '진실 게임'은 본질상 쉽사리 식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B에 속하는 구경꾼들은 잠깐 머릿수를 불려주는 것 같지만 금방 분위기를 깨뜨리고 판을 망가뜨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런 식의 '사회적 관심'이 냄비처럼 끓어올랐다가 식어버린 사례를 수도 없이 알고 있다.

반면 B에 속하는 구경꾼을 해산하고 C에 새로운 구경꾼을 집어넣는다면, A-C에서 갈등의 축이 형성될 수 있다. A에 속하는 이들은 C에 속하는 '민주 시민'들을 바라보며, '너희들은 이명박을 까기 위해 철거민 문제에 관심있는 척 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아냥거린다. 반면 C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명박이 싫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라고 말하다가, '민노당 진보신당 이래서 안 돼, 쯧쯧'하고 혀를 찰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수없이 접해온 '진짜 진보', 또는 '개혁세력'에 대한 논쟁의 틀과 일치한다.

재미삼아 우리는 C-D의 갈등축, 그리고 B-D의 갈등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C에 속하는 '민주 시민'은 D에 속하는 '방관자'에게 '그러니까 다음번 선거는 잘 하자, 그런데 당신은 XXX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운을 띄울 것이다. 노골적으로 한 후보만 지지하면 너무 속이 뻔히 보이니까 '꼭 투표하자 씨발' 이러면서 문장을 마무리지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B-D의 갈등축은, 과연 그게 생기긴 할지 잘 모르겠다. D에 속하는 사람이 B를 보고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돈이나 벌어'라고 하지 않을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미 용산 철거민 문제가 사회화되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볼 때, A-B의 갈등 구조로 이루어진 구경꾼 집단을 해산하고, 대신 A-C로 이루어진 구경꾼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 철거 피해자들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A나 C에 속하는 사람들이 '철거민 편'에 속할 가능성은, B나 D에 속하는 사람들에 비해 월등하게 높다. 게다가 공권력과 공공성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내 문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점에서, 이후 구경꾼을 더 끌어들이는데에도 훨씬 유리하다.

내가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과, 내가 그 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은 분명히 다른 층위를 구성한다. A-C의 갈등 라인으로 구경꾼을 형성하고자 한다면, 후자의 가능성을 모든 이에게 개방함으로써 한층 폭넓은 구경꾼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길게 표를 그리면서 설명하였지만, 이것은 간단하게 보자면 한없이 간단한 문제이다. 철거 문제에 대한 '본질적 해결' 여부와는 무관하게, 일단 이 사건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라면, 경찰의 폭력에 분노하고 용산구청의 '생떼거리' 간판에 치를 떠는 사람들을 가능한 한 더 많이, 더 확고한 구경꾼으로 붙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B에 속하는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과연 손실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은 갈등의 범위와 관련되어 있다 … 갈등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싸움에 구경꾼을 끌어들이거나 배제하는 데 성공하느냐에 따라 승자가 되기도 하고 패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방향으로 논점을 정리하는 것을 "갈등을 사회화하기 위해 그동안 노력해 왔던 세입자들의 주된 관심사에서 이탈하는 방향"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닌 것 같다. 시위 참가자들이 구속, 연행되는 지금도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더 많은 보상금의 확보'에 머물러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에게 유리한 구경꾼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더욱 사회화해야 하고, 또 그 갈등의 축은 공권력의 집행을 중심으로 삼고 있어야 한다.

2009-01-29

어떤 일

25일 밤부터 가을이가 화장실에 너무 자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26일, 27일 이틀동안 엄청난 양의 모래를 방바닥에 흩뿌리며, 5분에 한 번 꼴로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찔끔 소변을 보고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 혹시나 싶어서 수요일 오전에 병원에 데려갔다. 역시나 방광에 결석이 생겨 있었다.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고,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팔 수 있는 사료를 먹이고 있자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람과 달리 고양이는 말을 할 수 없다(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소리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개에 비해 현격하게 좁기 때문에, 아파도 제대로 낑낑거리지 못하고 이상한 행동만 하기 일쑤다. 가을이도 그랬다. 방광이 쓰라렸을 텐데, 칭얼거리지 않고 꾹 참고 있었다.

병원에 갔다 오고 나니 사태가 호전되고 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어제 아침에 비해 훨씬 화장실에 덜 들락거렸고, 편안한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행이다.

2009-01-23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는가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는가(경향신문, 2009년 1월 22일)


1월 20일,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인해 용산구 철거민 여섯 명이 사망했다. 이런 세상이다. 20대가 '왜' 보수화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은 우문(愚問)에 지나지 않는다. 그 참사를 겪고 난 다음에도, 용산구청은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제발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힌 현판을 떼지 않고 있다.[1] 돈 없으면 구청에서 민원을 해도 '생떼거리' 취급을 당하고,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한겨울에 철거당하고 빈 건물로 내몰린 다음 목숨을 잃게 된다. 순우리말 '생떼거리'의 어감이 이토록 징그러울 수가 없다.

20대 문제에 대해 올바른 답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질문을 고쳐 물어야 한다.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고 있는가? 지금의 20대는 투쟁의 주역에서 '투정'의 주역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용한 것이 바로 현 정부의 대선 캠프였다. 부산 사는 청년 백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영민씨. 그는 이명박 후보 지지 연설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직장을 잃었고, 어머니가 시장 바닥에서 반찬을 파는 것으로 가정의 생계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며 울먹였다.[2]

이명박 후보에 대한 이영민씨의 지지 연설은, 청년 실업 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을 포괄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는 "어서 정권이 바뀌어서, 누가 어머니께 '당신 아들 어디 다니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3]는 소망을 피력했다.

대기업 또는 공기업에 입사하거나, 공무원이 되지 않는 한 이 소원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예컨대 '포린폴리시 한국어판'에서 일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소개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반면 '삼성전자'나 '조선일보'에 다닌다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당당하고 말고는 개인의 태도 문제겠지만, 사회적인 대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연봉으로 환산해보면 1125만원이 나온다. 종업원 300인 미만의 536개 중소기업에 들어간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초봉 평균은 1977만원이지만, 500대 기업에 들어갈 경우 평균 연봉은 3102만원으로 뛰어오르기 때문이다.[4] 처음에는 1125만원으로 시작하지만 소득 격차는 연차가 쌓일수록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주상복합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하는 사람과, 삶의 터전을 잃기 싫어서 '생떼거리'를 부리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의 차이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문제는 그 '번듯한 직장'에서 사람을 뽑는 방식이다. 공직자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의 역사는 고려 광종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조선왕조 600년을 거쳐 일제시대를 통해 현대 한국에까지 고스란히 승계되고 있다. 사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대기업은 중소기업에서 유능한 경력사원을 선발하는 것보다는, 공채를 통해 신입사원을 뽑는 것을 선호한다. 이 시험들의 공통점은 응시자의 이력서를 꼼꼼하게 본다는 것과, 최후의 관문인 면접시험이 있다는 것이다.

20대는 바로 그 면접관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길들여지고 있다. 사법시험의 경우 올해는 10명, 작년에는 11명이 심층 면접에서 떨어졌다.[5]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은 '자기 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촛불시위에 나갔다가 체포되어 경찰 기록이 남기라도 한다면, 분명히 불이익이 돌아올 테니까. 대기업 입사시험을 준비하고 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재벌 그룹들은 나름의 인성 평가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금산분리 완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같은 질문 앞에서, 젊은이는 소신대로 답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회사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해야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통박'을 굴려야만 한다.[6]

20대가 '보수화'하고 있다는 표현은 그런 의미에서 적절하지 않다. 20대는 비굴해지고 있다. 한 손에는 월급 통장을, 한 손에는 물대포와 곤봉을 들고, 우리 사회는 20대를 '꺼삐딴 리'로 만들어가고 있다.





1. 안수찬.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민원인은 생떼쟁이?." 한겨레21, November 28, 2008.
2. 3. 변진경. "'청년 백수' MB맨 어디서 뭐하나 ." 시사IN, January 12, 2009.
4. "대졸자 초임 양극화 심화…대기업이 중소기업 1.5배 | 관점이 있는 뉴스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15115453§ion=02.
5. 서동욱. "사법시험 3차 심층면접, 10명 탈락." 머니투데이, November 25, 2008.
6. 송형석. "[취업! 길은 있다] 인성·적성검사‥회사와 궁합맞는 인재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 한국경제, September 16,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