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의 학원광고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유승준의 병역문제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들 중 하나다. 두 사건은 비슷한 구조
하에서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 두 경우 모두에서 해당 연예인보다는, 그들에게 열광한 후 다시 열광적으로 매도하는
대중들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그쪽에도 책임을 묻고자 한다. 역사는 역시나 두 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유승준과
신해철 모두, 한국 특유의 현상으로 보이는 '개념인'이라는 카테고리를 발견한 후, 그것을 적극 자신의 인기를 위해 사용하다가
역풍을 맞은 사례이다. 내가 생각하는 '개념인'이란 이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충 동의하고 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 이야기를, 유독 다른 사람들보다 돋보이게 주창하고 나서서 그들의 지지를 획득할 때 그는 '개념인'이 된다.
유승준의 경우부터 먼저 살펴보자. 한국에는 '남자라면 군말없이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라는 통념이 있다. 하지만 군대 문제 자체가
국가의 폭력과 결부되어 있으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게다가 군대에 다녀온 남성들의 피해의식이
포진해 있기 때문에 연예인이 군대와 관련하여 함부로 농담을 하거나 하면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
이럴 경우 가장
현명한 선택은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누가 말을 시키더라도 가장 소극적인 답변만 하는 것이다.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죠, 헤헤...'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그런 것 말이다. 유승준은 거기서 혁신적인 마케팅 방식을 찾아냈다. 아예 적극적으로
'군대를 가고자 하는 바른생활 사나이'라는 이미지 구축에 나선 것이다. 유승준 개인이 지니고 있던 확실한 스타성에, 그러한
'개념'이 덧붙여졌을 때 그 효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역풍도 확실히 불어닥쳐서, 지금도 유승준은
인천국제공항을 통과하지 못하는 국제 미아 신세가 되어 있는 처지이다. 내가 유승준이라면 가수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정치적
이유에서의 망명 신청'을 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비인간적인 일이다. 대체 그게 뭐가 죽일 일이라고? 물론 정언명법에 따르면 또
십계명에 따르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 하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거짓말도 하고, 걸리기도 하고, 연예인의 경우에는 '참회의
눈물'을 흘린 후 용서받기도 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유승준만은 예외이다. '개념인'이었기 때문이다. 유승준에 대해
아직도 분노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심리에는, 유승준을 철저히 연예인으로 취급하면서도, 동시에 연예인의 범주 바깥에
있는 수준의 윤리 의식을 요구하는 양면성이 포진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사람을 치여 죽여도 '용서'받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군대
간다고 했다가 한국 국적 포기하는 것은 안 된다. 류시원은 '개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승준은 아름다운 청년이었고,
'개념인'이었다. 평가의 기준이 확 달라진 것이다.
신해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유승준보다야 신해철의 '개념
발언'들이 비교적 낫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아무튼 그도 자신이 '개념인'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부인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분노할 뿐'이라는 말이 언제나 양념처럼 덧붙여졌다. 그 유보 조건이야말로 '개념인'을
개념인이게끔 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그저 평범하고 상식적인 것이다, 따라서 내 말에 동의하는 당신은
'안전'하다, 이런 식으로 브레이크를 걸어주지 않으면 '개념인'의 발언은 성립하지 않는다.
신해철은 '상식적'이라는
이유로 노무현을 지지했고, '비상식적'이라는 이유로 이명박을 비판하고 있다. 그가 해명 차원에서 내놓았던 첫 번째 요소가 '각하가
주신 용돈'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개념인'으로서의 자신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내놓은
답변에서도 마찬가지 코드가 좌르륵 나온다. '절라디언', 하지만 '알고보면 깨끗'한 사생활. 그런 것들로 방어벽을 쳐놓고 나서야
신해철은 공교육과 사교육을 분리하여, 자신이 반대하는 것은 공교육일 뿐 사교육에 반대한 적은 없다는 해명을 내놓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해명의 문제점이 아니라(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본다), 그 해명에 앞서 등장한 온갖
'개념인 코드'들이다. 너무도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그 말들. 너무도 '상식적'이지만 아무도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지 않는
그런 이야기들. 그래서 개념찬 발언을 해주는 신해철이 너무도 고마워지게 했었던 그런 것들.
문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념'과, 신해철이 머리에 담고 있는 '개념'이 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깨달아가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 사실만을 적어놓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논의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질문을 더 깊숙히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개념인으로서의 연예인'이라는 통념에는 문제가 없는가? 문제가 있다면, 대체 왜 문제인가?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나는 '개념인으로서의 연예인'을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지식인과 예능인, 진중권의 표현대로라면 '광대'의 입지 모두를 좁히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식인들과 예능인들이 공히 각성해야 하겠지만, 예능인들이 개념인 행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분위기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신해철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고 있지만, 그것 뿐이다.
앞서 말한 '개념인'의 코드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것들은 그냥 '상식적'이다. 그냥 한나라당이고 이명박이다. 그냥 조선일보고 그냥 강남이고 그냥 사교육이다.
'개념인'이 툭툭 던지는 '개념찬 발언'에는 '왜?'가 없다. 복잡하고 어려운 설명이, 혹은 쉽게 잘 이해되지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껄끄러운 그런 진실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개념인은 지식인을 구축한다.
신해철과
같은 '개념인'들이 용산 참사같은 진짜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명박이니까 잘못된 거지,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이러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도 크고 두려운, 진짜 참여와 사유를 하도록 강요하는 그런 사건이 터졌을 때, 그들의
(그리고 어쩌면 당신의) '상식'은 불현듯 입을 다물어버린다.
이명박이 경찰을 함부로 부리는 것은 잘못한 것
같지만 직접 명령을 내렸을 리도 없고 세입자들이 딱한 것도 같지만 연 매출이 억단위라고 그러고 찬 물을 끼얹은 게 잘못이긴 한데
전철연이 개입하고 있었고... '상식'이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팩트'만이 난잡한 시장판을 벌이고 있다.
악순환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사람들이 지식인은 멸시하고 폄하하지만 개념인은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예비 지식인들은,
'대중성'이라는 명목 하에 본래의 역할을 포기해버린다. 누군가를 개념인으로 만들어주는 그 '개념'이 상식과 통념이라면, 지식인
또한 결코 개념인일 수가 없다. 다들 알지만 쉬쉬해오는 것을 폭로하는 사람,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을 회의하게 만드는 사람,
상식과 통념을 파괴함으로써 사회를 위협한다고 모함당하지만 결국은 그에 기여하는 사람이 지식인이라면 분명히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판기에
200원을 넣고 버튼을 누르듯 질문이 들어온다. 나는 그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손쉬운 대답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 그가 욕망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런 욕망에 굴복하고, 그것을 잘 충족시켜준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으면 나 또한 '개념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 나는 개념인이 아니다. 대체 지식인이
뭐냐고 나에게 물으면, 실은 나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지식인이 되고자 지향하고 있고, 그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래야 한다.
개념인이라는 개념은 옳지 않은 개념이다. 그것은 진지한 탐구와 고민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한 두
줄로 요약되는 '어록'을 집어넣고, 사유를 마비시키며,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믿는 대중을 양성한다. 개념인이 있고, 그 개념인의
발언에 열광하는 내가 있다면, 나 또한 개념이 있는 것이다. 이런 손쉬운 삼단논법은 정말 어려운 문제들, 한국 사회가 진지하게
마주봐야 하는 문제들을 상대할 수 없다.
용산 참사가 터졌다. 그렇다면 재개발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어야 할 것인가?
수많은 전문가와 지식인들이 답변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여론 수용층의 입맛이 이미
'개념인'이라는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이명박을 깔 때에만 사랑받는다. 그때만 '개념인'이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한국 정치의 불균형한 정당 구조를 토로하고, 미디어와 현대 사회에 대한 '머리 아픈' 논의를
늘어놓을 때에는 진중권 또한 그저 '지식인'에 불과한 누군가로 강등된다.
연예인의 경우에도 '개념인'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이익이 되지 않는다. 사회적인 발언 한 두 개만 해도 졸지에 타고 싶지 않았던 무등을 타야 한다. 유재석이
정치에 대해 한 마디 했다고 쳐 보자. 난리가 날 것이다. 오오 개념인, 혹은 오오 알고보니 꼴통, 등등.
조지
클루니 일당처럼 '쿨'하게 정치적인 지향성을 드러내는 연예인이 나올 수 없는 이유는, 그런 발언을 하는 순간 대중들이 자신을
'개념인'으로 소비할 것임을 그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해 한 마디 하려면, 연예인은 자신의 직업 생명을
걸거나, 아예 컨셉을 바꿔야 한다. '광대니까 넘어가자'는 식의 중재안이 먹힐 수가 없는 사회인 것이다. 예술과 정치 사이에
길고도 깊은 구렁이 파이고, 그 강을 건너간 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유승준이 그랬고, 신해철도 그렇게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개념인이라는 개념을 붙들고 있는 것은 대단히 개념 없는 짓이다. 따라서 그러한 가치 판단의
기준 하에 신해철을 비판하는 것에 나는 원론적으로 찬성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포지션을 충분히 활용해 온 신해철에게
개인적인 실망을 느끼는 것까지 반대할 생각도 없다. 다만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특히 신해철이 두 번에 걸쳐 해명한
글에서 나온 그런 '개념 넘치는 단어'들에 대해 의문을 품고 숙고하고 고민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개념'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당신은 '개념인'들이 대답해주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드디어 지식인이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쾌락을 주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주지도 않는다. 지독하게 머리를 굴리고 나면 화끈하게
놀고 싶어진다. 그럴 때에는 광대를 찾아가면 된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해법은 이런 것이다.
2009-03-03
2009-02-24
자료 수집 및 관리 방법 - zotero
zotero라는 공개 소프트웨어가 있다. 파이어폭스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확장 기능으로, 미국의 조지 메이슨 대학에서 개발하고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는 무료 프로그램이다. 서지 정보를 입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웹 페이지를 캡처하고 날짜 시간 및 작성자
따위의 정보를 기입할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에 추가적인 노트를 첨부할 수도 있게 해준다. 이게 무료라는 사실이 참 놀랍다.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읽은 다음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대학교 새내기 무렵에는 그냥 노트에 샤프로 책의 내용과 감상을 옮겨 적었다. 기본적으로 악필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나의 색만 이용해서 정리를 하면 내 생각과 책의 본래 내용이 구분되지도 않는다.
'독서 일기'도 비슷하다. 일종의 자기 수양으로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일기'를 바탕으로 2차 저작물을 생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정확한 인용과 서지 정보를 쌓아놓을 수 있는 방법론을 찾아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마다 온갖 방법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관리한다. 이게 무서운 것이, 애초부터 신경을 안 쓰고 살았다면 모를 일이지만, 한 번 어떤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하면 '혹시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이것보다 더 좋은 어떤 방법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자기관리 중독자, 다이어리 광들이 '어떻게 해야 더 시간관리가 잘 되는 다이어리 구성을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maximizer가 되고자 한다면 끝없는 불안과 회의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료 수집 및 정리 체계를 갖출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식으로 정보를 습득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주로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이공계와 인문계는 저널에 논문이 올라오는 속도와 주기 자체가 다르다. 빨라야 분기 단위로 연구가 진행되는 인문계에서는 RSS를 통한 실시간 저널 구독이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반면 텍스트를 인용하고 그에 주석을 다는 기능은 훨씬 더 중요하고 절실해진다. 그래서 많은 인문계 대학원생들이 Endnote를 사용하지도 않는다고 알고 있다. 서지정보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는 그리 큰 의미가 없으며, Endnote는 노트 정리 기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문과쪽 학생들은 그냥 복사물을 쌓아두는 식으로 자료를 수집한다.
조테로의 경우 서지정보 관리와 노트 수집이라는 두 가지 요건을 상당 수준 이상 충족시켜 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2월 23일 1.5 베타가 공개되면서 '노트 정리'가 진일보했다. 그 전까지는 Only Text로만 관련 정보를 정돈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밑줄을 긋고 굵은 글씨를 쓰고 불릿 마크를 다는 식의 편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전까지 일일이 손으로 html코드를 입력해서 강조 지점을 만들었던 내 입장에서도, 아주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zotero에 저장된 서지 정보(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그 서지 정보에 추가된 인용 노트(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조테로가 지닌 최고의 장점은,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웹에서 본 것을 그대로 저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조테로는 자체 내장된 웹 스크린샷 기능을 제공한다. 그것은 이 프로그램을 '학술 연구' 등의 고상한 목적이 아니라, '인터넷 논쟁'이라는 저열한 차원에서도 십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리플을 지우고 도망가는 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의견 교환을 일삼는 자라면, 한번쯤 파이어폭스를 다운받고 조테로를 설치해볼만 하다.
아, 공부해야 되는데...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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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o님의 zotero 소개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읽은 다음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대학교 새내기 무렵에는 그냥 노트에 샤프로 책의 내용과 감상을 옮겨 적었다. 기본적으로 악필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나의 색만 이용해서 정리를 하면 내 생각과 책의 본래 내용이 구분되지도 않는다.
'독서 일기'도 비슷하다. 일종의 자기 수양으로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일기'를 바탕으로 2차 저작물을 생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정확한 인용과 서지 정보를 쌓아놓을 수 있는 방법론을 찾아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마다 온갖 방법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관리한다. 이게 무서운 것이, 애초부터 신경을 안 쓰고 살았다면 모를 일이지만, 한 번 어떤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하면 '혹시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이것보다 더 좋은 어떤 방법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자기관리 중독자, 다이어리 광들이 '어떻게 해야 더 시간관리가 잘 되는 다이어리 구성을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maximizer가 되고자 한다면 끝없는 불안과 회의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료 수집 및 정리 체계를 갖출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식으로 정보를 습득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주로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이공계와 인문계는 저널에 논문이 올라오는 속도와 주기 자체가 다르다. 빨라야 분기 단위로 연구가 진행되는 인문계에서는 RSS를 통한 실시간 저널 구독이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반면 텍스트를 인용하고 그에 주석을 다는 기능은 훨씬 더 중요하고 절실해진다. 그래서 많은 인문계 대학원생들이 Endnote를 사용하지도 않는다고 알고 있다. 서지정보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는 그리 큰 의미가 없으며, Endnote는 노트 정리 기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문과쪽 학생들은 그냥 복사물을 쌓아두는 식으로 자료를 수집한다.
조테로의 경우 서지정보 관리와 노트 수집이라는 두 가지 요건을 상당 수준 이상 충족시켜 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2월 23일 1.5 베타가 공개되면서 '노트 정리'가 진일보했다. 그 전까지는 Only Text로만 관련 정보를 정돈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밑줄을 긋고 굵은 글씨를 쓰고 불릿 마크를 다는 식의 편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전까지 일일이 손으로 html코드를 입력해서 강조 지점을 만들었던 내 입장에서도, 아주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zotero에 저장된 서지 정보(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그 서지 정보에 추가된 인용 노트(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조테로가 지닌 최고의 장점은,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웹에서 본 것을 그대로 저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조테로는 자체 내장된 웹 스크린샷 기능을 제공한다. 그것은 이 프로그램을 '학술 연구' 등의 고상한 목적이 아니라, '인터넷 논쟁'이라는 저열한 차원에서도 십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리플을 지우고 도망가는 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의견 교환을 일삼는 자라면, 한번쯤 파이어폭스를 다운받고 조테로를 설치해볼만 하다.
아, 공부해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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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o님의 zotero 소개
2009-02-16
용산 참사에 대한 주교회의의 입장
다음 내용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공식 사이트에서 퍼온, 용산 참사에 대한 주교회의의 공식 입장입니다. 발표 날짜는 2월 5일
목요일입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이 있을듯 하여 미리 말씀드리면, 주교회의는 한국 천주교회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입니다.
오늘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아멘.
용산 철거민 희생자 추모와 책임자 처벌 촉구
-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임시총회 열려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최기산 주교)는 지난 2월 4일 14시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대회의실에서 ‘한국경제의 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현 시국에 대해 우려하며 다음과 같이 의견을 모았다.
용산 참사에 대해 정부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며
-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5층 상가 건물 옥상에서, 합당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농성중인 용산 4구역 철거민과 전국 철거민 연합회 회원을 경찰이 폭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6명이 목숨을 잃고, 30여 명이 부상당한 참사에 대해 놀라움과 분노를 금치 못하며, 고인과 유가족 및 피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근원적인 원인의 파악과 올바른 해결책 마련을 정부에 촉구하기로 하였다.
- 특히 억울함을 호소하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 공권력이 오히려 특공대를 투입하여 과잉 폭력으로 진압하고, 유족들의 동의와 참여 없이 시신 부검을 강행한 것, 그리고 경찰과 철거 용역의 폭력은 덮어둔 채 농성 철거민의 폭력만 부각시키며 책임을 전가시키는 편파 수사로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정확한 진상 파악과 책임자 문책을 강력하게 촉구하기로 하였다.
- 가난한 이들이 밀려나고, 세입자의 생존권과 재산권이 무시된 채 무리하게 추진되는 뉴타운 재개발의 문제점이 이번 참사로 극명하게 드러났으므로, 정부는 앞으로 제 2의 용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재개발정책을 수정해야 하며,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 물질 중심, 개발 중심의 경제 정책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책의 추진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2009년 1월 1일) ‘빈곤 퇴치와 평화 건설’에서 말씀하셨듯이 가톨릭교회는 윤리적 빈곤 퇴치와 가난한 자의 아픔에 함께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정부도 경제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데 있어서 우선 약자의 권리가 존중되고 사회 정의가 공정하게 지켜져야 진정한 인간적인 삶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포함한 모든 국민을 제대로 섬기는 정부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촉구하기로 하였다.
2009. 2. 5.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오늘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아멘.
2009-02-15
인간에 대한 예의, 신에 대한 예의
"명동성당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노정태)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자그니님)
내가 지난번 포스트에 쓴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놓고 불필요한 리플 논쟁이 벌어졌던 것 같다. 그 말의 맥락을 좀 더 설명하면서, 지금까지는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지 않았는데, 자그니님의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거리로 나가자, 키스를 하자, 2009년 2월 13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언급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문제시하고 싶은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신에 대한, 종교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사회를 전제한다면, 과연 그 사회는 약자에게 도움이 될까 아니면 강자에게 도움이 될까?
군사독재시절을 겪으며 가톨릭 교회가 진보진영의 방패가 되어줄 수 있었던 것은, 군부가 가톨릭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전 세계에 지부가 뻗쳐 있는 가톨릭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 때문일 수도 있고, 종교 탄압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다는 최소한의 양심 때문일 수도 있고, 교회를 건드릴 경우 발생하게 될 저항의 크기에 대한 공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두 한 가지 본질적인 사항을 전제로 한다. 한국과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이 품고 있는 강렬한 신앙심이다.
경찰이 신부를 때리건 말건, 경찰이 성당을 수색하건 말건, 나는 그냥 성당에 와서 성체 받아먹고 갔으니 이번 한 주도 무사히 예수님 땡큐, 신자들의 분위기가 이런 식이었다면 경찰은 명동성당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경찰이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때리건 말건, 안방 장농을 뒤지건 말건, 나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오늘도 무사히, 대통령 각하 땡큐, 이런 사람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1000만의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성당을 내 집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경찰은 명동성당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글을 읽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주교회의 일원'인 나의 우월함이 아니라, 내가 그곳에 가야 하는 목적의 우월함이다.
촛불시위가 한창 벌어지고 청와대로 향하는 길을 경찰이 원천봉쇄했을 때, 효자동 등 궁궐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주민등록증을 보여달라는 경찰의 요구에 바로 내 반응과 같이 대응했다. 그들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그 길을 막아서면서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찰들에게 분노했다. 천주교 신자인 내가 주님이 계신 집에 들어가고자 할 때 경찰이 막아서는 상황을 상상한다면, 그보다 더 크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신앙심보다 사회적 정의에 대한 요구가 앞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인정한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신앙심은 그 무엇보다 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과는 사회 정의를 함께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보다 더 정의로운 가톨릭'을 요구하고자 한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심에 대해 직접적인 모욕을 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일부의 사람들은 바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강남성모병원이 용역을 불러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사건에 대해 되짚어보자. 그 일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가톨릭의 이름으로 이럴 수가!'라고 경악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천주교를 자기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반면 천주교회를 '진보적인 사회단체'중 일부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양자들 중 실질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지닌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가 아니라 전자에 속하는 이들이다. '어떻게 당신들이 이럴 수 있습니까!'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 천주교가 이럴 수 있습니까!'가 훨씬 더 강력한 목소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글루스에서 일부 '진보적'인 블로거들이 취하는 태도는, 어떤 면에서 다소 야비할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어리석기 짝이 없다.
자그니님이 쓴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를 살펴보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 중 지금은 다소 멀어진 이라는 것을 굳이 강조하면서, 끝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아버지를 지닌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을 '홍길똥'이라고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 다. '냉담자인 나는 신자가 아니라는데, 당신들 지금 나 내치는 거?'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도 우습기는 매한가지다. 세례를 받으면 파문을 당하지 않는 한 천주교회의 일원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그리고 자그니님은 파문까지 당해야 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 전혀 아니다.
보수적인 가톨릭 교리 속에서의 종교 생활과 진보적인 스스로의 지향성을 조율하고자 노력하는 다수의 신자들이 볼 때, 이런 태도는 '진보적'인 것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만을 불러올 뿐이다. 그의 글 제목에 담긴 질문에 대해, 자격은 없지만 내가 대답해보겠다. 내쫓는 것은 가톨릭이 아니다. 하지만 반박하는 것은 가톨릭이다. 가톨릭은 2000년의 역사를 통해 이단과, 종교 자체를 비아냥거리는 이들 모두에게 반박해 왔다. 바로 그 신앙심과 충성심이 명동성당을 성지로 만들어온 진짜 원동력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특별한 패션인 양 목에 두르는 손수건처럼 천주교인의 소속을 들먹거릴 때, 그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바로 당신과 같은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단 말이다.
천주교회는 소외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많은 신자들이 꾸준히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회적 선행이 단 하나의 중요한 원동력, 즉 신앙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다.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강남성모병원에서 벌어진 일을 비난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가톨릭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강남성모병원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완전'해진다.
같은 맥락에서 '성당도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라는 식으로 명동성당의 시설물 보호 조치를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나는 반대한다. 성당에서 조용히 해야 하고, 성물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하고, 미사 시간에 조용히 해야 하는 등의 기본적인 '예의'가 만약 오직 '인간에 대한 예의'라면, 우리는 강남성모병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납득해야만 한다.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자 환자들이 비싼 돈을 내고 입원했는데, 그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하는 것은 그 '인간들'에 대한 예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때로, 강자들에게만 유리한 무기로 사용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강남성모병원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윗사람'들이 보기에 더럽고 시끄럽고 무례하게 시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과연 '신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일까? 도리어 그 반대로, 정당한 노동에 대한 요구를 펼치는 이들을 때리고 쫓아내고 핍박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종교에 대한 진지한 자세, 신앙심에 대한 철저한 존중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방향의 논의를 아예 시작할 수도 없다.
미사 시간에 확성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신부님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시간은 수많은 신자들에게 실로 신성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신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만약 명동성당과 관련한 문제를 오직 인간에 대한 예의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보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종교적이지도 않다. 신자들이 하느님과 만나는 성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에 경찰은 성당에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바로 같은 이유로 시위대는 성당측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이들은 그 신앙심 자체를 함부로 비아냥거리거나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 체스터튼의 글을 인용하면서 내 부족한 논의를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자그니님)
내가 지난번 포스트에 쓴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놓고 불필요한 리플 논쟁이 벌어졌던 것 같다. 그 말의 맥락을 좀 더 설명하면서, 지금까지는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지 않았는데, 자그니님의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거리로 나가자, 키스를 하자, 2009년 2월 13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언급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문제시하고 싶은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신에 대한, 종교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사회를 전제한다면, 과연 그 사회는 약자에게 도움이 될까 아니면 강자에게 도움이 될까?
군사독재시절을 겪으며 가톨릭 교회가 진보진영의 방패가 되어줄 수 있었던 것은, 군부가 가톨릭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전 세계에 지부가 뻗쳐 있는 가톨릭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 때문일 수도 있고, 종교 탄압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다는 최소한의 양심 때문일 수도 있고, 교회를 건드릴 경우 발생하게 될 저항의 크기에 대한 공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두 한 가지 본질적인 사항을 전제로 한다. 한국과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이 품고 있는 강렬한 신앙심이다.
경찰이 신부를 때리건 말건, 경찰이 성당을 수색하건 말건, 나는 그냥 성당에 와서 성체 받아먹고 갔으니 이번 한 주도 무사히 예수님 땡큐, 신자들의 분위기가 이런 식이었다면 경찰은 명동성당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경찰이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때리건 말건, 안방 장농을 뒤지건 말건, 나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오늘도 무사히, 대통령 각하 땡큐, 이런 사람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1000만의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성당을 내 집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경찰은 명동성당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글을 읽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주교회의 일원'인 나의 우월함이 아니라, 내가 그곳에 가야 하는 목적의 우월함이다.
촛불시위가 한창 벌어지고 청와대로 향하는 길을 경찰이 원천봉쇄했을 때, 효자동 등 궁궐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주민등록증을 보여달라는 경찰의 요구에 바로 내 반응과 같이 대응했다. 그들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그 길을 막아서면서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찰들에게 분노했다. 천주교 신자인 내가 주님이 계신 집에 들어가고자 할 때 경찰이 막아서는 상황을 상상한다면, 그보다 더 크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신앙심보다 사회적 정의에 대한 요구가 앞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인정한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신앙심은 그 무엇보다 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과는 사회 정의를 함께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보다 더 정의로운 가톨릭'을 요구하고자 한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심에 대해 직접적인 모욕을 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일부의 사람들은 바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강남성모병원이 용역을 불러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사건에 대해 되짚어보자. 그 일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가톨릭의 이름으로 이럴 수가!'라고 경악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천주교를 자기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반면 천주교회를 '진보적인 사회단체'중 일부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양자들 중 실질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지닌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가 아니라 전자에 속하는 이들이다. '어떻게 당신들이 이럴 수 있습니까!'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 천주교가 이럴 수 있습니까!'가 훨씬 더 강력한 목소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글루스에서 일부 '진보적'인 블로거들이 취하는 태도는, 어떤 면에서 다소 야비할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어리석기 짝이 없다.
자그니님이 쓴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를 살펴보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 중 지금은 다소 멀어진 이라는 것을 굳이 강조하면서, 끝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아버지를 지닌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을 '홍길똥'이라고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 다. '냉담자인 나는 신자가 아니라는데, 당신들 지금 나 내치는 거?'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도 우습기는 매한가지다. 세례를 받으면 파문을 당하지 않는 한 천주교회의 일원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그리고 자그니님은 파문까지 당해야 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 전혀 아니다.
보수적인 가톨릭 교리 속에서의 종교 생활과 진보적인 스스로의 지향성을 조율하고자 노력하는 다수의 신자들이 볼 때, 이런 태도는 '진보적'인 것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만을 불러올 뿐이다. 그의 글 제목에 담긴 질문에 대해, 자격은 없지만 내가 대답해보겠다. 내쫓는 것은 가톨릭이 아니다. 하지만 반박하는 것은 가톨릭이다. 가톨릭은 2000년의 역사를 통해 이단과, 종교 자체를 비아냥거리는 이들 모두에게 반박해 왔다. 바로 그 신앙심과 충성심이 명동성당을 성지로 만들어온 진짜 원동력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특별한 패션인 양 목에 두르는 손수건처럼 천주교인의 소속을 들먹거릴 때, 그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바로 당신과 같은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단 말이다.
천주교회는 소외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많은 신자들이 꾸준히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회적 선행이 단 하나의 중요한 원동력, 즉 신앙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다.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강남성모병원에서 벌어진 일을 비난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가톨릭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강남성모병원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완전'해진다.
같은 맥락에서 '성당도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라는 식으로 명동성당의 시설물 보호 조치를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나는 반대한다. 성당에서 조용히 해야 하고, 성물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하고, 미사 시간에 조용히 해야 하는 등의 기본적인 '예의'가 만약 오직 '인간에 대한 예의'라면, 우리는 강남성모병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납득해야만 한다.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자 환자들이 비싼 돈을 내고 입원했는데, 그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하는 것은 그 '인간들'에 대한 예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때로, 강자들에게만 유리한 무기로 사용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강남성모병원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윗사람'들이 보기에 더럽고 시끄럽고 무례하게 시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과연 '신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일까? 도리어 그 반대로, 정당한 노동에 대한 요구를 펼치는 이들을 때리고 쫓아내고 핍박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종교에 대한 진지한 자세, 신앙심에 대한 철저한 존중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방향의 논의를 아예 시작할 수도 없다.
미사 시간에 확성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신부님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시간은 수많은 신자들에게 실로 신성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신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만약 명동성당과 관련한 문제를 오직 인간에 대한 예의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보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종교적이지도 않다. 신자들이 하느님과 만나는 성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에 경찰은 성당에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바로 같은 이유로 시위대는 성당측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이들은 그 신앙심 자체를 함부로 비아냥거리거나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 체스터튼의 글을 인용하면서 내 부족한 논의를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18세기의 사회적 계약이론은 우리 시대의 여러 섣부른 비평에 나타나 있다. 모든 역사적 통치기구의 이면에는 찬성과 협동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주장은 명백히 옳았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익을 의식적으로 교환함으로써 질서나 윤리를 얻고자 했다는 주장은 사실상 틀렸다. 도덕성은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네가 나를 때리지 않으면 나도 너를 때리지 않겠다"라고 말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아니다. 도덕성에는 그러한 거래의 흔적이 아니라, 두 사람이 "우리는 성스러운 곳에서 서로를 때리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 흔적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지킴으로써 그들의 도덕성을 얻었다. [127쪽]
G. K. 체스터튼, 『오소독시: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경기도 파주: 이끌리오, 2003)
73p. Orthodoxy (San Francisco, U.S.: Ignatius Press, 1995)
2009-02-13
명동성당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명동성당의 시설물 보호 요청을 두고 이글루스 내에서 논쟁이 뜨거운 것 같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명동성당이 경찰에게
'시설물 보호 요청'을 한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고, 명동성당의 권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성당측에 집회 사실을 먼저 알리지도 않고 일단 그쪽으로 향한 대책위의 행동에 대해서도 나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우선 대책위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 프레시안의 기사에 따르면, 대책위는 명동성당에서 집회를 할 생각이면서 명동성당측에 그 사실을 미리 알리지도 않았다.
촛불시위가 게릴라 시위로 변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 또한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책위 차원에서 움직이는 공식 행사마저 그런 식으로 절차를 무시하고 운영해서는 안 될 일 아닌가?
'민주화의 성지'인 명동성당이 어떻게 시위대를 막을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되물어보고 싶다. 명동성당이 '성지'일 수 있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말이다. 경찰이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명동성당은 시위자들이 도망칠 수 있는 소도로서의 기능을 해왔다. 요컨대 공권력이 천주교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에, 혹은 존중하는 척이라도 했기 때문에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당측에 연락하지도 않고 일단 진입부터 하려고 든 대책위의 행동이 과연 '존중'이라고 볼 수 있을까? 행간에 묻어나는 뉘앙스를 보면, 대책위는 '성당측이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적잖이 불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자기들이 먼저 연락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들이 성지를 진정 '성지'로서 존중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 성지가 경찰로부터 존중받기를 바란단 말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대책위가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성당이라면, 경찰은 더 쉽게 들어와서 그들을 체포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명동성당의 권위는, 종교의 권위는, 결국 사회 전체의 존경과 존중으로부터 나온다. 교단에서 사병에 가까운 '경비'를 세우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대 국가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가령 『사하촌』같은 소설에 등장하는 그런 깡패들을 절이나 교회, 성당에서 거느리고 있다면 굳이 시설경비요청을 부를 필요도 없다. 그것은 대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필립 풀먼의 소설 『황금나침반』에 등장하는 옥스포드 조단 칼리지를 떠올려보자. 조단 칼리지는 그 자체가 (리라가 사는 세계 속에서) 손꼽히는 부자이며, 거대한 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 영토에서는 국왕의 법보다 조단 칼리지 자체의 법이 우선한다. 그러므로 만약 대학은 당당하게 공권력의 퇴장을 요구할 수 있다. 소설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68혁명 당시 소르본느 대학은 경찰이 진입하려 하자 '소르본느는 소르본느가 다스린다'며 그들을 쫓아내고 학생들을 거두었다. 대학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금이야 프랑스에서도 대학 구내에 경찰들이 들락거리는 것 같지만, 본디 '거대 조직'은 그처럼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공권력과 대립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바티칸의 경우도 그렇다. 바티칸이 독립된 국가라는 것이 뭘 뜻하는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교회는 원래 국가와 대립하는, 또한 세속적 차원에서 동등한 차원의 힘을 가지는 무장 집단이기도 했다. 명동성당과는 달리 성 베드로 성당은 이탈리아 경찰에 시설보호요청을 할 필요가 없다.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된 근위대가 있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시절이니까 그들이 관광객과 사진을 찍어주면서 자신들의 소임을 다하고 있지만, 유혈사태가 발생한다면 그들은 당장 군인이 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그 맥락에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명동성당이 '성지'로 존중받는 이유가 단지 '사회의 존경과 존중'만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명동성당에 어느 정도 확실한 힘을 가진 무력집단이 있고, 그래서 그들이 군사독재시절에는 경찰들의 난입을 두들겨 패서 쫓아내면서 수배자들을 지켜주었다고 말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우리는 마구 들락거릴 수 있지만, 경찰만 못 들어오는 민주화 성지'라는 식의 잘못된 관념이 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당이 무장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명동성당에서 시설보호요청을 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방금 인용한 프레시안 기사에 따르면, 성당 입구를 막아선 경찰이 신자들의 신분을 확인한 후 입장시켜주었다는데, 이건 한 사람의 천주교 신자로서 참을 수 없을만큼 모욕적인 일이다.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나처럼 공권력보다 천주교회의 권위를 더욱 존중하고, 따라서 성당 땅에 경찰이 들어오는 꼴을 눈 뜨고 참아주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성당이라는 곳 자체가 공권력의 공백지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나는, 사전연락도 없이 일단 들어가고 보자는 식으로 나온 대책위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양자가 모두 진입 요청을 한다면 당연히 경찰은 안 되고 대책위는 환영이다. 하지만 허락받지 않고 들어오고자 한다면 둘 다 안 된다, 이게 교회의 입장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배타적인 것, 단호한 것, 규율을 내세우고 사람을 선별하는 것, 무차별적이기 이전에 확고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 이런 것들을 모두 '보수적'이라느니 '수구 꼴통'이라느니 하는 딱지를 붙인다면, 명동성당은 앞으로도 '민주화의 성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명동성당이 성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찰에게) 배타적이었고, (경찰에게) 단호했으며, (국가에게 종교적인) 규율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예우를 갖추라는 요구가 그렇게 못마땅한가? 그래서 굳이 '개톨릭'이니, '수구화'니 이런 소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나? 이건 뭐 중학생들도 아니고. 관광지에 있는 이국 종교의 사원에 들어갈때에는 신발을 잘도 벗는 사람들이, 한국 땅에 있는 우리의 성지에 들어갈 때에는 너무도 무례한 것 아닌가?
정리해보자. 교회가 단독으로 무장을 하거나 실력행사를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세상이다. 따라서 명동성당의 권위, 천주교회의 권위는 오직 사회의 존경심으로부터만 나와야 한다.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명동성당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지 않는다면, 집회를 방해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올 수 있다. 요컨대 '교회의 권위'라는 공공재의 가치가 떨어져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명동성당측과 최소한의 사전 연락도 없이 집회를 열고자 했던 대책위를, 이번만큼은 비판한다. 하지만 굳이 경찰을 불러서 교회의 문을 틀어막은 처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세상에서, 가톨릭 교회만큼은 그 권위와 위엄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시위대가 무단으로 시위를 벌이는 것만큼이나, 경찰이 신자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 또한 옳지 않은 일이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전자에 다소 화가 났지만, 지금은 후자에 더 화가 난다.
우선 대책위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 프레시안의 기사에 따르면, 대책위는 명동성당에서 집회를 할 생각이면서 명동성당측에 그 사실을 미리 알리지도 않았다.
사회단체로 구성된 '이명박 정권 용산 철거민 살인 진압 범국민 대책위원회'는 이날 오전 11시 기자 회견을 가진 뒤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철야 농성을 벌일 예정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죄와 진압의 책임자인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 원세훈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 처벌, 그리고 검찰의 재수사 등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명동성당에는 경찰이 먼저 도착해 모든 입구를 봉쇄했다.
경찰은 "성당 측에서 시설 보호 요청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성당 관계자는 "(농성을 하면) 성도들에게 피해가 가고, 촛불 집회를 하면 화재 위험이 있다"며 "시설 보호 요청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책위 관계자는 "급하게 결정하고 우리가 성당 쪽에 미처 알리지 않았던 농성을 성당에서 먼저 알고 경찰에 연락했다는 게 납득되지 않는다"며 "경찰이 먼저 성당에 농성 일정을 알려줬을 것"이라고 질타했다.
결국 경찰보다 먼저 도착한 20여 명의 대책위 대표자는 봉쇄한 경찰들 뒤 들머리에, 10여 명은 경찰 앞에 서서 기자 회견을 시작했다.
강 이현. “80년대로 돌아간 명동성당…경찰 '원천 봉쇄'.” 프레시안, February 11, 2009.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11163232§ion=03.
촛불시위가 게릴라 시위로 변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 또한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책위 차원에서 움직이는 공식 행사마저 그런 식으로 절차를 무시하고 운영해서는 안 될 일 아닌가?
'민주화의 성지'인 명동성당이 어떻게 시위대를 막을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되물어보고 싶다. 명동성당이 '성지'일 수 있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말이다. 경찰이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명동성당은 시위자들이 도망칠 수 있는 소도로서의 기능을 해왔다. 요컨대 공권력이 천주교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에, 혹은 존중하는 척이라도 했기 때문에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당측에 연락하지도 않고 일단 진입부터 하려고 든 대책위의 행동이 과연 '존중'이라고 볼 수 있을까? 행간에 묻어나는 뉘앙스를 보면, 대책위는 '성당측이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적잖이 불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자기들이 먼저 연락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들이 성지를 진정 '성지'로서 존중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 성지가 경찰로부터 존중받기를 바란단 말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대책위가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성당이라면, 경찰은 더 쉽게 들어와서 그들을 체포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명동성당의 권위는, 종교의 권위는, 결국 사회 전체의 존경과 존중으로부터 나온다. 교단에서 사병에 가까운 '경비'를 세우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대 국가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가령 『사하촌』같은 소설에 등장하는 그런 깡패들을 절이나 교회, 성당에서 거느리고 있다면 굳이 시설경비요청을 부를 필요도 없다. 그것은 대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필립 풀먼의 소설 『황금나침반』에 등장하는 옥스포드 조단 칼리지를 떠올려보자. 조단 칼리지는 그 자체가 (리라가 사는 세계 속에서) 손꼽히는 부자이며, 거대한 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 영토에서는 국왕의 법보다 조단 칼리지 자체의 법이 우선한다. 그러므로 만약 대학은 당당하게 공권력의 퇴장을 요구할 수 있다. 소설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68혁명 당시 소르본느 대학은 경찰이 진입하려 하자 '소르본느는 소르본느가 다스린다'며 그들을 쫓아내고 학생들을 거두었다. 대학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금이야 프랑스에서도 대학 구내에 경찰들이 들락거리는 것 같지만, 본디 '거대 조직'은 그처럼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공권력과 대립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바티칸의 경우도 그렇다. 바티칸이 독립된 국가라는 것이 뭘 뜻하는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교회는 원래 국가와 대립하는, 또한 세속적 차원에서 동등한 차원의 힘을 가지는 무장 집단이기도 했다. 명동성당과는 달리 성 베드로 성당은 이탈리아 경찰에 시설보호요청을 할 필요가 없다.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된 근위대가 있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시절이니까 그들이 관광객과 사진을 찍어주면서 자신들의 소임을 다하고 있지만, 유혈사태가 발생한다면 그들은 당장 군인이 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그 맥락에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명동성당이 '성지'로 존중받는 이유가 단지 '사회의 존경과 존중'만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명동성당에 어느 정도 확실한 힘을 가진 무력집단이 있고, 그래서 그들이 군사독재시절에는 경찰들의 난입을 두들겨 패서 쫓아내면서 수배자들을 지켜주었다고 말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우리는 마구 들락거릴 수 있지만, 경찰만 못 들어오는 민주화 성지'라는 식의 잘못된 관념이 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당이 무장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명동성당에서 시설보호요청을 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방금 인용한 프레시안 기사에 따르면, 성당 입구를 막아선 경찰이 신자들의 신분을 확인한 후 입장시켜주었다는데, 이건 한 사람의 천주교 신자로서 참을 수 없을만큼 모욕적인 일이다.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나처럼 공권력보다 천주교회의 권위를 더욱 존중하고, 따라서 성당 땅에 경찰이 들어오는 꼴을 눈 뜨고 참아주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성당이라는 곳 자체가 공권력의 공백지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나는, 사전연락도 없이 일단 들어가고 보자는 식으로 나온 대책위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양자가 모두 진입 요청을 한다면 당연히 경찰은 안 되고 대책위는 환영이다. 하지만 허락받지 않고 들어오고자 한다면 둘 다 안 된다, 이게 교회의 입장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배타적인 것, 단호한 것, 규율을 내세우고 사람을 선별하는 것, 무차별적이기 이전에 확고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 이런 것들을 모두 '보수적'이라느니 '수구 꼴통'이라느니 하는 딱지를 붙인다면, 명동성당은 앞으로도 '민주화의 성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명동성당이 성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찰에게) 배타적이었고, (경찰에게) 단호했으며, (국가에게 종교적인) 규율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예우를 갖추라는 요구가 그렇게 못마땅한가? 그래서 굳이 '개톨릭'이니, '수구화'니 이런 소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나? 이건 뭐 중학생들도 아니고. 관광지에 있는 이국 종교의 사원에 들어갈때에는 신발을 잘도 벗는 사람들이, 한국 땅에 있는 우리의 성지에 들어갈 때에는 너무도 무례한 것 아닌가?
정리해보자. 교회가 단독으로 무장을 하거나 실력행사를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세상이다. 따라서 명동성당의 권위, 천주교회의 권위는 오직 사회의 존경심으로부터만 나와야 한다.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명동성당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지 않는다면, 집회를 방해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올 수 있다. 요컨대 '교회의 권위'라는 공공재의 가치가 떨어져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명동성당측과 최소한의 사전 연락도 없이 집회를 열고자 했던 대책위를, 이번만큼은 비판한다. 하지만 굳이 경찰을 불러서 교회의 문을 틀어막은 처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세상에서, 가톨릭 교회만큼은 그 권위와 위엄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시위대가 무단으로 시위를 벌이는 것만큼이나, 경찰이 신자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 또한 옳지 않은 일이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전자에 다소 화가 났지만, 지금은 후자에 더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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