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16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자대에 온지 나흘째 되는 금요일이다. 화요일부터 겪었던 일들을 통해 나는,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은 현재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권위 혹은 권력관계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을 뜻한다.

579일 남은 군 복무기간이 한없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설령 나의 신병기간이 끝나고 내가 상당한 고참이 되어 지금처럼 불편하게 살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군생활 자체가 편안한 일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입대 순서에 따라 경례해야 하는 것 만큼이나, 같은 순서로 경례를 받는 것 역시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와 같은 욕망은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이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남아있어야 한다는 당위적 지향성, 지배-피지배 관계에서 벗어난 고립된 상태의 개인의 존재 등을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개인들 사이에서의 경제적 정의의 실현에 관심이 많고, 계층간의 갈등과 불화가 근본적인 사회 구조의 변화에 의해 해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본질적 측면, 혹은 '개인성'의 파괴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고 정확히 말할 수 없으나, 지금 이 순간 내가 지키고 싶어하는 바로 그것.

많은 경우 개인의 자유란 궁극적으로 '선택의 자유'라고 간주된다. 나를 가스실에 처넣겠다는 나치를 향해 한 인간으로서의 연민을 품을 수 있는, 그 어떤 경우에도 박탈될 수 없는 선택의 자유. 그런데 한 가지 역설적인 사실은, 그러한 종류의 자유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군대라는 것이다. KTA 3주차 월요일, 카투사 플래너 사용방법을 교육받을 때의 일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대한 감상적인 요약과 함께, 어떤 경우에도 모든 일은 마음 먹기 달렸다는 통속적 불교의 메시지로 그 내용은 쪼그라들어 버렸다. 비약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그것을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대립으로 놓고 일방의 손을 들어주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개인의 '자유'에 대해 군대에서 가르친다니.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떠한 경우에도 양도될 수 없는 궁극적인 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그 상황에 처한 개인이 아닌 그 개인을 통제하는 시스템에 의해 발화되는 순간, 그것은 그 궁극적 자유를 제외한 수많은 것들을 시스템이 임의로 제한하는 행동에 대한 알리바이로서 작동하게 된다. 군대 오니까 좆같지? 그래도 네게는 이 상황 속에서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 자기개발서적을 읽는 군인들. 자신의 꼬리를 물어뜯고 있는 자유주의. 가장 휴머니즘적으로 표현된 자유주의의 한 모습이 군대 내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좋은 것'으로 이야기되는 광경은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그것은 결국 개인들의 의식을 '내면'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현재의 체제를 공고화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외부로부터의 구체적인 억압과는 별개로 나는 그 억압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내면으로부터' 선택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지배하지도 않고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은 그와 상당히 다른 결을 띈다. 그것 역시 근본적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오직 내면 속에서 시작되고 결정되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배'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이미 그 선언은 나의 외면에 있는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 그 대상과의 구체적인 관계,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 등.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명제를 발화하는 주체는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다. 적어도 '나는 타인에 대한 나의 반응을 내면으로부터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주체보다는 그렇다. 물론 4성 장군도 전자와 같은 말을 할 수야 있지만 그것은 상당히 넌센스처럼 보인다. 후자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우, 자유주의는 내면적 자유를 향해 침잠해가는 개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본래적 의도와 상반된다.

두 명제의 차이는 왜 자유주의가 끝까지 부정적인 서술에 더 가깝게 머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이 가진 힘과 그것을 제약하는 외부적인 권력의 대립관계를 전제한다. 그런데 만약 개인의 힘을 긍정적으로 서술한다면, 그러한 전개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대체로 권력은 그 긍정된 부분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제약한다. 군인들에게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네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에게 '그 어떠한 상황'을 제공할 수도 있는 권력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준다.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텅 빈 서술은 그와 정 반대다. 그것은 화자에게는 긍정적인 서술이 아니나, 청자 즉 권력에게는 분명 어떠한 행위를 하겠다는 예고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인은 그와 같은 표현을 입 밖에 꺼내서는 안 된다.

자유주의는 대단히 양면적이고 역설적인 사상 체계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권력론과 인식론을 함유하며, 동시에 대단히 중요한 존재론적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 나는 바로 그런 것들을 연구하고 싶다. 그 누구에 대해서도,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는 자유 속에서.

2011-01-09

2010년 독서 목록

  1. 20100106 - 수디르 벤카테시, 김영선 옮김, 『괴짜 사회학』(서울: 김영사, 2009).

  2. 20100113 - 마이크 데이비스, 정병선 옮김, 『엘리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서울: 이후, 2008).

  3. 20100113 - 도모노 노리오, 이명희 옮김, 『행동경제학』(서울: 지형, 2007).

  4. 20100115 - 로버트 레브나스코니, 변광배 옮김, 『How to Read 사르트르』(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08).

  5. 20100123 - 강양구, 강이현, 『밥상혁명』(서울: 살림터, 2009).

  6. 20100124 - 비외른 롬보르, 김기응 옮김, 『쿨잇』(경기도 파주: 살림, 2008).

  7. 20100128 - 카토 요시코, 강현정 옮김, 『내 고양이 오래 살게 하는 50가지 방법』(서울: 해든아침, 2009).

  8. 20100202 - 트와일라 타프, 노진선 옮김, 『천재들의 창조적 습관』(서울: 문예출판사, 2006).

  9. 20100214 - 로빈 킨로스, 최성민 옮김, 『현대 타이포그라피 - 비판적 역사 에세이』(경기도 용인: 스펙터프레스, 2009).

  10. 20100216 - 강영안, 『칸트의 형이상학과 표상적 사유』(서울: 서강대학교출판부, 2009).

  11. 20100217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문화와 가치』(서울: 책세상, 2006).

  12. 20100227 - 마크 에론손, 장석봉 옮김, 『도발 - 아방가르드의 문화사』(서울: 이후, 2002).

  13. 20100303 - 막스 베버,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정치』(경기도 파주: 나남출판, 2007).

  14. 20100303 - 막스 베버,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경기도 파주: 나남출판, 2006).

  15. 20100306 - 심송용, 강희모, 『아름다운 수식문서작성 프로그램 – LaTeX (I) 기초편』(서울: 교우사, 2009).

  16. 20100306 - 심송용, 강희모, 『아름다운 수식문서작성 프로그램 – LaTeX (II) 활용편』(서울: 교우사, 2009).

  17. 20100328 - Debra Cameron, James Elliott, et al., Learning Gnu Emacs (3rd. ed.), (Sebastopol, CA, USA: O'Reilly, 2005).

  18. 20100417 - 앨버트 허쉬먼, 김승현 옮김, 『열정과 이해관계』(서울: 나남출판, 1994).

  19. 20100517 - 클레어 베상, 박슬라 옮김, 『캣 위스퍼러』(서울: 보누스, 2006).

  20. 20100530 - 캐스 선스타인, 이기동 옮김, 『루머』(서울: 프리뷰, 2009).

  21. 20100610 - 박노자, 『하얀 가면의 제국』(서울: 한겨레신문사, 2003).

  22. 20100702 - 헌터 S. 톰슨, 장호연 옮김,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서울: 마티, 2010).

  23. 20100702 - 플라톤, 이정호 옮김, 『메넥세노스』(서울: 이제이북스, 2008).

  24. 20100706 - 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경기도 파주: 한길사, 1997).

  25. 20100708 - 손석춘, 『신문 읽기의 혁명 2』(서울: 개마고원, 2009).

  26. 20100713 - 아우구스띠누스, 성염 역주, 『자유의지론』(대구: 분도출판사, 1998).

  27. 20100713 - 살바토레 세티스, 김운찬 옮김, 『고전의 미래』(서울: 길, 2009).

  28. 20100715 - 그레고어 쉘겐, 김현성 옮김, 『빌리 브란트』(서울: 빗살무늬, 2003).

  29. 20100720 - Terry Eagleton, Reason, Faith, and Revolution —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9).

  30. 20100722 - 조지 오웰, 정영목 옮김, 『카탈로니아 찬가』(서울: 민음사, 2001).

  31. 20100725 - 김혜나, 『제리』(서울: 민음사, 2010).

  32. 20100810 - 프란츠 파농, 이석호 옮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서울: 인간사랑, 1998).

  33. 20100811 - 니콜라스 시라디, 강경이 옮김,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서울: 에코의서재, 2009).

  34. 20100828 - 버락 오바마, 이경식 옮김,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35. 20100829 - 로버트 미지크, 서경홍 옮김, 『좌파들의 반항 - 마르크스에서 마이클 무어에 이르는 비판적 사고』(경기도 파주: 들녘, 2010).

  36. 20100905 - 슈테판 츠바이크, 안인희 옮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서울: 바오, 2009).

  37. 20100910 - 로버트 라이시, 형선호 옮김, 『슈퍼자본주의』(서울: 김영사, 2008).

  38. 20100913 - 알레시오 레오나르디, 얀 미덴도르프, 윤선일 옮김, 『한 줄의 활자』(서울: 안그라픽스, 2010).

  39. 20100920 - 얼 쇼리스, 고병헌·이병곤·임정아 옮김, 『희망의 인문학』(서울: 이매진, 2009), 개정판.

  40. 20100921 - 마이클 샌델, 이창신 옮김, 『정의란 무엇인가』(서울: 김영사, 2010).

  41. 20100929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실천이성비판』(서울: 아카넷, 2002).

  42. 20101225 - Malcolm Gladwell, What The Dog Saw(New York: Little Brown, 2009).

  43. 20101227 - 제임스 트레필, 정주연 옮김, 『산꼭대기의 과학자들』(서울: 지호, 2003).

  44. 20101227 - 장 자크 루소, 김중현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서울: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2010-10-11

입대합니다

2010년 10월 11일부터 2012년 7월 18일(예정)까지, 카추사로 군복무할 예정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기간동안 이 블로그에 정치·사회·시사적인 내용의 글은 올라오지 않습니다. 훈련소 주소 등 신상과 관련된, 외부에 공개해야 할 정보는 꾸준히 업데이트됩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에게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무운까지는 바라지 않고, 군복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기원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안녕히.

2010-10-01

죽은 시민의 사회

죽은 시민의 사회

이론적으로 따져보자면 우리는 슈퍼맨이 되어 있어야 한다. 불과 10년 전과 비교해볼 때, 우리는 비교를 불허하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 그것을 곧장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트위터나 페이스북 따위로 자신의 생각을 떠벌릴 수 있으며, 서 있는 위치에서 반경 5백 미터 안에 숨은 맛집을 찾아내는 것도 식은 죽 먹기다. 이 편리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한없이 똑똑해지고 강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현실은 정 반대다. 날이 갈수록 무기력해지는 자신,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배는 볼록해지면서 점점 스파이더맨이 되어가는 모습. 온갖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에서 떠들어대며 “당신 자신이 되세요, 화이팅”이라고 떠벌리지만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산다. 한 시간짜리 점심시간에 잠깐 짬을 내 은행 또는 증권사 매장에 앉아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면서, 왜 이렇게 초라하게 살고 있을까 한숨을 내쉴 즈음, ‘딩동’하고 벨이 울리며 한 여성이 당신을 부른다. “275번고객님!”

이 세상의 정체, 그 속에서 당신이 처한 위치를 알고 싶다면, 남들이 당신을 부르는 호칭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아침에 눈을 떠 휴대전화에 온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면 적어도 한 통 이상의 스팸 문자가 와 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판매자는 당신을 ‘고객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침에 눈뜨기 전부터 고객님이고, 잠들 때까지 고객님이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고객님, 스마트폰을 2년 약정으로 노예 계약한 고객님, 특급배송 서비스로 이것저것 결제하신 고객님, 실시간 스파이웨어 감시 프로그램이 꼭 필요하신 고객님. 이 무기력한 세상은, 당신을 ‘고객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세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기력해진 이유는 MB 때문이 아니다. 7월에출시되었어야 할 아이폰 4가 9월에 출시되어서도 아니고, 아이폰 대항마라는 딱지를 붙여가며 모 국내 전자업체가 집요한 언론 플레이를 펼치기 때문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이 통째로 ‘고객님’의 삶이 되어버렸다는 것, 주체적인 삶의 양식 없이 그저 소비자로서의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선택을 하든, 당신은 그저 고객님이다. 손님이 그냥 왕이라면 고객님은 ‘킹왕짱’이어야 하겠으나, 실상을 놓고 보면 우리는 결국 다른 고객님을 상대하면서 번 돈 몇 푼을 주머니에 넣고,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선택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그런 하잘것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약정하는 사람과 개통해주는 사람만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점점 질서정연하게 무기력해지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 상품이 쏟아지고, 앱스토어에는 수십만 개의 어플이 다운로드를 기다리며, 맞춤형 서비스가 속속 생겨나는 이 세상에서 왜 정작 ‘고객님’은 무기력해질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선택은 객관식이다. 시장을 통해 모든 것을 공급받는 우리로서는, 그 시장에서 공급해주는 것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뿐이다. 예컨대 아이폰이 국내에 출시되기 전까지 선택의 자유라는 말은, 적어도 스마트폰을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자유는 시장에서 공급하는 물건의 종류만큼, 딱 그 수준에서 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시장에서 무언가를 공급해주지 않을 경우, 고객님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역시 아이폰을 예로 들어보자. 스티브 잡스가 프리젠테이션을 하던 올해 7월, 아이폰 4가 출시되는 국가 목록에 대한민국이 빠지자 수많은 사람이 충격에 빠졌다. 인터넷 공간은 순식간에 이런 저런 음모론으로 뒤덮였고 비명과 절망과 탄식이 와이파이망을 타고 날아다녔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한국 애플 본사 앞에서 시위라도 할 것인가? 단식투쟁을 벌이면 스티브 잡스의 마음이 바뀔까?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론상 우리는 국가가 우리에게 마땅히 제공해야 할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은 우리에게 뭔가를 마땅히 제공해야 할 의무가 없을뿐더러, 그것을 요구 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횡포에 대해서는 촛불시위를 하고 서명운동을 하고 칼럼을 쓰고 투표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들의 전횡에 대해 일개 고객님인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기껏 다른 기업의 고객님이 되는 게 저항의 전부다. 그런데 이용하는 주유소를 A사에서 B사로 바꾼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긴 한가? 민주주의의 원리가 자본주의의 원리에 잠식되어 갈수록, 즉 우리가 시민에서 고객님으로 변해갈수록, 우리는 무력해진다. 번호표를 뽑고 얌전히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국내에 아이폰 4가 출시될 때까지 무조건 기다려야 하고, 예약 판매를 받는 서버가 다운된 것이 풀릴 때까지 그저 기다려야 한다. 할 일이 없다. 약정기간이 덜 끝난 휴대 전화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아보고, 쉴 새 없이 클릭하며 최저가 탐색 모험을 마치고 돌아오면, 불현듯 허탈해진다. 이것이 삶에 무슨 의미일까. 결국 수많은 불량품 중에 개중 나은 것을 찾으려 방황하고 있을 뿐 아닐까.

촛불시위 이후 정치적으로 맥이 빠져버린 한국 사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촛불시위는 수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정치적인 주제를 놓고 토론하고 이야기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였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자의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실컷 MB를 욕하고 나서, 결국 투표 잘하자며 집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가 정치인들 앞에서 고객님이 될 수 있는 기회, 즉 선거는 너무 멀리 있었고, 경찰은 컨테이너를 쌓고 버텼다. 촛불시위의 실패 이면에는 이미 고객님으로 길들여진 시민들의 무기력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의 정치 현상 역시 마찬가지다. 죽은 자식 고환 애무하듯, 선거 때 간신히 정치에 대한 관심이 솟고, 이후 곧 죽어버린다. 우리는 정치적 의제를 생산하고 실천하는 시민이 아니라, 정치인을 쇼핑하는 고객님으로 전락했다.

어떻게 하면 ‘죽은 시민의 사회’를 극복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정도의 해법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돈을 벌되, 벌어서 ‘시간’을 사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평화를 얻으라는 것이다. 똑똑한 소비자가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바보가 된다. 소비자는 어차피 기업이 짜놓은 판 위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 시간을 이용해서 고객님이 아닌 누군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당신을 아들이라고 부르는 부모님, 학생이라고 부르는 선생님, 동지라 부르는 당원, 아저씨라고 부르는 옆집 소녀 등, 눈을 돌려보면 생각 외로 우리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이 많다. 바로 그 세계, 진짜 우리의 삶이 촘촘히 얽혀 들어간 세계에 충실하는 것, 그것만이 죽은 시민의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GQ 2010년 10월호 

2010-09-30

이념으로서의 대중주의, 실천에서의 다수결 맹신

현재까지 한국 보수정치는 줄기차게 '중도주의'를 표방해왔다. 누가 봐도 대충 '옳으신 말씀'을 하면서 최대한 넓은 범위의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전략이 즐겨 사용되어왔다는 것이다. 현 정부도 "서민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텁게"라고 말하는데, 강남에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층들도 곧죽어도 자신들을 '중산층'이라고 칭한다는 것을 놓고 보면, 이건 그냥 '다들 행복하게 잘 살자'는 수준의 표어밖에 안 된다. 한국의 정치는 가장 넓게 그물을 펼치는 전략을 선호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넓은 정치'가 '힘의 정치'와 곧바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쌍끌이 어선끼리 어장 경쟁을 하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그 민주당을 비판하는 외곽 세력들이나, 이념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뿐더러 애초에 어떤 '이념성'을 지니려고 하지도 않는다. 특정한 핵심 지지층을 다지면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최대한 넓은 범위의 유권자들에게 단번에 호소하는 전략을 택하려다보니, 결국 정치는 한낱 쪽수 싸움으로 전락하고 만다.

지난 선거에서 단일화 국면을 떠올려보자. 만약 각 정당들이 특색에 따라 확고한 지지층을 지니고 있고 그 충성도가 높다면 애초에 단일화 논의가 잘 거론되지도 않을 뿐더러 명확한 '거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사에는 계급정당이 제대로 출현한 바 없었고, 그나마 유권자들을 묶어놓는 끈은 지역주의 뿐이었다. DJP 연합이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충청도 표를 주면 너는 나에게 총리직을 주고 내각제 개헌을 한다, 이건 '거래'가 된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진보정당의 확실한 표밭으로 구성된 비율이 턱없이 낮은 한국에서, 진보정당들과 민주당 및 민주당 계열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은 거래가 성사되기 어렵다. 서로 주고 받기 위해서는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한데, 민주당과 그 계파들은 애초에 대중추수에 급급했고, 진보정당들의 기반은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민주당 계열들은 진보정당과 정당한 거래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냥 힘으로 빼앗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할 테니까. 쪽수로 밀어붙이고 여론조사 결과로 압박하면, 사표 방지 심리로 진보정당의 핵심 지지층도 상당수 끌려간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역사가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당들, 특히 보수양당이 지니고 있는 '이념으로서의 대중주의'와 '실천에서의 다수결 맹신'은 이렇듯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다수결-쪽수로 밀어붙이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좋은 소리'만 한다. 그렇게 막연한 수사로 다수를 동원한 후, 스스로의 이념과 지향성을 지닌 정치집단들을 다수결에 의해 굴복시킨다.

전직 배우, 현직 정치인 문성근이 주도하는 '국민의 명령'은 이와 같은 경향성이 극대화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그 어떤 구체적인 내용도 제시하지 않고, 그냥 '합쳐라, 모여라'만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이념으로서의 대중주의를 극대화하기 위해 강령은 처음부터 만들지도 않았다. 실천에서의 다수결을 맹신하므로 백만 명을 모아서 야당들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발상을 이마에 써붙이고 다닌다. 구체적 강령이나 지향성 따위 없는, 함성을 위한 함성. 기의는 없고 기표만 남은 껍데기로서의 정치. 한국의 정치를 허깨비로 만드는 두 개의 큰 경향성이 완전히 하나로 융합되어 이와 같은 기괴한 대중정치운동이 출현한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경향성에 맞서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서구 민주주의는 선거권의 점진적 확대와 더불어 계급정당이 출현하고 그들이 핵심 지지층으로 구성되는 역사적 맥락 속에 성립하였지만, 한국에서는 해방 후 보통선거권이 그냥 주어졌고 갓 시작된 계급정당이 철저하게 와해되는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진보정당이 10%대의 득표율을 올린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북한의 3대 세습을 외부에서는 비판할 수 없다는 개또라이들이 당을 집어삼키면서 그 시도도 실패로 끝나고 있는 중이다.

진보정당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치들은 대부분 '대중성 강화'를 요구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대중성이란 이와 같이 이념적 탈색과 더불어 힘의 정치에 대한 숭배를 동시에 의미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노선을 택할 때 진보정당은 존재의 의의를 상실할 뿐더러 다수결이 민주주의라고 믿는 자들의 공세 앞에 더욱 무력해진다. 그러므로 진보정당의 지지자는 와해되고 있는 계급에 호소하거나,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새로운 대중성에 호소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