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obile.nytimes.com/2011/10/07/opinion/brooks-where-are-the-jobs.xml
잘 쓴 칼럼. 몇 가지 코멘트.
1. 기술 혁신이 느려지고 우리가 보는 세상이 확 달라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이미 오래전에 크루그먼이 했음. 크루그먼의 영향력은 이렇게 은근히 넓게 미침.
2. 스티브 잡스의 출현 요건으로 60년대의 반문화, 기크 문화, 미국식 기업문화의 종합을 꼽는다. 하지만 아래 리플에서
누군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건 어디까지나 당대의 미국이 좀 더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던 사회라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크지
않나?
3. 정보통신 혁명의 물리적 한계. 기술이 60년대의 SF처럼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물리적 한계의 탓이 크다. 가령 마하
5를 넘기면서 무사히 날아가는 비행기, 궤도 엘리베이터 따위. 정보통신 혁명 역시 같은 위기에 봉착할 우려가 있지 않을까?
2011-10-07
2011-10-06
무한, 생존, 경쟁 – 죽음에 대한 고찰
스티브 잡스의 부고가 전해지면서 세계 언론이 들끓기 시작한 가운데, 조선일보의 자회사인 비즈조선은 다음과 같은 문제적 제목의
기사를 내놓았다. “스티브 잡스 사망, 국내 스마트폰 경쟁력에는 도움”(비즈조선, 2011년 10월 6일). 당연히 항의 여론이
빗발쳤고 현재 그 기사의 제목은 좀 더 온건한 형태의 것으로 변경된 상태다.
우리는 대체로 그 ‘무한 경쟁 사회’가 인간성을 말살한다고 생각하거나 비판한다. 하지만 인간성이 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상대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 수도 있고, 단지 쾌락을 위해 무고한 누군가를 죽이거나 문자 그대로 잡아먹을 수도 있다.
비즈조선의 데스크가 과연 이 제목 선정을 후회할까? 그는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며 스스로를 변호할 것이다. 자신과 식솔의 생계 및 풍족한 생활을 위해 밥벌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행동이다. ‘비인간적’이라는 비난은 ‘무개념’이나 ‘몰상식’ 같은 표현 정도로 무의미한 무언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도덕적 관념과 규범이 하나의 인간관/인생관으로 함축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의존할 수 있을만한 기존의 관념이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이 소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앞서 나는 비즈조선의 데스크가 처자식 먹여살리기를 핑계삼아 후안무치한 헤드라인을 뽑았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 헤드라인의 내용은, 따지고 들어가보면, 스티브 잡스의 죽음이 살아있는 혹은 남아있는 자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이다. 이 발화행위의 내적 동기와 외적 발현에서 모두, 삶은 죽음에게 일말의 설 자리도 허용하고 있지 않다.
비즈조선의 이 헤드라인은 그런 면에서 너무도 ‘비-죽음적’이다. 문제는 그 발화 행위가 다름아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것이라는 데 있다. 죽음에 대해 비-죽음적으로 말하는 이 방식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본질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며 즉각적으로 누군가의 이익이나 손해를 떠올리며 입에 담는 이러한 화법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용산참사가 벌어졌을 당시, 스스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굳게 믿는 일련의 네티즌들은 입을 모아 유가족들이 받게 될 보상금이 얼마일지를 놓고 수근거렸다. 죽기 전에는 내려오지 않겠다며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 지도위원을 향해 구사대와 전경들이 몰아닥칠 때, 그의 죽음이 사측에게는 이익이 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진중공업의 주가는 크게 치솟았다. 스티브 잡스의 부고가 전해지고 삼성전자의 주가가 오르는 것은 그러므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살아있는 다른 이들의 이익으로, 그 어떤 반성적 고찰도 없이 즉각 치환되는 것은, 이 비-죽음의 시대를 표상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묻는다. 그게 뭐가 나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거 아냐? 이러한 발화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을 내가 먼저 챙기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가로채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전제되어 있다. 어차피 살아있는 놈들 중 누군가가 이익을 챙기게 되어 있다면, 내가 먹어야지.
그리하여 죽음은 결코 ‘무한 경쟁’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오직 살아있는 자들만이 살아있는 세상 속에서, 죽음은 또 다른 경쟁의 도구 혹은 대상으로 전락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삶을 온전히 삶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오래도록 고민해왔다. 번영과 풍요와 여유와 재생산, 우정과 돌봄과 사랑과 공감 등, 혹은 정의와 자유와 평등이 그 필수 요소로 거론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끝이 있으며 누구도 그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죽음 그 자체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으로써 삶은 완성된다. 내가 살아온 나의 삶이 나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내가 타인의 삶과 죽음에 모두 함께함으로써 나 자신의 죽음에 서서히 다가가는 것이다. 삶에 영원히 결여로서 남을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고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결코 완전해질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을 강요받는다. 죽음을 바라보고 사유할 겨를이 없다. 그리하여 무한성을 획득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삶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생존’ 뿐이다.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이 ‘무한 생존을 위한 경쟁’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죽음이 사라진 자리에 칡덩굴처럼 뒤엉켜 뻗치는 생존에는 그 어떤 이유도 목적도 윤리도 성찰도 없다. 심지어 그 생존에는, 지금 우리가 생생하게 겪고 있는 바와 같이, 삶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 ‘생존’의 주체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그 ‘무한 경쟁 사회’가 인간성을 말살한다고 생각하거나 비판한다. 하지만 인간성이 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상대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 수도 있고, 단지 쾌락을 위해 무고한 누군가를 죽이거나 문자 그대로 잡아먹을 수도 있다.
비즈조선의 데스크가 과연 이 제목 선정을 후회할까? 그는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며 스스로를 변호할 것이다. 자신과 식솔의 생계 및 풍족한 생활을 위해 밥벌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행동이다. ‘비인간적’이라는 비난은 ‘무개념’이나 ‘몰상식’ 같은 표현 정도로 무의미한 무언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도덕적 관념과 규범이 하나의 인간관/인생관으로 함축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의존할 수 있을만한 기존의 관념이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이 소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앞서 나는 비즈조선의 데스크가 처자식 먹여살리기를 핑계삼아 후안무치한 헤드라인을 뽑았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 헤드라인의 내용은, 따지고 들어가보면, 스티브 잡스의 죽음이 살아있는 혹은 남아있는 자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이다. 이 발화행위의 내적 동기와 외적 발현에서 모두, 삶은 죽음에게 일말의 설 자리도 허용하고 있지 않다.
비즈조선의 이 헤드라인은 그런 면에서 너무도 ‘비-죽음적’이다. 문제는 그 발화 행위가 다름아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것이라는 데 있다. 죽음에 대해 비-죽음적으로 말하는 이 방식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본질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며 즉각적으로 누군가의 이익이나 손해를 떠올리며 입에 담는 이러한 화법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용산참사가 벌어졌을 당시, 스스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굳게 믿는 일련의 네티즌들은 입을 모아 유가족들이 받게 될 보상금이 얼마일지를 놓고 수근거렸다. 죽기 전에는 내려오지 않겠다며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 지도위원을 향해 구사대와 전경들이 몰아닥칠 때, 그의 죽음이 사측에게는 이익이 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진중공업의 주가는 크게 치솟았다. 스티브 잡스의 부고가 전해지고 삼성전자의 주가가 오르는 것은 그러므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살아있는 다른 이들의 이익으로, 그 어떤 반성적 고찰도 없이 즉각 치환되는 것은, 이 비-죽음의 시대를 표상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묻는다. 그게 뭐가 나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거 아냐? 이러한 발화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을 내가 먼저 챙기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가로채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전제되어 있다. 어차피 살아있는 놈들 중 누군가가 이익을 챙기게 되어 있다면, 내가 먹어야지.
그리하여 죽음은 결코 ‘무한 경쟁’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오직 살아있는 자들만이 살아있는 세상 속에서, 죽음은 또 다른 경쟁의 도구 혹은 대상으로 전락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삶을 온전히 삶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오래도록 고민해왔다. 번영과 풍요와 여유와 재생산, 우정과 돌봄과 사랑과 공감 등, 혹은 정의와 자유와 평등이 그 필수 요소로 거론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끝이 있으며 누구도 그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죽음 그 자체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으로써 삶은 완성된다. 내가 살아온 나의 삶이 나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내가 타인의 삶과 죽음에 모두 함께함으로써 나 자신의 죽음에 서서히 다가가는 것이다. 삶에 영원히 결여로서 남을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고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결코 완전해질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을 강요받는다. 죽음을 바라보고 사유할 겨를이 없다. 그리하여 무한성을 획득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삶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생존’ 뿐이다.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이 ‘무한 생존을 위한 경쟁’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죽음이 사라진 자리에 칡덩굴처럼 뒤엉켜 뻗치는 생존에는 그 어떤 이유도 목적도 윤리도 성찰도 없다. 심지어 그 생존에는, 지금 우리가 생생하게 겪고 있는 바와 같이, 삶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 ‘생존’의 주체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기 때문이다.
2011-09-29
개인글: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열한번째 테제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열한번째 테제는 하이게이트 묘역의 마르크스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철학자들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 테제는 일반적으로 철학의 영향력은 중요하지
않으며, 혁명적 실천이 관건이라는 식으로 독해되었다. 전혀 그런 종류의 뜻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수동적으로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철학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으며, 세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철학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세계를 다시 주조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세계를 바꿔야만 한다는 것이다.
43p, Singer, Peter, Marx: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43p, Singer, Peter, Marx: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1-09-28
개인글: 조지 엘리엇이 서구 신학에 미친 영향
조지 엘리엇이라는 필명을 쓰던 마리안 에반스(Marian Evans)는 헤겔 철학이 영어권에 잘 알려져있지 않던 당시, 헤겔
좌파에 속하는 포이에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The Essence Of Christianity)을 영어로 옮겨 소개했다고 한다.
세상 참 좁군.
세상 참 좁군.
개인글: 인터넷 시대에 ‘내면’은 가능한가
무언가를 읽을 때 소리내어 읽지 않는 것이 일반화된 것은 인류 역사상 최근의 일이다. 고대 중세까지는 책을 소리내어 읽고, 입으로 떠들면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유명한 이야기이니 특별히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금 사람들은 시끌벅쩍하게 읽고 쓰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단적으로 나만 해도 그렇다. 혼자 생각하고 몰래 적어놓으면 될 이야기들을 왜 굳이 블로그에 적어놓을까? 혹자는 쉽사리 노출증 따위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태는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우리는 이제 인터넷에서 읽고 그것을 즉각적으로 공유하거나 코멘트를 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제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피드백을 얻을 수 없는 곳에는 자신의 의견이나 흔적을 남기지조차 않는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논란이 불거지면 바로 그 글에 리플이 달렸다. 지금은 그 글을 단축 URL로 뭉쳐놓은 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의견을 주고받는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근대적 자아, 묵독과 내면의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구축하는 근대적 자아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별반 새로울 게 없는 뻔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떠벌이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스스로가 그러한 경향성 하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읽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써도 충분하다. 지금 나는 사회를 향해 그리 많은 의견을 던질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오래도록 고민하였고 결국 덜컥 블로그를 열었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유명한 이야기이니 특별히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금 사람들은 시끌벅쩍하게 읽고 쓰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단적으로 나만 해도 그렇다. 혼자 생각하고 몰래 적어놓으면 될 이야기들을 왜 굳이 블로그에 적어놓을까? 혹자는 쉽사리 노출증 따위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태는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우리는 이제 인터넷에서 읽고 그것을 즉각적으로 공유하거나 코멘트를 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제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피드백을 얻을 수 없는 곳에는 자신의 의견이나 흔적을 남기지조차 않는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논란이 불거지면 바로 그 글에 리플이 달렸다. 지금은 그 글을 단축 URL로 뭉쳐놓은 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의견을 주고받는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근대적 자아, 묵독과 내면의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구축하는 근대적 자아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별반 새로울 게 없는 뻔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떠벌이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스스로가 그러한 경향성 하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읽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써도 충분하다. 지금 나는 사회를 향해 그리 많은 의견을 던질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오래도록 고민하였고 결국 덜컥 블로그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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