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06

무한, 생존, 경쟁 – 죽음에 대한 고찰

스티브 잡스의 부고가 전해지면서 세계 언론이 들끓기 시작한 가운데, 조선일보의 자회사인 비즈조선은 다음과 같은 문제적 제목의 기사를 내놓았다. “스티브 잡스 사망, 국내 스마트폰 경쟁력에는 도움”(비즈조선, 2011년 10월 6일). 당연히 항의 여론이 빗발쳤고 현재 그 기사의 제목은 좀 더 온건한 형태의 것으로 변경된 상태다.

우리는 대체로 그 ‘무한 경쟁 사회’가 인간성을 말살한다고 생각하거나 비판한다. 하지만 인간성이 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상대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 수도 있고, 단지 쾌락을 위해 무고한 누군가를 죽이거나 문자 그대로 잡아먹을 수도 있다.

비즈조선의 데스크가 과연 이 제목 선정을 후회할까? 그는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며 스스로를 변호할 것이다. 자신과 식솔의 생계 및 풍족한 생활을 위해 밥벌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행동이다. ‘비인간적’이라는 비난은 ‘무개념’이나 ‘몰상식’ 같은 표현 정도로 무의미한 무언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도덕적 관념과 규범이 하나의 인간관/인생관으로 함축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의존할 수 있을만한 기존의 관념이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이 소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앞서 나는 비즈조선의 데스크가 처자식 먹여살리기를 핑계삼아 후안무치한 헤드라인을 뽑았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 헤드라인의 내용은, 따지고 들어가보면, 스티브 잡스의 죽음이 살아있는 혹은 남아있는 자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이다. 이 발화행위의 내적 동기와 외적 발현에서 모두, 삶은 죽음에게 일말의 설 자리도 허용하고 있지 않다.

비즈조선의 이 헤드라인은 그런 면에서 너무도 ‘비-죽음적’이다. 문제는 그 발화 행위가 다름아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것이라는 데 있다. 죽음에 대해 비-죽음적으로 말하는 이 방식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본질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며 즉각적으로 누군가의 이익이나 손해를 떠올리며 입에 담는 이러한 화법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용산참사가 벌어졌을 당시, 스스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굳게 믿는 일련의 네티즌들은 입을 모아 유가족들이 받게 될 보상금이 얼마일지를 놓고 수근거렸다. 죽기 전에는 내려오지 않겠다며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 지도위원을 향해 구사대와 전경들이 몰아닥칠 때, 그의 죽음이 사측에게는 이익이 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진중공업의 주가는 크게 치솟았다. 스티브 잡스의 부고가 전해지고 삼성전자의 주가가 오르는 것은 그러므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살아있는 다른 이들의 이익으로, 그 어떤 반성적 고찰도 없이 즉각 치환되는 것은, 이 비-죽음의 시대를 표상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묻는다. 그게 뭐가 나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거 아냐? 이러한 발화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을 내가 먼저 챙기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가로채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전제되어 있다. 어차피 살아있는 놈들 중 누군가가 이익을 챙기게 되어 있다면, 내가 먹어야지.

그리하여 죽음은 결코 ‘무한 경쟁’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오직 살아있는 자들만이 살아있는 세상 속에서, 죽음은 또 다른 경쟁의 도구 혹은 대상으로 전락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삶을 온전히 삶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오래도록 고민해왔다. 번영과 풍요와 여유와 재생산, 우정과 돌봄과 사랑과 공감 등, 혹은 정의와 자유와 평등이 그 필수 요소로 거론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끝이 있으며 누구도 그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죽음 그 자체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으로써 삶은 완성된다. 내가 살아온 나의 삶이 나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내가 타인의 삶과 죽음에 모두 함께함으로써 나 자신의 죽음에 서서히 다가가는 것이다. 삶에 영원히 결여로서 남을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고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결코 완전해질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을 강요받는다. 죽음을 바라보고 사유할 겨를이 없다. 그리하여 무한성을 획득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삶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생존’ 뿐이다.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이 ‘무한 생존을 위한 경쟁’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죽음이 사라진 자리에 칡덩굴처럼 뒤엉켜 뻗치는 생존에는 그 어떤 이유도 목적도 윤리도 성찰도 없다. 심지어 그 생존에는, 지금 우리가 생생하게 겪고 있는 바와 같이, 삶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 ‘생존’의 주체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기 때문이다.

2011-09-29

개인글: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열한번째 테제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열한번째 테제는 하이게이트 묘역의 마르크스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철학자들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 테제는 일반적으로 철학의 영향력은 중요하지 않으며, 혁명적 실천이 관건이라는 식으로 독해되었다. 전혀 그런 종류의 뜻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수동적으로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철학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으며, 세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철학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세계를 다시 주조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세계를 바꿔야만 한다는 것이다.

43p, Singer, Peter, Marx: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1-09-28

개인글: 조지 엘리엇이 서구 신학에 미친 영향

조지 엘리엇이라는 필명을 쓰던 마리안 에반스(Marian Evans)는 헤겔 철학이 영어권에 잘 알려져있지 않던 당시, 헤겔 좌파에 속하는 포이에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The Essence Of Christianity)을 영어로 옮겨 소개했다고 한다.
세상 참 좁군.

개인글: 인터넷 시대에 ‘내면’은 가능한가

무언가를 읽을 때 소리내어 읽지 않는 것이 일반화된 것은 인류 역사상 최근의 일이다. 고대 중세까지는 책을 소리내어 읽고, 입으로 떠들면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유명한 이야기이니 특별히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금 사람들은 시끌벅쩍하게 읽고 쓰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단적으로 나만 해도 그렇다. 혼자 생각하고 몰래 적어놓으면 될 이야기들을 왜 굳이 블로그에 적어놓을까? 혹자는 쉽사리 노출증 따위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태는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우리는 이제 인터넷에서 읽고 그것을 즉각적으로 공유하거나 코멘트를 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제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피드백을 얻을 수 없는 곳에는 자신의 의견이나 흔적을 남기지조차 않는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논란이 불거지면 바로 그 글에 리플이 달렸다. 지금은 그 글을 단축 URL로 뭉쳐놓은 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의견을 주고받는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근대적 자아, 묵독과 내면의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구축하는 근대적 자아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별반 새로울 게 없는 뻔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떠벌이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스스로가 그러한 경향성 하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읽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써도 충분하다. 지금 나는 사회를 향해 그리 많은 의견을 던질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오래도록 고민하였고 결국 덜컥 블로그를 열었다.

2011-02-11

여성 문학은 남성 문학의 여집합인가 - 문학평론가 조영일이 불러온 논란에 대하여

어떤 발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되는 맥락과 설명들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때가 있다. 문학평론가 조영일이 트위터에서 내놓은 한 발언을 둘러싼 소동이 바로 그 예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영일에 따르면 이 발언에 대해 불과 수십분 사이 4-50개의 멘션이 달렸고, 그 중 상당수는 노골적인 비아냥 혹은 비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나는 그 시점까지는 이 사건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조영일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대하여 내놓는 트윗들, 그리고 그가 '맥락'으로 제시하는 별도의 비평문을 읽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대단히 전형적인,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굳이 지적될 필요가 있는 여성혐오의 한 양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트위터에 올린 위 발언이 크게 세 가지의 맥락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첫째, 소설가 김영하와의 논쟁. 둘째, 시나리오 작가 故 최고은 씨의 죽음. 셋째, 자신이 2010년 10월 12일에 쓴 "요즘 비평에 대한 오해 하나"라는 비평문에서 논하는 바.

논쟁을 통해 첫째 맥락에서는 '소설가는 낭만주의적 감수성에 의해 글을 쓰는 존재가 아니라, 글을 써서 돈을 버는 프로페셔널이어야 하며,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비평적 관점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테제가 도출되었다. 한편 두번째 맥락에서는, 그와 같은 당위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의 작가들(여기서 '작가'라는 단어는 대단히 넓은 맥락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이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벅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문제의 세 번째 글로 들어가봐야 한다.

"요즘 비평에 대한 오해 하나"는 문학평론가 남진우의 한 칼럼에 대한 비판의 형식을 띄고 있다. 두 사람은 공통된 문제 의식을 지니고 있지만 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두 사람 모두 현재 문학의 생산이 문예창작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인식한다. 하지만 남진우는 그것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벌어지고 있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반면, 조영일은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더 큰 문제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현대문학은 80년대 '민중문학' → 90년대 '여성문학' → 2000년대 '문창과문학'으로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조영일이 보기에 "문창과문학이 완성된 것은 2000년대지만, 그것이 시작된 것은 90년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문창과문학이 여성문학의 완성된, 혹은 발전된 형태인지에 대한 설명을 그 글에서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단지 "오늘날은 90년대보다 더 많은 여성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90년대에 나타난 특징들은 오로지 자신의 시대만 규정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 다음과 같은 반발을 할 것이다. 바로 밑에서 조영일이 충분히 설명을 하고 있지 않느냐고. 즉, "우리는 그 이유를 이론적 관점에서는 '근대문학의 종언', 현실적인 관점에서는 '한국문학의 위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으로 인해 문학은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총체성을 담지하는 텍스트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전까지 소설과 비평과 시를 읽으며 세상을 알아가고자 했던 영특한 10대들과 30대 중반 이후 엘리트 독자층이 와해되고, 그리하여 한국문학이 위축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축소된 시장 규모로 인해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남성 작가들은 더 이상 소설 쓰기 따위에 매진할 수 없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생계에 대한 부담이 적"은 여성작가들이 문창과에서 수업 듣고 소설 쓰면서 일군의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통찰' 내지는 모두가 알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던 진실에 대한 용감한 폭로처럼 보인다. 하나의 중대한 논리적 비약을 눈감아줄 수 있다면 그렇다. 이 설명은 아무리 에누리해준다 하더라도 왜 남성 작가들이 줄어들었는가에 대한 설명일 뿐, 왜 여성 작가들이 늘어났는가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남성 작가들이 줄어든다는 것과 여성 작가들이 늘어난다는 것 사이에는 필연적인 상관 관계가 성립하고 있지 않다. 일본의 GDP가 줄어든다고 해서 한국의 GDP가 늘어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로 여기에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가 있다. 조영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문학계에 여성작가들이 갑자기 힘을 발휘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거꾸로 질문을 던져보면, 의외로 쉽게 풀린다. "왜 한국문학계에서 남성들의 영향력이 점점 사라져간 것일까?""

이와 같은 질문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이른바 '여성문학'을 '남성문학'의 여집합으로 보는 시각을 전제한다. 여성 작가들이 늘어난 것은 남성 작가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문학계라는 것을 하나의 제로섬 게임으로 파악한다면 이와 같은 접근법이 타당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 문학의 독자층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따라서 글쓰기를 통해 돈 버는 일이 이전 시대에 비해 더욱 어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부류"[sic]들은 전망 없는 문창과에 입학하고 글을 쓰는가?

이게 바로 나와 같은 문학의 문외한이 '문학평론가'로부터 해답을 듣고 싶어하는 그런 종류의 질문이다. 요즘 여성 작가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나도 궁금하다. 그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읽고 쓰는지, 무엇을 욕망하고 표현하고자 하는지, 물론 직접 작품을 읽을 수도 있겠으나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좋겠다. "상대적으로 생계에 대한 부담이 적기 때문"에 여성 작가가 많다는 조영일 식의 설명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뿐 아니라 섬세함과 반대라는 의미에서 폭력적이다.

조영일이 세 번째 맥락으로 제시한 글이 '한국출판시장현황 - 남성 작가의 감소를 중심으로'라면 이와 같은 시각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즉 그는 단지 사실적이고 경제적인 상황의 기술만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문학평론가이며 비평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 작가의 감소를 통해 여성 작가의 증가를 설명하는 방식은 아주 자연스럽게 여성 작가들을 타자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비판 역시 가능할 것이다.

조영일의 글은 여성 작가들의 양적 증가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행위의 주체가 아닌 어떤 현상의 '결과물'로서 취급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도 과히 긍정적인 뉘앙스로 다루어지지는 않는 그런 결과물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맥락, 혹은 2012년 10월 12일에 쓴 글에서는 조영일이 여성 작가들, 혹은 여성문학을 진지하게 대상화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 작가들의 증가는 근대문학의 종언과 남성 작가의 감소에 수반된 일종의 부수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그 글의 논조가 대단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완전히 배제한 체 그들에 대해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맥락이 추가되었다. '작가는 글을 써서 돈을 버는 프로페셔널이어야 한다'는 당위와 '남는 밥을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젊은 여성 작가에 대한 애도'가 뒤섞인 가운데, 故 최고은 씨는 소설가가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이므로 '근대문학의 종언' 같은 논의가 결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지적 노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깨끗이 잊혀지고, 대신 너무도 익숙하고 상투적인 하나의 개념적 대립쌍이 출현하는 것이다. 성녀 대 창녀, 여성 노동자 동지 대 노는 년, 남편이나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예술한다는 년' 대 남는 밥을 얻어먹지 못해 굶어죽는 "생계형 여성작가".



나는 이 지점에서 어떤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김규항의 '그 페미니즘' 사건을 말이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가 아닌 진정한 여성해방운동가는 존경한다'고 말하던 김규항의 목소리와 조영일의 시각은 이 지점에서 근본적 유사성을 드러낸다. 그들은 본인들이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근본적인 지배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형 작가'나 '생계형 여성작가', 혹은 두 가지 모두, 담론적 분할통치를 위해 동원되는 가상의 범주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략은 끝없이 시도되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특히, 스스로가 지적이고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다. 당혹스러움과 분노 앞에서 정련되지 못한 언어가 튀어나올 때 돌아오는 대답은 백이면 백 다음과 같다. "몰랐어? 이게 현실이잖아. 왜 아닌 척 하니?"

이런 식의 논의가 용기 있는 발언으로 포장되어 유통되면 유통될수록 한국 사회의 문화적 지체는 더욱 심화될 뿐이다. 특히 "예술형 작가"라는 말에 담긴 비하와 질시의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싯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손이 밉더라.


공정한 논의를 위해 박정희와 조영일의 차이를 명시해보자. 박정희는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를 비판하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손놀림을 찬양했다. 반면 조영일은 "예술형 작가"들을 비판하면서 "생계형 여성작가"들을 "옹호대상"으로 삼았다. 공정한 논의를 위해 적었는데, 적고 보니 더욱, 두 사람의 논의 구조가 갖는 차이가 뭔지 모르겠다. 물론 여공과 "생계형 여성작가"는 같지 않다. 그러나 양자 모두 '예술한다는 년'들의 대립쌍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을 지닌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이 사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혹은 그리 큰 문제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인가? 심지어 우리는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3D업종에 종사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와 같이 경제적 사실을 진술할 때조차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을 하기 위해, 그 문장 안에 사실관계나 논리의 오류는 없는지에 대해 노심초사한다. 그렇다면 비평의 언어가 그만큼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솔까말 가부장제가 엄존하고' 같은 결론을 제시해버리는 광경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조영일이 이 글을 읽는다 해도 내가 지적하는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성주의적 감수성' 같은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적의 적은 친구', '반대의 반대는 참'과 같은 단순한 논리적 오류에 포박되어 있기 때문이다(이 시점에서 우리는 '여성 작가들이 왜 늘어났는지 알기 위해 남성 작가들이 왜 줄어들었는지를 알아보는' 그의 성향이 꽤 일관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영일은 말한다. "내가 공격당한 배경에는 최고은씨의 죽음이 있는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참 아이러니컬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따지고 보면 나만큼 문화계(문학계)의 불공정함을 문제삼은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링크)

설령 조영일 자신이 문학계의 '모든' 불공정함을 문제삼아왔다 해도, 그가 자신이 지적하고 있었던 문제점 중 하나를 범할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그 경우 비판받지 않을 수 있는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중학생용 논술 교재에도 안 나올법한, 너무도 당연한 오류의 예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이미 그는 '예술가형 여성 작가'와 '생계형 여성 작가'를 구분함으로써 문화계와 문학계를 넘어 인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불공정함에 반기를 들기는 커녕 참여해버렸다. 이건 이명박을 싫어하는 나를 왜 진보 진영에서 욕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왜 이 글을 썼을까?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고 서로 멘션을 주고받아본 적도 없는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평의 언어가 오히려 그 대상을 타자화하는 것, 그에 대해 직감하고 반발하는 이들 앞에서 당당해야 할 글의 주인이 희생자 놀이를 해버리는 것, 그 광경을 보고 젠체하며 이성적인 사람 행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등을 나는 참을 수 없다.

이 논쟁에서 조영일이 보여준 것과 같은 언어적 구조는 최대한 지양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누군가의 발언권을 빼앗아버리는 것, 대상화하고 분할하여 통치하고자 하는 담론적 움직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역할을 조영일을 비판하는 것으로 한정짓도록 하겠다. 소수자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소수자가 아닌 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천은 침묵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침묵으로 지금까지 표현되지 못한 이들에 대한 지지를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