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쳐 달라는 남자들'이 보이던 태도는 기존의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버리고 여성 활동가들에게 발언권을 넘겨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여성 활동가들에게 넘어온 것은 발언의 권리가 아니라 발언의 의무였다. 이런 구도에서 끊임없이 "어떻게 해야 돼?"라고 묻는 것은 남성 활동가들의 정치적 수동성과 무지를 변명해주는 편리한 알리바이가 되었고, "20여 년 동안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으로 사회화되어 온 무지한 남성"에게 여성주의적 정답을 제시해야 하는 무거운 부담은 여성 활동가들이 져야 했다. '가르치려 들지 않는' 겸허함을 칭찬하고, '배우려고 질문하는 자세를' 기특해 하고, 노력을 가상히 여기고, 실수를 용서해 주고, 계속 여성주의에 관심을 갖도록 보살피는 것은 이 구도 속에 있던 여성 활동가들에게 부과된 새로운 버전의 노동이었다.
그러나 사실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과 '가르쳐 달라는 남자들'은 동일한 성별 구도의 양면이다.[각주] 이 '오빠'들은 둘 다, 여성주의를 통해 자기를 성찰하고 조직과 이념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여성 활동가가 여성 문제를 '담당'하고 '전문가'가 돼 '해결사' 구실을 해주기를 요구했다. 여성주의를 '인정'한다고 하면서 "구색 맞추기"로 동원하고, 끊임없이 여성주의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면서 정답을 요구하는 남성의 행태는 여성 활동가들을 소진시키고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각주] 질문하는 권력과 대답해야 하는 고통은 다양한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수없이 실천되는 권력관계의 한 양상이다. 내가 만난 여성 활동가들 중 특히 남성 중심적 조직 안에서 별다른 여성 연대나 지지 집단 없이 활동한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로 "찍히"거나 "커밍아웃"을 한 뒤 끝없는 질문에 끝없이 대답해야만 했던 고통을 토로했다. 여고은은 주변의 "맑스주의자들이 한 달에 한 번은 시비를 걸어" 왔다고 말하면서, "자기 생각은 절대 얘기 안 하"면서 "당신은 페미니즘 진영의 대표로서 대답을 해야 된다"고 말하는 맑스주의자들의 태도를 고발하기도 했다. 타자에게 끊임없이 대답을 요구하고, '내가 물으니 너는 당연히 설명해줘야 한다'는 식의 태도는 많은 여성 활동가들의 공분을 샀다.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서울: 이매진, 2008), 233쪽. 강조는 인용자.
2016-08-25
여성주의를 '가르쳐 달라'는 남자들
2016-08-16
[북리뷰] 여성 차별의 유구한 역사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
강명관 지음·휴머니스트·1만3000원
숙종 30년, 서기로는 1704년이 되던 그해, 기계 유씨 가문의 후손 중 한 사람인 유정기는 예조에 문서를 올렸다. 자신이 이미 14년 전 쫓아내어 따로 살고 있는 부인 신태영과 완전히 법적으로 결별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은 이 희한한 소송에 대한 책이다.
양 부부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혼인 관계를 청산하는 법적 절차가 조선에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조선이라고 이혼이 없었던 나라는 아니다. “조선 건국 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즉 조선 전기에는 이혼 사례가 <실록>에서 광범하게 발견된다.” 하지만 그 이혼은, 즉 “<경국대전>의 이혼이라 함은 중혼(重婚)에 관한 처벌이며, 또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경우”(28쪽)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이혼은 여성에 대한 처벌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유정기는 이미 14년 동안 쫓아내고 있었던 부인 신태영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싶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밤에 혼자 돌아다녔다고, 즉 성적으로 일탈하였다고, 그리고 시부모에게 험한 말을 하고 제사용 그릇에 오물을 섞었다고 고발했다.
유정기의 가문은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였고, 널리 퍼진 인맥의 힘으로 처음에는 임금인 숙종에게서 이혼 허락을 받아내는 듯했다. 하지만 예조판서 민진후가 반론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신태영의 이혼 소송은 장기화된다. 유정기가 내놓은 증거들은 조작된 것이거나, 조작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을 만한 근거가 없었다. 증인이라고 해봐야 신태영 본인, 신태영의 몸종 등 ‘양반 남자’인 유정기에 비해 낮은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의 증언을 받아주면 ‘아랫것’이 ‘윗분’을 고발하는 셈이니 신분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며, 그 증언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남편의 주장만 듣고 법에도 없는 이혼을 허락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신태영의 이혼 소송>은 오해를 불러오기 딱 좋은 제목이다. 나도 책을 읽기 전까지는 신태영이 먼저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위자료를 청구하기라도 한 줄 알았다. 그러나 조선은 유교근본주의 국가였다. 신태영은 죄인, 혹은 피의자의 신분으로 감옥에 갇힌 채 ‘이혼 소송’을 겪어야 했다. 남편 유정기에게는 사회적 신분, 가문의 권세, 심지어 아내를 내쫓은 후 함께 살고 있는 첩까지 있었다. 반면 신태영은 유정기의 사별한 전처가 낳은 큰아들의 집에 머물다가 옥에 갇혀 있었고, 석방된 후에는 그 행적을 알 수 없다. 신태영이 한글로 쓰고 누군가 한문으로 옮긴 항변서, 즉 공초만이 남아 그의 영민함과 억울함을 대변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정기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의 여성차별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모든 제도를 중국에서 베껴왔지만 여성과 노비를 차별할 때만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은 높은 신분의 부인들이 재혼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조선에서는 이혼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이혼한 부인의 아들들은 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했다. 문제는 그 남자 양반들 역시 어떤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양반이 이혼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들의 출세길을 막는 꼴이 되어버린다. 여성의 목을 조르던 조선왕조는 이렇게 우스꽝스럽지도 않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여성차별의 역사가 유구하게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호주제는 2008년에 와서야 폐지됐다. 신태영‘들’의 이혼 소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명관 지음·휴머니스트·1만3000원
숙종 30년, 서기로는 1704년이 되던 그해, 기계 유씨 가문의 후손 중 한 사람인 유정기는 예조에 문서를 올렸다. 자신이 이미 14년 전 쫓아내어 따로 살고 있는 부인 신태영과 완전히 법적으로 결별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은 이 희한한 소송에 대한 책이다.
양 부부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혼인 관계를 청산하는 법적 절차가 조선에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조선이라고 이혼이 없었던 나라는 아니다. “조선 건국 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즉 조선 전기에는 이혼 사례가 <실록>에서 광범하게 발견된다.” 하지만 그 이혼은, 즉 “<경국대전>의 이혼이라 함은 중혼(重婚)에 관한 처벌이며, 또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경우”(28쪽)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이혼은 여성에 대한 처벌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유정기는 이미 14년 동안 쫓아내고 있었던 부인 신태영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싶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밤에 혼자 돌아다녔다고, 즉 성적으로 일탈하였다고, 그리고 시부모에게 험한 말을 하고 제사용 그릇에 오물을 섞었다고 고발했다.
유정기의 가문은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였고, 널리 퍼진 인맥의 힘으로 처음에는 임금인 숙종에게서 이혼 허락을 받아내는 듯했다. 하지만 예조판서 민진후가 반론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신태영의 이혼 소송은 장기화된다. 유정기가 내놓은 증거들은 조작된 것이거나, 조작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을 만한 근거가 없었다. 증인이라고 해봐야 신태영 본인, 신태영의 몸종 등 ‘양반 남자’인 유정기에 비해 낮은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의 증언을 받아주면 ‘아랫것’이 ‘윗분’을 고발하는 셈이니 신분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며, 그 증언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남편의 주장만 듣고 법에도 없는 이혼을 허락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신태영의 이혼 소송>은 오해를 불러오기 딱 좋은 제목이다. 나도 책을 읽기 전까지는 신태영이 먼저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위자료를 청구하기라도 한 줄 알았다. 그러나 조선은 유교근본주의 국가였다. 신태영은 죄인, 혹은 피의자의 신분으로 감옥에 갇힌 채 ‘이혼 소송’을 겪어야 했다. 남편 유정기에게는 사회적 신분, 가문의 권세, 심지어 아내를 내쫓은 후 함께 살고 있는 첩까지 있었다. 반면 신태영은 유정기의 사별한 전처가 낳은 큰아들의 집에 머물다가 옥에 갇혀 있었고, 석방된 후에는 그 행적을 알 수 없다. 신태영이 한글로 쓰고 누군가 한문으로 옮긴 항변서, 즉 공초만이 남아 그의 영민함과 억울함을 대변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정기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의 여성차별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모든 제도를 중국에서 베껴왔지만 여성과 노비를 차별할 때만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은 높은 신분의 부인들이 재혼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조선에서는 이혼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이혼한 부인의 아들들은 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했다. 문제는 그 남자 양반들 역시 어떤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양반이 이혼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들의 출세길을 막는 꼴이 되어버린다. 여성의 목을 조르던 조선왕조는 이렇게 우스꽝스럽지도 않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여성차별의 역사가 유구하게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호주제는 2008년에 와서야 폐지됐다. 신태영‘들’의 이혼 소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6-08-04
[별별시선]‘물뽕’과 부동액
2015년 11월 중순, 서울 성동경찰서 사이버 수사팀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집단강간 모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보에 따르면 한 남자가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소라넷에 올렸다. 술 혹은 약물에 의해 정신을 잃고 벌거벗은 한 여성의 사진과 함께, 작성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라를 잘 안 해서 랜덤 채팅 양톡으로 여태 3분 정도 와서 질사하고 가셨는데 ㅋㅋ 오늘은 소라에서 한번 해볼까요?”
‘골뱅이’란 술이나 약물 등에 의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성을 상대로 한 강간을 뜻하는 은어다. ‘왕십리 골뱅이’의 작성자는 첫 게시물을 올리고 11분 후 두 번째 글을 업데이트했다. 역시 의식을 잃은 듯 보이는 여성의 나체 사진이 붙어 있었다. 게시물 아래에는 ‘줄 서봅니다’라는 식의 댓글이 달리는 중이었다.
한편 2016년 6월,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 묘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정보] 진짜 한남 재기시켜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년들은 이거 먹여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게시물에는, “자동차 부동액은 물이랑 에틸렌글리콜 + 색소가 주성분”이라며 “용법은 1일 1회 5㎖”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물론 그 내용에는 어느 정도의 구체성이 있지만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과는 다르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거나 하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한남(한국 남자)을 재기(사망)시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라는 전제가 달린 가상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 흔한 ‘인증샷’도 없이 인터넷에서 그냥 하는 소리, 시쳇말로 ‘드립’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부동액 섞인 커피를 마시고 누군가가 병원에 입원했다면, 원인이 밝혀지면서 실제 범행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현실적 범죄의 정황이 없지만 경찰은 일단 수사를 개시했다. 허위 게시물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도 공권력은 작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반면 2015년 11월, 인터넷 성범죄 사이트 소라넷을 모니터링하던 활동가가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을 신고했을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페미니즘 활동가 단체인 ‘(RPO) 리벤지 포르노 아웃’팀이 공개한 당시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담당자는 “요거를 전체적인 댓글이나 글 게시된 걸 분석해 보니까 범죄혐의는 전혀 없”다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장난한 것 같애요. 이 소라넷 사이트 이용하는 애들이~ 반응 보려고~.”
설령 농담이라 해도 사람에게 독극물을 먹이자고 모의하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다. 전복적 발화로서 긍정적 기능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런 ‘미러링’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사람을 기절시키는 약물을 누군가 먹였다는 제보를 받은 공권력이 그것을 장난으로 간주해버리는 것만큼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자는 발화자들의 개인적 존엄 및 품위의 문제인 반면, 후자는 우리 사회의 공권력이 얼마나 공정하게 작동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두 사건 모두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인터넷 게시물을 두고 신고가 들어갔다. 그런데 왜 여자가 남자에게 부동액을 먹였다는 신고와, 남자가 여자에게 ‘물뽕’을 먹였다는 신고에 대해, 경찰의 반응이 이토록 다른 것인가? 전자는 살인이지만 후자는 성범죄이므로 범죄의 무게가 달라서라면, 경찰은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저년 배를 칼로 쑤시겠다, 목을 졸라 죽이고 싶다’는 식의 살해 협박에 대해서도 일일이 수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아무리 꼬셔도 안 넘어” 오는 그녀를 함락시키라는 광고 문구를 달고 버젓이 데이트 강간 약물이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죽이고 강간하겠다고 하면 ‘농담’이라고 대충 넘어가면서, 여자가 남자를 대상으로 비슷한 말을 하면 곧장 공권력이 투입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물뽕’과 부동액이 아니라, 법 앞의 평등이라는, 훨씬 근본적인 가치의 문제인 것이다.
입력 : 2016.07.31 20:51:00 수정 : 2016.07.31 20:53:24
덧붙임: "왕십리" 취중여성 강간 사건 경찰 녹취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PO) 리벤지 포르노 아웃 활동가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골뱅이’란 술이나 약물 등에 의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성을 상대로 한 강간을 뜻하는 은어다. ‘왕십리 골뱅이’의 작성자는 첫 게시물을 올리고 11분 후 두 번째 글을 업데이트했다. 역시 의식을 잃은 듯 보이는 여성의 나체 사진이 붙어 있었다. 게시물 아래에는 ‘줄 서봅니다’라는 식의 댓글이 달리는 중이었다.
한편 2016년 6월,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 묘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정보] 진짜 한남 재기시켜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년들은 이거 먹여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게시물에는, “자동차 부동액은 물이랑 에틸렌글리콜 + 색소가 주성분”이라며 “용법은 1일 1회 5㎖”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물론 그 내용에는 어느 정도의 구체성이 있지만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과는 다르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거나 하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한남(한국 남자)을 재기(사망)시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라는 전제가 달린 가상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 흔한 ‘인증샷’도 없이 인터넷에서 그냥 하는 소리, 시쳇말로 ‘드립’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부동액 섞인 커피를 마시고 누군가가 병원에 입원했다면, 원인이 밝혀지면서 실제 범행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현실적 범죄의 정황이 없지만 경찰은 일단 수사를 개시했다. 허위 게시물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도 공권력은 작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반면 2015년 11월, 인터넷 성범죄 사이트 소라넷을 모니터링하던 활동가가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을 신고했을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페미니즘 활동가 단체인 ‘(RPO) 리벤지 포르노 아웃’팀이 공개한 당시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담당자는 “요거를 전체적인 댓글이나 글 게시된 걸 분석해 보니까 범죄혐의는 전혀 없”다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장난한 것 같애요. 이 소라넷 사이트 이용하는 애들이~ 반응 보려고~.”
설령 농담이라 해도 사람에게 독극물을 먹이자고 모의하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다. 전복적 발화로서 긍정적 기능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런 ‘미러링’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사람을 기절시키는 약물을 누군가 먹였다는 제보를 받은 공권력이 그것을 장난으로 간주해버리는 것만큼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자는 발화자들의 개인적 존엄 및 품위의 문제인 반면, 후자는 우리 사회의 공권력이 얼마나 공정하게 작동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두 사건 모두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인터넷 게시물을 두고 신고가 들어갔다. 그런데 왜 여자가 남자에게 부동액을 먹였다는 신고와, 남자가 여자에게 ‘물뽕’을 먹였다는 신고에 대해, 경찰의 반응이 이토록 다른 것인가? 전자는 살인이지만 후자는 성범죄이므로 범죄의 무게가 달라서라면, 경찰은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저년 배를 칼로 쑤시겠다, 목을 졸라 죽이고 싶다’는 식의 살해 협박에 대해서도 일일이 수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아무리 꼬셔도 안 넘어” 오는 그녀를 함락시키라는 광고 문구를 달고 버젓이 데이트 강간 약물이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죽이고 강간하겠다고 하면 ‘농담’이라고 대충 넘어가면서, 여자가 남자를 대상으로 비슷한 말을 하면 곧장 공권력이 투입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물뽕’과 부동액이 아니라, 법 앞의 평등이라는, 훨씬 근본적인 가치의 문제인 것이다.
입력 : 2016.07.31 20:51:00 수정 : 2016.07.31 20:53:24
덧붙임: "왕십리" 취중여성 강간 사건 경찰 녹취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PO) 리벤지 포르노 아웃 활동가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6-08-01
지혜 보따리
어떤 철학자가 지적하는 바에 의하면 서양 사람은 한 가지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여러 가지 요소로 나누어서 모든 각도에서 철저히 알아본다. 이에 반해 동양 사람은 한 가지 문제가 있으면 그것과 비슷한 문제를 자꾸 모은다. 그리고 큰 지혜 보따리 같은 것에다 계속 집어 넣는다. 얼마 후 그 보따리는 우주만큼이나 커지고, 따라서 그 내용에 관한 논쟁도 우주적인 논쟁이 되어 처음의 문제 따위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고 한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재미있는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히로나카 헤이스케, 방승양 옮김, 『학문의 즐거움』(서울: 김영사, 2001), 121쪽.
2016-07-28
토니 주트의 글쓰기 방법론
언제나 자신의 어휘를 섬세하게, 내면의 음조에 맞춰 장인처럼 조율했던, 그는 위대한 작가였다. 그는 글쓰기의 체계적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고, 이 책에 실린 에세이는 모두 같은 방법론에 의해 작성되었는데, 심지어 2008년부터 2010년 사이, 그가 병에 걸리고 전신마비에 시달리던 무렵[1] 쓴 글들 역시 그러하다. 첫째, 그는 한 주제에 대해 읽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읽고, 노란색 유선 리걸패드에 손으로 노트를 작성했다. 그리고 개요로 넘어가 색깔별로 A, B, C, D를 분류하고, A1i, A1ii, A2iii 등으로 이어지는 하위 분류를 (더 많은 리걸패드에) 작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식당 테이블에 수도사처럼 몇 시간씩 앉아 노트의 모든 문장들, 모든 사실들, 날짜, 요점, 개념 등이 개요 속에 배치되도록 정렬했다. 다음, 가장 중요하고 충격적인 단계에서 그는 자신의 원래 노트를 전부 개요의 순서에 맞게 옮겨적었다. 에세이를 쓰기 위해 앉을 때쯤이면 그는 자신이 알아야 하는 것들 중 대부분을 베끼고, 또 베끼고, 외워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문을 걸어잠근 후 (마마이트 샌드위치와 진한 에스프레소를 곁들인 짧은 휴식을 제외하면) 하루에 여덟 시간씩 고쳐쓰고 또 고쳐썼다. 끝으로 "광내기"를 했다.
병에 걸렸을 때에도 이 과정은 바뀌지 않았고 다만 힘들어졌을 뿐이다. 누군가가 손을 보태서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자료들을 수합하고, 인터넷을 검색하며, 타자를 쳐야 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면서 그는 가장 사적인 일이라 할 수 있는 생각하기와 글쓰기를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재교육해야 했는데, 이는 그의 특출난 지성의 유연성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조수와 함께 작업했지만, 대부분의 작업은 보통 밤에 그의 머릿속에서 기억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렇게 작성, 분류, 색인, 재서술된 그의 정신적 노트는 아침에 A, B, C, D의 개요 순서에 따라 나, 우리의 아이들, 간호사, 그의 조수의 손을 통해 타자로 옮겨졌다.
이것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그의 정신 세계의 지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논리, 인내력, 밀도 높은 집중과 주의 깊은 논변의 구축, 사실 및 세부사항에 대한 군인같은 경계심, 대부분의 작가와 달리 최초의 구상안에서 빗겨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스스로의 신념에 대한 확신 등. 어려움은 "지상 위의 사실"이 아닌 "내면의 사실", 그의 내면에 배치된 가구마냥 그저 거기 있을 뿐인 것, 자기 자신도 완전히 보거나 알지 못하는 내면의 무언가와 부딪칠 때 발생했다. 그중 가장 명백한 난제는 그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 Jennifer Homans[2]의 서문. Tony Judt, When the Fact Changes(New York: Penguin Press, 2015)
[1] 토니 주트는 2008년 루게릭병이 발병하여 투병하다가 사망하였다. 루게릭병에 걸리면 몸의 근육이 마비된다.
[2] 토니 주트의 부인. 1993년 결혼하여 2010년 토니 주트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다.
참고: 같은 역사학자지만 E. H. 카의 글쓰기 방법론은 완전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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