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01

[북리뷰] 만주를 생각한다, 철도를 고민한다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고바야시 히데오, 산처럼, 1만2천원.

부산에서 신의주를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유럽의 끝인 지브롤터까지 향하는 꿈.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대륙을 향한 철도의 로망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만주라는 공간, 그리고 그 만주에 철도가 깔리던 그 시대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민중가요의 한 구절처럼 '광활한 만주벌판'을 노래하지만, 정작 그 만주가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심지어 몽고인과 러시아인들이 뒤섞이는 점이지대가 되었는지에 대해, 우리 사회의 이해는 아직도 피상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와세다대학 아시아태평양 연구센터 교수인 고바야시 히데오의 책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를 펼쳐보자.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일명 '만철'은 한때 설립되고 사라져버린 일개 기업이 아니었다.

정식명칭은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南滿州鐵道株式會社). 이 책에서 그 '탄생부터 사망까지' 40년에 가까운 역사를 더듬어보면서 이 회사가 가진 의미를 고찰해보려 한다. 1906년부터 1945년까지 20세기 전반의 반세기를 버텨온 이 회사는 일본 최대의 주식회사로서 중국 동북(東北)지역, '만주'에 군림했다. '만주'의 중요 산업을 지배하고, 철도 인접지역에 '부속지'라는 이름의 '영토'를 가진 이 회사는, 명칭은 주식회사였지만 그 실상은 하나의 식민지 국가였다. 세칭 '만철왕국.' 이 회사는 물론 중국 동북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일본 국내에도 그 이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15쪽)

마치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 영국이라는 국가 이전에 동인도회사라는 한 기업이 먼저 기틀을 다졌던 것처럼, 일본의 만주 지배 역시 일본이라는 국가의 프로젝트였지만 만철이라는 한 기업의 영리 활동의 외관을 빌렸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댓가로 얻어낸 철도 영업권 및 철도 부속지 관할권을 메이지 천황은 만철에 일임했고 야심만만한 일본의 엘리트들이 미개척지를 향해 뛰어들었던 것이다.

만주는 '비어있는 땅'이었다. 청나라가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그 진공에 수많은 세력들이 동시에 빨려들어갔다. 그런 만주에서 철도 회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기관차와 열차 및 기타 부속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 재료를 공급하는 제철소, 그 모든 시설과 인력을 보호하기 위한 무장 세력까지 포괄하는 준 국가 활동과 다를 바 없었다. 만철의 조사부는 그 모든 과정을 통솔하는 브레인 역할을 하면서, 훗날 일본의 대장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국가통제와 관려통제를 섞어서 짜낸"(16쪽) 통제경제의 모델을 생산해냈다.

그 여파는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만철 조사부는 1937년부터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했다. 그것은 30여년 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군복무를 한 박정희에 의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부활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만주국의 5개년 계획은 안산(鞍山) 제철소와 쇼와(昭化) 제강소를 중심에 두고 중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그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 일본으로부터 얻어온 차관과 기술력을 동원해 포항제철소를 건립했던 것이다.

만주국의 관료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논의는 이미 몇 차례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만주국과 만철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 분위기는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짧고 가벼운 책은 일제강점기 만주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입체적으로 끌어올려주기 위한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해낸다. '광활한 만주벌판', 그곳에는 철도가 놓여 있었다.


2016-10-31

입동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7년 11월 15일 저를 양육자로 선택했던 입동이는, 두 달이 넘는 투병 끝에 2016년 10월 31일 내가 보는 앞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심장과 폐가 멎은 상태로 병원에 당도하여, 네 차례의 심폐소생술 끝에 잠깐 심박을 되찾았지만, 혈압과 호흡 등이 돌아오지 않았고, 설령 그러했더라도 완전한 소생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인은 급성신부전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 손상으로 추정됩니다.

다 큰 다음에도 자그마한 체구에 겁이 많았고, 고집이 셌으며, 사람과의 스킨십을 좋아했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언제나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꾹꾹이를 하던 입동이. 함께 살기 시작한 그 날을 '생일'로 간주하였기에 만으로 열 살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햇살 속에서 행복한 낮잠을 즐기며, 나를 기다려주길.



2016-10-18

[북리뷰] 진정성을 갖고 작성한 사망진단서라는 거짓말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앤드류 포터, 마티, 1만6천원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 원인을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표기한 사망진단서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서울대병원은 사망진단서를 재논의하는 특별위원회를 열어, "백남기 씨의 사망진단서는 일반 지침과 다르게 작성됐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단서가 붙었다. "담당교수가 주치의로서 헌신적인 진료를 시행했으며, 임상적으로 특수한 상황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작성했음을 확인했다"고 말이다.

과학의 일부인 의학적 진술에 '진정성'이라니. 즉각적으로 조롱이 뒤따랐다. 주치의가 에세이를 쓰는 것도 아니고 무슨 소리냐, 진정성 따지고 들 거면 대체 한의학은 왜 비판하냐, 의사들이 결정적인 국면에 국민들의 신뢰를 배반하니까 허현회 같은 대체의학 사기꾼들이 판치는 것이 아니냐, 등 다양한 반응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책꽂이에서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을 꺼내들었다.

2008년 여름, 프랑스의 한 엔지니어가 아내 그리고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중고 요트 여행을 하다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붙잡힌 후, 그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특공대의 총탄에 맞고 사망한 사건과 함께 책은 시작된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현대 문명과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털어 중고 요트를 산 후,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해적이 우글거리는 해역으로 진입했다. "그들이 욕망한 삶의 '본질적인' 핵심은 달리 말하면 '진정성'(authenticity)이다."(10쪽)

이 사례만 들어도 많은 독자들은 저자가 비판하는 '진정성'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민주주의, 소비주의, 대량생산, GMO, 화학적 생산물, 기타등등 '현대적'(modern)인 것과 대척점에서 '진정한 나'를 일깨워주는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는 '진정성'을 찾고자 한다. 이제 제주도는 틀렸다. 산티아고나 히말라야에서 트래킹을 해야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 개천의 물을 퍼마시고 과탄산소다를 풀어 빨래를 하는 삶이 '친환경적'인 것으로 언론에 소개된다. '진정한' 면역력이 활약할 기회를 빼앗는 백신을 거부하고 서로 병을 옮겨주는 '수두 파티'를 벌인다.

캐나다의 트렌트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현재는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앤드류 포터는 전공인 철학 위에 다양한 대중문화적 지식을 접목하여 21세기 현재의 진보 운동이 빠져 있는 '진정성'의 늪을 파해쳐 보여준다. 그가 조지프 히스와 함께 쓴 책 <혁명을 팝니다>에서 보여줬던 것과 유사한 방법론이다. '진정성'이라는 것이 '근대성'에 대한 반발로 제시된 퇴행적 이념이라는 것을, 그리고 '진정성'에의 추구와 파시즘에 대한 열망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대단히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평범한 대중들과 달리 '깨어있는' 나는 대량생산되는 GMO 작물이 아니라 유기농 식품을 먹는다는 자부심 느끼기.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구분짓기'의 욕망이다. 그러한 '진정성' 담론이 힘을 얻을수록 수많은 인류를 굶주림과 질병에서 구하고 범죄율을 떨어뜨린 "자유민주주의의 전반적인 과학·법률·정치적 기반과 그 속에서 번성하는 문화"(312쪽)는 힘을 잃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성'을 찾아 야만과 폭력이 들끓는 전근대의 망망대해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물며 대한민국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진정성'을 운운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진정성'에의 호소가 권력을 향한 전근대적 복종의 습속과 맞닿아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6-10-04

[북리뷰] 남자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인가

맨박스
토니 포터, 한빛비즈, 1만4천원.

'남자도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말을 우리는 최근의 페미니즘 열기 속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남자다움'의 틀에 갇혀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고, 여자들과 가까워지는 법도 배우지 못하고, 그저 '일하는 기계'로 살다가 늙은 후 황혼이혼을 당한다는 것이 오늘날 남성의 인생을 애틋해하는 표준 서사를 이룬다. 이게 다 '남자답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우리 남자들은 더 이상 '남자답게' 굴지 않겠다, '여자를 지켜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못난 풍경도 더러 눈에 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자. 토니 포터의 책 <맨박스>는 그렇게 뻔뻔한 소리를 하는 책이 전혀 아니다. 남자들이 남성성이라는 정해진 틀을 강요당한다는 것, 그로 인해 남성 스스로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이 책의 중요한 서사를 이루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가이며 사회운동가로서 오래도록 남성들을 상대해왔던 토니 포터는 남자들, 특히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들에게, 값싼 면죄부 대신 유죄 판결을 내린다. '남자도 가부장제의 희생자'라는 이야기만을 듣고 싶어서 이 책을 펼친 사람은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맨박스는 그 속에 갇혀 있는 '선량한' 남자들을 답답하게 한다. 그러나 그 남자들이 갑갑해하면서도 결국 여성을 향한 그 억압을 용인하는 사이, 세상은 점점 더 나쁜 곳이 되어간다고 고발한다.

선한 남성들이 폭력적인 남성들을 대놓고 지지하지는 않는다. 무언의 합의에 따라 그들의 행동을 묵인할 뿐이다. 남성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묵시적 규범이자 기대치 그리고 남성들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하는 모든 규범들이 맨박스 안에 엉켜 있다.(41쪽)

매력적인 목소리와 화법으로 '맨박스'에서 남자들이 나와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던 토니 포터의 TED 강의만을 생각하던 이들, 특히 남성 독자들에게, 위와 같은 서술은 어쩌면 공격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선한 남성'들이 가부장제의 피해자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정 반대로, 스스로 선량하다고 믿고 있는 남자들 역시 맨박스 속에서 그것의 존속에 기여하고 있는 한, '나쁜 남자'들이 저지르는 직접적 폭력을 거들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일단 남자들에게 맨박스의 존재를 알리고, 맨박스가 이끄는대로 '자동 주행 모드'로 살아가지 않도록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남자들이 "일단 현실이 어떤지 알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생각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된다. 남성 모임에서도 이것이 사실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143쪽) 기존의 남성성 모델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고, 남자들이 스스로 새로운, 보다 평등하고 감정적으로 풍부하며 여성들 뿐 아니라 남성 스스로에 대해서도 억압하지 않은 성 역할 모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맨박스>는 한 활동가가 평생에 걸쳐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고 지도해왔던 내용을 최대한 평이한 문체와 짧은 분량에 담아낸 책이다. 토니 포터가 가진 자기 확신, 카리스마, 설득력 넘치는 화법 덕분에 그는 수많은 남자들을 맨박스에서 끄집어내는데 성공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의 저작물은 국내에 소개되면서 종종 오해받는 듯하다. '착한' 남자, 침묵하는 방관자들은 남자마저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아니다. 여성에 대한 공격적 행동을 당연시하는 남성성 모델을 재생산하고 있는 공범인 것이다. 우리 남자들은 이 책의 메시지를 좀 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토론할 필요가 있다.


2016.10.04ㅣ주간경향 1195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9270958021&code=116

2016-09-25

[별별시선] 거울도 안 보는 남자

남자들을 여장시키는 행사를 요즘에도 여기저기서 하는 모양이다. 일단 이 점을 분명히 해두자. 한국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는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적용할 때 불편한 일이다. 남자들이 부끄러워하는 건 그다지 문제가 아니다. '여자같이 꾸민 모습'을 품평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여성 비하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남자답지 않게 꾸민 남자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니만큼 동성애, 크로스드레싱, 트랜스젠더에 대해 적대적인 맥락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젠더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반해, 하위 주체로서의 '여성'의 위치에 남자들을 억지로 구겨넣은 후 남자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행사다. '여자다운 꾸밈'은 감상과 품평의 대상이 되며 그의 인격적 존엄은 짐짓 무시된다. 즉, 여성성을 조롱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 사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여장을 한 남자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리는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그 결과, 가부장제의 기득권층인 이성애자 남자들을 '여자'로 만드는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는 종종 역설적으로 해방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여자다움'이 비하와 멸시의 대상으로 취급되지 않는 맥락에서는 어떨까? '여장남자 대회' 역시 품위를 획득한다. 미국의 유명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하나인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태어났을 때 산부인과에서 '남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성성'을 어떻게 현시하는가, 즉 '드래그'하는가를 놓고 경쟁하는 리얼리티 쇼다. 그곳에서 '남자가 여자처럼 꾸미는 행위'는 미적 도전 과제로 재탄생한다.

이러한 상식에 기반해 9월 23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역사학자 전우용의 칼럼을 검토해보자. 그는 자신의 막내아들이 고등학교에서 겪은 일을 소개한다. 위에서 설명한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가 바로 그것이다. 스스로가 여장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니지만, 본인의 남자인 친구들이 당황하고 벌벌 떠는 모습과, 그런 꼴을 보고 웃어대는 여학생들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전우용의 막내아들은 아버지에게 하소연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전우용은 이렇게 말한다. "결국 설득에 실패했고, 오히려 내가 반성했다. 남자아이들에게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고 즐기면서 여자아이들이 배운 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전우용은 태세를 전환하여 '메갈리아'와 '미러링'을 두고 근엄한 태도로 훈계를 하는 것이다.

아주 원론적인 차원부터 말하자면, 자신의 아들마저 설득하지 못했다는 그의 경험담은 여성차별에 대한 전우용의 식견이 매우 얄팍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자기 아들에게도 한국 사회의 여성차별에 대해 가르치고 설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신문 지면에 해당 주제에 글을 쓴다니,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전우용의 막내아드님, 혹은 그와 유사한 분노를 느끼는 남자들에게, 내가 대신 대답해 주겠다.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가 열리고, 당신이나 당신의 친구들이 여자들에게 놀림감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여자처럼 꾸미는 행위' 자체를 천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그런 구조적 차별이 있기 때문에 남자인 당신이 '여장'을 할 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는 전략적 발화로서의 '미러링'이라 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을 '미러링'으로 받아들이고 화내는 남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 거울에 무엇이 비춰보이는가? '용모 단정'한 여직원을 뽑는다고 하면서, 동시에 '지하철에서 분가루 날리며 화장하는 여자'라는 상상 속의 마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이 사회의 여성 차별이 보이지 않는가?

'여자처럼 꾸미되 꾸밈을 드러내지 말라'는 모순된 사회적 요구에 여성들은 짓눌려 있다. 그러나 '거울도 안 보는 남자'들의 눈에는 이런 구조적 차별과 억압이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남자들도 거울 좀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



입력 : 2016.09.25 21:02:04 수정 : 2016.09.26 09:5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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