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0

[별별시선]트럼프 당선과 ‘진보’의 가치

미국 대선 결과는 뜻밖이었다. 하지만 국내의 반응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마치 페이스북을 통해 조작된 뉴스를 보고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미국인들처럼, 특히 일부 진보 인사들은 잘못된 사실관계를 기반으로 해 엉뚱한 방향으로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하나씩 짚어보자.

‘트럼프는 미국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틀렸다. 현지시간으로 11월17일 현재, 힐러리 클린턴의 총득표는 6282만5754표, 반면 트럼프는 6148만6735표에 그치고 있다. 약 130만표 차가 나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500만표가량 개표되지 않은 표가 남아있다.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 국민들은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미국이 연방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은 국민들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50개의 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당선은 민주주의적 원칙보다 연방주의적 원칙이 우선시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트럼프 지지층은 분노한 노동자들이다?’

천만에. 트럼프의 지지층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백인들이다. 숫자를 보자. 미국인의 중위소득은 5만6000달러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들은 약 6만1000달러의 중위소득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의 중위소득은 7만2000달러로, 클린턴 지지층에 비해 1만달러가 높을뿐더러 평범한 미국인들에 비해서도 1만6000달러나 더 높다. 이것은 평균이 아니라 중위값이므로 ‘슈퍼 리치’들이 공화당을 지지해서 왜곡된 통계가 아니다. 주요 트럼프 지지층이 ‘가난하고 분노한 노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샌더스가 나갔다면 이겼을 것이다?’

어림도 없다. 샌더스는 클린턴에게 경선에서 패배한 후보다. 특히 민주당의 ‘미래 지지 기반’인 히스패닉 및 소수자 집단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경선 패배의 원인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전국 득표력이 필요하다. 샌더스는 백인 밀집 지역인 ‘러스트 벨트’에서만 상대적 우위를 갖는 약한 후보였다. 게다가 샌더스가 트럼프와 1 대 1 토론에서 어떤 처참한 꼴을 당했을지 상상해봐야 한다.

미국 대선 관련 주요 이벤트를 모두 시청했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샌더스는 트럼프의 상대가 못된다.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잽 부시를 문자 그대로 짓뭉개버렸다. “닥쳐”(You shut up)라며 손가락질을 해대고 목청을 높이는 트럼프를 부시 집안의 세번째 대통령 출마자는 감당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트럼프는 온갖 부동산 거래뿐 아니라 리얼리티 쇼와 프로레슬링 무대 등으로 단련된 ‘미디어 인파이터’다. ‘남자 대 남자’로 맞대결해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은 없다. 점잖게 나오면 말을 안 들어먹고, 똑같이 진흙탕 싸움을 하면 이쪽이 더 손해를 본다. 클린턴처럼 소수자에 속하는 누군가가 품위 있는 태도로 맞서는 것만이 해법이었다. 샌더스는 트럼프를 이길 수 없었다.

정리해보자. 트럼프는 클린턴보다 최소 130만표 뒤졌지만 선거인단을 많이 확보해 승리했다. 게다가 트럼프 지지자들은 평균적인 미국인뿐 아니라 클린턴과 샌더스의 지지자들보다 잘사는, 교외에 거주하는 겉보기에 점잖은 백인 중산층들이다. 이번 미국 대선의 키워드는 ‘분노한 민중’이 아니라 ‘소수자를 혐오하는 기득권층’인 것이다.

그런데 왜 미국 대선을 ‘가난한 노동자의 반란’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까? 한국식으로 치자면 여성, 세월호 희생자, 삼성반도체 백혈병 환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외국인 노동자, 중국계 동포 등을 모욕하며 증오를 선동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베 스타’가 바로 트럼프다. 일부 인사들은 그러나 승자에게 감정이입하여, 트럼프의 승리에 어떤 ‘진보적 가치’를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는 안된다. 우리는 전 세계의 시민들과 연대하여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

입력 : 2016.11.20 21:16:01 수정 : 2016.11.20 21:18:55

2016-11-19

20161113 - 20161119: 미 연준 금리 인상 예고, 박근혜 대통령 피의자 신분

*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현지시간 11월 17일 의회에 출석해 남은 임기를 다 채울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그가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비방 때문이다. 트럼프는 선거운동 기간 중 연준이 민주당 정권을 돕기 위해 낮은 금리를 유지하고 있고, 그래서 달러가 저평가되고 있다고 공격했던 것이다.

옐런은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임기를 모두 채울 것임을 천명했다. 2018년 2월까지는 자리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를 유임시킬 생각이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므로, 이후로는 미국의 통화 정책이 크게 요동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옐런 의장은 의회에서 "현 시점에서 볼 때, 나는 경제가 우리의 목표를 향해 대단히 훌륭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며, 연준이 11월에 도달한 판단 역시 유지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기준금리 인상은 "상대적으로 빠른 시기에" 시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준금리 인상이 필요한 이유로, 견실한 회복세를 보이는 미국의 경제 외에도, 지나치게 낮은 금리로 인해 투자자들이 위험한 자산(가령 부실한 주택 담보 대출)으로 향하게 될 우려가 있음을 덧붙였다.


* 11월 17일, 박근혜 대통령이 주중 이루어질 것처럼 이야기되었던 검찰 조사를 거부했다. 검찰에서 그를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하려 했기 때문에,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고 언론과 법조인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러자 11월 18일 늦은 시각,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을 피의자라고 적시하지 않은 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특수본 관계자는 18일 “박 대통령에 대해 ‘형제번호’를 땄다(기재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신문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형제번호’는 검찰이 입건된 피의자에게 부여하는 일종의 사건번호다. 참고인은 입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형제번호가 기재됐다면 피의자라는 의미다."

그러나 검찰은 공식적으로 단 한 번도 박근혜 대통령이 피의자라고 밝히지 않았다.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는 바는 어디까지나 '관계자'의 말일 뿐이고, 아직 공식적으로 피의자 신분인 대통령에 대한 소환장이 발부되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의 통신사인 교도통신은 검찰 관계자가 박근혜 대통령을 '중요 참고인'으로 지적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한국갤럽에서 1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5%, 부정 평가는 90%, 의견 유보는 6%로 지난주와 유사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2016-11-15

'클린턴의 패배에 대한 오바마의 분석'에 대한 코멘트

클린턴의 패배에 대한 오바마의 '분석'은 밥을 꼭꼭 씹어먹어야 소화가 잘 된다 같은 원론적인 소리일 뿐. 그거 모르는 정치인도 있나? 문제는 클린턴 캠프가 '왜' 위스콘신 등을 동선에 넣지 않았느냐임. 내 추측은 인구 구성표를 믿고 도박을 했다는 쪽.

카운티 단위의 순회 일정을 감당하기에는 클린턴의 건강이 안 받쳐줬을 것이고,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재수없는 년'과의 휴먼 터치를 좋아할지조차 미지수이니, 플로리다와 (심지어) 텍사스 등 인종 구성이 다양한 대도시가 있는 주에 캠페인을 집중하고 망함.

이 가설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음. 1) 힐러리 클린턴의 건강 문제가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 2) 백인 남성과 가정주부들의 미소지니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클린턴 캠프에서 알고 선제적으로 포기했다. 아무튼 숫자를 놓고 보면 해볼만한 도박이었을듯.

문제는 막판에 FBI가 선거에 개입하면서 안그래도 투표율 낮은 마이너리티들의 투표 의지를 떨어뜨리고, 원래 투표율 높은 백인들을 반 클린턴으로 결집시키는 효과를 불러왔다는 것. 클린턴 캠프에서 패인을 FBI로 짚는 것을 왜 비난하는지 모르겠음...

이 가설이 맞다면, 클린턴 캠프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패인은 당연히 FBI 뿐임. '클린턴이 건강 때문에 카운티 단위 방문이 불가능했다', '우리는 판세를 보고 러스트 벨트를 버렸다' 같은 소리를 공개적으로 할 수야 없을 테니까.

* 2016년 11월 15일 오후 3시경 작성한 트윗들을 모은 것.

[북리뷰] 늑대왕 로보와 시튼, 그 문제적 관계

커럼포의 왕 로보
윌리엄 그릴, 찰리북, 1만5천원

영국 태생으로 캐나다로 이주한 동물학자 어니스트 시튼은 자신이 관찰하고 겪은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써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커럼포의 왕 로보'다. 미국 뉴멕시코의 커럼포는 로보라는 이름의 늑대가 지배하고 있다. 로보는 수백, 수천 마리의 양, 염소, 개 등을 물어죽이고 사냥하며 커럼포의 목장주들의 골칫거리를 넘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초청받은 시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동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로보를 추적한다. 강력한 독약을 정성스럽게 만든 미끼에 설치하고, 비싼 덫을 놓았다. 하지만 로보는 시튼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보다 영악해서, 그 어떤 미끼도 물지 않고, 덫도 피하며, 오히려 사람을 조롱하듯 그 위에 똥을 싸놓기까지 했다.

시튼은 사냥꾼이면서 동시에 동물학자였다. 그는 로보의 무리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감히 로보를 앞서나가는 어떤 늑대가 있다는 것. 암컷이었다. 시튼은 그 늑대가 로보의 짝임을 직감한다. 흰 털을 가진 아름다운 암컷 늑대 블랑카. 블랑카를 잡으면 로보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적중했다. 블랑카의 시체를 찾기 위해 로보는 평소라면 절대 빠지지 않았을 함정으로 달려들었고, 결국 시튼에게 붙잡혀, 물과 음식을 모두 거부한 채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영국의 젊은 일러스트레이터인 윌리엄 그릴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이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주로 색연필을 이용한 따스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필치로 로보와 블랑카, 로보의 무리, 사냥당하는 동물들, 그들을 추적하는 시튼의 모습을 담아냈다.

단지 그림만 다시 그린 게 아니다. 그는 시튼이 로보를 사냥해낸 후 늑대 보호 운동가로 변신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이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시튼이 깨달은 바, 로보가 가축을 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이 늑대의 먹잇감이 되어야 할 다른 야생동물의 씨를 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그릴의 로보 이야기는 시튼의 원작을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그것을 오늘날의 맥락에 맞게, 야생의 피 냄새를 파스텔톤으로 지워내면서 환경과 생명에 대한 고민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커럼포의 왕 로보>는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며, 고전의 리메이크라는 면에서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몇 개의 고민이 뇌리에 남는다. 시튼은 로보를 죽이고 나서야 늑대의 '보호'를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윌리엄 그릴은 그 이야기에 다시 한 번 현대적 맥락을 부여했다. 그런데 그것은, 늑대의 야생성을 이미 거세한 후에 벌어지는, 안전한 '애도'의 행위가 아닌가? 우리는 이미 정복한 자연만을 '보호'하며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어네스트 시튼의 로보 이야기 자체가 지니고 있는 시대적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수많은 갱스터물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바, '남성미를 뽐내는 마초가 짐덩어리밖에 안 되는 철없는 여자를 사랑해서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죽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의 몰락을 위해 종종 포르노적으로 학대당하는 여성 캐릭터의 원형을 암컷 늑대 블랑카가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맥락 속에서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처음부터 '불편한' 이야기이며 우리를 고민하고 사색하게 만든다. 바로 그런 면이야말로 <커럼포의 왕 로보>를, 윌리엄 그릴의 것이건 그 원작이 되는 어니스트 시튼의 것이건, 두고두고 되짚고 곱씹어야 할 걸작으로 만들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6.11.15ㅣ주간경향 1201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11090916411&code=116

탄핵 역풍? 노무현을 모욕하지 마라

노무현은 왜 탄핵을 당했을까? 대통령이기 이전에 변호사였던 노무현은, 본인의 발언이 선거법에 위반될 수 있음을 뻔히 알면서, 왜 공개적인 경로로 자신이 속한 신생 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던 것일까?

물론 일각에서는 그가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일부러 대통령 탄핵을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의 '선거 개입' 발언은, 그 자체만으로도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도전이었음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간과하는 듯하다. 그는 대통령이 한 사람의 정치인이자 정당인으로서 자신이 소속된 정당의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우리는 1987년까지, 그리고 어쩌면 그 이후로도, 지속적인 정권의 선거 개입을 목격해왔다. 그러므로 '대통령의 선거 개입'은 무조건적으로 막아야 할 일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만들어진 공직선거법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얼마 전 치뤄진 미국 대선에서 전례 없이 높은 임기 말 지지율을 자랑하는 오바마 미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유세장을 찾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연설을 했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라고 클린턴을 소개하고, 상대편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하면서, 클린턴의 약점인 '인간적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이다. 심지어 영부인 미쉘 오바마까지 동원해가며 말이다.

2016년 미국 대선의 경우, 권력 기관의 '선거 개입'은 오히려 야당 후보를 돕기 위해 벌어졌다. FBI 국장 제임스 코미가 이른바 '이메일 게이트'에 대한 재조사를 거론하면서 막판 부동층이 투표를 포기하거나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클린턴이 근소한 차이로 이길 것이라 예상되었던 모든 경합주를 빼앗기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통령제를 택하는 민주 국가의 경우, '선거 개입'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FBI, 경찰, 국가정보원, 기무사, 기타등등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이루어지는 그런 '선거 개입'이 첫번째다. 우리의 헌정질서는 바로 그런 '선거 개입'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두 번째의 '선거 개입', 즉 여당의 당원인 대통령이 공개적인 발언 등을 통해 여당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는 '선거 개입'도 있다.

노무현의 의지는 첫 번째의 '선거 개입'을 철저히 차단하는 대신, 두 번째의 '선거 개입'을 할 수 있는 권리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노무현은 자신이 탄핵당하게 된 사유 그 자체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또 대통령의 신분으로 공직선거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던 이유다. 다른 공무원들과 달리 대통령은 '공직자'이기 이전에 '정치인'이므로 정치적 활동을 금지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발언'에 대한 제약이 존재한다면 대통령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활용하여 선거에 개입할 유인동기를 갖게 된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개선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발상이다. 국민에게는 결사의 자유가 있고, 대통령 또한 국민이며, 따라서 선출직 공무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헌법적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을 제외한 수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은 대통령의 선거 개입 '발언'을 허용한다. 다만 권력기관을 동원한 음성적 '개입'을 철저히 금지할 뿐이다. 왜 대한민국에서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가?

노무현의 선거법 위반은 이렇듯 그 자체가 헌법적, 더 나아가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판단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설령 노무현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자체가 논쟁할만한 사안이라는 것만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은 '다른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을 뿐, 민주적 헌정 질서 그 자체를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당시의 국민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민주주의인가'의 문제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안이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발의될 때부터 찬성보다 반대가 더 많았던 것이다. 탄핵안이 발의된 2004년 3월 9일 당시의 신문을 인용해보자. "조선일보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9일저녁 전국 성인 714명을 상대로 전화 조사한 결과 탄핵반대가 53.9%, 찬성이 27.8%였다."(링크)

심지어 국민들은 그 탄핵안이 통과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같은 기사를 더 읽어보자. "국회 본회의에서 탄핵소추안의 통과를 전망하는 답변자는 24.4%이며 부결을 전망하는 답변자는 50.3%였다." 왜냐하면 애초에 대통령을 탄핵할만한 '깜'이 되지 않는다는 게 누가 봐도 명확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다만 "노 대통령이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은 60.8%이며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은 30.1%로 조사됐다." 그는 사과하지 않았고, 발의된 탄핵안은 국회에서 통과되어 헌재로 향하게 되었다.

탄핵 불가론 등을 운운하는 야권 내 주류 세력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박근혜-최순실-우병우 국정 농단 사건과, 노무현의 '선거 개입' 논란이, 당신들의 눈에는 동등하게 보이는가?

전자는 두말할 나위 없는 국정 농단이다. 최대한 빨리 그들을 처벌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후계자에게 합법적으로 넘겨야 하는 사안이다. 반면 후자는 '지금과는 다른 민주주의'를 꿈꾸던 이상주의자가 대통령 당선 이후 새 당을 만들더니 기존의 민주당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그 외 보수 세력을 자극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특히 구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들에게 대북송금특검에 뒤이은 열린우리당 창당과 대통령의 입당은 굉장히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지만, 그것은 어쨌건 최순실-우병우-김기춘 일당의 국정 농단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말이다.

실제로 국민들은 현임 대통령의 국정 농단을 매우 심각한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정치권 내부의 갈등이 오작동하고 불거졌던 2004년의 경우와 달리, 현재 국민들의 60퍼센트 가량은 박근혜 대통령이 사임하거나 탄핵당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탈당하고 여야 합의 총리에 국정을 이양해야 한다는 의견은 18.4퍼센트에 지나지 않으며, 박근혜 대통령이나 김병준 국무총리 임명자가 중심에 서서 국정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14.1%에 불과하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이 제1차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던 10월 25일 조사에서는 ‘자진 사퇴 및 탄핵’ 의견이 42.3%를 기록했고, 1주일 후인 최순실씨가 긴급 체포되어 검찰 조사를 받았던 11월 2일 조사에서는 55.3%로 10%p 이상 더 늘어난 데 이어, 역시 1주일 후인 이번 9일 조사에서는 60.4%를 기록하며 25일 조사 대비 20%p 가까이 ‘자신 사퇴 및 탄핵’ 여론이 더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링크)

놀랍게도, '이 탄핵'과 '저 탄핵'이 뭐가 다른지,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그저 '탄핵 역풍'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다름아닌 노무현의 이름과 이상을 내걸고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과 그 정치인의 지지자들이라는 것이다. 노무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다가 탄핵을 당했는데, 그의 유지를 받든다는 세력은 누가 봐도 잘못된 짓을 하다가 탄핵을 당하게 생긴 악당들과 노무현을 등치시킨다. 그들에게 '이 탄핵'이건 '저 탄핵'이건 중요한 건 그 내용이 아니라 그저 '탄핵 역풍'을 안 맞는 것 뿐이라는 뜻이다.

국민들은 '이 탄핵'과 '저 탄핵'이 다르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과거의 그것에는 정당성이 없었지만, 현재의 국정 마비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는 한이 있더라도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양자를 혼동하는 세력은 오직, 과거에 '탄핵 역풍'으로 재미를 본 바 있는 사람들 뿐이다. 이 역설은 너무도 받아들이기에 괴롭다. 노무현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사람들이, 노무현을 박근혜와 같은 식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에게 2004년의 탄핵은 '떡고물'이 떨어지는 정치적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노무현에게 그것은 끝까지 '쪽팔려'가며 싸워야 할 어떤 민주주의의 싸움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팔아 정치 생명을 이어가는 세력이 본인의 이상을 이토록 진흙탕에 처박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 탄핵'과 '저 탄핵'은 분명히 다르다. '탄핵 역풍'을 걱정하며 똑같은 범주로 싸잡을 사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뜻을 받든다는 이들이 더 이상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지 않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