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적폐(積弊)'라는 개념을 사람에게 붙이는 화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폭력적인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을 꼭 써야 한다면, 상대편 뿐 아니라 스스로의 적폐 또한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진보에도 적폐가 있다. 음모론자들이 바로 진보의 적폐세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진보 개혁 세력의 현실 인식을 방해하며, 사안에 대한 상식적 토론을 가로막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보수 적폐세력과 적대적 공존을 이어간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 역시 음모론자들의 개입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그 참사의 배후에 단일한 '악의 세력'이 존재하기를 원했다. 과적으로 인한 복원력 상실이라는 가장 합리적이고 단순한 이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국정원의 레이더 무기부터, 미국인지 이스라엘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나라의 잠수함까지, 수많은 '아니면 말고'가 밑도 끝도 없이 던져졌다. 선박 및 교통안전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대신, 음모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검증하느라 귀중한 논의의 기회가 날아가버렸다.
세월호가 인양되고 난 후 속된 말로 가장 '멘붕'한 쪽도 다름아닌 일부 진보 세력이었다. 그들은 세월호의 침몰 원인이 잠수함과의 충돌이라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월호가 인양되면 모든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굉장한 음모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정부에서 그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듯이 분위기를 조성하던 사람들. 세월호가 떠오르자 그들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계속 음모론을 생산하는 사람이 있다. 세월호 승무원들이 닻을 던져서 고의로 배를 침몰시켰다고 주장하던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세월호 인양 후에도 '고의침몰설'을 고수하더니, 4월 14일에는 18대 대선에서 개표 부정이 벌어졌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 <더 플랜>을 인터넷으로 공개했다.
<더 플랜>에서 인터뷰한 UC 버클리 통계학과 교수 필립 스타크의 말을 통해 <더 플랜>의 기본적 오류를 반박해보자. "옵티컬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종이 기록지가 남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기록지를 재확인할 수 있지만 전자투표는 오류를 확인하거나 수정이나 복원을 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한국의 선거는 정확히 "옵티컬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전자투표가 아니다. 투표지분류기는 이름 그대로 투표지를 '분류'만 해줄 뿐이고, 실제 개표는 사람이 한다. 애초부터 한국의 선거는 애초부터 수개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수개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기계를 동원해 표를 '분류'할 뿐이다. 미분류표에 박근혜 표가 많았건 문재인 표가 많았건 결과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최종적으로 사람이 손으로 넘겨보고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개표소에는 각 후보 및 정당에서 추천한 참관인들이 있다. 18대 대선에서 여당에 유리하도록 부정개표가 이루어졌다면 민주통합당에서 추천한 참관인 중에 매수 혹은 협박당한 사람, 혹은 그런 상황을 목격한 증인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런 사례는 확인된 바 없다.
김어준도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아니면 말고'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이 시점에서 음모론을 하나 던져보지 말라는 법도 없겠다. 19대 대선을 앞두고 18대 대선 개표부정설을 퍼뜨린다니 이게 무슨 짓일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불복 운동을 벌이려는 냄새가 나지 않나? 뭐, 아니면 말고.
누가 이기건 정권교체가 예정된 대선이다. 보수의 적폐세력은 무너졌다. 이제 범진보진영 역시 스스로의 적폐를 돌이켜보고, 반성하며, 청산해야 한다. 동쪽에는 트럼프, 서쪽에는 시진핑, 북쪽에는 김정은이 둘러싸고 있는 지금, 음모론 따위에 낭비할 여력은 없다. 진보의 고질병인 음모론, 적폐세력인 음모론자들을 떨쳐내고, 새로운 시대를 헤쳐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