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과 핵잠수함, 쌀밥과 파스타
유럽 선진국들이 앞장선다는 그 '탈핵'. 특히 대대적인 탈핵 실험을 진행중인 독일이 많이 거론되며, 스위스도 가끔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그 나라들이 가진 공통점에 대해 국내 언론은 따로 언급하지 않는 듯하다.
독일도 그렇고 스위스도 그렇고, 탈원전을 선포하고 시행하는 나라들은 핵잠수함 도입 같은 소리를 하지 않는 나라들이다. 사방이 내륙인 스위스야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한때 U-보트로 영국과 미국의 해군을 쩔쩔매게 만들었던 독일 역시 핵잠수함 따위 잊어버린지 오래다. 왜냐하면, 내가 지난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핵잠수함이란 가압형 경수로를 탑재한 잠수함이기 때문이다. 즉, 탈핵과 핵잠수함 도입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탄수화물 줄이기 위해 쌀밥 끊고 파스타 먹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1945년 이후의 국제 질서라는 게 있습니다
지난 글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아니 거 우리도 핵잠수함 좀 가지면 어때서?'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완전히 주제파악을 못하는 소리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대중적 인식과 청와대의 의사 결정 수준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핵잠수함을 보유한 나라, 그리고 핵폭탄을 가지고 있는 나라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그것을 대략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핵잠 보유국: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핵탄 보유국: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NPT 공인)
핵탄 보유 선언국: 인도, 파키스탄, 북한
핵탄 보유 추정국: 이스라엘
뭔가 느낌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핵확산금지조약(NPT)상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다섯 나라는 모두 핵잠수함도 가지고 있다. 그 나라들은 동시에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퀴즈.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어떤 나라들일까?
정답: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아주 간단한 문제다. 왜 어떤 나라는 핵을 가져도 되고 어떤 나라는 플루토늄을 재처리하는지 아닌지 감시를 당해야 하는가? 인류가 마지막으로 겪은 전면적 국제전에서 만들어진 세계 질서가 그렇기 때문이다. 저 질서를 이겨내고 싶다면, 인도나 파키스탄 혹은 북한처럼 국제적 고립과 제재를 감수하고 NPT에서 탈퇴해가면서 핵무기를 만들거나, 3차 세계대전을 벌인 후 이기는 수밖에 없다.
반면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은 고사하고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다. 심지어 대다수의 식민지 조선 식자층은 일본이 전쟁에서 질 줄도 몰랐기 때문에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 타령을 하고 있었다.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고, 미국 앞에서 핵무기 타령하지 말라
핵무기 보유의 국제정치학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한국이 돈 좀 벌고 어깨에 힘 좀 들어갔다고 '우리도 핵잠수함 좀 가지면 안 되나?'라고 하는 행동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사회에 어떻게 보일까? 아파트 한 채 샀다가 값 올랐다고 수백억 수천억 부자들 앞에서 돈자랑하고 '나 무시하냐?' 이러는 강남 중산층처럼 보이지 않을까?
주제 파악을 좀 하고 살자는 소리다. 우리는 기껏해야 세계 10위권에 속하는 경제력을 갖춘 나라고, 그나마 1인당 구매력 기준으로 놓고 보면 선진국 클럽에 들어가기에는 체급이 딸리는, 태평양 북서쪽에 붙은 자그마한 사실상의 섬나라일 뿐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좀 팔리고 싸이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히트 치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나 싶은데, 현재 대한민국은 핵 보유를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강국의 반열에 들 수가 없는 나라라는 말이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나라들이, 최소 20%에서 최대 90% 이상 농축한 우라늄-235을 연료로 쓰는 가압형 경수로를 잠수함에 탑재하면, 그게 바로 핵잠수함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핵잠수함을 개발하고 운용한다는 것은 전후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도 돈 좀 벌었으니까 어깨에 힘 좀 주겠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소리들을 하는구나 싶다.
군용 원자력 잠수함이지만 군사 목적의 원자력은 아니라구요
핵잠수함은 원자력을 군사적으로 활용하는 무기다. 원자력 잠수함이 연료 보급 없이 긴 시간 작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우라늄-235를 농축시켜야 한다. 핵탄두를 만드는 것과 원자력 잠수함 연료를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핵탄두를 가질 수 없는 나라는 공개적으로 핵잠수함을 가질 수도 없다. 그리고 2017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북한 핑계를 대면 우리가 핵탄두(와 유사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국제 사회가 용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
핵을 폭발시키는 게 아니라 단지 추진력으로 사용할 뿐이니 괜찮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문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를 막론하고 보이는데, 한미원자력협정에 규정된 바에 따르면 전혀 사실과 다르다. 2015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 제13조를 읽어보자.
제13조
폭발 또는 군사적 적용 금지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및 구성품과 이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에 이용되었거나 이러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의 이용을 통하여 생산된 모든 핵물질, 감속재 물질, 또는 부산 물질은 ①핵무기 또는 어떠한 ②핵폭발 장치, 어떠한 ③핵폭발 장치의 연구 또는 개발이나 어떠한 ④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도 이용되지 아니한다.
해군과 정부, 그리고 청와대 및 야권의 핵무장론자들은 우리가 잠수함에 탑재하는 것이 핵폭탄이 아니라 원자로일 뿐이므로 괜찮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위 조항의 문언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그렇게 폭발하는 방사성 물질과 그 연구 개발은 ①에서 ③까지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지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외에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터뜨리지 않고 사용하는 군사적 활용'은 ④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군용 잠수함은 군사적 목적으로 움직인다. 군함이기 때문이다. 그 잠수함에 들어가는 원자로가 ④의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대놓고 한미원자력협정을 어기겠다는 소리를 지금 대통령 포함 해군과 정치권에서 마구 하는 중이다. 한때는 그렇게 평화를 사랑한다던 사람들 중 일부는 문 대통령이 각별히 관심을 갖는다니까 핵잠수함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라고 완곡어법을 써가며 옹호한다. 미국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듯하다. 장난하냐?
눈앞의 북핵을 핑계로 언젠가 완성될 비밀 핵개발?
북한의 핵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그러므로 북한의 미사일이 한반도에 떨어지기 전에 격추시키는 종말고고도지역방어시스템, 즉 사드(THAAD)가 필요하다. 이미 '임시 배치'되어 있지만 몇 기 더 배치되어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북한이 우리에게 핵을 쏜다면 즉각적으로 되갚아줄 수 있다는 확실한 위협 수단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은 자체적인 핵무장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에 입각해 미국의 전략핵무기를 다시 한반도에 배치하는 것이다.
북한 핵미사일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데,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직 해보지도 않은 '자체 핵개발'을 대응책으로 제시한다는 발상 자체가, 사태의 심각성을 도외시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배치할 수 있고, 확실히 날아가서 터진다고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미국의 전술핵 배치야말로 '대북 억제력'으로서 유의미하다. 원자력 잠수함을 설령 몰래 만든다 한들 그걸 언제 완성할 것인가? 핵잠수함을 국제 사회의 눈을 피해 몰래 만들어서 몰래 실전 배치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한 억지력이 필요하면 한미동맹에 기반해 미국의 전략핵을 배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대응이다. 그러나 '주체적 핵개발' 좋아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미국의 핵무기를 놓자고 하면 또 드러눕고 난리 피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원자력 잠수함 추진에 대해서는 별 말 없던 온갖 '평화 지킴이'들이 드러눕고 난리가 날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말이다.
무궁화 버섯구름을 피워올리고 싶다는 군국주의적 열광
자체적 혹은 '주체적'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1990년대, 한국 사회가 소소하지만 나름대로 '버블 호황기' 비슷한 것을 누리던 시절, 상업화된 민족주의적 대중 문화의 영역으로부터 퍼져나간 군국주의적 판타지에 불과하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박정희에 대한 복고풍 열광이 몰아닥쳤는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핵무장마저도 '재평가'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핵무장'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긍정적 인식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되짚어보자는 뜻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데프콘』 같은 대중적 소설이 우리 사회에 심어놓은 군국주의적 열광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남북이 '우리 민족끼리'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걸 일본에게 쏜다 해서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모든 국민의 삶은 군국주의로 인해 피폐해질 것이다. 마치 전시 체제에 돌입한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조선인 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삶도 황폐해졌듯이 말이다.
무궁화 꽃은 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의 풍요는 원자폭탄이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의 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포기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원자폭탄으로 향하는 첫 단추인 원자력 잠수함에 집착하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보여줄 필요가 없다.
핵폭탄이 아닌 평화와 번영의 무궁화 꽃을
정부는 원전 폐로 등에 연구를 집중하고 소형모듈원전 등 차세대 원전의 개발을 뒷전으로 미룰 태세다. 그런데 원자력 잠수함에 들어가는 선박용 원자로는 만들고 싶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정도가 있는 법 아닌가. 원자력 잠수함을 정 만들고 싶다면, 민간용 원자력선인 무츠를 만들어서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했던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성의라도 보여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더니 다짜고짜 '탈핵합니다! 그런데 핵잠수함 만들고 싶다 핵 핵핵핵' 하는데 미국이 대체 왜 한미원자력협정을 바꿔준단 말인가? '사우스와 노스 모두 코리아는 핵에 미쳤군'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핵폭탄을 가진 가난한 나라. 북한이다. 나와 당신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러나 우려스럽게도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런 미래를 거부해야 한다. 신고리 5, 6호기는 마저 짓고, 4세대 원전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자체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깨끗하게 접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보여주도록 하자. 그것이 평화와 번영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