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5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쏜다면

1.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물론 우리, 대한민국에는 핵탄두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 기술이 있다. 한국형 신형 원전 모델인 APR-1400은 지난 10월 유럽사업자요건 인증을 받았고, 그보다 앞서 지난 6월에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설계 인증 심사를 사실상 통과"했으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안전성을 검증받은 원전 설계 기술이 있고, 설계도에 맞춰 실제로 원전을 만들어낼 기술과 인력 또한 확보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건만 갖춰진다면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보다 저렴한 가격에 원전을 '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는 우리가 가진 강점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오히려 원자력 발전을 말려죽이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니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쏘는' 상상은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환경주의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마따나, 우리는 다른 미래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2.

2017년 11월 5일 현재,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는 대규모 정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초대형 허리케인 마리아(Maria)와 어마(Irma)가 발전소가 밀집한 섬의 남동부를 강타하면서 주요 송전망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10월 23일 복스(Vox)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푸에르토리코 본섬의 79퍼센트가 아직 정전 상태에 놓여 있다.

푸에르토리코 대정전 사태는 엄밀히 말해 발전소가 아니라 송전망이 망가져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왜 송전망이 망가졌는지 따져본다면, 푸에르토리코의 경제가 몰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때 잘나갔던 푸에르토리코 경제가 주저앉게 된 이유의 한복판에는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탈원전 논쟁의 한복판에서 푸에르토리코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푸에르토리코는 본디 스페인의 식민지로 개발되었지만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스페인이 물러나게 되었고, 1952년 새 헌법을 통해 미국의 자치령으로 편입되었다. 2012년 주민투표를 통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될 것을 결정했지만 미국의 연방의회에서 거쳐야 할 절차가 많은 탓에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령'이지만 '미국'은 아니다.

그 섬의 역사는 섬 전체에 전기를 공급해온 푸에르토리코 에너지국(Puerto Rico Electric Power Authority (PREPA))의 역사와도 같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하고 있다. 1941년 설립된 푸에르토리코 에너지국은 1970년대, 푸에르토리코의 호경기 속에서 함께 호황을 누렸다. 제약업체를 필두로 한 미국의 기업들이 세제 혜택을 노리고 푸에르토리코에 대거 공장을 건설했던 것이다. 지금도 몇몇 의약품들은 잘 살펴보면 "Made in Puerto Rico"라고 원산지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잠깐이었다. 1996년 클린턴 정부가 푸에르토리코의 세제 혜택을 없애면서 많은 공장들이 섬을 떠났다. 그와 함께 경제가 고꾸라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PREPA와 푸에르토리코 자치정부의 어리석은 결정이 큰 역할을 했다. 첫째, 애초부터 정부와 지자체는 요금을 내지 않고 전기를 쓰고 있었다. 둘째, 경제가 위기에 몰리자 석유 의존도를 줄이겠다며 태양광과 천연가스 발전에 돈을 쏟아부었다(“The story of Puerto Rico’s power grid is the story of Puerto Rico”. The Economist. 2017년 10월 21일 접속. https://www.economist.com/news/united-states/21730432-even-hurricane-maria-hit-it-was-mess-story-puerto-ricos-power-grid). 셋째, 기저발전으로서 제 역할을 해줄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진작에 포기한 상태였다.

3.

2016년 기준 푸에르토리코의 발전원 비중을 알아보자. 미국에너지정보청에 따르면 47%가 석유, 34%가 천연가스, 17%가 석탄, 2%가 신재생에너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은 2%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상 가격이 함께 오르내리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총 발전량의 8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Puerto Rico - Territory Energy Profile Overview - U.S.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EIA)”. 2017년 10월 21일 접속. https://www.eia.gov/state/?sid=RQ).

애초부터 유가의 등락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전력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푸에르토리코는 90년대 말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유가의 고공행진 속에서 경제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경제위기 이후 폭락했던 유가는 이제서야 슬슬 고개를 들고 있는데, 그동안 유가가 낮은 상황에서도 푸에르토리코의 에너지 가격은 미국 내에서 하와이 다음으로 높았다. 그런데 하와이의 경우 관광산업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는 반면 푸에르토리코에는 그런 게 없다.

경제적으로 워낙 낙후되어 있는 탓에 전력망의 품질이 형편없다. 전력망의 품질이 형편없는 탓에 지금과 같은 대정전이 아니어도 자꾸 전기가 끊기고 공장의 생산 비용이 높아진다. 인프라가 엉터리인 탓에 경제가 절름거리고, 경제가 힘차게 달려나가지 못하니 인프라 확충이 늦어진다. 악순환이다. 앞서 인용한 Vox의 기사에서 FiveThirtyEight의 자료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푸에르토리코 발전소 설비의 연식 중위값은 44년이다. 일반적인 산업국가 발전 설비 연식의 중위값이 18년인 것에 비하면 굉장히 높은 수준이다. 낡은 전력 인프라에 의존해 간신히 돌아가던 경제가 초대형 태풍을 만나 좌초한 것이다.

4.

푸에르토리코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PREPA는 발전원 중 석유의 비중을 줄이고자 천연가스와 태양광 발전의 비중을 높이기로 결정했다. 기업들이 문을 닫고 떠나는 와중이었다. 세제 혜택이 사라진 마당에, 전기요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을 왜 그들은 하지 않았던 것일까? 영어권에서 나온 관련 기사들을 찾아 읽어보아도 뚜렷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사실이 있다. 굳이 태양광과 가스 발전을 늘리려 드는 그러한 움직임이 '친환경'으로 포장되었으리라는 점 말이다. 산업과 경제의 기초 체력이 갖춰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PREPA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이 아니라 '깨끗한 에너지'에 돈을 쏟아부었다. 물론 태양광 발전기와 풍력 발전기, 가스 발전기가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을 불러온 직접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더 저렴한 발전원이 존재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라는 것 역시 분명하다.

지금도 푸에르토리코에는 풍력 발전기가 존재한다. 심지어 태풍을 맞은 상태에서도 건재하게, 전혀 고장나지 않은 발전기가 남아있었다(지멘스의 놀라운 기술력이여!). 하지만 발전기를 운용하는 이들은 망연자실하게 돌지 않는 풍력 터빈을 바라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풍력 발전기를 최초로 구동하기 위해서는 외부 전력원이 필요한데, 바로 그 외부 전력원을 확보하는 것이 현 시점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문자 그대로 '태평양 앞바다가 사이다여도 컵이 없어서 못 마시는' 꼴이다(Dreazen, Yochi. “Darkness: life in Puerto Rico without electricity”. Vox, 2017년 10월 23일 접속. https://www.vox.com/2017/10/23/16501164/puerto-rico-hurricane-maria-power-water-sewage-trump).

5.

푸에르토리코에 건설되어 있던 태양광 발전 판넬이 태풍을 맞아 파괴된 모습.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하던가. 일론 머스크는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 소식을 접하자 그것을 자신의 태양광 발전 사업의 홍보 기회로 삼았다. 푸에르토리코 전역에 솔라시티(Solar City)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력 공급 문제를 해결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고 나섰던 것이다.

나는 일론 머스크의 그러한 제안이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그가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공개한 것처럼, 솔라시티에서 만드는 태양광 발전기 내장형 타일을 시공하여 테슬라 자동차 한 대를 굴리고 집안 전체에서 쓰고 남을만큼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해도, 푸에르토리코의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기는 집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음악을 듣고 TV를 볼 때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내리면 등받이 쪽의 물탱크에 새로운 물이 차오른다. 그런데 수도가 정상 작동하려면 (고대 로마나 에도 시대의 일본처럼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하지 않는 한) 당연히 어딘가에서 전기를 이용해 수압을 만들어내고 있어야 한다. 도시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보일러가 작동하기 위해서도 전기가 필요하다. 그야말로 인프라 중의 인프라인 셈이다. 그런데 일론 머스크는 그러한 재앙을, 미국 서부에 거주하는 고소득층을 위한 제품의 홍보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에는 집집마다 옥상에 깔려서 각 가정의 소비를 충족시켜주는 전기만 필요한 게 아니다. 섬의 인프라 전체를 작동시켜줄, 절대 꺼지지 않는, 어지간한 자연재해에도 굴하지 않는 든든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원자력 말이다.

6.

1959년. BONUS(BOiling NUclear Superheat reactor)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BWR이라는 실험적 기법을 채택한 원자력 발전 시스템이다. 푸에르토리코 측에서는 평범한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를 원했으나, 애석하게도 아주 작은 용량의 시험적 설비가 도입되었던 것이다. 푸에르토리코 섬의 서쪽 끝인 린꼰(Rincon)에 부지를 마련하고 1963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General Nuclear Engineering Corporation (GNEC)이 이리저리 인수합병되는 과정을 거치며 건설은 지체되고 비용이 상승했다. 결국 예정보다 한 해 늦은 1964년 4월에 첫 시동을 했고 1965년 9월에서야 최대 출력을 뽑아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결국 발전소는 1968년 폐쇄되었고, 오늘날은 원자로의 건물을 재활용하여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원자력 발전소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웨스팅하우스를 통해 평범한, 검증된, 583메가와트의 발전소를 건설하고자 했다. 1970년 시작된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는 실제로 진행되는 것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1978년 완전히 폐기되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푸에르토리코는 '핵발전소 없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섬'이 되어있다(“Nuclear Energy for Puerto Rico | ANS Nuclear Cafe”. 2017년 10월 22일 접속. http://ansnuclearcafe.org/2016/04/14/nuclear-energy-for-puerto-rico/).

7.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1970년의 프로젝트가 정상적으로 추진되었다면, 푸에르토리코의 운명은 지금과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미 연방 정부의 세제 혜택 철회에도 견딜 수 있을만큼 안정적인 산업 기반을 확보하고 경제력을 다졌더라면 그토록 낙후한 발전 및 송전 설비에 의존하고 있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은 경제적 실패의 문제고, 그 경제적 실패의 밑바탕에는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깔려 있는 셈이다.

그 실패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원자력을 도입해야 할 시점을 놓쳤다. 둘째, 석유의 비중을 줄이고자 택한 것이 천연가스와 태양광이었다. 말하자면 후라이팬 바깥으로 뛰어서 불 속으로 뛰어든 셈이다. 그런데 두 번째 실패에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또 다른 에너지 정책 실패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클린턴 정권과 함께 불어닥친 미국 내 탈원전 열풍에 푸에르토리코의 에너지 정책이 영향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도 미국의 담론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수많은 IT 기업들이 푸에르토리코를 소재로 자기 회사의 기발한 기술을 뽐낸다. 일론 머스크 뿐만이 아니다. 구글은 거대한 기구를 띄워서 푸에르토리코에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하겠다고 하고 있고, 페이스북은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24시간 돌아가는 신뢰할만한 기저발전이 없다면 현대 문명은 유지될 수 없는데 말이다.

8.

관련 뉴스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누구도 푸에르토리코에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감히 입에 올리고 있지는 않다. 물론 원자력 발전소는 건설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설비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술 자체가 굉장히 고난이도이며, 여타의 발전소보다 훨씬 건설 비용이 크다. 당장 전기가 안 돌아서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섬을 두고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인들은, 잘 알고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경제이고, 경제는 인프라가 확충되어 있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푸에르토리코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실질적으로는 섬과 다를 바 없는 환경이다. 마치 우리처럼, 그들에게도 원자력이 필요하다. 설령 폭풍우와 기상 악화로 석탄이나 석유 혹은 가스를 실은 배가 입항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꿋꿋하게 작동하는, 한 번 연료를 보급하면 1년 정도는 거뜬한, 그런 원자력 발전소 말이다.

만약 한국이 석유 47%, 천연가스 34% 등의 에너지 믹스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 우리의 경제적 처지는 어땠을까? 두 차례의 오일 쇼크를 견디고, 2008년 경제위기 이전까지의 고유가 상황을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9.

11월 7일,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방한이 예정되어 있다.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뭐니뭐니해도 북핵이다. 북한이 핵탄두를 소형화하고 ICBM에 장착하여 발사 실험까지 성공하는 순간, 그것이 미국 본토에 떨어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므로,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험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의 참모들이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실이 있다.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시 미국에 핵을 '쏠' 능력이 있다는 것 말이다. 다만 그들의 핵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기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의 핵은 완성된 기술이며 평화적으로 활용되는 발전소라는 차이가 있다.

한국은 미국에 원전을 수출할 수 있을만한 기술력을 인정받은 나라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리고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원하는 300만 이상의 (미국 대통령 투표권은 없는) 미국 시민들이 살고 있다. 북한이 아니라 우리도 미국에 핵을 '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상상, 아니 망상에 가깝다. 현 정권의 탈핵 기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 내의 여론과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의 의사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담대한 계획'이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상상을 멈출 수 없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원자력의 유용함과 안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래서 한국에 온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깜짝 놀랄 제안'을 던진다면? 그렇게 우리가 가진 기술로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의 밤을 밝힐 수 있게 된다면?

적어도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미래를 상상하며 긴 글을 한 편 써 보았다.

2017-11-03

나는 지방분권개헌에 반대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1월 1일 국회 시정 연설에서 지방분권개헌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도권과 지방이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지방분권과 자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년 지방선거에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하자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나는 지방분권개헌에 반대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체 무엇을 위해 어떤 권한을 어떻게 지방에 넘겨줄지,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과정에서 지자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권한 중 일부는 중앙정부가 회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청사진 없이 덜컥 지방분권개헌을 약속하는 것은 무책임한 정치적 행보로 읽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지역 사회가 위축되고 소멸하는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실체 없는 이상을 앞세워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예산이 새어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할 시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전략을 수립하며 추진하는 백년지대계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국사를 처리하고 있다. 가령 탈원전 정책을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단위를 놓고 본다면 탈원전이란 성립할 수 없는 정책이다. 우리는 사실상의 섬나라에 살고 있으며, 석유도 LNG 가스도 나오지 않는다. 바람의 질도 형편없고 국토의 70%가 산이다.

국가 단위의 에너지 정책을 놓고 볼 때 최선의 선택지는 원전을 짓고 기술을 개발하여 더 안전하고 풍부한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반면 개별적인 지자체의 시선에서 보자면 탈원전이 좋다. 위험하지도 않지만 아무튼 다들 싫어하는 기피시설인 원전은 어딘가로 쫓아내버리고, 우리 동네는 소위 '꿀 빠는 지역'으로 남아있는 것이 최선일테니 말이다.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은 바로 저런 식의 지역이기주의를 적극 부추기고 그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원자력만큼 안전한 전력 공급원이 또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풍요와 발전을 위해서는 마땅히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는 불편한 짐을 떠안고 있다고 느끼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이런 진실을 설득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대통령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일개 시장이나 도지사의 눈으로 국가 에너지 정책을 바라보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전공대의 건설과 유치에 대한 논의도 그런 식이다. 과연 지금 한국전력이라는 공기업이 대학을 추가로 건설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대학에 들어갈 학생들의 숫자는 날로 줄어들고 있고, 멀쩡히 있는 대학들도 정원을 줄이는 이 판국에 말이다. 정상적인 대통령의 시각으로, 나라 전체의 살림을 바라보며 미래를 대비하는 시각에서라면, 굳이 지금 대학을 더 지을 이유를 찾기란 어렵다. 하지만 일개 지자체장의 눈으로 보자면 무슨 상관이랴? 일단 우리 지역에 번듯한 건물 가진 대학 하나 더 들어오는 게 급선무다.

정작 지자체의 운영을 보면 한숨만 나올 지경이다. 풍기인삼축제조직위원회는 지난 10월 20일, 2.5미터 크기의 인삼 조형물을 공개했다. 그런데 그 실상은 이런 꼴이었다.

축제의 주제를 나타내는 조형물로 축제장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남원천에 세워졌다. 문제는 인삼 조형물 중간 부분에 붉은 색을 띤 남자의 성기 모형이 부착돼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모터장치를 해 성기 모형이 아래위로 계속 움직인다. 인삼 조형물에는 '인삼의 힘!'이라고 적힌 어깨띠가 걸쳐져 있다. 풍기인삼이 정력에 좋다는 뜻을 담기 위해 조직위가 설치했다. (이용호, "풍기인삼축제? 풍기문란축제!", 한국일보, 2017년 10월 23일.)

지자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돈을 펑펑 쓰고 있다. 강원도 양구군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시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만들고 기네스북에 등재하기 위해 1억1천6백만원을 소진했다. 울산시 울주군의 초대형 옹기에는 9천만원, 충북 영동군의 초대형 북에는 2억3천만원이 들었다. 지자체장이 자신의 업적으로 삼으려고 했거나, 알량한 '관광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물건들일 것이다. (참고: 윤영현, "'세계 최대'가 뭐길래...지자체 '억' 단위 세금 펑펑", SBS, 2017년 10월 31일.)

이건 반드시 '지방'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는 높이 5미터에 달하는 '강남스타일 말춤 조형물'이 있다. 2016년 신연희 강남구청장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풍기인삼처럼 문란하지는 않지만 제작비는 총 4억원 가량 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여선웅 강남구의회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당시 싸이측에서 동상 제작에 부정적이어서 완전한 말춤 동상을 제작할 수 없었다"며 "정상적이면 포기해야 되는데 기어코 손목이라도 만들어 버린 것이다"라고 조형물 관련 뒷얘기를 전했다"(김남중, "싸이, 코엑스 '강남스타일' 조형물에 "과하다"", 국민일보, 2017년 7월 24일)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 그 누구에게도 양도하거나 유보될 수 없는 자유의 이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법치주의의 기반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타인의 자의적 판단이나 폭력에 우리의 자유가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근대적인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의 확충은 지자체에 수많은 예산을 퍼주고 그것을 낭비하건 말건 수수방관하며, 큰 필요성이 있건 없건 아무 축제나 벌이고 대학을 짓겠다고 하는 그런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런 과정에서 국가 전체의 역량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우리의 자유와 풍요는 훼손된다. 지방자치의 이상 하에 우리 개인들의 삶이 침해당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치경찰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위 '섬마을 주민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인 교사는 낙도의 경찰이 아니라, 그 경찰을 관할하는 목포의 지서까지 찾아가 신고를 했다. 왜일까? '섬마을 공동체'와 경찰은 서로 얼굴을 보고 지내는 이웃이기 때문에 성폭력을 신고해봐야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복을 당할 우려가 크다는 판단이었다. 공권력은 주민과 친근해야 하지만, 유착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자치경찰제가 과연 지역 토호와의 거리두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권 내부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모든 지방자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줄어드는 인구와 고령화에 대응해 훨씬 밀도 높고 '스마트'한 방향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재정적으로 자립도 어렵고 산업 기반도 허물어진 가운데, 지자체들이 궁여지책으로 조잡하고 흉측한 조형물을 만들고 축제를 벌이며 대학 유치에나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대통령과 중앙정부가 제동을 걸기는커녕 도리어 지방분권개헌을 덜컥 약속해버리는 오늘날의 모습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지자체와 국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예산을 최종적으로 책임진다. 지자체는 내부의 범죄나 소요를 통제하지 못하면 군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는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에 스스로 맞서야 한다. 지자체는 남자 성기가 껄떡거리는 인삼 조형물 수천 개를 만들고 파산해도 중앙정부에 재정적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반면 중앙정부가 재정적으로 파산하면 그 여파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요컨대 권한과 책임의 범주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지자체적 시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지자체는 내후년의 산업 동향과 '미래 먹거리'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다른 지자체에게 돌아갈 몫을 어떻게 우리 지자체가 확보하느냐가 더 중요한 관건이다. 하지만 국가는 다르다. 국가의 경영은 미래를 바라보며 이루어져야 하고, 때로는 국민이 거부감을 드러내는 일도 추진하며 동의를 얻어나가야 한다. 요컨대, 대승적 관점을 견지해야 마땅하다. 언제나 주민 행복만을 위해 오직 그것만을 원칙으로 삼아도 큰 탈이 없는 지자체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다.

이게 나라냐? 지난해 촛불시위에서 많이 들려왔던 구호다. 당시 시위의 참여자들은 그 시위를 통해 '나라다운 나라'가 이룩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현재의 집권 세력은 '나라다운 나라'를 '촛불특별시'와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대한민국은 국가다. 지자체의 연맹이 아니다. 청와대가 지자체의 눈으로 국가를 바라보지 말고, 국가의 눈으로 지자체를 바라보면서, 온 국민을 위한 미래의 계획을 수립할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2017-11-01

탈핵론자들은 대체 무엇에 반대하는가

나는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탈핵론자들은 뭔가를 열심히 반대하고 있는데, 자신들이 뭘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방사능 유출의 위험'은 한국 원전의 설계와 가능한 사고의 영역 속에서 발생할 수 없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로 핵물질이 유출된 것은 격납 용기를 감싸는 콘크리트 외벽의 두께가 고작 16cm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수소폭발을 견디지 못했다.

반면 미국 최악의 원전 사고였던 TMI(Three Mile Islands) 발전소 사건은 달랐다. 노심용융으로 인해 수소폭발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격납 용기 외벽의 두께가 1미터였고, 내부의 폭발력을 격납 용기가 견뎌냈다. 심지어 사고가 난 2호기는 폐쇄했지만 그 옆의 1호기는 얼마 후 정상 가동했다. 하루에 적어도 8시간씩 노동자들이 출근해서 일했다는 것이다. 바로 옆에서,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난 후에 일하던 사람들도, 방사능 때문에 죽지 않았다. 격납 용기의 힘이다.

이와 같이, 방사성 물질이 원자로를 감싸고 있는 격납 용기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경우, 방사능은 유출되지 않는다. 방사능이란 방사성 물질이 뿜어내는 파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그 어떤 발전용 원자로도 후쿠시마처럼 16센티미터에 불과한 콘크리트 외벽을 가진 격납 용기 안에 들어있거나 하지 않다.

한국에서 최악의 원전 사고가 터져도 핵물질이 격납 용기 밖으로 나올 가능성은 0에 매우 가깝다. 왜냐하면 원전 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수소폭발의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고, 그 폭발력을 격납 용기가 너끈히 견뎌내기 때문이다. 그럼 방사능은 나오지 않는다. 방사능의 위험 때문에 원전에 반대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들이 말하는 '원전이 공격당하면 핵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이 끔찍하다'는 말 또한 현실 속에서 발생할 수 없다. 이미 미국에서 2002년에 실험을 해봤다. 두께 1미터 이상의 격납 용기는 보잉 767로 들이받아도 끄떡없다. 북한에서 미사일이 날아와 직격해도, 어지간히 센 탄두를 탑재하고 있지 않은 한, 격납 용기 내의 핵물질을 유출시킬 수는 없다. 그렇게까지 강력한 탄두, 가령 핵탄두를 실은 미사일이 날아온다면 그때는 원전이 아니라 그 공격 자체가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동남권에 위치한 원전은 원전에 반대하는 환경주의자들이 대체로 반대하는 THAAD가 '죽음의 전자파'를 쏘아대며 지켜주는 범위 안에 있다. THAAD의 주된 목적은 부산항에서 왜관을 거쳐 평택으로 이어지는 미군의 보급선을 방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는 미군의 보호 하에 놓이게 되었다. 원전이 북한 미사일에 공격당할까봐 걱정되는가? 그렇다면 적어도 THAAD 배치에 찬성하고, 추가 배치를 추진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하다.

그들이 말하는 '규모 7.0의 지진이 바로 원전 밑에서 발생하면 큰일 아니냐'는 우려 역시 말이 안 된다. 그럼 당신들은 규모 7.0의 지진이 청와대 바로 밑에서 발생할 가능성은 0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0.00000000000000000001%라도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논리로 원전을 폐쇄해야 한다면, 청와대 역시 같은 확률로 지진 피해를 입고 폭싹 무너질 수 있다(하지만 그런 지진을 겪어도 원전 건물은 안 무너진다. 동일본대지진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당장 청와대에서 나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자연재해를 견딜 수 있는 어딘가로 피신해야 한다. 어디가 좋을까? 노아의 방주?

그들이 말하는 소위 '화장실 없는 아파트' 타령, 사용후핵폐기물 문제 역시 마찬가지로 엉터리다. 사용후핵폐기물이 10만 년을 가니까 원전을 당장 없애야 한다는 사람은, 화력발전소가 만들어내는 폐기물인 탄소가 몇 년을 가는지 알고 있나? 무한대다. 왜냐하면 탄소는 원자이며 원자는 대단히 특별한 경우(핵융합이나 핵분열 혹은 방사성 붕괴 등)가 아닌 다음에야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 쭉 그냥 그대로 가기 때문이다.

사용후핵폐기물이 걱정된다면 그것을 처리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면 된다. 이미 과학적으로 처리 방법은 다 고안되어 있다. 다만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와 핵탄두의 개발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에,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을 두려워한 미국에 의해 해당 기술의 발전이 막혀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 원자력계는 4세대 원전 개발에서도 앞서나가는 선두주자다. 4세대 원전을 개발하고 상용화하는 순간, 10만 년을 간다는 사용후핵폐기물 문제는 깨끗하게 사라진다. 대신 그 핵폐기물이 값싸고 훌륭한 발전 연료로 재활용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미래의 에너지라고 칭송하는 핵융합보다 훨씬 쉽게 구현 가능하고 그만큼 안전한 대안적 에너지 시스템이다.

그들이 말하는 온갖 '위험'에는 실체가 없다. 반면 실체가 없는 위험을 떠벌이는 '세력'에는 실체가 있다. 당신들은 원전의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원전의 위험을 떠벌이는 당신들의 세력을 지키고 싶은 것인가?

탈원전을 외치는 이들은 최소한의 지적 정직성을 보여주기 바란다. 사실 당신들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탈원전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숙의'하면 할수록, 원전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당신들의 공포 마케팅에 현혹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말이다.

실체가 없는 '위험'을 홍보하는 것으로 뭉친 '세력'에는 존재의 당위가 없다. 나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의 환경주의가 새롭게 바뀌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2017-10-17

[북리뷰] 독일 통일, '그 후'도 연구해야 한다

독일 통일 25년 후
이기식 저·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1만4000원

9월 24일 치러진 독일 총선의 결과는 예상대로 충격적이었다. 예상대로 메르켈 총리는 4선 연임에 성공했지만,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12.6%를 득표하며 기독민주연합과 사회민주당의 뒤를 이어 3위에 등극한 것이다. 나치의 패망 이후 최초로 극우 정당이 연방의회의석을, 전체 709석중 무려 94석이나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알리는 한국 언론 중 상당수가 거론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독일대안당의 세력권이 구 동독과 포개진다는 것 말이다. 특히 작센 주에서는 독일대안당이 기민련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득표율에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동독 출신 메르켈의 든든한 텃밭이었던 그곳이 극우 세력의 토양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해체되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필자는 유학생 신분으로서 독일의 통일 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대단한 행운이었다."(194쪽) 그 유학생 이기식은 귀국하여 교편을 잡은 후, 자료 연구 및 현지 조사 등을 통해 『독일 통일 15년의 작은 백서』, 『독일 통일 20년』, 『독일 통일 25년 후』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오늘 살펴볼 책은 2016년까지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세 번째 책이다.

"동서독이 어떻게 해서 통일이 되었는지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분단 국가의 국민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관심이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 독일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남녀가 만나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보여 주는 우리의 드라마와 마찬가지다."(8쪽)

동독과 서독 사이에는 여전히 깊은 감정의 골이 패여 있고, 두 지역 출신은 서로 교류하지 않으며, 특히 동독 출신들은 서독에 대해 끝없이 열등감을 느낀다. 생필품 공급, 영양 상태 등 기초적인 삶의 질은 분명히 나아졌다. "하지만 동독인들은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서독인들과 비교한다. 자신의 여건이 좀 나아지면 또다시 서독인과 비교하는 것이다."(64쪽) 이렇게 상대적 박탈감에 젖은 동독인들의 불만은 당연하다는 듯이 외국인, 특히 유색인종에게 향한다.

"'디 차이트'와 '타게스 슈피겔'지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1990년 통독부터 2012년까지 적어도 152명이 극우 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했"(136쪽)다. 그런데 "2012년에 발생한 인종주의적 사건은 모두 130건"이며 "이중 47%인 61건이 동독 지역에서 벌어졌"다. 문제는 "동독 인구는 독일에서 겨우 17%에 불과"(109쪽)하다는 것이다. 물론 서독에도 지지자들이 있지만, 페기다(PEGIDA) 운동과 독일대안당 극우 세력은 동독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있다. 한국 뿐 아니라 독일의 언론조차도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 의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사례에 속한다. 이탈리아는 통일 왕국을 건설하고 민주정을 수립한지 150여년이 지나도록 남북간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예멘이나 베트남 역시 내부의 골이 깊다. 최근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 시사하고 있다시피 미국 역시 내전까지 치러가며 통일되었지만 아직도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다. "같은 민족인데 남북의 이데올로기 차이든, 체제 차이든 쉽게 극복할 수 있다"(7쪽)는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공부해야 할 시점이다.

2017.10.17ㅣ주간경향 1247호

2017-10-03

'에너지 민주주의'라는 가짜 이념

탈핵론자들이 내거는 멋진 기치 중 하나가 바로 '에너지 민주주의'다.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이해하고 작동시키는 원전보다, 개똥이네 말숙이네 집에 모두 태양광 발전기가 깔려있으면, 그게 본질적으로 '민주적'이고 따라서 옳다는 논리다.

이건 에너지 정책 이전에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하는 주장이다. 민주주의는 일단 근대국가를 전제로 한다. 근대국가는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시스템이고, 다만 그 폭력의 활용 방식을 법치주의와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통제하는 것이다.

큰 발전소를 다 없애버리고 작은 발전소만 돌아가는 것을 이상향으로 제시하는 것은, 에너지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에너지 전근대주의, 혹은 에너지 봉건주의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애초에 민주주의 자체가 (고대 그리스의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근대적 이념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렴하게 에너지에 대한 접근권을 갖는 것, 본인이 사용한만큼 필요에 따라 적용된 누진제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요금을 내는 것, 그리고 그 에너지의 생산과 사용 과정에서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감시 체제가 돌아가는 것, 이 모든 것들은 '탈원전'과 필연적인 상관이 없다.

에너지의 생산과 유통을 감시하는 문제도 그러하다. 원자력 업계가 그렇게 의심스럽고 사악해보인다면, 감시하는 단체들이 전문성을 키움으로써 투명성을 강화할 수 있다. 오히려 원전은 숫자가 많지 않고 그만큼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가령 원자력안전정보공개센터(http://nsic.nssc.go.kr/main.do)와 같이 자료를 공개하는 일이 가능하다.

원전을 욕하기 위해 원자력안전정보공개센터 자료를 참고하는 사람들이, 그 생태적 피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태양광과 풍력을 예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너무 잘 관리되는 탓에 알 수 있는 '문제'에만 손가락질하고, 자신들이 정작 파악하지도 못하는 '문제'들은 아예 없는 셈 쳐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무조건 선이니까 관리 감독의 필요가 없다고? 태양과 바람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리가 없다고? 그런 목가적 판타지에 기반해 국가 정책을 추진하자는 소리인가?

오히려 에너지 봉건주의자들의 이상대로 '공동체' 단위로 발전을 하고 옹기종기 모여 살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에너지의 값이 비싸진다.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존에 저렴한 가격에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었던 빈곤층부터 소외되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독거노인들이 전기장판을 못 틀게 된다는 말이다.

에너지는 민주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에너지를 민주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집집마다 발전기를 나눠 달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에너지 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을 들을 때마다, 나는 총을 들고 무장할 권리가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미국의 총기 소지 옹호론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에너지의 생산은 최소한의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하고, 그것을 적법한 기구에 의해 감시하는 것이야말로 근대 민주주의 이념에 부합한다. 마치 국가의 총과 무기는 군대와 경찰이 독점적으로 관리하고, 다만 국민들은 국회나 정부 및 법원을 통해 그 무장 조직들을 감시하는 것이 근대국가의 기본인 것처럼 말이다.

원전에 반대하는 논리로 뭘 갖다 붙이건 그건 주장하는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탈원전을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포장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알고도 그런다면 '강남 좌파 판타지'에 복무하는 것이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면 고민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