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5

코로나의 불똥? 국민국가(nation state)가 귀환하고 있다

지난 3월 16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대국민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불필요한 이동과 사회적 접촉을 삼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연거푸 전달한 그에게 한 기자가 던진 질문.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국경은 과연 잘 통제될 수 있겠습니까?’

CNN으로 그 장면을 생방송으로 보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의 국경 문제, 이른바 ‘백스톱’은, 브렉시트 협상을 지지부진하게 만들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다수의 영국 언론은 검문소와 담장 등 물리적 국경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영국의 국경은 튼튼한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코로나-19가 뒤집어놓은 풍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국민국가(nation state)가 귀환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국경 없는 세계주의’를 선으로, ‘자국 중심주의’를 악으로 단정짓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중국에서 바이러스 확산이 본격화되고 있음에도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그러한 도덕관념에 기댄 것이기도 했다.

지난달 11일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에서 의료진이 운전자의 체온을 측정하고 있다. 이날 슬로베니아 정부는 이탈리아와의 국경을 차단한다고 발표했다./게티이미지

하지만 바이러스에는 국경이 없어도 바이러스 대응에는 국경이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수석 외교 논평가인 기드온 라흐만(Gideon Rachman)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여분간 이어진 대국민 연설에서 단 한 번도 유럽연합(EU)을 언급하지 않았다. 독일은 EU를 주도하고 있는 나라다. 그런 독일마저 코로나-19 앞에서 오직 독일 자신만을 챙기는 중이다.

EU는 미국처럼 내전을 치러가며 국방, 치안, 행정 등을 통합하는 대신 그저 같은 화폐를 쓰고 인구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만으로 연방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이상주의적 기획이었다. 좋을 때는 좋았지만 힘든 시절이 오니 어림도 없다. <포린 폴리시>의 보도에 따르면, 3월 현재 이탈리아의 발병 건수가 중국을 넘어서고, 성당마다 시신이 넘쳐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의료 지원을 제공하는 EU 회원국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EU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하다.

초국가적 공동체의 이상이 무너지고 나니 국민국가의 모습과 개성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앞서 말했듯 독일은 위기가 닥쳐오자 감정을 배제하고 국민의 60% 이상이 감염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질병과의 총력전에 나섰다. 흔히 프랑스를 ‘시위할 때 자동차를 불태우는 나라’, ‘왕의 목을 자른 나라’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자 마크롱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대국민담화를 통해 친구들과 만나 파티를 벌이는 국민, 특히 청년들을 꾸짖었다. 부르봉 왕가와 나폴레옹, 드골을 거쳐 오늘날까지 권위주의적 중앙집권의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국가가 아닌 도시나 마을 단위로 귀속감을 느낀다. 최근 화제를 끌었던, 한 이탈리아 시장이 시민들을 향해 조깅하지 말고 개 산책시키지 말라고 화내는 영상을 떠올려보자.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돈 까밀로와 뻬뽀네(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시리즈가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가톨릭 신부와 공산주의자 시장의 힘싸움을 그려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연방국가로서 미국이 가지고 있는 특성 또한 이번 일을 통해 도드라졌다. 지난 3월 27일, 지나 레이몬도 로드아일랜드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배치해 뉴욕주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량을 멈춰세우고 격리 조치에 대해 상기시켰던 것이다. 미국은 각 주가 무장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연방국가이며, 남북전쟁을 통해 무력으로 그 틀을 지켜냈음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힘은 표준화와 대량생산에 있다. 그 DNA는 사라지지 않았다. 청와대와 일부 언론은 한국의 코로나-19 검사 속도를 소위 ‘국뽕’의 소재로 삼아왔다. 이는 민간 기업이 신속하게 내놓은 5종의 키트를 임상병리사들이 수작업으로 비교하여 만들어내는 결과다. 반면 미국은 3월 31일 현재 자동화된 과정을 통해 엄청난 속도와 정확도로 코로나-19 확진 여부를 검사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포드 모델 T처럼 전차를 찍어내고, 돛단배나 요트처럼 군함을 띄우던 저력으로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영국은, 마치 처칠의 그 유명한 연설처럼,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것이 ‘피와 땀과 눈물’뿐임을 천명하고 단결과 희생을 호소하는 중이다. 기자회견장에서 보리스 존슨이 보좌관들과 설명한 바, 코로나 사망자는 세 종류다. 건강한데 코로나 때문에 죽는 경우, 기저질환이 있고 코로나 때문에 죽는 경우, 의료 과부하로 치료를 못 받아 다른 병이나 사고로 죽는 경우. 코로나-19의 치료제가 없는 현실 속에서 병원에 온다 한들 첫째 경우는 공공의료체계 NHS가 해줄 일이 없다. 아파도 집에서 참아야 한다. 그래야 세 번째에 해당하는, 대구 17세 소년 같은 환자가 제때 필요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집에 있자, NHS를 지키자, 생명을 구하자. 본인도 확진자가 된 후 자가격리에 들어가면서 존슨 총리는 본의 아니게 솔선수범하는 지도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바이러스의 대공습 앞에 국제주의와 탈국가주의의 이상은 온데간데없이, 각국이 뿔뿔이 흩어져 대응하는 경향이 도드라진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수석 경제평론가 마틴 울프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에 ‘윤리적 과제’를 던진다고 이야기한다. 앞서 언급한 기드온 라흐만은 이 사태로 인해 극우 민족주의자와 극좌 환경주의자라는 양 극단이 기승을 부리게 될지 우려한다.

하지만 대만처럼 선제적으로 중국발 입국을 차단한 뉴질랜드는 노동당 출신의 1980년생 여성 총리 저신다 아던의 지휘 하에 사망자를 한 자릿수로 묶어두고 있다. 2015년 완전한 남녀동수 내각을 출범하며 세계인을 놀라게 했던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 또한 해외 입국을 차단한 상태다. 차이잉원 대만 총리의 진보적 성향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진보 정권들이 선제적으로 자국민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국민국가를 절대악도 필요악도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코로나-19가 퍼지기 이전 세상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 걸맞는 삶의 조건과 윤리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조선닷컴 | 입력 2020.04.04 12:00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3/2020040303118.html

2020-04-04

코로나 바이러스와 페미니즘의 위기

COVID-19 사태는 여성주의와 그 성과마저 위협하고 있다. 재택근무 혹은 자가격리가 일상화되면서 당연하다는 듯 여성에게 가사노동이 떠안겨지고 있는 현실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외신도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한 위기를 겪고 있지만 아시아 여성이 상대적으로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BBC는 8일 재택근무와 함께 가사노동·자녀돌봄노동을 해야 하는 여성들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어린이집과 학교들이 문을 닫으면서 특히 일하는 여성의 육아 고충이 커지고 있다. 성 불평등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김가연, “”코로나 때문에 일이 두배” 육아·가사노동에 피로 호소하는 여성들”, 아시아경제, 2020년 3월 10일. https://www.asiae.co.kr/article/2020031009205389640

이는 단지 집에서 밥을 더 자주 해야 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 등이 여성에게 편중되게 떠넘겨진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가령 말레이시아의 경우 SNS를 통해 재택근무중인 여성들을 상대로 ‘남자를 위한 직장의 꽃’ 역할까지 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가 빈축을 산 바 있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여성부는 앞서 이동제한령에 따른 봉쇄 기간 중 아내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들을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 게시했다. 현재 삭제된 게시물에서 여성부는 여성들에게 남편에게 잔소리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여성들이 집에서도 편하게 입기보다는 옷을 단정히 입고, 화장도 하라고 권했다. 평상복 차림의 여성 그림에는 금지 표시를 하고,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PC작업을 하는 여성을 포스터에 등장시켰다. 여성들이 가사일에 도움이 필요할 때 ‘비꼬는’ 태도를 남편에게 취하지 말라고도 했다.

조재희, “”아내들, 잔소리말고 화장해라”가 봉쇄 기간 정부 지침?”, 조선일보, 2020년 4월 1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1/2020040101974.html
/말레이시아여성부 인스타그램·호주 ABC | 조선일보 기사에서 재인용

여기서 우리는 경제 영역에서 페미니즘이 추구한 두 가지 목적이 모두 코로나 바이러스 퇴치라는 명분 하에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아무런 사전적 사후적 제약 없이,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일할 권리
  2. 여성이 직장에서 일함에 있어서 소위 ‘여성적인 역할’에 묶이거나 그러한 역할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보다 근본적인 문제 또한 발생하는 중이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시행된 주말, 영국의 가정폭력 상담 핫라인에 걸려오는 학대 신고 건수가 65% 증가했다. BBC는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했던 아버지로부터 도망가 웨이트리스 일을 하며 살고 있던 여성이, 직장이 문을 닫으면서 월세를 내지 못해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들어가 살게 된 경우도 보도한다. 여성의 경제적 생활과 권리 이전에 직접적인 생존과 안전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퇴행은 COVID-19가 최초로 터져나온 중국에서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마치 그 동쪽에 있는 어떤 나라처럼) ‘우리가 코로나 대응을 정말 잘한다 최고다’ 따위 프로파간다에 매진했는데, 그 주요 소재로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동원되어 왔던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환자에게 헌신하기 위해 삭발한 간호사의 눈물겨운 사연이라던가, 뭐 그딴 것들. 인터넷의 반응을 살펴보면 일부 한국인들은 그런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하기까지 하는 것 같았지만, 중국인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여성의 신체를 정권 홍보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위챗 기사가 1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올린 후 검열되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말이다.

중국의 의료 현장에서 여성들은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홍보를 위한 성적 이미지의 대상으로 착취당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남자들보다 더 열등한 급식을 받아왔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보도한 바 있다. (“Covid-19 has revealed widespread sexism in China”, The Economist, 2020년 3월 7일) 여성을 헌신적이고 용감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이상화하면서, 대상화하고, 뜯어먹는 것이다.

The propagandists’ portrayals of women during the epidemic—as self-sacrificing, brave or beautiful—“basically all follow the playbook”, says Zoe, the blogger. But she was surprised to see a state-run charity follow the volunteers’ lead and donate sanitary pads. People’s Daily has condemned “feudal” attitudes to menstruation and eulogies to “extreme behaviour” such as returning to work right after a miscarriage. Only fierce and widespread anger, she reasons, could have spurred the party’s mouthpiece to say such things.

“Covid-19 has revealed widespread sexism in China”, The Economist, 2020년 3월 7일. https://www.economist.com/china/2020/03/07/covid-19-has-revealed-widespread-sexism-in-china

아직 사태가 종식되려면 멀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잠잠해진다 해도 언제 다시 발병자가 솟구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더더욱, 이러한 재앙을 기회로 여성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는 권력의 움직임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이다.

2020-03-31

무기력증을 치료하는 기적의 알약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어서 먹다가 만 건강보조제 말이다. 글루코사민이 됐건 밀크시슬이 됐건 비타민 ABCDEFG가 됐건 오메가 3가 됐건, 그냥 그거. 그게 무기력증에 정말 효과가 있다.

몇 알 먹다가 까먹거나 방치하고 있는 그 알약을, 하루에 하나씩 먹으면, 무기력증이 치료된다. 단, 끝까지 먹어야 한다. 한꺼번에 다 먹어치워도 안 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데’ 싶은 것들이 머릿속에 쌓여 있으면 사람은 무기력해지기 때문이다.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 뭔가를 해야 한다. 그런데 막상 하려니 너무 사소하고 시시한 일 같아서 안 하게 된다. 안 하면 안 하는 일이 쌓이고, ‘해야지 해야지’가 되어서, 정작 아무것도 못 하도록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므로 ‘사놓고 안 먹는 건강보조제’가 마법의 알약인 것이다. 그냥 내버려두고 있으면 우리의 정신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반대로 차근차근 먹어치우면 아주 작고 시시하지만 성취감이 생긴다. 그 성취감이, 특히 요즘처럼 사람들이 하염없이 집에 갇혀 보내는 시절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나 자신의 경험이기도 하다. 뭐였더라, 빈 통을 버린 다음 아예 까먹어버려서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사놓고 안 먹던 어떤 무의미한 알약을 매일밤 하나씩 해서 다 먹었다. 그랬더니 문득, 화장실에 걸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샀지만 설치 안 하던 수건걸이도 설치했고, 나사못이 빠져 기울어져 있던 천장 등도 5분만에 뚝딱 고쳤다.

이제는 역시 사놓고 안 먹던, 300알 넘게 들어있는 묵직한 종합비타민제를 비우는 중이다. 매일 밤, 자기 전, 하나씩. 이걸 먹고 내 컨디션이 좋아진다면 그것은 비타민의 힘이 아니다. 작지만 뭔가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긍정적인 활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사람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이럴 때일수록 뭐라도 해야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나서 내 경험을 적어보았다. 읽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2020-03-28

스페인 독감은 인도 인구의 6%를 희생시켰다

So covid-19 could soon be all over poor countries. And their health-care systems are in no position to cope. Many cannot deal with the infectious diseases they already know, let alone a new and highly contagious one. Health spending per head in Pakistan is one two-hundredth the level in America. Uganda has more government ministers than intensive-care beds. Throughout history, the poor have been hardest-hit by pandemics. Most people who die of AIDS are African. *The Spanish flu wiped out 6% of India’s entire population.*

“The coronavirus could devastate poor countries”, The Economist, 2020년 3월 26일. https://www.economist.com/leaders/2020/03/26/covid-19-could-devastate-poor-countries

2020-03-27

n번방과 텔레그램, 기술과 선악의 문제

특정 기술의 기반 위에서 발생하는 악을, 기술 자체의 선악 판단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비트코인도, 텔레그램도, 기술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이번 사안에서는 그렇다.

텔레그램이 특정 국가의 ‘범죄 수사’ 목적에 따라 자료를 제공하기 시작하면, 러시아 정부가 추적하는 반체제인사와 성소수자 및 인권 운동가, 대륙 중국과 홍콩의 반 시진핑 운동가들 등의 신변이 모두 위험해진다.

n번방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악이지만, 반 시진핑 반 푸틴 운동가들은 정의의 편이니까, 다른 케이스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발화자는 텔레그램이라는 일개 인터넷 메신저 서비스의 운영진에게,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결정할 권한을 주는 셈이 되어버린다.

n번방에 관여한 개자식들은 모두 잡아서 처벌해야 한다. 일벌백계가 아니라 백벌백계가 답이다. 그런데 그게 텔레그램의 잘못인가? 지금은 그 이용자들이 또 다른, 기밀성이 보장되는 메신저 혹은 딥웹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럼 그건 또 그 서비스의 잘못인가?

이 사안을 두고 ‘기술에 대한 인문학적/시민사회적 성찰’을 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도 의아하다. 이것은 경제적, 정서적으로 취약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 범죄다. 성범죄는 성범죄로 다뤄야 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미국의 중산층 이상 가정에서는 어린이 청소년들의 SNS 사용을 금지 혹은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21세기다보니 기초적인 학교 과제를 위해 다들 구글 계정은 가지고 있고, 구글 문서 등을 이용해 숙제를 한다.

그러자 학생들은 공유 구글 문서를 만들어 채팅창으로 활용하고, 당연히, 그 공간에서 사이버불링도 죽어라고 한다.

그럼 이게 구글 탓인가? 구글이 모든 사용자의 모든 문서 사용 내역을 조회하여, 사이버불링이 발생할 경우 신고해야 하나? 당신들이, 혹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가? 어떤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가?

‘텔레그램 탈퇴 선언’ 등을 종종 보면서, 나는 우리 사회가 (넓은 의미에서 ‘서구 문명’의 일부인) 기술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전시하며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경향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쉬운 답은 없다. 하지만 ‘쉬워보이는’ 답은 있다. 신기술에 손가락질을 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그런 ‘쉬워보이는’ 답을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