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아이돌, '항미원조' 기념하는 한 BTS 못 된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02. 10:01●SNS에 일제히 ‘항미원조’ 기념 글 올린 중국 스타들
●자유 없는 땅에서 문화 산업 고사하는 이유
●국가 눈치 보는 국민, 해외 팬에게 매력 없어
●中, 서구 유명 게임 개발사 인수해도 성과 바닥
●韓정치권, 잘나가는 케이팝에 숟가락 얹지 마라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필자가 청소년기를 보낸 1990년대로 돌아가 보자. 당시 미국에서는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것이 유행했다. 커트 코베인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밴드 너바나를 중심으로 펄 잼이나 REM 같은 밴드가 세계 우울한 청소년의 우상 노릇을 했다.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자 갑자기 오아시스와 블러로 대표되는 브릿팝이 대두했다. 영국 록음악 씬에 무슨 화학적 변화가 벌어졌는지 갑자기 명반이 쏟아졌다. 당시 미디어는 '2차 브리티시 인배이전(영국의 공습)'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비틀즈 이후 다시 한 번 영국 밴드가 미국과 세계 대중음악계를 재패한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음악적 유행은 10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X Japan이 이끈 제이팝의 흥망성쇠
영미권 대중문화뿐 아니라 일본 대중문화 역시 뜨고 지는 흐름이 있었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강렬한 비주얼로 국내 대중음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일본 록 밴드 X Japan 같은 경우,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지 않았던 시점에도 한국 청소년들을 들었다 놓았다고 할 정도였지만, 멤버가 비극적인 사고로 목숨을 잃고 내부 갈등이 불거지면서 몇 년의 전성기를 마무리지었다. X Japan의 시대는 곧 제이팝의 시대이기도 했는데 그 또한 2000년대 초반 정도까지가 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케이팝이 이런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만 아닐까. 소녀시대가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 2010년대 초의 일이므로 2020년 현재 케이팝이 '반짝 유행'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폄하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한국 대중문화가 영원토록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대중문화는 원래 그런 것이다. 매일 새로운 스타가 떠오르고, 왕년의 스타는 쓸쓸히 퇴장한다. 케이팝도 언젠가는 유행의 끝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문화산업은 한 국가의 경상 수지 전체를 장기간에 걸쳐 책임져주지 못한다. 1970년대 세계는 스웨덴 혼성 보컬 그룹 아바(ABBA) 열풍에 휩싸였다. 스웨덴 양대 수출품은 아바와 사브(SAAB·항공기, 자동차 메이커)라는 농담까지 오갈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스웨덴이 음악으로 먹고 사는 나라인가? 그렇지 않다. 케이팝도 예외일 수 없다. 수출 측면에서 보자면 BTS뿐 아니라 그 어떤 아이돌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등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대중문화와 국력의 느슨한 상관관계
물론 세상만사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므로, 케이팝 혹은 케이팝에서 비롯한 새로운 문화 산업의 문법이 출현할 수도 있다. 그 새로운 문화 산업이 한국을 종주국으로 삼아 할리우드 영화 산업처럼 100년이 넘도록 순항해 한국이 그 중심지 노릇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가능성을 보고 국가 정책을 세워서는 안 된다. 케이팝의 성공은 해당 업계 종사자들에게는 노력의 산물이지만 국가 전체를 놓고 보면 그저 행운일 뿐이고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어떤 가수는 왜 뜨는가? 외모도 비슷하고 심지어 노래는 더 좋은데 내가 좋아하는 스타는 왜 각광받지 못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니,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한국 가수가 빌보드 차트 1위를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해상도를 좀 낮춰보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대중문화와 국력 사이에는 느슨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의 대중문화가 사랑받는 것은 그 나라에 방문하고 싶어 하는, 혹은 가서 살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대중문화가 폭발하고 중흥하는 시점에 해당 국가의 경제력은 인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경우가 많다.
예외가 없지는 않다. 구소련의 록 가수였던 빅토르 최의 음악을 좋아한다 해서 그 시절 소련에서 살고 싶어 할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관관계는 대체로 사실이다. 가령 홍콩의 경우 언제나 한국인이 동경하는 곳 아니었던가.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 영화와 음악에서 잘나가던 1980년대는 홍콩 경제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당시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답답함을 느끼던 많은 한국인은 홍콩의 자유와 개방적인 문화를 동경했다.
자유와 풍요라는 두 기둥
요컨대 잘 사는 나라에 사는 예쁘고 잘생긴 멋쟁이가 자유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는 모습을 볼 때, 동경하는 마음이 들고, 그래서 그 나라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사랑받게 된다는 것이다. 예외를 찾자면 이 또한 얼마든지 반박 가능할 주장이다. 하지만 적어도 케이팝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호응을 얻는 현상의 바탕에 이런 이유가 깔려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이 1980년대에 홍콩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던 바탕에는, 한국보다 잘 살고 또 자유로운 홍콩에 대한 동경이 깔려 있었으니 말이다.자유와 풍요가 대중문화 성공을 이끌어내는 두 개의 원인이라고 우리는 이야기해볼 수 있다. 어떤 나라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가수가 성공할지, 무슨 영화가 흥행할지 맞히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우리만치 어렵지만, 어떤 나라의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전반적인 인기를 끌지 예상하는 것은 훨씬 난도가 낮은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보다 잘 살고 자유로운 나라의 대중문화 콘텐츠를 좋아한다.
여기서 잠시 자유와 풍요라는 두 요소의 관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양자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흔히 믿어왔다.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나라 중 경제적으로 낙후된 나라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시켜주고 미국 시장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던 미국의 리버럴 엘리트들 역시 그랬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저절로 자유로운 나라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현실은 정반대로 진행됐다. 중국은 부유해졌지만 자유로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시아의 진주' 홍콩을 입에 넣고 으스러뜨리고 있는 중이다. 언제까지 지금 같은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면서도 경제적 풍요를 이루는 일에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국가가 무서운 국민의 나라
대중음악만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게임 시장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중국 기업들은 막대한 자금력으로 블리자드를 비롯한 서구 주요 게임 개발사를 인수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 개발한 자체 콘텐츠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왜 재미가 없을까? 상상력을 펼치는 대신 정권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게임 규제는 게임에 관심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놀랄 수준이다. 중국인들은 오직 중국인만 접속하는 서버에서 게임을 해야 한다. 외국인과 게임 내 채팅으로 대화하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다. 감염병이나 좀비 등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연상케 하는 내용이 등장해도 안 된다.
심지어 게임에 맵을 편집하는 기능도 넣을 수 없다. 조슈아 웡을 비롯한 홍콩 민주화 투사들이 닌텐도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서 게임 내 디자인 기능을 활용해 "광복 홍콩, 시대 혁명(光復香港 時代革命)"이라는 문구를 넣어 퍼뜨렸는데 앞으로는 그런 것도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게임 내 조직 결성 등도 당연히 금지돼 있다.
중국이 지금의 풍요를 이뤘는데도 문화산업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 게임 개발자는 좀비도 감염병도 게임에 넣지 못하지만, 영국 게임 개발자는 플레이어가 감염병이 돼 온 인류를 감염시키면 승리하는 게임을 만들어냈다(전염병 주식회사‧Plague inc). 풍요만 있고 자유가 없는 땅에서는 그 어떤 기발한 콘텐츠도 나올 수 없다.
SNS에 '항미원조' 기념한 중국 스타들
한국인 처지에서는 극히 황당한 사건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바로 이런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은 앞으로도 한국 대중문화를 따라잡기 어려울 것이다. 해외에 나가 활동하면서도 정부 방침에 따라, 중국 팬들 눈치를 보며 SNS에 게시물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연예인이 어떻게 세계 대중의 우상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국민이 국가를 두려워하는 나라, 알량한 풍요로 자유의 박탈을 정당화하는 나라에서, 대중문화는 꽃필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자니 기분이 석연치 않다.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은 자유와 풍요를 서서히 잃어가는 것 같아 불안하다. 감사원에 따르면 월성 1호기의 경제성은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했다. 그렇게 낮은 평가를 한 이유는 청와대, 달리 말하면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맞춰 어떻게든 월성 1호기를 폐쇄하라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우리의 경제적 풍요를 지탱하는 에너지 산업, 그 척추와도 같은 원자력 산업을, 임기 5년짜리 대통령이 으스러뜨리고 있다. 과연 우리가 풍요를 지킬 수 있을까?
자유라는 측면으로 넘어오면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해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걸핏하면 한류 스타를 불러 들러리로 세웠다고 비판하던 당시의 야당이, 권력을 잡자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 본인들은 군대 가겠다는데 빌보드 차트 1위를 했다고 BTS 군 복무를 면제하자는 소리를 정치권에서 들먹인다. 정치가 문화·연예에 너무 간섭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숟가락을 들이대다 보면 케이팝과 한국 대중문화가 외국인에게 점점 중국 비슷해 보이지는 않을지 우려된다.
한국과 중국을 확실히 차별화하는 무언가를 우리는 추석을 하루 앞둔 날 TV를 통해 목격할 수 있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초청해도 가지 않는 배짱과 뚝심의 대중예술가 나훈아. 코로나19에 지친 국민을 위로하고자 오래간만에 방송 무대에 선 그는 당당히 권력을 향해 일침을 놓았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자유. 이것이 한국 대중문화의 진정한 원동력이다.
케이팝의 인기는 영원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가기를 바란다면 정치는 문화 예술에서 손을 떼야 한다. 온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풍요를 보장하는 일에나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한국인 스스로도 '억울한 희생자' 역사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책임 있는 세계 시민으로 스스로를 성장시키고자 힘써야 할 때다. 이렇게 우리가 더 나은 나라를 만든다면, 제2의 BTS와 블랙핑크는 자신들의 힘으로 나타날 것이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