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주변 세력에 휘둘리는 허수아비?
갈등 방치해 권력 지키고 지지자 결속 다지는 효과
필요에 따라 수동적 모습 적극적으로 연출하는 것
지난 1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문재인 대통령./연합뉴스
박범계 법무장관은 신현수 민정수석과 문재인 대통령을 모두 ‘패싱’하고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발표했던 것일까.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면서도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는 않고 있다. 유영민 비서실장은 중대범죄수사청 설치에 대해 ‘문 대통령이 속도
조절 당부를 했다’고 국회 운영위에서 발언했다. 하지만 박 법무장관, 김경수 경남지사, 박주민 의원 등은 ‘그런 말을 들은 적
없다’며 반발하는 상태다.
이런 식이다 보니 일각에서는 ‘문재인 허수아비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마치 안동 김씨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 없이 휘둘리다가 일찍 세상을 뜬 ‘강화 도령’ 철종처럼, 문 대통령을 자리에 앉혀놓고 조종하는 특정
세력이 막후에서 현 정국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비선 실세’의 통제하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의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청와대 내부 인사로부터 전해들은 어떤 ‘소스’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사례와 권력의 생리를 놓고 볼 때 ‘문재인 허수아비설’은 설득력이 크지 않다.
연합군과
소련군 양쪽의 압박을 받아 함락 직전이던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돌아가 보자. 이미 상당수의 부하들이 적에게 투항했다.
일부는 아예 명령을 듣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 틀어박혀 무의미한 항전을 이어나갔다. 왜일까?
히틀러는
베를린을 떠나거나 항복 의사를 밝힐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무적의 천재 전략가 히틀러 총통’이라는 대중의 환상이 깨진다.
그것은 권력의 붕괴를 뜻했다. 그러니 존재하지도 않는 군대를 지휘하며 전쟁놀이를 하다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되었을 때
자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나라가 망하건 말건 본인은 총통으로서 죽을 테니 말이다.
문 대통령의 모든 것을 히틀러와 비교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외우내환과 사분오열을 방치하거나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입지와 이익을 지키는 어두운 권력의 기술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고종의 사례가 좀 더 잘 와닿을지 모르겠다. 고종은 대원군과 명성왕후 사이의 갈등을 철저히 활용했다. 동학을 믿는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그 청군을 통제할 수 없으니 일제를 불러들였고, 개화파의 힘이 커지자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갔다.
결국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나라는 쑥대밭이 되어 식민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한일합방 이후
고종과 그 일가는 일제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왕공족(王公族)으로 분류됐다. 황족에 준하며 일본의 귀족인 화족보다
높은 신분이었다. 얼핏 보면 무능한 고종이 아버지와 아내와 신하들, 침략하는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끌려다닌 것 같지만, 최후의
승자는 고종이었다.
대통령이 주변 세력에 휘둘리고 있다고만 볼 수 있을까. 박범계 대 신현수, 유영민 대 김경수 등의
갈등 구도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추미애 전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이 충돌할 때 드러났던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실력이다. 이게 바로 문재인 대통령의 ‘실력’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윤건영 의원의 말마따나 현 정권의 힘은 이 와중에도 40%대를 유지하는 대통령 지지율에서 나온다. 지지의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문 대통령이 능력이 부족하고 서툴 수는 있어도 나쁜 의도를 가진 건 아니라는, 선한 의지에 대한 지지층의 믿음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문재인 허수아비설’은 현 정권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 믿었던 부하들조차 말을 듣지 않는 외로운 대통령을
향해 지지자들은 오히려 동정표를 보내고 결속을 다지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 틀어박힌 채 고립무원의 지도자상을
연출하며 권력을 지켰던 것과 마찬가지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국토부가 반기를 들자 당장 부산을 방문해 “조속한
입법을 희망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라. 문 대통령은 ‘패싱’당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필요에 따라 수동적인
모습을 적극적으로 연출할 뿐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일 뿐 ‘팩트’는 아니다. 문 대통령이 자리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는 확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오늘도 ‘패싱’당하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묻고 싶을 따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철종인가, 고종인가.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2021-02-27
[朝鮮칼럼 The Column] 文 대통령은 철종인가, 고종인가
2021-02-22
터키에 에스프레소 머신이 퍼지게 된 이유는?
터키는 커피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국가 중 하나. 그들이 커피를 마시는 방법은 우리와 사뭇 다르다. 아주 곱게 간 커피 가루를 제즈베라는 구리 주전자에 넣고 끓여서 마시는 것이다. 당연히 매우 쓰기 때문에 설탕을 팍팍 쳐서 먹는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터키의 거리에 에스프레소 머신이 늘어났다. 낯선 문화가 갑자기 퍼진 것이다. 그 이유는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난민들이 넘어왔기 때문.
시리아 사람들이 원래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셨느냐? 전혀 그렇지 않다. 시리아의 커피 문화도 오래되었고, 터키와 비슷하다. 곱게 분쇄한 커피를 추출해서, 아니 차라리 달여서 많은 양의 설탕이나 프림과 함께 마셔왔다.
하지만 시리아 난민들은 좁은 공간에 모여 살고 자연스럽게 거리에서 시간을 보낸다. 몇 시간씩 커피를 달이고 있을 공간도 시간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에스프레소 머신을 중고로 구입해 거리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터키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은 중고로 미화 2500달러 정도인데, 감가상각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관계로 되팔때도 비슷한 값을 받을 수 있다. 식당 같은 큰 사업을 벌이기에는 부담스러운 이들이 작은 자영업으로 하기에 딱 적당한 아이템이 되었다. 그래서 터키의 도시 중 시리아 난민이 많은 곳에는 어김없이 에스프레소 머신이 즐비하다.
그 에스프레소는 우리가 아는 '에스프레소'와 다르다. 원두를 탬핑하지 않는다. 당연히 표준적인 에스프레소보다 맛이 연한데, 그 위에 인스턴트 커피 가루를 뿌려서 더 강한 맛을 낸다.
그럼 처음부터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아무튼 시리아 난민들은 난민 생활이라는 환경 속에서 그런 문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위에 막대한 양의 설탕과 프림을 뿌려 먹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아무리 봐도 맛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커피가 맛있고 맛없고 등등은 모두 문화와 취향에 따른 것이겠지.)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건 어떤 식으로건 살아가며, 자신의 문화를 지키려 한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교훈. 최근 몇 달 간 유튜브에서 본 영상 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기에, 공유한다. 11분 정도 되니 여유 있으신 분들은 한번 직접 보시길.
2021-02-20
직업윤리 저버린 권력자들로 ‘대한민국號’가 위태롭다
[아무튼, 주말][노정태의 시사哲]
美 조종사 설리가 보여준 ‘직업윤리란 무엇인가?’
체슬리 설렌버거, 일명 캡틴 ‘설리’. 40년 경력을 자랑하는 조종사다. 이 남자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두 엔진을 모두 잃고도 희생자 단 한 명도 없이 완벽한 비상착륙을 해낸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2009년 1월 15일 뉴욕에서 있었던 실화다. US 에어웨이스 1549편이 이륙 직후 새 떼에 부딪혀 동력을 잃었지만 허드슨강에 무사히 착륙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혹한에 일부 승객이 강물에 빠졌지만 전원 무사 구조되었다.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해 총 155명이 생환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은 이렇게 감동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직업윤리란 무엇인가?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는 설리가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설리에게는 승객을 안전하게 모실 의무가 있었고, 자신의 역할을 완수했다. 직업윤리의 영웅이다. 반면 NTSB는 사고 원인과 전개 과정을 정확히 파악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언론이 설리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고 해서 그를 검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승객 전원을 무사히 보호해낸 설리는 이제 NTSB 앞에서 자신의 명예와 경력을 지켜야 한다. 두 직업윤리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에서 청문회에 불려나온 캡틴 설리(톰 행크스·왼쪽)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대표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펼쳐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이나 르네상스 시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은행가였던 야코프 푸거 등은 수많은 조언을 남겼다. 정직해야 하고,
친절해야 하며, 절제해야 하고, 이웃이 믿을 수 있는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신뢰받는 상인으로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돈을 뭐 하려고 벌까? 이들은 ‘적당히 벌었으니 사치스럽게 놀고
먹자’는 식의 사고방식에 빠지지 않았다. 죽는 그날까지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돈에 대한 욕심은 인류
공통이지만, 경건한 태도로 돈벌이에 임하는 것은 오직 서구의 근대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들에게 일이란 윤리의 최고선(summum bonum)에 다가가는 방법이었다. 베버는 그런 사고방식을 자본주의 정신, 혹은 직업윤리라고 불렀다.
근대
이전까지는 직업으로 사람의 귀천을 나누었다. 동서양 모두가 그랬다. 조선이 사농공상 논리로 작동했다면 서양의 중세는 성직자와
기사 계급이 상공업자와 농민들을 착취하며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런 사고방식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서 뒤집혔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핵심이다. 사람은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함으로써 스스로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직업윤리의 요체다. 모든 직업이 평등하다는 것. 그러므로 어떤 일이건
성심성의껏 해나가야 한다는 것. 이는 곧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는 말과도 같다.
직업윤리는 자본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직업윤리라는 개념이 국민적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15일
조선일보에 실린 한동훈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의 인터뷰 때문이다. 특수통 검사 한동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정권을 겨냥한 소위
‘적폐 청산’ 수사의 일선에 섰고 ‘꽃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조국 일가를 수사하면서 문재인 정권과 맞섰고 세 차례에 걸친 좌천성
인사를 감내하며 대가를 치르고 있다. 눈 딱 감고 조국 수사를 안 했다면 계속 승승장구했을 텐데 왜 사서 고생할까? 한동훈의
대답은 간명했다. “그냥 할 일이니까 한 겁니다. 직업윤리죠.”
한동훈과 그의 상관인 윤석열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무리한 수사를 해왔다는 비판도 있다. 일리가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직업과 사회적 역할이 존재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검찰을 통제하는 것은 법원 몫이다. 마치 설리를 철저하게 검증하던 영화 속 NTSB처럼 말이다.
이
지점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의 직업윤리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장은 한 사람의 판사이면서 동시에 사법부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삼권분립은 그의 직업적 소명의 핵심이다. 판사들이 정치적 외압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그러한 본분을
다하기는커녕, 정치권에서 탄핵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니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법원장을, 국민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공적 차원에서 거짓말을 했으니 판사로서도 실격이다. 사퇴해야 마땅하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과 직업윤리의 기원을
개신교에서 찾았다. 자본주의 자체는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현상이었지만 자본주의의 바탕에 소명 의식과 직업윤리를 도입한 것은 개신교
문화권의 서구에서만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벤저민 프랭클린은 대체 왜 “사람에게서 돈을 짜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아버지가 가르쳐준 성경 구절을 통해 대답한다. “네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서리라.”
이러한 서구 개신교 중심적 설명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 논쟁만 따로 떼어내도 별개 학문이 성립할 지경이다. ‘서구’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이론이다.
하지만 그 기원이 어찌 됐건 직업윤리는 ‘우리의 윤리’다. 2021년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자본주의 체제를 택하고 있으니 말이다.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직업윤리가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캡틴 설리 또한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NTSB에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부기장을 다독여준다. ‘그들은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US 에어웨이스 1549편의 이륙에서 착륙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08초. 캡틴 설리의 신속한 판단과 행동이 155명을 구했다. 5000만명이
탑승한 대한민국호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경건한 태도로 상공업에 힘쓰는 대신 권력을 이용해 한탕 하려는 자들, 근대적
직업윤리를 파괴하고 전근대적 사농공상 체제로 퇴행하려는 자들이 조종간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늦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도 않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2021-02-14
안중근 사형선고일? 여성해방의 날!
2월 14일, 언론에 또 그 타령이 실렸다. 발렌타인데이가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런 소리 말이다.
2월 14일을 안중근 사형선고일이라고 떠벌이며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짓는 것은 '인터넷 밈'이었다. 자신에게 여자친구가 없다고 한탄하는 남자들이 인터넷의 구석에서 시시덕거리던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언론은 품위에 대한 인식이 없는 관계로, 그런 헛소리를 슬슬 지면이나 방송을 통해 다루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2월 14일에는 엄숙한 표정을 짓자'는 주장은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추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엄숙하게 나가보는 건 어떨까 싶다. 매년 2월 14일을 '여성해방의 날'로 기념하는 것이다. 근거는? 미군정 시대, 1948년 2월 14일, 공창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김말봉, 박현숙 등 10여 명의 여성단체 지도자들은 공창폐지연맹을 조직하여 기왕에 발표된 법령 제70호는 단지 인신매매 금지령일 뿐이므로 시급히 공ㆍ사창을 폐지하게 하는 법령을 제정해 달라고 입법의원에 건의하였다.41)
이를 받아들여 입법의원은 1947년 10월 28일 전격적으로 공창폐지법을 통과시키고 즉시 미 군정 장관의 추인을 요청하여 이듬해 2월 14일 공창제 폐지를 실시하는 법령을 공고하게 되었다.42)
개정판 |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강준만 저
안중근의 인생 중 생일도 아니고 사형집행일도 아닌 사형'선고일'을 기념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반면 공창제 폐지는,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 여성 인권 운동의 첫 단추로서 매우 뜻깊은 사건이었다.
2월 14일이 발렌타인데이인 것이 그렇게 못마땅하다면, 2월 14일을 '여성해방의 날'로 기념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여성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것 역시 일종의 해방된 자의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을테니 기존의 전통과도 충돌하지 않을 듯하다.
박정희는 독재자지만 설 전통까지 날조하진 않았다
[노정태의 뷰파인더㉑] 코로나, 차례와 제사 쇄신 기회였는데…
● ‘홍동백서, 조율이시’ 근본 없는 상차림?
● 홍동백서는 예부터 세시풍속의 한 양식
● 일제 잔재도 박정희 ‘창조’도 아냐
● 문헌상으로도 100년 넘는 전통
● 산업화·도시화와 밀접히 연관
● 女 억압하는 전통 개선할 숙제는 남아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명절 때마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으로 대표되는 ‘전통 차례상’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하지만 홍동백서는 과거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도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
이번 설은 다소 예외적이다. 5인 이상 집합 금지가 내려졌고 언론도 정부 정책 방향에 부응하기 위해 해묵은 ‘차례상에 전통은 있는가’라는 주제를 꺼내들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되고 하반기에 마무리된다면 추석에는 익숙한 레퍼토리를 또 듣게 되지 않을까 싶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이야기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같은 기사를 보면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차례상 기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결정적으로 박정희 정부가 유교 이데올로기를 심으려고 ‘가정의례준칙’을 발표해 제사 상차림 기준을 정했다.” “원래 유교 예법에는 뭘 놔라, 뭘 놓지 말라 하는 게 없다. 떡국 하나만 놓아도 충분하다.”
두 가지 논의를 합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첫째,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은 주자가례에 적혀있지 않은, 말하자면 ‘근본 없는’ 상차림이다. 둘째, 그러한 의식이 전통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배경에는 어떤 외부 요인이 있다. 셋째, ‘근본 없는 상차림’이 전통 행세를 하게 된 원흉은 박정희의 ‘가정의례준칙’이다.
역사를 보면 그런 주장에 근거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1934년 11월 11일, 조선총독부가 ‘의례준칙’을 발표하여 관혼상제와 관련된 조선의 다양한 세시풍속에 기준을 제시했다. 이후 1955년 ‘의례규범’, 1961년의 ‘표준의례’를 지나, 1968년 12월 7일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가정의례준칙’이 공표되고 이듬해인 1969년부터 시행됐다.
가정의례준칙을 비롯해 그때까지 발표된 준칙은 법적 강제력을 지니지 않는 권고조항이었다. 박정희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973년 3월, 가정의례준칙을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로 바꾸어 강제성 있는 규범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이렇듯 민간 가정의례를 법령으로 제도화하여 권고를 넘어 강제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의례준칙’은 일제에 의해 처음 도입됐다. 박정희는 그것을 아예 법으로 못 박았다. 이렇게만 써놓고 보면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가 우리 고유의 전통과 미풍양속을 깡그리 깔아뭉개고, 그 자리에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것들을 갖다 놓은 것만 같다. 앞서 인용한 기사처럼 그런 건 “약 40년 전부터 내려오는 민간 관습”일 뿐 ‘진정한 전통’은 아니지 않을까?
1920년 6월 26일 ‘조선일보’에 실린 “조선유림에게 고함 (2)”라는 글을 읽어보자.
“今之儒者(금지유자)가口(구)로눈禮樂射御書數(예악사어서수)라能言(능언)하지만은其實(기실)은能通(능통)한者(자)一有(일유)타言(언)하기不能(불능)이니禮(예)의糧粕卽喪服(양박즉상복)의前三後四(전삼후사)와祭需(제수)의紅東白西等(홍동백서등)이나主張(주장)하야知禮者(지례자)로自爲(자위)하는普通儒者(보통유자)를多見(다견)하얏지만은...”
이는 ‘요즘 주나라 예법에 정통하다고 말하는 유생이 많지만 실은 능통한 사람이 한 명 있다 하기도 어렵고, 상복을 어찌 입어야 하는지 제수를 차릴 때 홍동백서가 어쩌니 저쩌니 말하며 자신이 예를 잘 안다고 하는 평범한 유생들을 많이 보았지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통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홍동백서라는 개념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가 강제한 국적 불명의 풍속 같은 것도 아니다. 홍동백서는 유교의 예법에 대해 대단한 지식과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은 ‘보통유자’들도 입에 담으며 거들먹거리는 흔한 지식이었다. 대중에게 널리 퍼져 있는 세시풍속의 한 양식, 즉 전통이었던 것이다.
올해가 2021년이니 홍동백서의 전통은 문헌으로 확인되는 것만 봐도 무려 100년이 넘는다. 박정희가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하기 전이었던 1961년의 신문 기사에서도 홍동백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1961년 2월 16일자 ‘조선일보’ ‘만물상’의 한 대목이다.
“祭床(제상)의 陳說法(진설법)은 까다롭고 또이른바 『家家禮(가가례)』라, 집집마다 禮法(예법)이 다를수있지마는 大體(대체)로 基本法則(기본법칙)은 『紅東白西(홍동백서)』요 『棗東栗西(조동율서)』다.”
박정희가 가정의례준칙을 발표한 해는 1968년이다. 그러니 박정희가 홍동백서라는 허구의 전통을 날조하여 공권력을 이용해 민간에 강요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홍동백서는 일제시대와 박정희 이전에도 한반도에 있었고 그 후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1969년 4월 12일자 ‘동아일보’, 1977년 12월 2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집집마다 지내는 기제사나 차례가 아닌 마을 공동의 거릿제 등에서도 홍동백서에 따라 상을 차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반도에 거주하는 수많은 이들이 영적 존재와 소통하는 유교적, 혹은 무속적 상차림을 할 때 홍동백서에 따랐다. 홍동백서를 전통이 아니라고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설을 일주일 앞둔 2월 4일 경기 성남시의 한 전통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제수용품을 구매하고 있다. 코로나19와 한파로 인해서 시장은 한산한 모습이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
농경 사회라면 장례가 길어진다 해도 큰 문제가 없다. 다들 비슷한 곳에 살면서 농사를 지으니 탄력적으로 업무와 장례를 조율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정희가 추구하는 근대화된 공업 국가는 그런 식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박정희의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나 정해진 날짜만, 최대한 짧게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공장과 사무실에서 일해야 했다. 박정희는 그리하여 ‘준칙’을 배포하였지만 모두가 순순히 말을 듣지는 않자 아예 법을 만들어버렸다.
강경한 ‘조국 근대화’의 흐름은 1980년대가 되면서 한풀 사그라졌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집권의 정당성이 부족했기도 하거니와, 전두환 자신이 박정희처럼 ‘조국 근대화’에 집착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1984년 가정의례준칙 규제를 줄이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전두환이 직접 나서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도시를 기준으로 할 때는 3일장이 정착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긴 시간을 들여 많은 손님을 받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축제’를 벌이는 식의 장례를 치를만한 환경 자체가 역사의 유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1987년 ‘동아일보’에 실린 이 기사는 급변하고 있던 당시의 풍속도를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가끔 코미디에서나 나오는 것 같은 현실을 목격한다. 며칠 밤새 시끄러운 것이야 공동 생활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해하지만, 아파트의 이삿짐을 운반하기 위해 사용되는 곤돌라가 수선을 피우며 관을 올리고 내리는데 사용될 때마다 남의 초상집이지만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이제 한국인은 집에서 죽기 어려워졌다. 병원에서 죽고 장례식장으로 간다. 이렇듯 ‘죽음’과 관련된 의식을 가정이 아닌 병원 같은 공적 공간에서 처리하게 된 것은 한국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가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잘 묘사했듯이, 모든 국가와 문화권은 근대화 과정에서 죽음의 공간과 삶의 공간을 분리한다. 또 친족의 죽음을 처리하는 의식을 가족 외의 누군가에게 ‘아웃소싱’한다.
즉 한국인이 흙으로 담을 쌓은 초가집과 기와집을 버리고 아파트로 대표되는 도시의 삶을 택하면서, 관혼상제를 비롯한 온갖 ‘전통’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1969년 2월 15일 가정의례준칙에 서명하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 [동아DB] |
하지만 박정희가 ‘진짜 전통’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홍동백서 같은 근본 없는 가짜 전통’을 집어넣었다는 식의 서술은 옳지 않다. 박정희는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민속학자, 국어학자, 역사학자 등 자문을 구할 수 있을법한 국학자(國學者)들에게 폭넓게 자문을 구했다.
자문위원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일제시대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이다. 그는 가정의례준칙 제정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취지를 국민에게 설득하기도 했다. ‘이희승 전집’ 9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1969년 3월 9일 ‘주간중앙’을 통해 발표된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기고문에서 이희승은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번에 정부로부터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것을 제정하여 일반에 공포하였으니, 종래의 관습으로 볼 때에, 좀 소홀하다고 느껴질 점도 없지 않을 것이나, 이는 여러 위원들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나 장래를 고려·전망하면서, 고래의 예절을 가능한 한 존중한 것이니, 누구나 비판보다 앞서 실천하여 보면, 그 제정의 동기와 진의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정의례준칙을 국가에서 배포하고 심지어 법으로 강제한 것은 여러모로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례적이라는 게 꼭 ‘비정상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가정의례준칙의 제정과 배포 및 시행 과정을 둘러싼 논란은 구한말 이후 한반도의 거주민이 시달려야 했던 숱한 역사적 부침, 그리고 광복과 한일수교 이후 겪었던 급격한 근대화의 부산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조선인’이 아닌 ‘한국인’이 되었고, 지금도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글은 홍동백서와 가정의례준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산술적으로 모든 집안이 양반 가문일 리는 없다. 그럼에도 집집마다 차례와 제사를 지내는, 특히 여성에게 억압적인 이 전통을 오늘에 맞게 개선해 나가자는 게 이 글의 취지다.
그러자면 일단 감정적인 반응을 잠시 접어두고 그 양면적인 속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같은 상차림 규칙을 박정희가 온 국민에게 가르친 것은 맞다. 그렇게 보자면 오늘날의 차례와 제사 문화는 ‘만들어진 전통’이다.
하지만 그것을 박정희가 ‘창작’했다고 말하는 건 옳지 않다. 가정의례준칙 중 일부는 적어도 19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반도의 전통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원문을 읽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싶은 주자가례보다는 모든 이가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홍동백서가 우리의 ‘전통’에 더욱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전통이 오늘의 상황과 맥락에 부합하느냐다. 5일장이나 7일장으로 치러지는, 시끌벅적한 축제를 방불케 하는 장례식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국인은 이제 아파트 혹은 도시의 마당 없는 주택에 산다. 집에는 관을 두고 염을 하고 손님을 맞이할 공간 자체가 없다. 생의 막바지의 투병과 임종은 대부분 병원에서 맞이하게 되며 곧장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결혼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에도 ‘전통혼례’를 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 경우도 예식장 혹은 별도의 장소를 빌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1960년대로부터 고작 수십 년이 지났을 뿐인데, 집에서 치르는 혼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졌다. 남자의 성인식을 일컫는 관례는 아예 형해화됐다. 관혼상제 중 남은 것은 제례, 즉 차례와 제사뿐이다. 제사는 결혼이나 장례와 달리 상업화하기 어려운 분야다. 그러므로 없애건 고치건 오늘날에 맞도록 갱신하려면 사회가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의식적으로 분위기를 바꿔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논의가 제때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랬더라면,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 위기는 오히려 차례와 제사라는 가정의례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쇄신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박정희를 뛰어넘어 ‘가정의례준칙’의 큰 기조를 수정했다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업적으로 역사에 기록됐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페미니스트 대통령’ 문재인은 1960년대의 가정의례준칙과 관련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19가 닥쳐왔다. 코로나19 사망자와 유족들은 제대로 된 작별과 애도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있다. 결혼식장은 줄폐업을 하고 하객들은 마스크를 썼다 벗었다 하느라 바쁘다. 그럼에도 차례와 제사는 남아, 이번 설에도 며느리들은 ‘시월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고민하고 갈등했다. 위기를 극복하고 한 단계 도약할 기회를 덧없이 놓친 셈이다.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좋은 정치가 절실하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