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뷰파인더㉑] 코로나, 차례와 제사 쇄신 기회였는데…
● ‘홍동백서, 조율이시’ 근본 없는 상차림?
● 홍동백서는 예부터 세시풍속의 한 양식
● 일제 잔재도 박정희 ‘창조’도 아냐
● 문헌상으로도 100년 넘는 전통
● 산업화·도시화와 밀접히 연관
● 女 억압하는 전통 개선할 숙제는 남아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명절 때마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으로 대표되는 ‘전통 차례상’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하지만 홍동백서는 과거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도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
이번 설은 다소 예외적이다. 5인 이상 집합 금지가 내려졌고 언론도 정부 정책 방향에 부응하기 위해 해묵은 ‘차례상에 전통은 있는가’라는 주제를 꺼내들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되고 하반기에 마무리된다면 추석에는 익숙한 레퍼토리를 또 듣게 되지 않을까 싶다.
박정희가 유교 이데올로기 심으려 했다?
2017년
1월, “설은 남녀노소 모두 노는 날…차례상엔 떡국이면 충분”이라는 제목으로 발행된 ‘연합뉴스’ 기사를 되짚어보자. 이제는
친숙하다 못해 식상해진 내용이다. 기사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차례상은 원래 간소하게 차린다”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성균관 박광영
의례부장은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규칙은 주자가례 같은 예서(禮書)에 나오는 게 아니고, 약 40년 전부터 내려오는 민간 관습”이라고 설명했다. 홍동백서는 주자가례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의 전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이야기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같은 기사를 보면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차례상 기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결정적으로 박정희 정부가 유교 이데올로기를 심으려고 ‘가정의례준칙’을 발표해 제사 상차림 기준을 정했다.” “원래 유교 예법에는 뭘 놔라, 뭘 놓지 말라 하는 게 없다. 떡국 하나만 놓아도 충분하다.”
두 가지 논의를 합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첫째,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은 주자가례에 적혀있지 않은, 말하자면 ‘근본 없는’ 상차림이다. 둘째, 그러한 의식이 전통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배경에는 어떤 외부 요인이 있다. 셋째, ‘근본 없는 상차림’이 전통 행세를 하게 된 원흉은 박정희의 ‘가정의례준칙’이다.
역사를 보면 그런 주장에 근거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1934년 11월 11일, 조선총독부가 ‘의례준칙’을 발표하여 관혼상제와 관련된 조선의 다양한 세시풍속에 기준을 제시했다. 이후 1955년 ‘의례규범’, 1961년의 ‘표준의례’를 지나, 1968년 12월 7일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가정의례준칙’이 공표되고 이듬해인 1969년부터 시행됐다.
가정의례준칙을 비롯해 그때까지 발표된 준칙은 법적 강제력을 지니지 않는 권고조항이었다. 박정희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973년 3월, 가정의례준칙을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로 바꾸어 강제성 있는 규범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이렇듯 민간 가정의례를 법령으로 제도화하여 권고를 넘어 강제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의례준칙’은 일제에 의해 처음 도입됐다. 박정희는 그것을 아예 법으로 못 박았다. 이렇게만 써놓고 보면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가 우리 고유의 전통과 미풍양속을 깡그리 깔아뭉개고, 그 자리에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것들을 갖다 놓은 것만 같다. 앞서 인용한 기사처럼 그런 건 “약 40년 전부터 내려오는 민간 관습”일 뿐 ‘진정한 전통’은 아니지 않을까?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인들도 알았다
홍동백서는 ‘우리의 전통’이 맞다. 적어도 40년보다는 오래되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통해 옛날 신문을 뒤져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홍동백서로 대표되는 양식화된 상차림은 19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확인할 수 있다. 1920년 6월 26일 ‘조선일보’에 실린 “조선유림에게 고함 (2)”라는 글을 읽어보자.
“今之儒者(금지유자)가口(구)로눈禮樂射御書數(예악사어서수)라能言(능언)하지만은其實(기실)은能通(능통)한者(자)一有(일유)타言(언)하기不能(불능)이니禮(예)의糧粕卽喪服(양박즉상복)의前三後四(전삼후사)와祭需(제수)의紅東白西等(홍동백서등)이나主張(주장)하야知禮者(지례자)로自爲(자위)하는普通儒者(보통유자)를多見(다견)하얏지만은...”
이는 ‘요즘 주나라 예법에 정통하다고 말하는 유생이 많지만 실은 능통한 사람이 한 명 있다 하기도 어렵고, 상복을 어찌 입어야 하는지 제수를 차릴 때 홍동백서가 어쩌니 저쩌니 말하며 자신이 예를 잘 안다고 하는 평범한 유생들을 많이 보았지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통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홍동백서라는 개념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가 강제한 국적 불명의 풍속 같은 것도 아니다. 홍동백서는 유교의 예법에 대해 대단한 지식과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은 ‘보통유자’들도 입에 담으며 거들먹거리는 흔한 지식이었다. 대중에게 널리 퍼져 있는 세시풍속의 한 양식, 즉 전통이었던 것이다.
올해가 2021년이니 홍동백서의 전통은 문헌으로 확인되는 것만 봐도 무려 100년이 넘는다. 박정희가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하기 전이었던 1961년의 신문 기사에서도 홍동백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1961년 2월 16일자 ‘조선일보’ ‘만물상’의 한 대목이다.
“祭床(제상)의 陳說法(진설법)은 까다롭고 또이른바 『家家禮(가가례)』라, 집집마다 禮法(예법)이 다를수있지마는 大體(대체)로 基本法則(기본법칙)은 『紅東白西(홍동백서)』요 『棗東栗西(조동율서)』다.”
박정희가 가정의례준칙을 발표한 해는 1968년이다. 그러니 박정희가 홍동백서라는 허구의 전통을 날조하여 공권력을 이용해 민간에 강요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홍동백서는 일제시대와 박정희 이전에도 한반도에 있었고 그 후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1969년 4월 12일자 ‘동아일보’, 1977년 12월 2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집집마다 지내는 기제사나 차례가 아닌 마을 공동의 거릿제 등에서도 홍동백서에 따라 상을 차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반도에 거주하는 수많은 이들이 영적 존재와 소통하는 유교적, 혹은 무속적 상차림을 할 때 홍동백서에 따랐다. 홍동백서를 전통이 아니라고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도시의 삶과 온갖 전통의 위축
설을 일주일 앞둔 2월 4일 경기 성남시의 한 전통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제수용품을 구매하고 있다. 코로나19와 한파로 인해서 시장은 한산한 모습이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
농경 사회라면 장례가 길어진다 해도 큰 문제가 없다. 다들 비슷한 곳에 살면서 농사를 지으니 탄력적으로 업무와 장례를 조율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정희가 추구하는 근대화된 공업 국가는 그런 식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박정희의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나 정해진 날짜만, 최대한 짧게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공장과 사무실에서 일해야 했다. 박정희는 그리하여 ‘준칙’을 배포하였지만 모두가 순순히 말을 듣지는 않자 아예 법을 만들어버렸다.
강경한 ‘조국 근대화’의 흐름은 1980년대가 되면서 한풀 사그라졌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집권의 정당성이 부족했기도 하거니와, 전두환 자신이 박정희처럼 ‘조국 근대화’에 집착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1984년 가정의례준칙 규제를 줄이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전두환이 직접 나서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도시를 기준으로 할 때는 3일장이 정착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긴 시간을 들여 많은 손님을 받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축제’를 벌이는 식의 장례를 치를만한 환경 자체가 역사의 유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1987년 ‘동아일보’에 실린 이 기사는 급변하고 있던 당시의 풍속도를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가끔 코미디에서나 나오는 것 같은 현실을 목격한다. 며칠 밤새 시끄러운 것이야 공동 생활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해하지만, 아파트의 이삿짐을 운반하기 위해 사용되는 곤돌라가 수선을 피우며 관을 올리고 내리는데 사용될 때마다 남의 초상집이지만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이제 한국인은 집에서 죽기 어려워졌다. 병원에서 죽고 장례식장으로 간다. 이렇듯 ‘죽음’과 관련된 의식을 가정이 아닌 병원 같은 공적 공간에서 처리하게 된 것은 한국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가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잘 묘사했듯이, 모든 국가와 문화권은 근대화 과정에서 죽음의 공간과 삶의 공간을 분리한다. 또 친족의 죽음을 처리하는 의식을 가족 외의 누군가에게 ‘아웃소싱’한다.
즉 한국인이 흙으로 담을 쌓은 초가집과 기와집을 버리고 아파트로 대표되는 도시의 삶을 택하면서, 관혼상제를 비롯한 온갖 ‘전통’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조선인’에서 ‘한국인’으로
1969년 2월 15일 가정의례준칙에 서명하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 [동아DB] |
하지만 박정희가 ‘진짜 전통’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홍동백서 같은 근본 없는 가짜 전통’을 집어넣었다는 식의 서술은 옳지 않다. 박정희는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민속학자, 국어학자, 역사학자 등 자문을 구할 수 있을법한 국학자(國學者)들에게 폭넓게 자문을 구했다.
자문위원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일제시대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이다. 그는 가정의례준칙 제정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취지를 국민에게 설득하기도 했다. ‘이희승 전집’ 9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1969년 3월 9일 ‘주간중앙’을 통해 발표된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기고문에서 이희승은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번에 정부로부터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것을 제정하여 일반에 공포하였으니, 종래의 관습으로 볼 때에, 좀 소홀하다고 느껴질 점도 없지 않을 것이나, 이는 여러 위원들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나 장래를 고려·전망하면서, 고래의 예절을 가능한 한 존중한 것이니, 누구나 비판보다 앞서 실천하여 보면, 그 제정의 동기와 진의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정의례준칙을 국가에서 배포하고 심지어 법으로 강제한 것은 여러모로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례적이라는 게 꼭 ‘비정상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가정의례준칙의 제정과 배포 및 시행 과정을 둘러싼 논란은 구한말 이후 한반도의 거주민이 시달려야 했던 숱한 역사적 부침, 그리고 광복과 한일수교 이후 겪었던 급격한 근대화의 부산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조선인’이 아닌 ‘한국인’이 되었고, 지금도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글은 홍동백서와 가정의례준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산술적으로 모든 집안이 양반 가문일 리는 없다. 그럼에도 집집마다 차례와 제사를 지내는, 특히 여성에게 억압적인 이 전통을 오늘에 맞게 개선해 나가자는 게 이 글의 취지다.
그러자면 일단 감정적인 반응을 잠시 접어두고 그 양면적인 속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같은 상차림 규칙을 박정희가 온 국민에게 가르친 것은 맞다. 그렇게 보자면 오늘날의 차례와 제사 문화는 ‘만들어진 전통’이다.
하지만 그것을 박정희가 ‘창작’했다고 말하는 건 옳지 않다. 가정의례준칙 중 일부는 적어도 19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반도의 전통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원문을 읽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싶은 주자가례보다는 모든 이가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홍동백서가 우리의 ‘전통’에 더욱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전통이 오늘의 상황과 맥락에 부합하느냐다. 5일장이나 7일장으로 치러지는, 시끌벅적한 축제를 방불케 하는 장례식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국인은 이제 아파트 혹은 도시의 마당 없는 주택에 산다. 집에는 관을 두고 염을 하고 손님을 맞이할 공간 자체가 없다. 생의 막바지의 투병과 임종은 대부분 병원에서 맞이하게 되며 곧장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결혼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에도 ‘전통혼례’를 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 경우도 예식장 혹은 별도의 장소를 빌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1960년대로부터 고작 수십 년이 지났을 뿐인데, 집에서 치르는 혼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졌다. 남자의 성인식을 일컫는 관례는 아예 형해화됐다. 관혼상제 중 남은 것은 제례, 즉 차례와 제사뿐이다. 제사는 결혼이나 장례와 달리 상업화하기 어려운 분야다. 그러므로 없애건 고치건 오늘날에 맞도록 갱신하려면 사회가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의식적으로 분위기를 바꿔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여전히 ‘시월드’ 속에서
이
시점에서 문재인 정권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정권은 출범 초기 페미니스트 정권을 표방했다. 그렇다면 일찍부터
각계각층의 국민을 불러 모아 올바른 차례와 제사 문화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고 공론의 장을 열 필요가 있었다. 다수의 여성이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대목이 바로 명절이니 말이다. 논의가 제때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랬더라면,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 위기는 오히려 차례와 제사라는 가정의례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쇄신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박정희를 뛰어넘어 ‘가정의례준칙’의 큰 기조를 수정했다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업적으로 역사에 기록됐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페미니스트 대통령’ 문재인은 1960년대의 가정의례준칙과 관련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19가 닥쳐왔다. 코로나19 사망자와 유족들은 제대로 된 작별과 애도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있다. 결혼식장은 줄폐업을 하고 하객들은 마스크를 썼다 벗었다 하느라 바쁘다. 그럼에도 차례와 제사는 남아, 이번 설에도 며느리들은 ‘시월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고민하고 갈등했다. 위기를 극복하고 한 단계 도약할 기회를 덧없이 놓친 셈이다.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좋은 정치가 절실하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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