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0

직업윤리 저버린 권력자들로 ‘대한민국號’가 위태롭다

 [아무튼, 주말][노정태의 시사哲]
美 조종사 설리가 보여준 ‘직업윤리란 무엇인가?’

체슬리 설렌버거, 일명 캡틴 ‘설리’. 40년 경력을 자랑하는 조종사다. 이 남자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두 엔진을 모두 잃고도 희생자 단 한 명도 없이 완벽한 비상착륙을 해낸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2009년 1월 15일 뉴욕에서 있었던 실화다. US 에어웨이스 1549편이 이륙 직후 새 떼에 부딪혀 동력을 잃었지만 허드슨강에 무사히 착륙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혹한에 일부 승객이 강물에 빠졌지만 전원 무사 구조되었다.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해 총 155명이 생환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은 이렇게 감동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직업윤리란 무엇인가?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는 설리가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설리에게는 승객을 안전하게 모실 의무가 있었고, 자신의 역할을 완수했다. 직업윤리의 영웅이다. 반면 NTSB는 사고 원인과 전개 과정을 정확히 파악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언론이 설리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고 해서 그를 검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승객 전원을 무사히 보호해낸 설리는 이제 NTSB 앞에서 자신의 명예와 경력을 지켜야 한다. 두 직업윤리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에서 청문회에 불려나온 캡틴 설리(톰 행크스·왼쪽)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대표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펼쳐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이나 르네상스 시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은행가였던 야코프 푸거 등은 수많은 조언을 남겼다. 정직해야 하고, 친절해야 하며, 절제해야 하고, 이웃이 믿을 수 있는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신뢰받는 상인으로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돈을 뭐 하려고 벌까? 이들은 ‘적당히 벌었으니 사치스럽게 놀고 먹자’는 식의 사고방식에 빠지지 않았다. 죽는 그날까지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돈에 대한 욕심은 인류 공통이지만, 경건한 태도로 돈벌이에 임하는 것은 오직 서구의 근대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들에게 일이란 윤리의 최고선(summum bonum)에 다가가는 방법이었다. 베버는 그런 사고방식을 자본주의 정신, 혹은 직업윤리라고 불렀다.

근대 이전까지는 직업으로 사람의 귀천을 나누었다. 동서양 모두가 그랬다. 조선이 사농공상 논리로 작동했다면 서양의 중세는 성직자와 기사 계급이 상공업자와 농민들을 착취하며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런 사고방식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서 뒤집혔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핵심이다. 사람은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함으로써 스스로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직업윤리의 요체다. 모든 직업이 평등하다는 것. 그러므로 어떤 일이건 성심성의껏 해나가야 한다는 것. 이는 곧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는 말과도 같다. 직업윤리는 자본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직업윤리라는 개념이 국민적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15일 조선일보에 실린 한동훈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의 인터뷰 때문이다. 특수통 검사 한동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정권을 겨냥한 소위 ‘적폐 청산’ 수사의 일선에 섰고 ‘꽃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조국 일가를 수사하면서 문재인 정권과 맞섰고 세 차례에 걸친 좌천성 인사를 감내하며 대가를 치르고 있다. 눈 딱 감고 조국 수사를 안 했다면 계속 승승장구했을 텐데 왜 사서 고생할까? 한동훈의 대답은 간명했다. “그냥 할 일이니까 한 겁니다. 직업윤리죠.”

한동훈과 그의 상관인 윤석열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무리한 수사를 해왔다는 비판도 있다. 일리가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직업과 사회적 역할이 존재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검찰을 통제하는 것은 법원 몫이다. 마치 설리를 철저하게 검증하던 영화 속 NTSB처럼 말이다.

이 지점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의 직업윤리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장은 한 사람의 판사이면서 동시에 사법부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삼권분립은 그의 직업적 소명의 핵심이다. 판사들이 정치적 외압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그러한 본분을 다하기는커녕, 정치권에서 탄핵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니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법원장을, 국민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공적 차원에서 거짓말을 했으니 판사로서도 실격이다. 사퇴해야 마땅하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과 직업윤리의 기원을 개신교에서 찾았다. 자본주의 자체는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현상이었지만 자본주의의 바탕에 소명 의식과 직업윤리를 도입한 것은 개신교 문화권의 서구에서만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벤저민 프랭클린은 대체 왜 “사람에게서 돈을 짜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아버지가 가르쳐준 성경 구절을 통해 대답한다. “네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서리라.”

이러한 서구 개신교 중심적 설명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 논쟁만 따로 떼어내도 별개 학문이 성립할 지경이다. ‘서구’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이론이다.

하지만 그 기원이 어찌 됐건 직업윤리는 ‘우리의 윤리’다. 2021년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자본주의 체제를 택하고 있으니 말이다.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직업윤리가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캡틴 설리 또한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NTSB에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부기장을 다독여준다. ‘그들은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US 에어웨이스 1549편의 이륙에서 착륙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08초. 캡틴 설리의 신속한 판단과 행동이 155명을 구했다. 5000만명이 탑승한 대한민국호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경건한 태도로 상공업에 힘쓰는 대신 권력을 이용해 한탕 하려는 자들, 근대적 직업윤리를 파괴하고 전근대적 사농공상 체제로 퇴행하려는 자들이 조종간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늦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도 않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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